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 속을 방랑하는 작은 걸음
아홉 살의 겨울부터 열 살의 봄까지
*Warning: 가정 학대(정서적 학대)
겨울의 시작점은 언제나 모호했다.
혹자는 서늘한 대기가 냉기에 얼어붙기 시작할 무렵이나 첫눈이 내리는 날을 두고 겨울이 시작되었다고 표현하지만, 눈송이를 화산재처럼 뒤집어쓴 아이는 이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땅 위에 두터운 설원이 만들어지고, 발자국마저 쉬이 사라져 돌아갈 길마저 찾을 수 없을 만큼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이 곧 겨울의 시작이라고.
아이는 하얀 포말이 일었다 사라지는 선착장의 정경을 돌아보았다. 파도가 소용돌이치는 바다 너머에 육지의 모습이란 없었다. 남쪽 바다에 외따로 떨어진 섬은 홍련이라는 이름과는 사뭇 동떨어진 분위기를 지녀, 낯선 장소를 낯설게 바라보는 아이에게 차가운 소외감을 안겨주었다. 아이의 주먹만 한 눈송이가 하늘로부터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아직 제설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발목까지 쌓인 눈이 어린 이방인의 살갗을 차갑게 얼리고 있었다.
“한눈 팔지 말고 잘 따라오너라, 하운아.”
겨울 공기처럼 차디찬 목소리가 아이의 고개를 홱 돌게 만들었다. 하운은 자신을 이곳으로 인도한 노인을 여전히 낯설어 하는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네, 할아버지.’라는 예의 바른 대답을 듣지 못해 못마땅한 기색이 된 노인은 아이를 한차례 훑어보고는 몸을 돌려 가던 길을 재촉했다. 하운은 어른의 보폭을 따라잡기 위해 잰걸음으로 걸어가면서도 섬의 풍경을 눈에 익히려고 노력했다. 섬의 북쪽에 높이 솟아오른 화산에서 연기가 쉼 없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해안가 부근에는 체육관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건물들이 모여서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섬의 주민들은 주로 그 마을에서 살고 있을 터인데, 노인은 마을로 통하는 길을 무시하고 그대로 외곽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섬의 풍경은 아이의 시야를 새하얗게 물들여놓을 뿐 어떤 따스한 흔적도 남겨주지 않았다.
'어디까지 걸어야 하는 걸까.' 하운은 노인의 등만 보고 걷는 동안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헤아리지 못했다. 공기 중으로 하얗게 스며 나오는 자신의 숨결이 시계의 초침보다 더 빠르다는 생각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노인에게 언제까지 걸어야 하느냐고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낯선 어른이 제게 보이는 냉랭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상 하운은 그 노인이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아버지, 즉 자신의 외조부가 되는 사람이었다. 기억에 별로 남지 않은 인물이라서 낯설다고 느낄 따름이었다. 하운은 차라리 그보다는 외조모 쪽을 더 잘 기억하고 있었다. 어릴 적에, 그러니까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최하한의 나이에 맞이했던 생일날, 자신에게 어린 쏘드라를 안겨줬던 노인이 함께 남긴 말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너라면 장차 우리 가문을 이어줄 아이가 될 수 있겠구나.’ 그러나 그때 자신의 오빠가 적개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이 역시 그다지 따뜻한 목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운은 이번에는 가까운 과거를 회상해 보았다. 오빠가 바다 건너의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고 일주일 째 되던 날, 자신은 보육원에서 주최한 단기 캠프의 퇴소식을 마치고 갈색시티의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웬 노인ー다시 설명하자면 하운은 이 인물이 자신의 외조부인 줄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었다. 거의 까마득해진 기억 속의 얼굴을 쉽게 떠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ー이 집을 찾아와서는 대뜸 "당분간 널 돌봐 줄 사람이 없다고 네 어미가 말하더구나. 그러니 나와 네 외조모가 앞으로 너를 맡기로 했다." 라면서 자신을 데리고 가겠더랬다. 혹시 몰라서 칼로스 지방에서 지내고 있다는 어머니에게 확인차 전화를 걸어보니, "하운아, 당분간 외가댁에서 지내야겠다. 나와 네 아빠는 일이 너무 바빠서 널 제대로 돌봐줄 수가 없는 데다 네 오빠도 멀리 나가 있고… 그렇다고 너와 네 포켓몬만 집에 두자니 걱정이 되어서 말야, 엄마의 부탁으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께서 당분간 널 맡아주시기로 했어." 라는 확인사살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싫다고 버텼어야 했는데, 그간 자신을 돌보느라 남들은 다 가는 트레이너 여행을 가지 못했던 오빠를 생각한답시고 어른스러운 척 알겠다고 승낙한 저의 탓이 컸다. 그렇게 하운은 노인의 손에 붙잡혀서 남쪽 바다의 외딴 섬까지 건너오게 된 참이었으며, 외조부모와 가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그로서는 외부와 동떨어진 땅에 유배를 당하는 듯한 기분에 천천히 잠식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역시 생떼라도 써서 집에 남아있어야 했는데. 하운은 주머니 속의 작은 몬스터볼을 꼭 쥐며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자신을 가족 대신 돌봐주기로 한 혈육이 저런 냉혈한 같은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면 앞으로 외가댁에서 지내는 동안의 제 일상에 찬바람이 쌩쌩 불 것임은 자명했다. 그나마 의지할 대상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자기만큼 어리고 약한 쏘드라가 이런 데서 힘을 제대로 쓸 수나 있을 지조차 의문이다.
“다 왔다. 저택으로 들어가기 전 신발부터 벗고 행동거지를 조심히 유지해야 한다.”
특유의 깐깐한 목소리가 하운의 의식을 헤집고 지나갔다. 한창 딴생각에 빠져 있던 하운은 화들짝 놀라서 앞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기와집이 지붕에 눈을 이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뽐내며 서 있는 가운데, 기와집을 감싸듯 드넓게 펼쳐진 성도풍 정원의 풍경은 이 장소에 처음 와보는 이로 하여금 쉬이 주눅 들게 만들었다. 노인은 손녀딸에게 주변을 구경할 틈도 내주지 않고 곧장 정문으로 향했다. 하운은 당장 그를 따르는 대신 제자리에 서서 머뭇거렸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환경이 펼쳐질 지 모르는데, 이대로 뒤돌아서서 선착장까지 달려가 버릴까, 그런 다음 배를 타고 갈색시티로 돌아가서 따뜻한 집에 쏘드라와 함께 이불 속에서 편안하게 뒹굴거리고 싶은데….'
차가운 벌판 위에 서서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마음이 마구 동하기 시작했다. 귓가에서 누군가가 속삭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뒤만 돌면 바로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길이니까, 이런 차가운 곳 말고 따뜻한 데서 마음 편히 지내려면 기회는 지금 뿐이니까… ….’ 차게 식은 고사리손이 주먹을 꾹 쥐었다.
“뭘 하는 거냐, 빨리 따라오지 않고.”
…그러나 노인의 권위적인 음성은 어린 아이가 거역하기 힘든 압박을 품고 있었다. 하운은 아득하게 펼쳐진 설원을 아득한 시선으로 돌아보고 나서 하릴없이 노인을 따라 터덜터덜 걸어갔다.
저택의 대문이 닫히는 소리마저 하운의 마음에 육중한 쇳덩어리를 올려놓는 듯했다.
복도를 이루는 나무바닥은 상당히 낡았는지 연신 삐걱거리는 음을 내고 있었다. 조명마저 어두침침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어서 살아있는 사람보다는 유령과 더 자주 마주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이런 저택에서 오랫동안 지낸다면 성격 정도는 쉽게 버릴 수 있겠구나 싶기도 했다. 하운은 침울하게 주눅이 든 상태에서 마룻바닥의 소음을 배경음악 삼아 하염없이 걷고 걸었다. 아마 신경을 조금 더 다른 곳에 두고 있었다면 제 앞에서 움직이고 있던 외조부가 갑작스럽게 멈춰 서는 것에 따라 그대로 그 등에 코를 박게 되었을 것이다.
“저쪽 끝으로 가면 네 방이 나올 것이다. 방에서 짐부터 풀고 이 복도를 따라서 본당으로 오너라. 여기서 지내려면 가문의 규칙부터 알아야겠구나. 가주님과 함께 기다리고 있을 테니 늦지 않도록 해라.”
'규칙? 무슨 규칙?' 하운은 놀란 이어롤처럼 눈이 동그래져서 외조부를 바라보지만, 그는 손주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바람을 쌩하니 일으키며 본당 방향으로 걸어가버리는 것이다.
“뭐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마디 툭 내뱉고 노인이 알려준 방으로 들어가 보니 허전하기 이를데없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운은 아기자기하게 꾸민 자신의 방을 아련하게 떠올리며 붙박이장과 책상만이 들어선 방을 천천히 둘러보고는 몬스터볼을 꺼냈다. 펑,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쏘드라가 볼에서 튀어나왔다.
“…그믐아, 우리 이제 여기서 지내야 한대.”
하운은 차가운 공기와 낯선 분위기에 놀라 바짝 긴장하는 쏘드라를 안아 올리며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어린 주인의 팔뚝에 꼬리를 휘감은 채 연신 주위를 둘러보던 쏘드라의 시선이 주인의 얼굴을 향했다. ‘왜?’하고 묻는 포켓몬의 눈빛이 마찬가지로 처량했다.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가족을 대신해서 돌봐주시기로 했다는데… 모르겠어, 여기 느낌 이상해. 저택에서 지내는데 지켜야 할 규칙까지 있대….”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이 어린애 치고 묵직하기 짝이 없다. 쏘드라는 모든 것이 바뀐 세상이 그저 무서운 듯이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하운은 팔뚝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쏘드라를 위로하듯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나서 가방에서 짐을 풀기 시작했다. 워낙 급하게 나왔던 터라 챙겨온 물건이 얼마 없었다. 여분의 옷가지와 세면도구, 일기장, 필기도구, 그리고 오빠에게서 생일 선물로 받은 오카리나….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오빠가 여행에서 돌아올 텐데….”
어른들이 왜 그렇게 서둘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갈색시티를 급하게 떠나느라 오빠한테 연락도 하지 못했는데. 오빠가 알면 걱정을 엄청 하겠지…?'
“…여기 전화기는 있겠지…?”
옛날이야기 속에서나 볼 법한 저택에 현대 문명이 얼마나 들어와 있을 지도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전화기 정도는 있겠거니, 애써 자기자신을 달래며 외조모에게 전화기의 위치를 물어보겠노라 다짐한 하운은 짐짓 기운을 차리듯 쏘드라를 돌아보았다.
“할머니랑 할아버지한테 가 보자. 나도 여기 오래 있기는 싫으니까, 눈이 어느 정도 녹을 때 집으로 보내달라고 해 봐야지.”
앞 문장을 들은 쏘드라는 망설이는 빛을 띄었다가도 뒤 문장에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운은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방문을 나섰다.
무엇이든 부딪쳐 봐야 알고 살아남는 세상이지.
…그러나 머잖아 하운은 자신이 이 저택에서 일주일은커녕 단 하루조차 버틸 수 없을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본당에서 조부모를 대면한 하운이 그들에게서 들은 내용은 규칙의 탈을 쓴 강제였다. 신나게 뛰어놀기 좋아하는 아이 입장에서 듣는 금기부터가 숨이 막혔다. ‘허락 없이 바깥에 나가면 아니 되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동행인을 데려가야 한다. 친구를 마음대로 만들지 말고, 포켓몬은 드래곤 타입 외에는 엔트리에 들이지 않도록 하며, 가문에서는 행동을 조신히 하고, 조부모님께 대들거나 뜻을 거역하지 않도록 하고, 주어지는 일정에 대해 시간을 어기지 않도록 한다…’ 외 기타등등, 온통 고리타분한 것들 일색이었다.
“돌봐주신다는 말씀이랑 전혀 다르잖아요, 이건 그냥 저를 집에 가두고… ‘길들이겠다’는 거 아니에요?”
하운은 ‘길들인다’는 단어까지 떠올려 낸 자기자신에게 미처 감탄하지도 못했다.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손녀딸이 언성을 높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외조모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잘못 이해하고 있었나 보구나. 네가 라씨 가문의 혈통을 잇는 이상은 마땅히 지켜야 할 것들이란다. 적자로 대우를 받으려면 그만한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니?”
“…라씨 가문이란 게 뭔데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다가 툭 뱉은 질문이 상석에 앉아있는 노인들의 심기를 제대로 거슬러버린 모양이다. 한쪽은 한숨을 쉬고, 한쪽은 헛기침 소리를 냈다. 몰라서 묻는 건데 왜 화를 내느냐고 욱하려는 손녀의 말을 가로챈 사람은 이번에도 역시 외조모였다.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사근사근 낮추어 버릇 나쁜 아이를 타이르는 어조로 말했다.
“우리 라씨 가문은 관동 지방에서 유서 깊은 드래곤 조련사 가문이란다. 포켓몬 중에서 최고로 강력한 힘을 지닌 드래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려면 자신의 근본부터 잘 다스려야 하는 법이야. 우리가 네게 거는 기대가 큰 만큼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말이다.”
‘뭐야, 그런 거 몰라요.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멋대로 정한 걸 따르고 싶지 않아요.’ 하운은 직접적인 거부 의사를 간단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집에 갈래요. 전화 쓰게 해 주세요.”
외조모는 눈썹을 가볍게 치켜뜨며 대꾸했다.
“이 저택에는 전화기가 없다.”
“그럼 저건 뭔데요, 장식물이에요?”
하운은 협탁 위에 놓인 구식 전화기를 가리키며 항의했지만 외조부의 낮은 웃음소리만이 뒤따라왔을 뿐이었다.
“이 저택에 네가 쓸 전화기는 없다는 의미다. 어차피 네 가족이 모두 바빠서 전화를 받을 수나 있을 지 모르겠구나.”
하운은 일이 자기들 뜻대로 되어가는 것처럼 흡족하게 웃는 조부모를 쳐다보며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쯤 되면 부모님이 일을 핑계 삼아 자신을 외가댁에 팔아넘긴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떠오를 지경이다. 하운은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억지로 참아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알았어요. 그럼 전 언제까지 여기 있으면 되는 거예요?”
“글쎄다…. 네 부모가 여유를 찾아서 너를 거둬들일 때를 생각하고 있지마는….”
하운은 길게 늘어지는 문장 뒤에 어떤 내용이 이어질 지 잘 알고 있었다. ‘네 부모가 워낙에 바빠서 말이다.’ 자식들과 애착관계조차 제대로 형성하지 않고 남매를 소홀히 대해 온 부모가 퍽이나 자신을 신경쓰겠다는 자조를 덧입힌 예측이었으며, 더불어서 하운은 다음의 선심 쓰듯 하는 말투에 절로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네가 네 앞가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이 저택에서 지내는 건 어떻겠느냐.”
“전 지금 당장도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걸요.”
성미를 참지 못하고 뱉은 문장이 단번에 부정당했다.
“가주님께 버릇없이 말대꾸를 하는 꼴을 보자면 아직 한참 멀었다. 보아하니 진영이가 제 새끼를 완전히 풀어두고 키운 모양이구나.”
외조부가 한 말의 의도는 아홉 살짜리의 기를 납작하게 눌러놓기 위함에 있었겠지만, 이는 오히려 하운이 가진 천부적인 반항심을 더욱 날카롭게 벼려놓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애시당초 조부모에게 자신의 오빠는 안중에도 없는 존재이자 방해물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하운의 실보호자를 한참 헛짚고 있었다.
‘여기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지, 목덜미를 잡게 해서 틈을 만들어 놓을 지….’
본당에 흐르는 긴장의 한쪽 끝을 늙수그레하게 나이 먹은 이가 붙잡고, 반대쪽 끝을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이가 붙잡고 있는 괴상한 구도가 펼쳐졌다. 이제 여기서 한 발 더 나가면 패륜으로 여겨질 만한 말이 튀어나오겠지만, 분노와 짜증과 서러움 때문에 머릿속 여유가 얼마 남지 않은 하운으로서는 정도를 조절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가주가 손뼉을 쳐 중재에 나서지 않았더라면, 이다음 순간의 본당에는 험악한 감정이 차올랐을 것이다.
“하운이가 먼 길 오느라 많이 피곤했을 텐데, 오늘 이야기 나누는 건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너는 방에 돌아가서 쉬어라. 일정에 관한 이야기는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하도록 하자꾸나.”
대립을 뒤늦게나마 끊어 준 외조모에게 딱히 감사를 표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보답삼아 예의를 조금이라도 차려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운은 어영부영 감사의 말을 중얼이고는 곧장 뒤돌아섰다. 서둘러 본당을 나서는 아이의 얼굴은 비장한 표정으로 잔뜩 굳어 있었다.
시곗바늘이 자정을 훌쩍 넘기고 새벽 한 시를 향하고 있을 무렵, 하운은 창문 바로 앞에 우뚝 서 있는 나무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오빠의 건장한 포켓몬들과 활발하게 어울리며 꾸준히 쌓아 온 신체 능력을 직접 시험해 볼 때가 도래했으니, 이는 곧 손녀딸이 지닌 행동력을 완벽히 무시하고 있던 노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쉰 후 몬스터볼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집으로 돌아가자, 그믐아.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여기서 버티지 못할 게 틀림없어. 따뜻한 곳으로 가야지.”
쏘드라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볼 바깥쪽에 있는 주인을 향했다. '어떻게 나가려고?'
하운의 시선이 천천히 탈출경로를 그렸다. 이 앞의 나무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서 몰래 정문을 나가면 저택 탈출은 끝. 땅 위에는 아직 눈이 쌓여 있어 만일의 추락으로 인한 충격을 덜어줄 것이다. 길을 뒤덮고 있는 눈도 어느 정도 제설 처리가 되었으니 드러난 길만 잘 따라서 내려가면 마을에 다다를 수 있겠지. 지금 시각이면 선착장에 배는 없겠지만 적어도 포켓몬 센터는 열려 있을 것이고, 아침까지 기다린 후에 첫배를 타고 육지까지 나가면 탈출 시나리오가 완성된다. 하운은 묘하게 짜릿한 감정을 느끼며 창가와 나무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 도움닫기가 없어도 단 한 번의 점프로 건너뛸 수 있는 짧은 거리였지만 발을 잘못 디디거나 손을 헛짚어버리면 그대로 아래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주의에 주의를 거듭해야 했다. 창가에 발을 올려놓는 하운의 잇새로 짤막한 심호흡이 흘렀다. 품속에 잘 여며넣은 몬스터볼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제자리를 박차고 허공으로 뛰며 앞으로 쭉 뻗은 손이 나뭇가지를 아슬아슬하게 낚아채, 나뭇가지에 매달린 마른 잎사귀들이 떨림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다. 하운은 굵직한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기둥을 타고 천천히 땅으로 내려섰다. 나뭇결에 쓸린 손바닥이 욱신거렸지만 낙하에 비하면 선방이었다. 아이는 씩 웃으며 손을 대충 털고 쏘드라를 꺼내주었다.
“봐, 성공했지? 이제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저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돼. …이 새벽에 도대체 누가 바깥을 돌아다닐지, 흠.”
하운은 배낭을 고쳐메고 파트너 포켓몬을 품에 끌어안았다. 달이 뜨지 않아 어둡기만 한 밤, 왜소한 몸집을 가진 아이가 황량한 정원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웬만해서는 다른 이의 눈에 띄지 않을 터였다. 행여나 누군가가 뒤따라올세라 신경을 바짝 세운 채로 뜀박질을 하는 데 드는 체력이 평소보다 많아서 숨이 금방 차오르는 것만 제외하면 제법 성공적인 작전이다. 저 문만 나서면 자유야. 희열에 찬 미소가 점차 입가에 떠오르고 있었다. 모든 일이 제 뜻대로 흘러감에 따라 가슴 속이 쿵쿵 울리는 이 감각이 마음에 쏙 들었다. 하운은 집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오빠도 여행길에서 돌아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야 이 모험담을 생생하게 들려줄 수 있을 텐데!
희망으로 가득 부풀어오른 발자국이 기척을 선명하게 남겨 놓으면,
어린 생명체의 움직임을 감지한 무언가가 어둠 속을 휙 움직여 와,
사냥감의 앞을 가로막고 커다란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드는 그 찰나에,
그의 입가를 맴돌던 승리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그믐, 연막이야!” 비명 같은 외침이 밤공기를 다급하게 갈랐다. 쏘드라가 날쌔게 발사한 먹물은 괴수가 가진 세 개의 머리 중 정중앙의 머리에 적중해 눈을 완전히 가려놓았다. 그러나 하운과 그의 파트너는 환호성을 지를 틈을 찾지 못했다. 흉악한 외모의 괴수는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 사냥 본능으로 적들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냈으며, 남은 두 개의 대가리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그들을 향해 덮쳐 오고 있었다. 하운은 자기가 비명을 질렀는지도 알지 못했다. 소리를 알아채기에는 청각을 휩쓰는 포효성이 지나치게 컸다.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쏘드라를 힘껏 끌어안고 등을 돌린 채로 공격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이쯤 해두면 허튼짓은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겠지. 잘했다, 삼삼드래.”
하운은 꽉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외조부가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허공을 유영하듯이 움직여 온 삼삼드래가 세 개의 머리를 거만하게 조아렸다. 하운은 제 품속에서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고 있는 쏘드라를 달래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알고 있었어요…?”
“그럼, 알다마다. 말썽쟁이는 너 말고도 더 있었으니. 반항꾼들이 머리를 굴려봤자 다 똑같다. 정신 차렸으면 일어나거라.”
하운은 강철집게 같은 손이 자신의 팔뚝을 붙잡고 억지로 일으키는 것을 있는 힘껏 뿌리치려 했지만 어린 아이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삼삼드래가 바로 가까이 붙어서 하운과 쏘드라가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않는지 감시하기 시작했다. 수치심과 모멸감이 패배의 감정에 들러붙어 속이 울컥거리며 끓어올라, 하운은 울분을 참기 위해 입술을 힘껏 깨물며 인상을 구겼다. 외조부는 이를 조롱하듯 냉소를 지으며 손녀의 어깨를 붙들고 앞서서 걷게 하였다. 그대로 방까지 끌려온 하운은 코앞에서 매섭게 닫히는 문을 응시했다.
“…이제 어떡하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눈빛이 허망하기만 했다. 공포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쏘드라의 훌쩍임 소리가 선했다. 하운은 망연자실하게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파트너의 울음에 자극을 받고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나 여기 싫어, 감옥 같아,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 이게 다 뭐야…. 다 미워, 이제 우리 어떡하면 좋아….”
자신의 감정을 참을 수가 없게 된 하운은 쏘드라를 끌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강압적이기만 하고 손녀를 전혀 이해할 줄을 모르는 조부모님이 싫었고, 바쁜 직장 생활을 구실 삼아 딸을 외가댁으로 보내 버린 부모님이 원망스러웠고, 낯선 곳에서 헤매고 있는 동생을 데리러 오지 않는 오빠가 미웠다. 한동안 꾹 참았다 터뜨린 눈물은 도저히 그칠 줄을 몰랐다.
느닷없이 찾아온 냉기는 하운이 느끼고 있는 추위를 한층 무르익게 하고 있었다. 그 아홉 번째 겨울은 아이의 일상을 비롯한 모든 것들을 차갑게 얼려 버린 계절이었다.
척박한 땅에 떨어진 씨앗이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고 주변 환경에 적응해 나가듯이, 아이 또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 평온한 일상을 되찾기 위해 저택의 분위기에 저 자신을 맞추어 나갔다. 가족이 보고 싶다고 울음을 터뜨려서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 집안에서 절대권력을 쥐고 있는 외조모에게 대들어봤자 벌만 가중될 뿐이니, 여기서 하운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서서히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순진한 메리프를 가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속내로는 언제든 저택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만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가주는 손녀가 완전하게 가문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고 있겠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다. 하운에게 완전한 굴복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일한 적자를 최강의 드래곤 조련사로 키우려는 가주의 집착 섞인 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드래곤 포켓몬의 맹렬한 공격성을 제어하고 마음대로 부릴 수 있으려면 조련사와 포켓몬은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워서 하운과 쏘드라가 지칠 때까지 대련에 내세웠다. 가주의 파트너 포켓몬인 망나뇽은 주인과는 달리 인자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인간과 포켓몬이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이면 쉴 틈을 내어주곤 했지만, 외조부의 삼삼드래는 아예 처음부터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저택에 처음 왔던 날 하운의 탈출 시도를 실패로 돌리게 한 원흉은 그야말로 악의 덩어리 그 자체였다. 쏘드라에게 끔찍한 트라우마를 남긴 삼삼드래는 배틀 필드에서 어린 포켓몬을 마주하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겁쟁이 주제에 어딜 기어들어 오려 하느냐’라며 주인을 그대로 닮아서 난폭하고 거만한 성정을 숨기지 않고 쏘드라를 마구 몰아붙이곤 했으며, 어떻게든 싸움을 빠져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몸부림을 비웃듯 괴롭힘을 멈추지 않았다.
하운은 이를 말리지 않는 조부모에게 분노했지만 ‘그렇게 약하기만 해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적반하장 식 발언을 듣고는 이를 바득바득 갈 수밖에 없었다. 상처투성이가 된 파트너를 더 볼 수가 없어서 후계자 수업 따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적도 있었는데 도리어 외출 금지를 받게 되니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훈련에 임하게 되었고.
“네가 진화하면 조금이라도 더 수월하게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운은 그믐의 꼬리에 생겨난 상처를 치료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쏘드라는 시무룩한 낯빛으로 지느러미를 흐느적거렸다.
“네 잘못 아닌 거 알아.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애초 여기로 오지 않았더라면 네가 그렇게 힘들 필요도 없었잖아.”
방수 붕대를 감아주는 손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다못해 그 삼삼드래만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맨바닥에서 구를 게 아니라 마음 편히 놀러 다닐 수 있었을 텐데. 하운은 눈에 띄게 지쳐가는 파트너의 모습이 안쓰럽고 미안해서라도 하루빨리 이 저택에서 나가고 싶었다.
“…오빠가 나 구하러 와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자신을 그렇게나 아껴줬던 오빠마저 와주지 않아 느끼는 실망감이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편지로 몇 번이나 구조 요청을 보내도 답장조차 돌아오지 않으니 섭섭한 감정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오빠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자신이 보낸 편지를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하곤 했는데, 결국 오빠를 보고 싶다는 그리움으로 결론이 나 버려서 코끝이 시큰하게 저려오기 일쑤였다.
“오빠가 답장 보내줬으면 좋겠다…. 오빠네 포켓몬들도 잘 지내고 있으려나. 너도 높새 보고 싶지?”
수조 안으로 들어간 쏘드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벽면에 얼굴을 찰싹 붙여오니, 하운이 일기장의 페이지 사이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유리면에 붙여주니 방금까지 울적했던 낯이 조금 되살아나는 듯했다. 하운은 그 모습을 보면서 웃다가 코를 훌쩍였다. 사진 속에서는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손가락 포즈를 취한 남매의 주변으로 다섯 마리 포켓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고, 이것은 제게 얼마 남지 않은 보물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운은 수조의 반대편에서 턱을 괴고 사진 속 인물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나직이 종알거렸다.
'다음에 만나면 높새랑 같이 날게 해달라고 조르자. 더 높게 날아보고 싶어. 서리한테 자장가 불러달라고도 해볼까, 아무래도 그런 거 들을 나이는 한참 지났지만… 보라 털도 빗겨줘야 하는데! 걔 털 너무 곱슬졌단 말야. 마파람이랑은 나무타기 대결도 해보고 싶다. 저번엔 내가 아깝게 졌지만 다음번은 이길 자신 있는데. 오빠가 또 어떤 친구를 데려올지도 궁금한데, 다음 편지 쓸 때 물어봐야겠는걸.' 쏘드라는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느라 주인의 목소리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수조의 바닥에서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물방울이 수면에 이르러서 톡톡 터지는 모습이 시선을 끌었다. 하운은 이 소강상태가 되도록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라며 멍하니 상념에 빠져들었다.
적어도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까지는 방해를 받지 않아서 다행인가 싶은데, 돌아오는 편지가 도통 없다 보니 중간에서 답장이 빼돌려지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었다. 지금까지 보낸 편지만 모아본다면 책 서너 권 정도는 너끈히 만들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오빠에게 편지를 보내러 가겠다고 하자 콧방귀를 뀌던 외조부의 모습이 문득 스쳐 지나가기도 했는데, 하운은 그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 지 여태 알 수 없어서 이만저만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만약 나를 두고 둘이서 배틀하면 틀림없이 오빠가 이길 텐데, 참된 가족이 가진 힘을 모르는 할아버지가 불쌍해요.’ …라고 도발해 볼 법한 시기를 한참 놓쳐서 아쉽기도 했다. 세상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기분은 불쾌하기만 해, 하운은 이대로 땅이 꺼지고 저택이 무너져 버리면 소원이 없겠다는 심정으로 재차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삶이 암담하다 하더라도 꼬렛 굴에 햇빛 드는 날도 있다는 말이 아예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따분하기만 한 예절 교육이 끝난 직후 늘 그랬듯 제 방으로 뛰어가려는 하운을 가주가 불러 세우고 나서 한 말이 그야말로 귀를 반짝 뜨이게 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부가주님이 상록시티에서 함께 살펴야 할 일이 있는데, 아무래도 너를 저택에 두고 가는 마음이 편치 않구나. 너도 좁은 저택 안에서 지내는 게 갑갑할 테니 오랜만에 육지로 함께 나가보지 않으련? 사용인과 동행한다는 조건으로 도시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좋다.”
굳이 바꿔서 표현해 보자면, ‘우리가 멀리 떨어진 곳에 나가 있는 동안 네가 저택에서 무슨 일을 벌일 지 모르니 아예 우리와 함께 다니는 편이 좋겠다. 숨통은 트게 만들어 주겠지만 네가 도시에서 이상한 일을 만들지 않도록 감시를 붙이겠다.’ 정도가 되겠지만 하운은 괘념치 않는다는 듯이 선선히 수긍했다. 그리곤 설레는 마음으로 방에 돌아와서 그믐의 몬스터볼을 챙기고, 책장에 고이 모셔둔 오카리나를 목에 걸고, 가벼운 나들이를 대비해 군것질을 준비하는 것처럼 소중한 물건들을 꼼꼼히 챙겨넣은 작은 배낭을 들었다. 자신의 옷차림이 활동하기 편한 복장임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하운은 자신과 동행할 사용인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하는 것을 애써 감추려 들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육지 공기를 마셔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분이 좋은 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주의 망나뇽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를 때, 하운은 지금의 감각 그대로 심리적으로도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 기분은 상록시티에 도착하자마자 시들해지고 말았다. 조부모가 따로 일을 보러 자리를 뜬 것까지는 좋았지만, 감시역으로 붙은 사용인이 어찌나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졸졸 따라오고 있는지. 하운은 그를 떨쳐낼 틈을 좀처럼 찾지 못하고 정처 없이 도시 안을 떠돌기만 했다.
‘내가 말썽쟁이로 소문난 탓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화장실 안까지 따라 들어오려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 먹은 길거리 음식이 꽤 됐는지라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는 자신의 뒤를 사용인이 딱 달라붙어 오니 답답하기가 저택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우리… 아무리 같은 가문의 사람들이라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여기서 내가 땅으로 꺼질 리도 없고 하늘로 솟을 수도 없으니 그냥 밖에서 기다려주세요. 얌전히 들어갔다 나올게요. 응? 제발요.”
목석처럼 버틸 기세를 유지하던 사용인은 드세기로 이름난 가문의 아가씨가 사정의 제스쳐를 취하며 ‘제발’이라는 단어까지 입에 올리자 마음이 흔들리는 눈치였다. 하운은 그가 머뭇거리는 틈을 타서 아무 말썽도 일으키지 않을 것임을 못 박듯 강조했고, 결국 최소한의 사적 거리를 겨우 사수해낼 수 있게 되었다. 사용인 딴에는 일을 착실히 해내고 있는 셈이니 거기에 대고 멋대로 불평을 흘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쓴 입맛을 다시며 장소를 터덜터덜 걸어 나가는 발걸음이 우뚝 멈춰서고, 자신이 들어왔던 입구와 완전히 반대편으로 이어지는 길을 발견한 하운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저쪽의 감시 업무에 돌발 상황이 일어나겠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아이 입장에서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뒷문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하운은 이번에야말로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어 홀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예전에 겪은 실패 때문에 긴장이 바짝 올라 있는 한편으로 자신이 거머쥔 이것이 정녕 진실된 자유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서 좀처럼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대로 갈색시티가 나올 때까지 걸어가면 되겠지, 어차피 같은 육지 안에 있을 텐데 길이야 어느 정도 헤매도 되지 않을까?'
하운은 치밀한 준비 없이 무턱대고 길을 걷는 행위가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간과하고 있었고, 조심성 부족한 발걸음은 그 주인을 도시와 인접한 숲속으로 충실히 이끌었다.
‘상록숲은 ‘천연의 미로’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무턱대고 들어갔다가는 금방 헤맬 수 있대.’
하운이 오래 전 오빠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을 때는 이미 깊은 숲속으로 들어섰을 무렵이었다. 아이가 걸어가는 숲길 옆으로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이 모여서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가리고 있어 어두컴컴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제가끔씩 구구와 피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거나 풀숲 사이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피카츄가 인기척을 듣고 재빨리 모습을 감추기도 했다. 긴 겨울을 보내고 초봄을 맞이한 숲은 상록을 여태껏 잃지 않아 충만한 생명력을 머금고 있었다. 연둣빛이 만연한 숲 그늘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발이 닿는 대로 길을 걷던 하운은 세 번째 갈림길을 마주치고 우두커니 멈춰 섰다. 쭉 들떠 있던 얼굴 위에 처음으로 난감한 빛이 떠올랐다.
“…으음.”
일단 가문의 손아귀를 벗어나긴 했는데 이런 숲을 끝없이 헤매다가는 하루가 금방 저물어버릴 것 같았다. 그렇다고 상록시티로 돌아가자니 아무렇게나 밟아왔던 길의 방향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운은 방금 깨달은 사실을 소리 내 중얼거렸다. “길을 잃었네.”
초봄의 서늘한 바람에 싱그러운 풀냄새가 언뜻 섞여오는 숲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풀밭의 가장자리를 지나가다 마주치는 야생 포켓몬이라고는 캐터피나 단데기 같은 약한 벌레 포켓몬들 뿐이라 위험한 상황도 일어나지 않았다. 갈림길의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한동안 망설이던 하운은 ‘한 번씩 가 보면 대충 길을 알게 되겠지’ 하는 심정에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 문득 바람에 함께 실려 온 바이올린의 선율이 하운의 주의를 이끌어, 어디로 이어질 지 모르는 길로 걸어 들어가려던 그를 뒤돌아서게 만들었다. 숲에서 난데없이 바이올린 소리라니, 누군가가 이런 데서 연주를? 하운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지는 동안에도 그의 발걸음은 충실히 음률이 흐르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무 구멍에서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내밀었던 뿔충이가 인기척을 느끼고 재빨리 숨어들지만 하운은 그런 곳에 신경 쓸 여념을 내지 않았다.
커다란 나무를 짚고 돌아서자마자 작은 공터가 펼쳐지고, 한 아이가 그 가운데 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Twinkle twinkle little star,
How I wonder what you are,
Up above the world so high,
Like a diamond in the sky…
하운 자신도 잘 알고 있어서 가끔 흥얼거리는 노래가 숲 한복판을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숲속에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 소리가 메아리에 힘입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어서 그에 저절로 심취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하운은 제 목에 걸린 오카리나를 무심코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간단한 악기조차 서투르게 다루는 하운의 눈에는 저렇게 복잡하고 섬세한 현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하는 아이가 그저 천재처럼 보였다.
‘오카리나는 연주 방법이 많이 다르겠지, 가르침을 청해볼까 했는데 초면부터 그런 부탁을 하기에는 아무래도 좀 그러려나.’
멍하니 생각을 흘리는 도중에 두 쌍의 시선이 서로 마주치고,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지는가 싶더니 매끄럽게 흐르던 바이올린의 선율이 뚝 끊겼다.
“…어라, 뜻밖의 관객이네.”
연주를 엿들은 것에 무안한 감정이 드는 것도 잠시였다. 하운은 멋쩍게 웃으며 나무에서 떨어져 나왔다.
“멋진 연주 잘 들었어~. 아, 일부러 엿들으려던 건 아니고… 숲을 헤매다가 소리가 들려서 와보니까 네가 여기 있더라고.”
인사인지 변명인지 모를 말을 듣는 눈이 깜박이다가 배시시 휘었다. 하운은 그 무해한 웃음을 보고도 보이지 않는 진땀을 흘렸다. 너무 오랜만에 마주친 또래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머리가 텅 빈 상태였다.
“참, 이름이 뭐야? 나는 하운! 라하운이라고 해.”
자기소개를 할 때는 이름 앞에 ‘라씨 가문의~’를 꼭 붙이라던 가주의 당부를 가볍게 어기고 한 말이었다. 소개부터 꺼낸 것이 꽤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한 하운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내 이름은 셴 리우…, 그럼 너는 길을 잃었던 거야?”
리우는 은은하게 반짝인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아이였다. 조용한 성격이기도 한 그 애에게서 나오는 따스한 빛깔이 시선을 오묘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숲의 공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둘 사이에 낯가림 따위는 없었다. 하운은 자기가 이렇게 말이 많은 성격이었던가 하고 스스로 새삼스러워 하면서도 아예 그의 곁에 자리를 잡고 재잘재잘 떠들었다.
블루시티에 사는 그 아이는 음악적인 재능을 지니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데 가끔 콩쿠르에 참가한다고도 했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장소에서 연습을 하고 있던 중이라고도 했다. 제 실력을 자신없어 하는 리우에게 ‘그렇지만 나는 정말 좋았는데.’ 라고 말해주었을 때 본 그의 미소가 참 곱다고 생각했는데, 하운의 시각으로 봤을 때 한결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 지내고 있는 듯해서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바깥으로 나왔으니까 나도 괜찮아, 하운은 부러움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아, 그래서 말인데.” 여기서 시간을 더 보내려 했다가 해가 금방 질 수도 있어서 헤어지기 전에 블루시티로 가는 길을 알려달라고 입을 여는 찰나였다.
“아가씨―!”
“…….”
하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후, 외침이 들려온 방향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고 있는 리우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우리 펜팔하자.”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바로 지척이었는지라 금방 따라잡힐 것이 뻔했다. 오늘 처음 만난 친구를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할 수는 없었으니 지금 당장은 후퇴를 택해야겠지. 과연 때마침 길모퉁이를 돌아 나온 사용인이 이쪽을 향해 허겁지겁 다가오고 있었다. 하운의 열띤 시선을 받은 리우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하운은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럼 나중에 내가 먼저 연락할게! 만나서 반가웠어, 리우.”
정말 아쉽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지만 욕심을 너무 부리지는 않기로 했다. 오늘 같은 날도 있으니 다음에도 밖으로 빠져나올 좋은 기회가 또 생길 것이고, 그 동안에는 새로 사귄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달력을 넘기면 될 것이라는 자기위안을 끌어당긴 셈이다. 하운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은 채 제게 손을 흔들어 주는 리우에게서 등을 돌리고 왔던 길을 되짚었다. 사용인의 사색이 된 얼굴에 안도가 떠오르는 것을 보자니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찔리는 것도 같았다. 한참을 찾았다는 다그침에는 정말로 미안하다는 낯빛을 떠올리며,
“…길을 잘못 들어서 그대로 숲으로 와버렸지 뭐예요. 찾아와주셔서 고마워요, 다음번엔 저도 주의할게요.”
순순히 따르는 반응을 보이니 이 이상으로 탓하는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상록시티로 되돌아가는 하운의 발걸음은 결코 가볍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겁지도 않았다.
이후 석 달에 가까운 시간을 홍련섬에서 보내는 동안 육지로 부친 편지의 수는 이전에 비해 갑절로 늘어났다.
외조부모는 그들의 손녀딸이 가족이 아닌 외부인과 편지를 주고받는 중이란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다거나…, 물론 하운은 제게 제재만 들어오지 않는다면야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하운은 자신의 오빠에게 꼬박꼬박 편지를 쓰면서 리우에게도 보낼 편지도 함께 꾸준히 썼는데, 친구의 답장이 잘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서도 여전히 오빠의 답장은 받아본 적이 없어서 동시에 침울함을 느껴야 했다. 자신의 편지가 도중에 빼돌려지는 것도 아니라면 오빠가 일부러 동생의 편지를 무시하는 게 아닌 이상 본가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의미가 될 텐데, 정말로 오빠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나 싶은 불안감만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하운은 시무룩한 기분을 억누르며 우편함에서 리우의 답장을 꺼내 들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친구가 안부 인사에 간간이 덧붙여주는 희소식이 거의 유일하게 하운의 따분한 일상을 밝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라 봉투를 뜯는 매 순간만큼은 기분이 금세 나아지곤 했다. '전에는 동생이 생겼다는 소식을 받았고…. 콩쿠르에서 상을 탔다는 얘기도 들었지.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가 들어있을까?' 편지지를 꺼내는 손가락 밑으로 반듯하게 접힌 전단지가 같이 딸려나왔다. 재빨리 편지지를 펼쳐 들고 내용을 읽어내리는 눈에 점차 생기가 돋아난다.
“…그믐아.” 수조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쏘드라는 어린 주인의 목소리에 은근한 열기가 묻어나오는 것을 느끼고 의아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운은 그런 파트너에게 전단지를 보여주며 즐겁게 말한다.
“태초마을의 오박사님 연구소에서 트레이너 캠프가 열린대. 우리도 여기 갈 수 있어.”
'그러려면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지만….'
바쁘게 머리를 굴려서 떠올려 낸 구실은 나름대로 성공적인 결과를 끌어냈다.
“무작정 드래곤 타입만 공부하는 것보다는 포켓몬을 제대로 다루는 방법부터 배우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초를 익히지 않고 상급의 개념만을 고집하면 주춧돌 없이 집을 짓는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요?”
아이의 영악함이 노인의 지성을 뛰어넘을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다. 아무리 아이를 바깥세상과 갈라놓고 가문의 틀에 맞추어 키운다 한들 어린 아이가 품고 있는 원대한 호기심을 완전히 잠재우지 못할 것을 비로소 깨닫기라도 했는지, 그것이 아니라면 가문의 강압적인 교육 방식의 맹점을 제대로 지적당하고 강건한 이지가 흔들리기라도 했는지, 그 어떤 것도 하운이 신경 쓸 내용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네 원대로 배워보고 오너라.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는지 나중에 네가 이 곳에 돌아왔을 때 시험해 볼 터이니, 말썽이나 게으름은 절대 피우지 말아야 한다.”
하운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얌전히 알았다고 답했다. 손녀의 고분고분해진 태도를 눈여겨 본 가주는 그것으로 만족한 듯이 이만 물러가라 이른다. 하운은 곧바로 제 방에 달려가서 트레이너 캠프에의 참가를 신청하는 편지를 썼다.
“흥,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무슨 짓인들 못할까. 리우한테는 엄청난 빚을 졌는데, 어떤 선물을 줘야 할지 고민해봐야겠네.”
쏘드라는 주인이 싱글벙글하며 편지봉투에 우표를 붙이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저 얼굴에 떠오른 해맑은 미소,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하운은 제 파트너의 설레는 눈빛을 알아채고 활짝 웃었다.
“캠프가 끝나면 바로 여행을 떠나는 거야. 우리가 갈 수 있는 한 멀리멀리 떠나서 엄청 강해지자. 으음, 그리고 만약 오빠를 만나면 겸사겸사 혼쭐내줘야지. 어때?”
하운은 누가 문밖에서 엿들을세라 한껏 소리를 낮추고 소곤소곤 말했고, 그믐도 덩달아서 고개를 얼른 끄덕거렸다.
하운이 포켓몬 연구소로 보낸 편지는 얼마 후 초대장을 싣고 되돌아왔다. ‘뛸 듯이 기쁘다’는 감정이 퍽으로 생소하게 다가온 날이었다.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은 마을’, 간판의 표어가 묘사하는 태초마을의 풍경은 조용할 것 같은 인상과는 달리 활기찬 분위기로 한껏 물들어 있었다. 마을의 목가적인 이미지는 하운이 연구소의 정문으로 들어섰을 때부터 빠르게 희석되는 중이었다.
'내 또래 아이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하운은 눈을 멍하니 깜박이다가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관동지방의 곳곳에서 찾아온 캠프 참가자들이 연구소의 앞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연구소의 부지를 뛰노는 포켓몬들의 모습을 보고 눈을 반짝거리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낯선 장소에 적응하느라 떠들썩한 분위기에 어울릴 여념이 없었고, 또 누군가는 벌써 친목을 쌓느라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운은 그 사이에서 자신을 보며 반색하는 리우의 얼굴을 알아보고 폴짝폴짝 뛰어갔다. 아이들끼리 인사를 하고 다니기에는 일주일간의 캠프 일정이 촉박했다. 참가자들이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연구원들은 몬스터볼이 빼곡하게 담긴 가방들을 가져와 야외 테이블에 펼쳐놓았다.
“캠프 기간을 함께 보낼 포켓몬을 골라주세요! 여러분과 시작점에 나란히 서 줄 아이들이랍니다.”
와―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줄을 서는 동안 하운은 맨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파이리를 고르라고 하셨지만 그건 어림없는 소리지.’
당분간은 용과 관련된 포켓몬을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으며, 하운은 이것이 화풀이에 가까운 심정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며 자기암시를 걸었다. 그렇지만 드래곤 조련사의 ‘드’자도 듣기 지겨운걸. 하운은 제 차례가 다가왔을 때 미간을 모은 채로 몬스터볼 속 포켓몬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고민의 시간은 의외로 길지 않았다.
“너, 네가 좋겠다. 너라면 물타입 중에서도 최고로 강할 거야.”
'그리고 물타입을 지녔으니 얼음타입 기술도 능숙하게 쓸 줄 알겠지.' 하운은 볼 밖의 차가운 공기를 맞아서 맹하고 하찮은 표정을 짓는 물짱이를 번쩍 들어안아 행렬 바깥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흠… 시작이라고 했으니 네 이름을 ‘초승’이라고 할까?”
물짱이는 아무래도 좋은 듯한 얼굴이었다. 하운은 초승의 뺨을 조물조물 만져보며 재차 고민에 잠겼다.
'또래와 동떨어져 지낸지가 오래라 저 애들과 어떻게 어울려야 할 지를 모르겠네. 맛있는 간식이나 나눠 먹으려고 초콜릿을 잔뜩 챙겨오긴 했는데… 이런 걸로 환심을 살 것도 아니고.' 살짝 곁눈질을 해보니 리우는 이미 다른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그의 팔 안에는 어느 샌가 누리공이 안겨 있었다. 그나저나 제법 어울리는 포켓몬을 골랐구나,
“어디보자… 넌 어느 자리가 편해? 어깨? 머리? 야, 후드는 안돼, 내가 목이 졸리잖아.”
새로운 포켓몬과 어떻게든 친화력을 쌓아야 앞으로의 생활이 윤택해질 것을 알아서 잠깐 자리 쟁탈전 비슷한 씨름을 벌이던 중이었다. 어느 새 다가왔는지도 모를 아이가 브케인을 안고 팔짝 뛰어와서 인사를 건넨다.
“안녕! 물짱이 친구 너무 귀여운 거지요!”
레몬색 머리칼이 유달리 눈길을 끈다고 생각했던 아이였다. 하운은 그가 브케인의 조그마한 앞발을 손가락으로 일으켜서 살랑살랑 흔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아가씨네 브케인도 귀여워. 이름이 뭐야?”
둘을 번갈아보며 묻자 그이는 해말간 미소를 지어 보인다.
“우리 애플이 귀엽죠! 제 이름은 마에하라 유이인데, 아가씨는 이름이 뭔가요?”
“…라하운, 하운이야. 홍련마을에서 왔어.”
하운은 그에게 초콜릿 사탕을 건네는 자신의 손길이 자연스럽기를 바라며 ‘너는?’ 하고 되묻고, 제 질문에 돌아올 목소리를 기다리며 조용히 실감했다.
그 소녀는 봄기운을 가득 몰고 다니는 아이임을,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자신의 겨울이 끝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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