단편

Fly Me to the Moon 中

Let's kidnap each other



이명헌은 설거지를 꽤 잘한다. 단체 생활을 오래 했으니 못 하는 게 이상하다지만, 그중에서도 특출난 편이었다. 한때는 농구를 그만두게 되면 식당에서 설거지를 할까, 한갓진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때라면 내내 딱딱하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웅크려 앉아 종일 그릇만 닦아도 문제 될 게 없을 테니까. 그러기엔 제 무릎의 스프링이 여전히 지나치게 성하고, 아직 성장판까지 미약하게 열려있어 요원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한참 멍때리다 보니 그릇들이 반짝거렸다.

열어젖힌 텐트 안엔 의외로 필요한 것들이 잘 갖춰져 있었다. 식기도 일회용이 아니고. 찝찝해서 쓰기 전에 이렇게 한번 닦긴 하지만. 하는 김에 다 해놓지 싶어 있는 것들을 몽땅 끄집어내 왔더니 무게가 제법이었다. 그래도 비품들을 본 현철의 표정이 덤덤했던 걸 보면 그렇게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짐 중 식기는 없을 것이다. 그럼 뭘 그렇게 챙겨온 거지 궁금했지만, 어쨌든 잘된 일이다. 물받침째 들고 온 거치대를 걷는 내내 조금씩 흔들어 물기를 빼면서 터덜터덜 걸었다. 현철이 예약한 텐트는 제일 구석진 안쪽에 있었다. 야무지다,뿅. 언제 신현철의 경기 운영에 모든 걸 맡겨도 뚝딱 20점 차를 벌릴 수 있을 만큼. 속으로 옛 은사의 말버릇을 따라 외며 걸으니 또 금방이었다. 활짝 열어 가장자리의 봉에 매듭으로 고정한 천막 안에 팔을 걷어붙인 현철이 주전자를 든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고소한 냄새가 났다. 뭐야,뿅. 냄새만 맡아도 뻔히 알면서 부러 묻자 여전히 검은 액체의 수면에 시선을 고정한 현철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드립?

 

“뭘 챙겨 왔나 했더니, 뿅.”

“이거 말고도 많다.”

“넌 마시지도 않잖아.”

“넌 자꾸 당연한 말을 시키더라. 니가 마시잖아, 자기야. 얼른 그릇이나 내려놓고 와서 앉아.”

“...아, 떡.”

“냉장고 위에 박스.”

 

고2쯤 간혹 한 잔씩 마시기 시작한 커피는 밋밋한 명헌의 일상에 의외로 도움이 되는 낙이었다. 컨디션 조절이나 몸 관리를 하자면 아예 안 마시는 게 좋았지만, 그렇다고 설탕을 잔뜩 넣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세이프였다. 다만 이렇게 본격적인 드립 커피는 종종 찾는 카페 외에 명헌도 처음이었다. 카페를 가도 아이스아메리카노, 거기에 샷을 반 더 추가하는 고정 커맨드 같은 주문이 있었기에 많이 마셔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제 몸에 대해선 저보다 훨씬 독해서 애초에 카페인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은 애인이 내려주는 드립이라니. 세상은 오래 살 가치가 있었다. 들고 있던 식기 거치대를 테이블에 얌전히 돌려놓고 말해준 박스에서 떡을 꺼내 현철이 미리 펼쳐 먼지를 털어둔 간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떡을 감싼 비닐랩을 뜯고 보니 기다리는 일 외에 마땅히 할 게 없어 눈도 좀 굴렸다. 그러다 현철이 제 손 옆에 늘어놓은 것들에 시선이 가닿았다. 속이 두둑해 보이는 크라프트 재질의 봉투, 그라인더.

 

“아무리 그래도 원두를? 삐뇽.”

“바로 갈아야 맛있다던데, 이거 빌려준 놈이.”

“으음. 다 갈았어?”

“아직 많이 남았지.”

“많이?”

“너 좋아하니까 혹시 몰라서.”

 

아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명헌이 드리퍼 벽을 타고 부지런히 흐르는 물줄기를 구경하다 이내 봉투와 그라인더를 집어 제 앞으로 끌어왔다. 힐끗 보긴 했지만, 현철은 딱히 막지 않았다. 커피를 정량 이상 마시는 일이나 멀쩡한 원두를 다 갈아놓는 어린애 장난까지도. 까만 가루로 얼룩진 그라인더 속에 후드득 장난스럽게 원두를 털어 넣은 명헌이 손잡이를 돌릴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났다.

 

“이러고 있으니까 왠지 졸린다,뿅.”

“커피 마시면 깨지 않을까.”

“으응...뿅.”

“된 거 같은데. 마셔. 떡도 먹고.”

“안 그래도 꺼내왔는데. 잔소리쟁이 뿅.”

“하.”

 

중얼중얼 헛소리 염불을 외면서도 주는 대로 커피잔을 받아 들고 맨손으로 떡을 집어 드는 게 웃겼는지 짧은 웃음소리와 함께 현철이 그대로 대답을 잘라먹었다. 명헌도 돌아올 말을 바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기 때문에 텐트 안은 곧 떡 씹는 소리만 남게 되었다. 참기름 발린 바람떡은 번들거리고, 고소하고. 바깥 온도에 식어 차가워졌는데도 충분히 달았다. 갓 내린 따뜻한 커피랑 곁들이기에 딱이었다. 어금니로 느릿하게 떡을 뭉개면서 명헌은 잠시 잊고 있던 텐트 바깥을 향해 눈을 돌렸다. 이런 곳들이 으레 그렇듯 바로 앞에 산이 있었다. 들어올 때 개울이라 생각했던 것은 거의 말라붙어 물가라 말하기 민망했지만 둥그런 자갈들이 곳곳에 쌓여있어 영 썰렁하진 않았다. 오히려 물소리가 없어 좋았다. 딱 쉬기 위한 장소였다. 산등성이를 눈으로 따라가며 훑으면서 먹어 치우면 아무리 턱이 느려도 금방 동이 났다. 부른 배와 따뜻해진 몸 덕에 끝도 없이 깔아졌다. 떡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명헌처럼 바깥을 구경하던 현철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명헌의 새끼손가락을 툭 건드렸다.

 

“텐트 안은 아직 좀 추운데. 정 졸리면 낮잠 좀 잘래?”

“응... 패딩 입고 자면 되지 뿅.”

“참내.”

“패딩도 없이 산에 버려졌던 통한의 세월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현철.”

“자기야... 누가 훈련을 그렇게 말해...”

“지도 다음 날 나랑 같이 튀어놓고삐뇽.”

“응 맞음. 그땐 주장 말이 법이라서. 주장이 주동자라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래, 어딜 가나 주장 말을 잘 들어야지 새끼야.”

“딱 보니까 기분 좋구만? 컨셉질도 때려치고.”

“...뿅.”

“늦었다, 명헌아. 암튼 기다려봐, 잠깐만.”

 

구석진 곳의 텐트는 바로 옆에 빈 공간이 있어 차를 끌고 들어올 수 있었다. 덕분에 후다닥 뛰어간 현철이 큼직한 온풍기를 가지고 돌아온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걸 보고는 뭘 봐도 태연했던 명헌마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가뜩이나 키득대던 둘 사이가 순간 웃음소리로 잔뜩 부풀었다.

 

“요란도, 뿅. 아까 보니까 보온 텐트도 침대 위에 있던데.”

“야, 이게 필수랬거든.”

“그래... 패딩 안 입고 자도 되겠네 뿅.”

“다 벗고 자도 될걸.”

“응큼 뿅.”

“진짜 응큼한 거 보여줘? 됐고 다 먹었으면 양치질하고 와. 틀어 놓을게.”

“너는?”

“난 너 자면 정리 좀 더 하다가.”

 

칼같이 칫솔과 치약을 꺼내주길래 군말 없이 받은 명헌이 이내 미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물론 속으론 몇 마디를 덧붙이면서. 좌우지간 잔소리가 많다, 뭐 그런 투정들. 싱크대가 모여있는 컨테이너 안쪽 문을 열면 화장실 딸린 공동 샤워장이 나왔다. 세면대에서 나오는 물도 싱크대가 그랬던 것처럼 따뜻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어쨌든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거품을 뱉고 입안을 헹궜다. 일련의 동작을 하며 드문드문 비친 거울 속의 저는 어쩐지 간만에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이것 때문인가. 올해가 시작되자마자 구멍을 낸 귓불에 작은 피어싱이 점처럼 매달려있었다. 모두가 의외라며 놀라워했지만, 그걸 처음 본 현철만은 놀라지 않았다. 대신 다시 떠올려도 꽤 심한 말로 짖궂게 굴긴 했다. 영화 보면 보통 연쇄살인마들이 많이 그러는데, 이명헌. 이 귀여운 또라이 새끼. 그러다 좀 적적한 말투로 덧붙였다. 너 졸업하기 전까지 내 등 번호도 싫었겠다. 명헌은 그 전의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해 대답하지 않았고, 뒷말에는 나름대로 어쩔 줄 모르며 현철의 목에 가만히 얼굴을 묻었다. 싫어서 뚫은 거 아니다,뿅.

 

잊고 싶지 않을 뿐이야. 최초이자 최후의 패배는 여전히 귀에 위태롭게 매달려 반짝이고, 명헌은 그 이채에서 불면의 원인을 찾았다. 이명헌이 예민한 것은 잊지 않기 때문이다. 과도한 승리욕은 늘 가장 좋은 자질임과 동시에 금방 숨구멍을 막는 독이 된다. 입가에 남은 물을 닦으며 역시 애인의 말은 틀리는 법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제대로 비틀려있기는 하지. 정말로 연쇄살인범처럼. 지나간 패배를 끝없이 복기하고 원인을 분석하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하지만

 

하지만 먼저 그래도 된다고 한 것도 역시 너였지. 테이블 위에 칫솔을 대충 던져두고 현철이 먼저 자리를 잡아 아래 깔린 전기 매트의 온도를 조절하던 침대 위에 푹, 몸을 묻었다. 명헌이 나가자마자 강한 온도로 한참 뒀는지 안면에 금방 훈기가 닿았다. 침대 아래 진짜로 돌아가고 있는 온풍기도 한몫했다. 만족할만한 온도를 찾았는지 커다란 손으로 이불 위를 더듬던 현철이 드디어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 명헌의 어깨를 안았다.

 

“양치질하다 잠 깬 거 아니냐?”

“...그 정도로 깰 잠이 아니다 뿅.”

“...그래, 더 자. 한참 못 잤을 텐데.”

“응.”

 

손으로 괴고 있던 고개를 내려감은 눈꺼풀 위에 입술을 부빈 현철이 이내 쥔 어깨를 일정한 리듬으로 토닥이기 시작한다. 늘 애먼 곳에나 예민하게 날을 세우느라 가장 중요한 일에 둔감한 이명헌은 그제야 깨닫는다. 앞으로 쭉 이 고요하고 맹목적인 다정이 그리울 것이라고. 심지어 바로 옆에 숨 쉬고 있는 순간에도.

 

 

“...뿅.”

 

그건 그렇고 민망할 정도로 깊이 잤다. 덕분에 커피를 마시면서 조금 내려 갔던 붓기가 다시 올라붙었다. 그 전보다 3배로. 그 정도로 푹 자다가 깬 것은, 엉망으로 부은 눈꺼풀 틈으로도 들어오는 맵싸한 냄새가 제법 강렬한 탓이었다. 불 냄새. 미처 다 떠지지 않은 눈으로 손만 뻗어 옆을 더듬었는데, 있어야 할 사람이 없었다. 불이 죄 꺼져있어 어둑한 텐트 바닥으로 겨우 한 발을 디딘 명헌이 비틀비틀 갓 태어난 초식 동물처럼 걸음을 옮겼다. 뭘 하고있는 거냐, 뿅.

 

“어, 일어났냐? 안그래도 깨우려고 했는데.”

“뭐 하는데. 삐뇽.”

“저녁 먹어야지.”

“... 벌써?”

 

햇볕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직 하늘이 푸르스름하니 밝았다. 물론 못 먹을 거야 없지만. 그새 조금 잤다고 판판해진 배를 쓸었다. 그런데 현철이 미리 꺼내놓은 것들은 좀 아니었다.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종이 박스 찢은 것을 부채 삼아 들고 가면서도 의아하게 물었다.

 

“밝은데 캠프 파이어뿅?”

“불 피우고 고기 굽다 보면 금방 어두워져.”

“그래도 너무 이른데.”

“지금 먹는 게 맞아. 이따가는 또 할 일 있어서.”

“오, 극기훈련뿅.”

“고만 짹짹거려라,좀.”

“뿅뿅거렸지 짹짹거리진 않았는데 뿅. 삐뇽. 삐용.”

“아오... 아, 붙었네. 됐어, 이제.”

 

장난치느라 부채질은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현철이 미리 해둔 게 있어 금방 불씨가 올랐다. 널찍한 석쇠를 올린 현철이 온도를 체크하는가 싶더니 고기 한 팩을 뜯어 덩어리째 무심하게 그 위를 채운다. 그 모양을 말없이 지켜보던 명헌이 눈을 돌려 그 옆에 고기만큼 뭉텅이로 썰어놓은 부재료를 훑었다. 버섯, 감자 뭐 등등. 그중 가장 실해 보이는 파인애플을 바로 손으로 집어 입으로 밀어 넣는다. 달큰하고 끈적한 과즙이 금방 헛헛한 입 속을 적셨다.

 

“구운 거 좋아하잖아.”

“안 구운 것도 좋아한다 뿅.”

“고기 먹기 전이니까 적당히 집어 먹어.”

“소화 시키는 건데. 연육 작용한다더라고.”

“그냐. 아, 술 마실 거면 꺼내.”

“술을 샀어, 뿅?”

“많이는 아니고 한 병. 기분 내라고.”

“오.”

 

어느 때보다 반갑게 달려가 냉장고를 여니 정말로 맥주 페트 한 병이 들어있었다. 아무튼 센스가 좋다. 단숨에 뚜껑을 딴 명헌이 잔을 찾으며 물었다. 너도 한 잔? 커피도 술도 즐기지 않는 걸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나 내라고. 평소라면 딱 잘라 거절했겠지만, 늘 그렇듯 명헌이 권할 때만큼은 예외였다. 그래서 돌아온 대답이 낯설었다. 아니. 나는 됐어.

 

“아쉬울 텐데.뿅.”

“혼자 마시니까 외로워서 그러지, 너.”

“알면 좀 맞춰주지, 삐뇽.”

“미안. 근데 오늘은 진짜 안돼. 이따 운전해야돼서.”

“? 외박한다며.”

“어, 그건 맞고.”

 

이따 별 보러 가자. 다 구워진 고기를 썰어 접시로 옮기면서, 현철이 더없이 상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에 천문대가 어쩌고, 하는 현수막이 보이긴 했다. 역시 애인은 독한 놈이었다. 새삼 몸서리친 명헌이 잔뜩 뚱해진 얼굴로 삐딱하게 현철을 올려보다가 될 대로 돼라, 반쯤 먹은 파인애플을 그대로 석쇠 위에 던져 올렸다. 덩어리는 그대로 지글거리는 불판 위에 안착했다. 덕분에 배로 신난 현철만 휘파람을 분다. 포인트가드가, 야투율 봐. 대놓고 낄낄대며 놀려 먹다 고기 먹으라며 다가와서는 뺨을 부드럽게 문지른다. 잘 잤네, 여기 자국 남았다. 그런 일에 놀라지도 않거니와, 미처 놀라기도 전에 그 위로 또 습관처럼 입술을 붙인 현철이 다정하게 속살거린다. 좀 맞춰줘. 오랜만이라 신나서 그래. 그럼 이명헌에게는 마땅한 수가 없었다. 그저 여전히 제 뺨을 쥔 팔뚝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자리에 앉는 수밖에는. 현철을 만난 이후 명헌은 자주 제 사랑에 대해 골몰했다. 현철이 제게 주는 무한정의 포용이나 조건 없는 다정함에 비해 제 것이 너무나 볼품없어 보인 탓이다. 간혹 창작물 속의 한껏 끔찍하게 꾸며진 연쇄살인마처럼 음습한 저까지도 품어준 대가로 나도 너에게, 심지어는 ‘웬만하면' 맞춰주는 것이 진짜 사랑인지 의심하곤 했다. 현철은 납치당한 인질이고, 어쩌면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되도록 그 사실을 모르게 두는 것이 제 사랑 같았다. 눈과 귀를 가린 채 영영 미지 속에 남겨두고 오직 혼자서만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일. 그렇게 생각하니 퍽 끔찍했다. 그래서 명헌은 제 발목을 잡아채려는 어두운 밀물을 뒤로 하고 아직은 튼튼한 제 무릎에 또 힘을 준다. 어쨌든 지금 납치한 쪽은 현철이니까,뿅. 그러면 다시 고기를 굽기 위해 석쇠 앞으로 돌아간 현철이 혼잣말을 귀신처럼 알아채고 그랬다. 자기야, 갑자기 혼잣말 다 좋은데 고기 먹으면서 해라. 식는다. 아무튼 잔소리쟁이 같으니.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맞춰주고 싶었다. 지금보다 더. 고기는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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