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 오는 날,
겨울의 공기에서는 서늘한 맛이 났다. 누군가 설탕을 쏟기라도 한 것처럼, 세상을 가득 채운 푸르고 흰빛마저 정오의 햇살 앞에서는 금빛 테를 머금었다. 삼삼오오 줄지어 높다란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가만 올려다보던 치유리가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명소도 아니고 고작해야 동네에 자리한 신사라 여긴 것이 잘못이었을까. 주차하러 떠난 연인은 10분째 감감무소식이었다. 더 늦기 전에는 줄을 서야 할 텐데. 꼼짝 없이 계단 아래에 발이 묶인 여자가 발을 동동 굴렀다. 껑충껑충 뛰어 올라가는 아이와 그 뒤를 따르는 부모, 도란도란 잔웃음을 흘리는 또래 소년소녀 무리와 쭈뼛거리는 커플들을 지켜보는 것은 퍽 즐거웠던 고로, 탓하려는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볕이 드러났다 하여 살을 에는 추위가 가시는 것은 아닌지라 두터운 옷자락으로도 가리지 못한 양 뺨은 이미 벌겋게 얼어있었다.
그나마 도톰한 털목도리를 두른 치유리와 달리, 언제나 폼생폼사로 살아가는 그녀의 연인은 자발적으로 펭귄이 되기를 포기했다. 군청빛 기모노와 더욱 짙은 빛깔의 하카마 차림의 사내를 떠올린 치유리가 기어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을 때였다.
“왜 먼저 올라가 있지 않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느른한 미성이 귓가에 닿았다. 늘상 불그스름한 것은 눈동자뿐이었던 사내가 드러난 귀며 코끝을 불긋하게 물들인 채 다가섰다. 그 모습에 되레 놀란 치유리가 쥐고 있던 핫팩을 볼 가에 가져다 대었다. 자존심과 인권 중 자존심을 택하기는 하였으나 목숨마저 내버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아키토는 고개를 숙여, 열기를 만끽하고는 빈손 안에 테이크아웃한 커피잔을 쥐여주었다.
“메시지 확인도 안하더라, 너. 마음대로 사긴 했는데 괜찮지?”
괜찮지, 보다는 괜찮을 거잖아. 에 가까운 어투다. 확신에 가까운 어조에 무어라 토를 달려던 치유리의 입을 막아선 것은 달큰한 코코아 향이었다.
“저 먹으라고 사 온 거예요?”
“추운 거 싫어하잖아. 그러게, 패딩은 왜 안 챙겨 왔어?”
“기모노가 두꺼우니까 괜찮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저보다 얇게 입은 아키쨩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난 너보단 추위 안 타니까 해도 되지 않나.”
“하긴… 아키쨩은 어릴 때도 겉옷 같은 건 안 입고 다녔었죠.”
“거긴 애초에 기온을 관리하잖아.”
하지만 동기 중에 겉옷 안 입고 다닌 건 당신밖에 없었는데도요. 쫑알거리는 여자를 두고, 먼저 앞서 나가려던 사내가 제 몫의 커피잔을 기울였다.
“기모노는 역시 걸음이 옹졸해지네.”
작은 중얼거림을 기민하게 잡아챈 치유리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춥다고 엄살을 떨 때는 언제고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기는 하는가 싶어, 긴가민가한 낯으로도 걸음을 내디뎠다 돌아서기를 반복하던 치유리가 결국 의문을 뱉어냈다.
“옹졸하다고요?”
“넌 평소랑 다를 바 없지 않아? 옷도 비슷하고, 키도….”
“아키쨩!”
잡히지 않는 술래잡기가 끝난 것은 계단을 모두 오른 뒤였다. 붉은 토리이를 지나, 바로 앞의 입구에 놓인 매대를 골똘히 살피던 여자가 오마모리 두 개를 골라냈다.
“이걸로 할까 하는데, 아키쨩이 보기에는 어때요?”
참배를 하러 신사에 가는 김에 부적을 사고 싶다고 한 것은 치유리의 의견이었다. 미신을 믿기는커녕, 흥미를 갖지도 않는 사내와 달리 그녀는 맹신하지는 않았으되 즐기는 것까지 거부하는 성미는 아니었다.
“그럼 내 것까지 네가 골라.”
“그래도 되나요? 아키쨩이 갖고 싶은 복이랑 제가 선택한 복이 다를 수도 있는데….”
“거기서 파는 부적이 행운 앨리스가 직접 만든 부적도 아니고 뭐 어때.”
“종류가 아니라 만드는 사람부터 따지는 건가욧~!”
달랑달랑―.
부적을 흔들 때마다 건강어수健康御守를 새긴 자수가 차르르 빛을 냈다. 애초부터 크게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다지만 고심한 것치고는 심심한 선택이었다. 아키토는 치유리가 골라낸 똑같은 오마모리 두 개를 바라보며 무슨 반응을 보일지 고민에 빠졌다.
모양? 저쪽에 있는 게 더 화려하지 않나.
의미? 모르겠다. 적어도 시라미네 치유리가 택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흠, 예의 삼아 짧게 침묵을 잇던 아키토가 끝내 진열된 다른 부적 칸을 가리켰다.
“왜 저걸로 안 사고? 네 취향이잖아.”
연분홍, 꽃분홍, 정열적인 진홍! 연애니, 결혼이니 하는 것들이라면 익히 떠올릴 색들로 이루어진 부적이 조명 아래에서 저를 뽐내기 바쁘다. “……취향이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만요,” 처음을 제외하면 눈길도 주지 않았던 그 부적들을 보고는 질끈 눈을 감은 치유리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속삭였다.
“아키쨩이라면 그런 건 나랑 상의 해야지, 왜 신을 찾냐고 할 것 같아서….”
근 십여 년간 미사여구로 점철된 이야기를 속삭여 와놓고, 이제와 부끄럼이라도 타는 것인지 답잖게 낮고 빠른 어조였다.
“그럼 나 말고 신이랑 연애하려고?”
“아이잇, 아키쨩도 참!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뭐… 부정하고 싶은데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네. 근데 그건 부적을 사는 것부터가 문제 아닌가.”
“그건 아키쨩이 사도 된다고 했었으니까 괜찮은 걸로 치고요.”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그런 거랍니다. 게다가 연애랑 결혼은 저희가 잘하면 되지만 건강은 그럴 수 없으니까요?
너 또 잊어버린 것 같은데 나도 의사야.
아키쨩은 마음의 건강을 주로 보잖아요. 몸 건강도 따로 챙겨야죠~! 핫… 그렇지만 아키토는 관리 잘하니까 교통안전 부적을 살 걸 그랬나요?
다시 돌아가 줘?
에~ 조금만 고민해 볼래요. 기다려 줄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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