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키모

[백키모] 꽃의 왈츠

당신과는 천천히

루키모 by 루키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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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저씨를 아방수로 만든건 내가 아니라 백이라고ㅡ!

-루끼모(억울하다는 듯이, 절규하며, 밧줄에 묶여 끌려가는 중에)-


"하모니 섬에 어서오십시오! 두 분이신가요? 아름다운 선율이 함께하는 절경을 천천히 즐기고 가시길!"

"…여기예요?"

"응. 이 시간이 아니면 입장할 수가 없는데. 다행히 시간 딱 맞췄군."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나와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며 드물게 먼저 권해오는 그의 배를 타고 먼 뱃길을 달려 도착한 참이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주변 풍경을 돌아보았다. 그가 먼저 함께 가자고 권한 것 치고는... 작고 시시한 섬이었다. 입구에서 봤을 때는 그랬다. 잘 가꾸어진 공원이 겨우 있는 섬 정도로 보였다. 물론 그가 데려와 준 것이 싫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이런 시시한 장소가 그와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

"백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자, 상념에 빠진 나에게 손을 뻗은 그가 보였다. 어서 가자며 손을 잡아오는 그의 표정이 어쩐지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묘하게 들떠있는 것도 같았다. 그 드물게 환한 얼굴에 나는 시큰둥했던 이 장소의 첫 감상은 접어두고 밝게 웃으며 그를 따라나섰다. 그래, 그가 좋으면 좋은 거지. 서늘한 그의 손 온도를 느끼며 이대로 놓치지 않도록 더 꼬옥 쥐었다.

섬 중앙에 다다르자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와글와글 모여있었다. 그들은 연인, 가족, 친구 등 유추할 수 있는 관계가 매우 다양해 보였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언제 시작하냐며 부모를 재촉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여기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뒷목을 슥슥 문지르며 하늘을 보자, 맑게 개인 하늘에 풍성한 구름이 몇점 흘러 지나가고 있었다. 공기는 아직 서늘했지만 화창한 날씨와 딱 좋은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슬쩍 루키모를 보자 그도 바람이 기분 좋은지,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는 바람에도 옅게 미소지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아아, 귀여워. 순간 오늘의 날씨만큼이나 아름다운 그가 너무 사랑스러워져 그 이마에 키스하고픈 충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기분 좋아보이는 그를 괜히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그의 정체를 알아본 사람은 없는 듯 했지만, 이곳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기회가 오겠지, 속으로 욕망을 삭히며 그와 마주 보고 웃어보였다.

조금 지났을까.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이 성큼성큼, 꽃밭으로 둘러쌓인 이 광장 한복판으로 걸어나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따위의 장황한 인삿말이 이어지고 살짝 지루해질 무렵, 마침내 그가 '마음껏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라며 마지막으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주변의 꽃들이 일제히 유연하게 움직이며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지휘자의 신호에 숨을 참던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며 꺄르르 웃어대었다. 각자가 가져온 악기를 꺼내 함께 연주하는 이들도 있었다. 온 섬에 울려퍼지는 선율에, 모여들었던 인파는 삼삼오오 흩어져 자유롭게 감상하기 시작하였다. 그 선율은 싱그러운 봄날씨와 어울리는 경쾌한 곡조였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슬쩍 루키모를 바라보자 그가 어떠냐는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 그게… 솔직히 난감했다. 키모는 나를 어린애로 보고있는 것일까? 내가 그보다는 분명 많이 어리긴 하지만, 다 큰 어른이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착잡하게 생각을 이어나가다 이걸 나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고군분투했을 그를 생각하니 갑자기 웃음이 났다. 오히려 지금 눈 앞에서 들뜬 듯 어린애처럼 굴고 있는건 키모 아닌가.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웃자 그가 안도하는 듯 하였다. 이럴 땐 너무 투명하게 비쳐보이는 그의 속이 너무 우습고 또 사랑스러웠다.

"더 안쪽으로 가자.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

"네, 네. 얼마든지요."

한동안 잡고 있어서 한껏 따끈해진 그의 손을 고쳐쥐고 그가 끌고 가는 대로 따랐다. 이 섬 자체에는 흥미가 식었지만, 눈 앞에서 웃는 연인이 있어 즐거웠다. 덩치 큰 남자 둘이 손을 맞잡고 걸어도 이상하게 보는 시선 없이, 모두가 각자의 행복에 빠져있었다. 혼돈이 범람하는 아크라시아의 형세와 판이하게 아주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키모는 이걸 위해 싸우고 있는 거겠지.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우리는 시계탑이 보이는 잘 가꾸어진 다리 위에서 멈춰섰다.

"저길 봐. 예쁘지."

그가 보는 흐르는 물과 맑은 하늘이 저마다의 색으로 그의 두 눈에 비쳐보였다.

"네. 예뻐요."

'당신이.'

나는 뒷말을 삼키며 미소지었다. 그가 원하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맞춰 연기할 수 있었다. 지금 여기에 루키모 당신이 없으면 이런 풍경도, 음악도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야. 전부 따분한 감상뿐인걸.

잠시 눈을 감아보라는 그의 말에 나는 또 뭐가 남아있을까 하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쪽.

눈을 감자, 작은 소리와 함께 부드럽고 따듯한 뭔가가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놀란 내가 반사적으로 눈을 뜨니 눈 앞에 그가 한껏 발그레진 얼굴로 바짝 다가와 서있었다. 그답지 않은 당돌함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하, 괜찮아요? 아직 사람들도 많은데?"

"여기선 괜찮아. 아무도 신경쓰는 사람 없으니까. 원래 그런… 곳이고."

"그 말, 감당할수 있어요? 제가 평소에 얼마나 참고 있는지 모르죠?"

"…평범하게. 다들 하는 것처럼만.."

천천히 다가오던 그가 내 말에 멈칫했지만 이내 내 목에 팔을 감으며 입술을 부벼왔다. 나도 웃으며 그를 안고 그 키스에 응해주었다. '남들 하는 것 처럼만', 예민한 몸 탓에 키스가 늘 키스로만 끝나지 않아서 곤란한 그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솔직하다고 해야하나, 그 예민한 몸을 나는 매우 좋아하지만. 그는 시도때도 없이 반응하는 자신의 몸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듯 하였다. 조심스레 입술을 빨고 가볍게 혀를 섞으니 그가 이제 그만 하라는 듯이 내 가슴을 툭툭 치며 밀어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까보다 한층 더 붉어진 얼굴로 새침하게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 오늘은 입술만…."

보는 눈 많은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먼저 키스를 졸랐으면서, 금새 혼자 달아올라 일정 선은 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 다웠고, 또 귀여웠다. 쉽게 흥분할까봐 자제하는 그 모습이 오히려 입맛 당기게 하고 있다는 걸 당신이 알까.

우리는 그 다음으로도 계속 손을 잡고 섬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가 나를 이끌고 도착하는 장소마다 입술을 맞춰대니, 이건 또 무언가의 순례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그가 행복해하는 듯했고, 그건 나 또한 좋으니 이 이상은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둘이 함께여서 행복한 이 순간을 그저 즐기기로. 시선을 맞추고, 가볍게 입술을 맞대고 떨어질때마다 설레었다. 화창하고 상쾌한 하늘 아래 그가 웃고 있다. 절경이라는 해안절벽도, 조형미를 과시하는 듯한 석탑도, 잘 닦여진 돌담길도, 연인의 웃음 앞에서는 그 색이 바래는 듯 볼품없게 느껴졌다. 이미 내 눈에는 그 말고 주변 풍경따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이다, 라는 혼잣말을 한 그를 모른척 따라가니 섬의 입구와 가장 먼 안쪽에 호수가 있었다. 걷는 길마다 작은 수첩을 꺼내 흘깃흘깃 보는 것이 매우 수상했지만 쭉 모른척해왔는데 마지막이라니, 역시 뭔가 있는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꽃줄기가 휘감겨있는 호수 중앙 아치에 다다르자 온 섬에 울려퍼지던 경쾌한 음악이 어느덧 잔잔한 선율로 바뀌어 있었다. 물이 맑은 호수엔 꽃나무가 활짝 피어 이 섬에서 보아온 풍경 중 가장 볼만했다. 이번에도 입을 맞춰주러 고개를 숙이자 그가 당황한 듯이 손을 들어 내 입을 막았다.

"자, 잠깐만.“

“…뭐예요?”

당황한 기색으로 살짝 떨어진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하기 시작하였다.

“아름다운 조화의 호수. 이 앞에 선 루키모, 나는 눈 앞의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섬의 모든 축복을 모아 그 삶에 부디 행복만이 깃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의 말에 휘둥그레진 내 두 눈을 보며 살풋 웃은 그가 다시 한 발자국 다가와 입을 맞추려고 하였다. 잠깐, 이런건 반칙이잖아. 왜 혼자만.

“운백입니다. 눈 앞의 사람, 루키모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거구요. 영원히…. 행복, 깃들기를. 저와 함께요.”

나는 다급하게 그의 말을 엉망진창 따라하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내 말에 아연실색해 무어라고 말하려는 입을 막으며 키스하였다. 버둥거리는 몸을 도망가지 못하게 꽉 잡고 혀까지 밀어넣었다. 점막을 빨아들이며 혀를 휘감자 그가 비음을 흘리며 잔뜩 녹아내렸다. 아무도 없는 둘만의 호숫가, 그리고 그 주변을 꽉 채운 잔잔한 선율에 맞춰 농밀하게 혀를 섞었다. 두 눈을 질끈 감아 파르르 떨리는 그의 속눈썹을 몰래 훔쳐보며 나는 참았던 만큼 오랫동안 그 입을 맛보았다. 그가 놓아달라는 듯이 온 몸을 베베 꼬아대도 나에게 붙잡혀서 옴짝달싹 하지 못했다. 나는 실컷 그 입을 희롱한 후에야 비로소 만족스럽게 떨어졌다.

“히, 아아, 백, 백아아…. 너, 이게….”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몸을 움츠린 그가 말을 더듬거렸다.

“하아, 하하. 사랑해요. 키모.”

나무라려던 표정의 그가 내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깊게 한숨을 뱉어낸 그가 체념한 듯, 나를 올려보며 답했다.

“…나도.”

동시에 따듯한 바람이 불어 그와 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흐트러지는 그의 갈색 머리카락과 두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것이 더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그 때, 호수 한가운데에서 난데없이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

“키모, 조심…!”

당장 하늘에 떠있는 태양보다 밝은 빛에, 나는 황급히 그를 등 뒤로 숨기며 앞을 가로막았다. 젠장. 무기는 가져오지 않았지만 이 기묘한 상황으로부터 어떤 위협이 발생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우선 나는 그를 지켜야했다. 내가 잔뜩 경계하며 바라보자, 그 빛은 서서히 사그라들며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대체 뭐지? 사그라든 줄 알았던 빛은 무언가와 함께 보글보글 수면위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공중에 떠올라 둥실둥실, 우리가 있는 곳까지 부유해왔다.

“저건…!”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보았는지, 괜찮다며 내 어깨를 두드린 그가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일렁이던 형체로 보이던 그것은 루키모의 손에 닿자 둥글고 단단한 구슬이 되었다. 그는 그것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며 이것이 ‘섬의 마음’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섬의… 마음이요?”

“섬에도 마음이 있어. 기에나 여신이 남긴….”

“혹시 오늘은 이것 때문에..?”

순간 그도 나처럼 연기를 한 것일까 불안함이 엄습해왔다. 사랑한다는 이야기 까지도, 설마.

“하하, 아니야. 아니야, 백아. 오늘은, 여기는 그냥…”

내 시무룩한 태도를 읽었는지, 그가 웃었다. 이럴 때마저도 아름답다.

“평범한 데이트…를 하고 싶었어. 섬을 순례하는 가이드를 얻게 되어서, 백이 너와… 꼭 다시 오고 싶었어.”

“정말이죠.”

“…백이 너라면, 거짓이 아닌 걸 알잖아. 맹세하지.”

잘 안다. 그의 속은 너무 투명해서 전부 보이는 걸. 이 알량한 불안감은 제 발 저린 도둑의 그것이겠지. 그치만 기회인 듯 했다. 오늘은 어린애처럼 투정 좀 부려볼까.

“그럼 사랑한다고 다시 말해줘요.”

“아, 음….”

“네? 어서요.”

그의 당황한 두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오늘은 말해주려나. 맞닿은 시선에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던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사…랑해.”

온 섬에 울려퍼지던 선율이 최고조로 달콤하게 젖어들었다.

“저도요. 사랑해요, 키모.”

(천재 후빌님의 아름다운 그림삽화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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