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키모] 사랑이라는 말이 가진 무게가 버겁다는 것은.
언령言霊. 말에는 힘이 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많은 날을 숨 쉬고 있지만
기억해 언제나 우린 함께라는 걸
이곳이 광휘의 샘인가. 나는 흙바닥을 발로 몇번 쓸고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그저 멍하니 샘을 바라보았다. 이런 저런 일로 고민하던 나에게 아자키엘이 일러준, 명상하기 좋다는 엘가시아의 숨겨진 명소였다. 과연. 오가는 사람도 없고. 이곳에 생명체라고는 나와, 저 멀리 온순해 보이는 동물들만이 다인 듯하였다. 그들은 멀리서 내가 궁금한 듯 킁킁거릴 뿐, 일정 범위 이상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아름답고 고요한 장소였다. 풍경 또한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찬란하게 부서졌고 새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나뭇잎 바스러지는 소리 또한 싱그러웠다. 눈앞에서 한없이 솟아나는 샘물은 맑고 깨끗하였다. 눈을 낮추면 낯설지만 아름다운 식생들이 피어나 한껏 배경을 채우고 있었다.
카제로스의 부활이 머지않았다. 전前 욕망군단장인 에키드나의 등장 또한 그 신호탄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느껴졌다.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그녀와 권속들을 겨우 물리쳤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에 앞으로 있을 큰 전쟁을 분주히 준비하는 나날이 길게 이어져 왔다. 나를 믿는 모든 연합군과 에버그레이스, 그를 따르는 빛의 가디언들, 아만과 주시자, 아크와 에스더, 현자, 내가 지켜야 할 수많은 사람들과 또한 나를 지키는 자들, 그리고 백이…. 많은 기대와 소망들이 어깨의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와중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그였다.
카제로스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부터 우리의 만남은 눈에 띄게 횟수가 줄게 되었다. 그래. 당연했다. 잠시 앉아있을 틈도 없이 나를 찾아대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촌각을 다투는 긴급한 사건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맞아. 알아. 지금은 한가롭게 연애나 할 시기가 아니었다. 아플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보고 싶었다. 그리움에 목이 말랐다. 그가 그리워 정말 잠깐의 시간을 내어 찾아간 적도 많았다. 아무도 없는 빈 집안에 우두커니 앉아 기다릴 뿐, 백이와는 만나지도 못한 채 발걸음을 돌린 적도 여러번이었다. 지금처럼 생각을 정리하는 것 정도는 그의 집에서 해도 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와의 추억이 겹겹이 쌓인 그 집에서는 단 한 사람의 생각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샘에 왔건만, 명상의 결과는 비슷했다.
"...보고싶어."
두텁게 쌓인 감정을 입으로 소리내어 보자, 해소되지 않았던 답답한 감정이 물결에 쓸려 떠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곳의 오랜 정적을 깬 나의 말은 바람과 함께 흩어져 순식간에 스러져갔다. 무슨 말을 해도 아무도 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 용기가 났다.
"...사랑해. 사랑해, 백아."
사랑. 그의 앞에선 늘 죄책감과 두려움, 버거움과 설렘, 벅차오르는 많은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압박하는 기분에 쉬이 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이리 간단한 말인데도 어려웠다. 말이 힘을 갖는다고 해야할까.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를 사랑하지만, 내 이기심에 그의 마음을, 영혼을 멋대로 붙들어 버리는 게 아닐까 조바심이 났다.
인간은 쉽게 죽는다. 나 또한 그러할 것이다. 나 없이도 살아가야만 하는 그가 나를 쉽게 잊지 못하고 잘못될까봐 두려웠다. 정해진 미래는 아무것도 없지만, 겁이났다. 파비안을 잃고 십수년간 빈 껍데기처럼 살아온 나이기에 알 수 있었다. 백이라면 아마 나쁜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를 사랑했기에, 더 가까워지면 안 된다고. 그에게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지독하게 눈을 돌려왔었다.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 후에도 이 생각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를 붙드는 것은 나의 작은 이기심이었다.
그런 나에게 사랑한다고, 당신이 제 전부라고 말해주는 백이가 못내 미안하고 고마웠다. 무겁게 뱉어낸 진심은 물소리와 새소리에 휩쓸려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나는 대답처럼 돌아오는 새소리에 계속해서 홀로 중얼거렸다.
"...사랑해."
비겁하지 않은가.
"백아."
졸렬하고.
"좋아해."
이기적이며,
"보고싶어...."
추했다.
"백아..."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양심에 직격으로 꽂히는 기분이었다. 비겁하게 그에게 전하지 못하는 거대한 진심이 나를 내리 누르는 듯한. 처참한 기분이었다. 그를 사랑해. 하지만 그를 사랑하면 안 돼. 그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지만 그는 날 사랑하면 안 돼.
나는 한껏 작아진 몸을 웅크려 무릎을 끌어안았다. 백이와 함께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되던 추한 감정들이 만나지 못한만큼 쌓여, 마치 옛날로 돌아간 듯 속을 시끄럽게 괴롭혔다. 몰아치는 감정에 무릎에 얼굴을 묻고 그 자리에서 흐느껴 울었다. 여기라면 아무도 오지 않을테니까.
그때였다.
"울어요?"
익숙하고도 그리운 목소리에 흠칫. 아냐, 여기 올 수 있을리가. 다른 곳도 아니고 엘가시아인데. 눈물범벅으로 엉망인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자 정말로 눈앞에 그가 있었다. 운백. 내 사랑스러운 어린 연인. 그였다.
"왜 울고 있어요."
"백이 네가 여긴 어떻게…."
놀란 내 옆에 한쪽 무릎을 꿇어 앉으며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이 평소처럼 다정했다. 그가 함께 있는 풍경과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울어서 그런지 열이 오른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꿈이 아닌 듯,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사실은, 전에 키모의 짐에서 악보를 봤어요. 문득 기억이 나서 모르고 연주했는데….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요. 엘가시아는."
아아. 가디언 알비온과 공명해 엘가시아를 오갈 수 있는 노래, 천공의 노래. 하지만 대체 어떻게? 백이에게 스며들어있는 내 기운을 알아본 알비온이 그 공명에 응해준 것일까. 아무튼 무심코 연주한 천공의 노래로 도착한 아리안오브에 이방인으로 놀란 사람들이 티엔과 아자키엘을 불러왔고, 퉁명스럽게 설명한 나와의 관계를 한치의 의심없이 믿어준 아자키엘이 이 장소를 알려주었다고. 머쓱한 듯 이곳에 당도하게 된 전말을 설명하던 그가 일순간 가깝게 다가와 나를 덥썩 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더 이상 많은 말은 필요없었다. 서로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심장이 닿을 것처럼 꽉 끌어안았다. 온기를 가진 생명이 주는 안도감, 따듯함, 벅차오름과 덧없음이 범람하듯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다.
"또 울어요?"
어느새 어깨까지 떨며 흐느끼는 나를 괜찮다는 듯, 백이 어루만지고 쓸어주었다. 한참을 그에게 안겨 말없이 수많은 감정을 덜어내었다.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백이 너에게 하고싶은 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백이를 바라보았다. 잘게 부서지는 햇살을 가득 담은 샘물을 다시 담아낸 듯한 맑은 눈동자가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
설마.
"저 다 들었는데."
"어…."
한 대 맞은 듯이 머리가 왕왕 울렸다. 내 말라가는 눈물자국을 쓸어주는 백은, 미소짓고 있었다.
"좋아해요. 사랑해요. 많이 보고 싶었어요. 키모."
나는 이것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안다. 마음이 벅차올랐다.
"…나도. 나도 백아."
목이 메어와 더는 길게 말할 수 없었다. 대신 그를 마주보며 힘겹게 웃어보였다. 뒤이어 그가 천천히 다가와 부드럽게 입술을 포갰다.
그가 지금 나와 같은, 혹은 나만큼의 행복을 느끼고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그랬다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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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모 창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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