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를 손에 쥘 수 있다면,

AKCU by 에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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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티스토리에 있어서 순서가 꼬였는데... 가을 바다 직전 로그네요.


 길가에 늘어진 가로수에서는 무거운 소리가 났다. 솨아아, 허공의 수중처럼 깊은 물결음 사이로 매미의 울음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뒤섞여 순간의 화음을 자아냈다. 소란스럽다면 소란스럽고, 감상적이라면 감상적일 축제의 풍경이다.

 어지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불빛 속에서 엷은 제비꽃색 눈동자가 기울었다. 시야 끄트머리에서 짤랑이는 비녀를 한번, 그리고는 풋여름 속에서 홀로 겨울의 색을 품은 청년에게 한번. “예쁘네.” 단 세 글자의 칭찬에도 시선을 빼앗긴 것은 무심하기 그지없던 낯이 봄녘에 녹은 것처럼 다정히 뒤바뀌는 순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실 그녀의 소꿉친구가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인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여름밤의 마법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소리였다. 허튼소리를 한다며 작은 타박을 속삭이던 소년 시절부터 이제는 이해되지 않을 허무맹랑한 이야기에도 부드러이 미소 짓는 청년이 되기까지에는 적잖은 시간이 존재했다.

 타니무라 아키토는 정말 천천히 변했다. 남들이 조그마한 태엽 시계를 쓸 때, 홀로 커다란 모래시계를 품은 것 같기도 했다. 혹은 봄비에 소맷자락을 적시듯 서로에게 익숙해졌다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이지 기이한 일이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친우가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 그 변화에 제가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여자는 더럭 양가 된 감정을 품었다.

“내가 표현하지 않는 건 그럴 필요가 없고 그러고 싶지 않아서, 표현하는 건 그 외의 것에 신경 쓰지 않길 바라서야.”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적당히 어울리고 내보여줄 테니 더 파고들지 말라는 의미.”


 꼬리를 물 듯, 그 뒤를 따라 달려온 것은 어느 날의 기억이다. 제 삶의 많은 순간을 정제하고 빚어내어 그럴듯한 피사체로 만들어내던 청년의 목소리, 입꼬리 끝에 걸려있던 웃음, 봄날의 새뜻한 사진과 따뜻한 찻잔의 온기…. 그날의 기억은 여러 감각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개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유리가면 뒤에 비친 그림자를 엿보았을 적의 감각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진심으로 웃고 있는 것일까? 여자는 문득 그 미소에 담긴 의미를 캐물어 볼까 하는 충동에 휩싸였다가 돌연 그만두었다. 과거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하여 청년이 이름 모를 괴물이 된 것도 아닐진대,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사사건건 의심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모처럼의 미소마저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잖은가.

 

“아키쨩,”

 그러나 태생부터 생각보다 행동이 빨랐던 죄는 제법 컸다. 저도 모르게 달싹인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렀다. “자, 여기까지가 적당한 대답.” 무슨 질문을 해야 제대로 된 답이 돌아올까. 원래 그렇게 아무한테나 예쁘다고 했어요? 따위의 질문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아니아니, 역시 이것도 아니죠. 애초에 그랬다면 아키쨩은 학원 제일의 바람둥이라 소문났을지도 모르고요. 애초 시라미네 치유리가 알고 있는 사내는 퍽 칭찬에 야박한 데가 있었으므로 무의미한 질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바람둥이라. 거만하게 다리를 꼰 채, 윗 학년과 아래 학년의 가장 어여쁜―시라미네 치유리는 제 소꿉친구의 이상형을 알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아이들을 좌우로 낀 타니무라를 상상해보던 여자의 아미가 밉게 좁혀졌다. 타니무라 아키토가 하지 않을 것 같은 행동인 것은 차지하더라도 이건….

“전혀 산뜻하지 않아요.”
“……뭐가?”

 맥락을 모두 잘라 먹은 말이었으나 말없이 휙휙 바뀌는 표정이 퍽 재미있었던 듯, 긴 침묵 속에서도 사내의 낯에는 언짢음 따위는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냥요, 잠깐 아키쨩 얼굴을 가진 다른 사람을 상상해봤어요.” 농지거리를 속삭이던 입매가 보기 좋게 호선을 그렸다. 축제의 좌판이 흔히 그렇듯, 품질에 비해 비싼 값을 치른 여자의 손 위로 여러 지폐와 동전이 얹혔다. 차르르르한 맑은소리는 덤이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상상한 타인이 나보다 상쾌하지 않다고?”

“그럼요, 아키쨩은 아키쨩이라 좋은 거잖아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아까 뭘 잘못 먹은 거 아냐?”

“네에? 그런 거 아니거든요~!”

 또 못된 말을 하죠. 입술을 비쭉 내민 시라미네가 밉잖게 눈을 흘기는데도 그는 익숙하다는 듯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똑같이 학원에서 나고 자랐건만 그만이 퍽 귀하게 자란 도련님 같아 보이는 태도였다. 여자는 몇 번이나 보았을 그 옆모습에 가만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진짜예요.”

 전에도 말했잖아요, 아키쨩의 상쾌함은 보편적인 것과 다르다고. 그랬던가. 구태여 결제를 마친 노점 앞을 가리고 있을 이유는 없었기에 두 사람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소란 속에 묻힌 재잘거림을 따라 물풍선이 얕게 흔들렸다. 바삐 걸음 할 이유가 없었기에 나아가는 속도는 더뎠다. 이따금은 친구나 가족과 함께 온 아이의 웃음에 시선을 빼앗긴 치유리가 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드문드문 끊기는 말소리를 듣고도 아키토는 보채지 않았다. 보챌 필요가 없을 만큼 사소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인 탓도 있었다.

“이따 좌판, 다시 구경하러 가도 될까요?”
“사고 싶었던 거라도 있었어?”
“으응, 아키쨩한테 어울릴만한 게 있나 보고 싶어서요.”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축제에 올 적이면 온갖 상품을 따다 넘기는 사내에게 선물을 사주고 싶었다며 종알거리는 목소리를 잔웃음이 덮었다. 난 상품에 관심 없다고 말했었지 않나. 그래도요! 그리고 주기로는 네가 더 많이 줬어. 음, 그건 기억 안 할래요. 아무튼 골라오면 받아줄 거죠? 실로 억지스러운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게 두 사람의 차이라면 차이였을 것이다.

 저의 일상에서 겪은 자잘한 좋은 것들을 모두 그러모은 채 가장 아끼는 사람들에게 노나주는 것이 당연한 여자와 제게 있어 중요치 않은 것들을 타인에게 떠넘기며 살아온 남자의.


 한밤의 어둠을 뚫고, 여름 축제의 불빛이 오묘한 빛을 띠었다. 붉디붉은 전등의 색 사이로 드문드문 자리한 오렌지와 꽃분홍 같은 색들이 아롱아롱 반짝인다. 뒤엉킨 색채가 제멋대로 주변을 물들이기를 반복하자 그것이 흔한 여름 축제를 자아낸다.

 그렇다면 이 찰나의 빛을 손에 쥔다면 무슨 색이 될까. “아키쨩,” 그것이 어떤 색이든 사람 많고 소란스러운 곳을 싫어하는 아키토가 선뜻 발 들일만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무어 어떻담. 축제의 분위기에 취해,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치유리가 돌연 고개를 기울였다. 또 왜, 많은 인파 사이에서 비죽 튀어나온 머리가 입을 빠끔댄다. 혹여 듣지 못했을까 싶어 평소보다 또렷해진 입모양이 퍽 즐겁다.

 반면 이름을 담았던 입은 슬며시 다물렸다.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했고, 잔심술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어느 쪽이었던 간에 상대가 짜증을 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었으리라. 있잖아요, 그의 눈치를 살피듯 조심스레 눈을 굴리던 여자가 다시 운을 떼었다.

“저, 아키쨩의 웃는 얼굴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웃기는 자주 웃지 않나? 그의 되물음에 치유리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조금 달라요. 어떻게 다른데. 설명하기 좀 어려운데요…. 흠. 고민하듯 가운데로 몰린 눈썹 사이로는 가뭄 같은 강줄기가, 다시금 앙 다물린 입술 아래로는 옅은 호두알이 새겨졌다. 

“사실 이래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이죠.”
“왜, 내가 웃는 모습이 못돼 보이기라도 해?”
“아이참, 아키쨩은 또 무슨 소릴 하는 건가요?”
“너 언제는 내가 못되게 생겨서 좋다며.”

 그건,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조금 다르다고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치유리가 이내 답답하다는 듯 발을 굴렸다. “아키쨩은 제가 살면서 본 사람 중 가장 수상하고 맘씨 나쁘게 생겼지만!” “지금 부정하고 있는 거 맞아?” “웃을 땐 천사 같다고요, 당신은!” “……….” 어이없음을 넘어 얼빠진 시선이 그녀를 힐난하듯 꽂혔다. 도망치기라도 하듯 여자의 발걸음이 빨라진 것은 자연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아키쨩은 종종 심술부리잖아요. 말하면 안 웃어줄까 봐 그랬죠.”
“……내가 그랬던가, 기분 탓 아냐?”
“아니에요, 정말 심술부렸어요. 그보다 방금 고민했던 거 아니에요?”

 양궁 카페에 가는 것을 심술로 칠 수 있다면 심술이겠지만. 어이없는 거 알지? 에엥. 바람 빠지는 웃음과 함께 한숨이 섞인다. 투정이 그 뒤를 바짝 좇아 달려오다, 다시금 도란도란한 말소리와 사람들의 환성에 짓눌려 스러진다. 색색의 불꽃이 어둔 밤을 장식하고 간간이 손뼉이 마주하는 소리가 빛을 따라 퍼졌다.

“보러 오길 잘한 것 같아요. 내년에도 올까요, 우리?”

 빙수도 먹고, 또 풍선 낚시도 해요.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많이 따줄게요. 그리고…. 사람 많은 곳은 물론이요, 귀찮고 불필요한 일을 꺼리는 사내의 성정을 모르는 것도 아닐진대 줄줄이 나열되는 것들은 죄 하잘 것없는 일들이다. 노을을 품은 눈과 시선을 맞춘 여자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곱게 접힌 눈매 사이로 옅은 꽃잎색이 반짝이다, 이내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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