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Fly Me to the Moon 上




가끔 모든 게 두려워지는 순간이 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어느 때가 되었든. 기분이나 컨디션 따위를 타는 일이 아니었다. 최근 명헌은 저를 지긋하게 따라다니는 그 고질을 드디어 그저 예민하게 태어난 사람의 노파심이라고 인정했다. 대학 리그에서의 첫 시즌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성적으로 막을 내렸다. 고등학교 내내 지지부진하던 신장도 조금이지만, 눈금이 올라갔다. 배정받은 기숙사는 쾌적했고, 매일 먹는 밥은 아닐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입에 맞았다. 과장을 보태 말하자면 근심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시즌 종료 후 관례대로 받은 짧은 휴가를 내내 불면으로 아깝게 날리고 있었다. 애인과 가족들은 번갈아 가며 차츰 헬쓱해지는 명헌을 걱정하고 그들이 입에 넣어주는 각종 보양식과 거기 묻은 들쩍지근한 사랑을 함께 씹으며 명헌은, 여전히 제 불안을 음미한다. 그러다 불에 덴 듯 놀라 움츠렸던 턱을 떨구는 것이다. 어느 날부턴가 씹어 넘기는 일마저 피곤했던 탓이다. 세간에선 보통 이런 걸 번아웃이라고 하지, 뿅. 전율의 크기에 비해 감상은 지극히 단출했다. 구구절절 풀어놓은들 하루 아침에 뚝딱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명헌은 그럴 때 유독 말을 아끼는 편이다. 애인은, 현철은 어릴 때부터 명헌의 그런 부분을 가장 걱정스러워했고, 급기야는 그런 명헌을 마크하다가 대변인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명헌은 어련히 예감했다. 조만간 그 애인이 들이닥치리라고. 여태껏 단 한 번도 엇갈린 적 없는 약속이었다.

 

퉁퉁 불은 눈꺼풀에 힘을 줘 겨우 떠내면 고등학교 때보다 더 두껍고 든든해진 팔뚝, 더 나아가 안온한 이불 속... 이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애인은 독한 놈이었다. 차는 벌써 멈춰섰는데 제 속은 여전히 달리는 모양인지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일단 중간에 들른 휴게소에서 산 보리차부터 들이켰다. 차 내부의 뜨끈한 공기에 샀을 때보다 훨씬 미지근해지긴 했지만, 마실만 했다. 남은 액체를 몽땅 벌컥이며 엉성하게 선팅된 전면 창을 훑는데 그 너머로 주차권 발급기와 씨름하는 현철이 보였다. 본가에서 경운기, 트랙터 따위를 흔하게 접해서인지 고만고만한 또래 중에도 신기하게 운전을 익히는 건 빨랐는데, (명헌은 면허는커녕 운전대를 잡아본 일조차 없다.) 또 저런 자잘한 일에는 서툰 것이 딱 제 나이처럼 보였다. 귀향길에 몇 번 차를 얻어타며 익히 본 모습이라 새삼스러운 감상이 들지는 않았다.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세웠던 등을 이내 무심하게 시트에 파묻자, 드디어 원하는 바를 이뤘는지 돌아오는 얼굴이 묘하게 밝았다. 정우성이 보면 또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도 있지 않나요 그러겠네뿅. 그러나 이명헌은 정우성이 아니고, 신현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미묘한 표정을 꽤 귀엽다고 느꼈다. 열리는 문틈으로 불쑥 들어와 가까워진 모습도 그리 험악하진 않았다.

 

“일어났네.”

“...어디야,뿅.”

“이거 또 잠 덜 깨서는. 출발 전에 얘기했잖아.”

“그때도 자고 있었다, 삐뇽.”

“아무튼.”

 

입으로는 면박을 주면서도 드는 볕에 따뜻해진 머리통을 쓰다듬는 손이 애살스럽다. 주차권을 대충 대시보드 위에 밀어둔 현철이 금방 큼지막한 손으로 핸들을 돌려 쉽게도 주차장의 빈칸을 찾아냈다. 학교의 공간들은 모두 이보다 컸는데, 유독 선이 흐리고 좁은데다 바깥으로 기찻길까지 보이니 좀 멀리 나온게 아닌가 싶긴 했다. 반쯤 죽어있던 명헌이 제대로 된 대답을 떠올리길 야무지게 기대하고 있는지 여전히 묻는 말엔 대답해줄 기미가 없는 현철이 네모진 공간에 깔끔하게 차를 세우며 툭 던졌다. 해장국 먹을 거다.

 

“삐뇽?”

“뭘 왜야, 양평이니까.”

 

쪽. 두툼한 입술이 익숙하게 이마 위에 진하게 붙었다 떨어진다. 어안이 벙벙한 애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덤덤하게 제 뒤통수를 긁적인 현철이 제 거구를 차체 밖으로 밀어내며 덧붙였다. 감자전도 씨발, 인당 한 장이야. 빼는 거 없어 이명헌. 들썩거리는 어깨 움직임을 보니 꽤 작정을 한 모양인데, 아쉽게도 이명헌은 아마 세상에서 제일 말을 안 듣는 애인일 것이다. 운전석 문이 닫히기도 전에 투덜거렸다. 술 마신 것도 아닌데 무슨 해장국 씨발뿅. 그러자 잽싸게 돌아와 기어이 조수석 문을 연 현철이 아예 명헌의 허리를 답싹 안아 내리며 시원하게 웃는다. 먹으면 그런 소리 안 나올걸. 엉거주춤하면서도 못 이기는 척 비척비척 따라 걸었다. 어느새 다 커서 이국땅을 밟은 해맑은 후배는 영영 모르겠지만, 이명헌은 신현철의 웃는 얼굴에 약했다.

 

과연 학교가 위치한 도시와는 달랐다. 내리자마자 보인 오밀조밀하게 붙은 건물들의 층고가 죄 낮았다. 평균 신장을 훨씬 웃도는 남자 둘이 그사이를 걷자니 길목 길목이 꼭 어디 소인국의 것처럼 보였다. 마을은 작을수록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 명헌과 현철 둘이 학창 시절을 난 강원도의 작은 동네가 꼭 그랬던 것처럼,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아마도 현철의 목적지인 해장국집이 나왔다. 나지막한 대신 양옆으로 널찍한 건물 한쪽에 코딱지만 한 총포사가 붙어있고, 그 외엔 온통 무언가를 달이고 고는 냄새 천지였다. 찾는 이가 많은지 주차장으로 마련해 둔 점포 앞의 넓은 부지는 포장이 되지 않아 가벼운 바람에도 옅은 흙먼지가 일었다. 발끝으로 그 위를 문득 문지르던 명헌이 질문처럼 고개를 쳐들자, 금세 그 의중을 파악한 현철이 덤덤하게 손을 끌었다. 역 근처에 마트가 있어서, 식당은 그냥 걸어오는 게 편하겠더라고. 

촌스러운 라벨지 다닥다닥 붙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 내부는 점심이라기에 애매한 시간에도 손님이 제법 있었다. 양이며 선지를 넣고 끓여내는 음식인데도 바닥이나 테이블이 끈끈해 보이지 않아 나름 마음이 놓였다. 거의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넓게 트인 4인용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뭘 먹어야 하지,뿅. 갑자기 끌려온 처지라 아는 게 없었다. 널찍한 어깨를 옹송그려 굳이 붙이고 함께 메뉴판을 들여다보던 현철이 이내 그중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냥 시그니처 먹어, 시그니처. 찾아봤는데 별로 안 맵대. 그리고 감자전. 무조건. 왜 그렇게나 감자전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 뭐. 현철의 추천이라면 웬만해선 거스른 적이 없다.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종업원이 가지고 온 잔에 물을 채우자, 빠르게 정한 메뉴를 읊은 현철이 손을 뻗어 수저를 놓아주었다. 계절치고 퍽 쌀쌀한 날씨에 가게 안의 난방이 제법이었다. 간만의 이동으로 노곤해진 몸이 또 차 안에서처럼 금방 풀릴 것 같았다. 턱을 괴고 그런 명헌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현철이 툭, 볼을 건드렸다.

 

“...왜, 뿅.”

“너는 꼭 이맘때쯤 잠이 많아지더라.”

“그런가...”

“봄도 다 타고, 귀엽게.”

“... 어디 밖에 나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뿅.”

 

다 기겁해, 삐뇽. 짐짓 질린 낯을 꾸며내 일갈했지만, 그런 소리는 이제 익숙하고 실은 꽤 좋아했다. 말하지 않아도 사소한 하나까지 찾아내 짚어주는 사랑이 불쾌할 리 없었다. 그래도 졸지 말아봐, 여기 음식 금방 나온대. 손장난을 하고 있으면 정말로 금방 커다란 감자전이 나왔다. 좀 특이했다. 감자를 간 게 아니라 채 썰고 넓게 펴 부친 것이었다. 제법 두툼해 보이는 부피감 가운데 간장 종지가 올라가 있었다. 잘게 썬 청양고추와 파도 따로 나왔다. 따로 간장 하나를 더 부탁한 현철이 제 앞으로 당겨간 종지 안으로 파를 쓸어 넣으며 명헌을 재촉했다.

 

“일단 내 거에만 넣는다. 집어 먹고 맛 괜찮으면 새로 넣어 먹어.”

“원래 이렇게 먹는 거, 뿅?”

“그렇다네. 맛있대. 선배가 괜찮다고 하길래.”

“으음. 삐뇽.”

 

단순히 음식을 먹는 일에도 이명헌은 딱히 모험을 즐기지 않았다. 특이하고 새로운 것들은 잘 먹는 편인데, 그 전에 꼭 몇 번씩 찾아보곤 했다. 그러니 단순한 전 한 장에도 입안이 좀 떨떠름했지만, 파 쓸어 넣는 손을 보고 있자니 왠지 허기가 돌았다. 며칠 만에 처음이었다. 작게 찢은 전 위에 간장에 절은 파채를 올려 그대로 밀어 넣었다. 오. 두꺼워서 기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식감이 괜찮았다.

 

“맛있다니까.”

“지도 안 먹어봤으면서, 뿅.”

“니랑 같이 먹으려고.”

“지랄 노,삐뇽.”

“밥도 같이 먹으면 되겠네. 좀 팍팍 먹어라 자기야.”

“뿅.”

 

때마침 나온 해장국은 양과 선지가 가득 들어 위로 엷은 기름막이 떠 있었다. 국물은 붉고, 제법 매워 보였는데 막상 떠넣으니 그냥 구수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것치고는 둘 다 좀 맛있었다. 든든하고. 기름진 국물에 밥을 털어 넣으며 명헌은 생각했다. 사랑은 아마도 하나라도 더 못 먹여 안달인 일인 모양이라고. 그리고 간만에 제 생각에 동의했다. 덩치에 비해 의외로 정갈하게 식사하는 모습이 보기 싫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까 애먼 곳에서 뜬금없이 장을 보는 것도, 여전히 그 영문을 몰라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카트를 끌며 그 안에 턱턱 쌓는 고기의 양이 남달랐다. 둘 다 한창 현역인 운동선수인 만큼 먹는 양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는데 그런 것 치고도 많았다. 뭐, 그래도 상관없지만. 오랜 선수 생활로 이명헌도 신현철도 매한가지로, 식사에 대해서는 센서가 좀 망가진 편이었다. 알아서 쌈 채소까지 한 바가지 쓸어 넣는 넓은 등짝을 따라가며 근처에 널린 간식거리나 갈짝이다 문득 포장된 떡을 잔뜩 쌓아둔 매대 앞에 멈춰 섰다. 언제 눈치를 챘는지 등 뒤에 바짝 다가온 현철이 귓가에 작게 묻는다. 매장 안의 음악 소리나 호객 행위가 꽤 시끄러웠던 탓에.

 

“먹을래?”

“... 바람떡이 괜찮을지 시루떡이 괜찮을지 고민 중이었다,뿅.”

“자기 단 거 좋아하잖아. 왜, 식단 걱정?”

“그건 아니고... 니가 할아버지 같은 걸 좋아하니까 삐뇽.”

“와, 씨발. 존나 상처.”

“흐흥.”

“웃기는, 새끼. 그냥 이거 먹어.”

 

너 뭘 모르는 모양인데, 할아버지들은 원래 단 거 더 좋아하거든. 너처럼. 대놓고 반격을 해보겠단 투였는데 아쉽게도 타격은 없었다. 원체 애늙은이 소리를 꼬리표처럼 달고 자랐던 데다 타박하는 말투가 뭔가 흔적을 남기기엔 지나치게 둥글었기 때문이다.

 

 

“근데 현철.”

“응. 뭐, 자기야.”

“우리 진짜 어디가는 거냐 뿅.”

“뭐야, 아직도 모르고 그냥 타고 있었냐.”

“잤다고 했잖아.”

 

결국 장보기는, 뒷좌석이 꽉 차다 못해 조수석의 명헌이 커다란 1.5리터짜리 음료수 번들을 끌어안고 나서야 끝났다. 트렁크를 열면 될 텐데 오기 전에 이미 꽉 차 있어 자리가 없다고 했다. 탄지 얼마 안되기도 했지만, 신현철은 기본적으로 주변이 늘 깨끗한 사람이다. 그러니 갑자기 채워진 트렁크는 아마 지금 가는 곳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 지역의 시내인 듯한 도로를 벗어나면 언제 복작거렸냐는 듯 썰렁하고, 내내 구불거리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한참 이어졌다. 그 옆으로 몇 채의 펜션들이, 또는 캠핑카들이 조형물처럼 늘어서 있었다. 카페도 좀 있고. 그 수를 한참 헤아려보던 명헌이 물었다. 우리 오늘,

 

“외박하냐, 뿅?”

“당연한 소릴. 너도 휴가, 나도 휴가.”

“숙박업소가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어우, 아무튼 엉큼도 하셔라.”

“그럼 엉큼해야지 뿅. 엄청 오랜만인데. 현철은 안 그런가보네.”

 

서운하다, 뿅. 짐짓 장난스레 입술을 내밀자 잠깐 길이 매끈해진 틈을 타 명헌을 보고 실쭉 웃은 현철이 그 도톰한 살 위를 툭, 손가락으로 건드리고 떨어진다. 야, 안 그래도 너 태울 때부터 난리였거든.

 

“근데?”

“근데 더 재밌는 거 한 지는 더 한참인 거 같아서.”

“그게 뭔데,삐뇽.”

“데이트. 아, 거의 다 왔다. 이쯤 어딘데.”

 

들어서는 길이 제법 좁고 위태로웠다. 덕분에 별스럽지 않게 이어가던 현철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끝내 잦아들어 완전히 사라졌다. 눈을 끔벅이며 꽤 집중한 옆태를 빤히 보던 명헌이 이내 현철과 같이 앞을 바라보았다. 허술하게 지어둔 다리 아래로 작은 개천이 흐르고, 꽤 가까이 큼직한 천막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댄 모양이 보였다. 입구인 듯 보이는 곳에 알록달록한 꼬마전구를 두른 표지판도 세워져 있었다. 글램핑. 뭔지는 알고 있었지만, 단어를 봤다고 바로 와닿지는 않았다. 전지훈련 같은 건 현철도 저도 수없이 해봤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눈물 날 정도로 추운 날씨에 제대로 된 방한복 없이 해변을 뜀박질한 적도 있다. 둘 다에게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한 명헌이 시트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러자 떨떠름한 기색을 기민하게 눈치챈 현철이 키득거리며 차를 세우고, 문 대신 명헌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곧 맞닿은 입술이 처음에는 까끌했는데, 부드러운 혀를 내어 덧칠하니 금방 말랑해졌다. 제 허벅지 옆을 짚은 손등을 쥐고 한참 입을 맞추었다. 지금이라도 근처 모텔이나 찾아보라고 할까, 고민하면서. 그러나 갈등이 무색하게 떨어진 얼굴이 꽤 신나게 웃고 있어서 그냥 목이나 한 번 더 끌어안고 다시 입을 맞추고 말았다. 같이 얼어 죽지 뭐, 뿅. 어쨌든 데이트는 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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