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아리움
하얀 포말이 둥글게 떠올랐다. 뽀그르르─ 흩날리는 거품 사이로 물결이 인다. 짙은 물살 사이로 빛의 조각이 춤을 췄다. 희고 푸르게 빛나는 결정들이 산산이 부서지며 파랑波浪을 이뤘다. 검푸른 그림자를 지나, 검은 꼬리가 큰 폭으로 흔들렸다. 물살을 가르고, 모난 곳 없이 통통한 몸체가 유려하게 나아간다.
느긋함마저 엿보이는 움직임에 절로 탄성이 튀었다.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감탄에 꼿꼿이 몸을 세웠던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물빛보다도 짙은 머리칼 위로 빛이 어리며 오묘한 색채를 자아냈다. 언제나보다도 더 깊은 파랑 아래, 희고 고운 낯이 호선을 덧그린다.
“이런 게 마음에 들어?”
목소리는 느른했고, 고저 없는 어조는 얼핏 퉁명스럽게까지 들렸다. 타니무라 아키토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는 자라면 그를 거만하고 무례하다 여겼을지도 모른다. 이해는 행간의 사이, 낱말의 끝처럼 연출자의 의도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마치 널리고 널린 관극처럼. 그리하여 어느 불일치는 몰이해를 낳는 법이니.
“그럼요~ 귀엽지 않나요? 눈도 몸도 동글동글하고♪”
그러나 이번의 청자와 화자는 다르다. 두 사람은 모두 서로의 발화 방식에 있어 의문을 품지 않으며,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일상을 공유하는 기쁨과 서로를 향한 이해다. 이제 와 시답잖은 이야기로 서로를 곡해하기엔 너무나 오랜 이야기가 흘렀다.
“……내 눈엔 헤엄치는 돼지처럼 보이는데.”
“엣!? 어딜 봐도 귀여운 물범이지 않나요? 돼지라니요~”
“동그랗잖아. 바다 돼지 같지 않나.”
바다 돼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물돼지. 만약 바다표범이 일본어를 할 수 있었다면 거세게 항의했을 것이다. “으음….” 묘한 표현에 가늘게 좁혀진 눈가가 뜨일 줄을 모른다.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던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기다란 머리채가 금빛 물결을 만들고, 흰 리본이 해파리의 꼬리처럼 살랑인다.
“그런가요? 돼지보다는…….”
종알거리던 치유리의 목소리가 이내 잦아들었다. 소녀 시절부터 유별날 정도로 말 많던 이가 잠잠해지는 것은 퍽 특이한 일이다.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높다란 목소리가 흩어지자 두 사람 사이에는 적막이 찾아들었다. 저 멀리서, 놀러 온 사람들끼리 속닥거리는 소리만이 그 위를 덧칠했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그게요,”
데로록 굴러간 눈 끝에 둥그런 몸체가 닿았다. 물살을 가르고, 느긋하게 공중제비를 하던 바다표범이 돌연 그들 쪽으로 다가섰다. 치유리의 입에서는 어떠한 음률도 흐르지 않았으니, 앨리스로 인한 조종은 아니었다. 투명한 수조 위에 손을 올리고, 동그랗고 힘없는─ 새까만 눈동자와 눈을 맞춘 여자가 방싯방싯 웃음을 흘렸다.
어딜 보아도 한눈을 파는 모양새다. 재촉할까, 기다릴까. 팔짱을 낀 채 잠자코 서 있던 아키토가 손을 까딱였다. 그렇게까지 중요한 문제도, 궁금한 이야기도 아니었으니 마음은 기다리는 것으로 기운다. 그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인을 내버려 둔 채 태평하게 물범과 일방 소통하던 여자가 총총 그의 곁에 섰다.
“아키쨩, 잠깐만 숙여봐요.”
숨결이 느껴질 만치 가깝게 붙은 치유리가 속달거린다. 펑퍼짐한 겉옷의 끝자락을 붙들고, 이끄는 손길에 따라 아키토의 몸이 기운다. 당긴 것은 저이면서, 또 얼굴에 홀리기라도 한 것인지─얼굴만 보고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니라지마는, 시라미네 치유리가 그의 얼굴에 질릴 날이 정녕 오기는 할까?─ 행동이 굼뜨다. 슬핏 올라간 사내의 입꼬리를 포착한 것인지, 간질거리는 숨결 뒤로 웃음꽃이 피었다.
“……돼지보다는 새우튀김을 닮았다고 생각해요.”
“가만 보면 네가 제일 심한 말을 해.”
“그,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잖아요!? 저 애가 들을까봐….”
새치름한 눈이 길쭉하게 뜨였다. “하지만 닮은 건 사실이지 않나요.” “어디가?” 힐난하는 것이 명백한 시선에도 꿋꿋이 항변을 읊은 여자가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어디를 보아도 저 불만 있어요─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다.
“꼬리라던가? 그보다 아이가 듣는다니까요.”
동기 중에서는 가장 낭만과 낙원을 꿈꾸면서도 이따금 시라미네 치유리는 여러모로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꺼내고는 했다. 종알대는 여자를 두고, 사내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가끔 네 머릿속이 궁금할 때가 있어.”
“에, 갑자기요~?”
감청색 타일 위로 발길이 이어진다. 낮잠을 즐긴 사자처럼 유유자적한 사내와 달리, 뒤따르는 걸음은 조바심에 가득 차 있다. 흰 샌들이 음률 사이의 스타카토처럼 튄다. 같이 가요! 목소리를 캐치한 것인지, 혹은 심술을 거둔 것뿐인지. 돌연, 멈추어선 손끝을 붙든 치유리가 말갛게 웃었다.
붙잡힌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봤는데 들어서 문제 될 만한 이유가 있나?” “으응?” 맞닿은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도가 제법 상이하다. 원래 사람의 손이 이렇게 차갑던가. 미적지근한 열기에 대해 고찰하기도 전에 열기는 뒤섞여 간다.
“그렇지 않나? 쟤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동물 회화 앨리스인 것도 아닌데.”
“아키쨩은 가끔 너무 심란한 이야기를 해요.”
“누가 할 소리를…….”
어이없네. 그래서 싫어졌어요? 전 아키쨩의 그런 부분까지 좋은 건데. 싫어진 건 아닌데, 뒤섞이는 목소리가 정답다. 키득키득, 잔웃음을 흘리며 담소를 나누는 남녀가 재미있어 보였던 것인지 다시금 물범무리가 짧뚱한 꼬리를 길게 늘어트리며 물살을 가른다. 살랑이며 헤엄치는 것치고는 물살이 거세다. 발 디딘 곳이 수조의 바깥이 아니라 그 안쪽이었다면 휘말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고민하게 될 만큼. 공기와 맞닿아 생긴 거품이 보그르르 톡톡, 튀는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맨 앞에서 헤엄치고 있는 아이가 아까 그 애일까요?”
“글쎄. 그게 그거처럼 보이는데,”
“으으, 사실 저도 그렇긴 해요. 사육사는 대단히 멋진 일이네요.”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저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요?
이제는 다시금 보폭을 맞추어, 두 사람은 천천히 물의 터널을 걸어나갔다.
두 사람이 실외로 나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본래 점심을 먹기로 했던 시간보다는 조금 늦었으나, 빛을 그러모은 것처럼 아름다운 빛을 내는 해파리 수조와 사육사와 함께 진행하는 먹이 주기 체험 등, 매력적으로 여겨질 만한 것들이 한데 모여 그들을─보다 정확히는 시라미네 치유리를─ 홀린 탓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이런 아쿠아리움은 학원 쪽이 더 좋은 것 같아요.”
“거긴 볼거리가 많긴 하지. 보통 기계나 환상으로 만드니까.”
“그쵸? 제대로 돌봄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실제 아쿠아리움은 좁아서 갑갑하다고들 하고 말이죠.”
학원만 해도 그렇게나 컸는데, 답답하다고 하는 아이들도 있었고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냐? 에~. 무단결석하는 비율이 꽤 높아졌던 것 같은데. 그건 잊어주세요…. 그보다, 아키쨩은 어땠나요? 학원 생활이요.
톡, 하고 물방울이 떨어진 것은 그때였다. 도란도란 이어지던 대화와 함께 그녀의 걸음이 뚝 끊겼다. 물장난? 혹은 사고일까. 그러나 주위를 살피어도 곁에 있는 것은 사랑하는 연인뿐이었으니 짐작 갈 만한 사고는 단 하나뿐이다.
“비 오네.”
“으으, 일기예보에선 하루 종일 맑다고 했는데! 부슬비일까요? 부슬비겠죠?”
“쓸데없는 기대는 안 하는 편이 좋아. 정 싫으면 키코한테 연락하던가…. 사이 좋은 편이지 않나, 너희.”
“아니아니아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데이트하는데 비가 오니까 맑게 해달라고 하면 키코쨩이 절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뭐긴, 평범하게 귀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하겠지.”
아아아아키쨩~!! 빽 내지른 비명이 길다. 정곡을 찔린 탓인지 평소보다도 반응이 거세다. 찰박이는 소음과 함께 허우적거리던 치유리의 이마가 꾹 밀렸다. 기우뚱─ 기울어지던 몸을 간신히 바로잡는 사이, 먼저 차양 아래의 테라스석에 자리를 잡은 아키토가 메뉴가 적힌 간판을 훑었다.
“음료수는 주문할 거지?”
“으응, 역시 시원한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도시락에 음료까지 챙기면 부피도 너무 커질 것 같고.”
“식사도 여기서 사 먹어도 괜찮았는데.”
“그치만, 모처럼의 수족관이니까 직접 챙기고 싶었어요. 여긴 외부 음식 반입도 된다고 하고….”
리본을 묶어둔 쇼핑백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부러 가벼이 흔드는 태도에도 내용물은 제법 묵직하다. “흐음….” 실로 아집에 가까운 행동이었으나 청년은 수족관이나 카페나 그게 그것이 아니냐, 쓸데없이 수고를 들인다는 둥의 말로 연인의 노력을 폄훼하는 대신 침묵을 고수했다.
그의 선택은 사랑이나 다정 따위의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 맞추어 주는 것은 그의 특기였고, 구태여 달콤한 낭만 한 스푼 섞인 호의를 밀어낼 이유를 찾는 것은 수고로운 일이다. 그의 한마디에 울고 웃을 이라는 것을 안다면 더욱이나.
그것이 시라미네 치유리가 타니무라 아키토를 다정하다고 여기는 이유일 것이다. 타니무라 아키토는 그의 자각과 관계없이 많은 것이 변했고, 변하고 있었으며, 또 변하지 않았지만….
타니무라 아키토는 언젠가, 제가 생각하는 ‘다정함’의 기준을 이해하는 날이 올까?
“그럼 난 아메리카노로. 너는?”
“레모네이드를 할까 했는데요, 여기 무지개색 크림 소다란 메뉴가 맛있대요.”
“도시락이랑 같이 먹기엔 그렇지 않나. 이번엔 주먹밥이라며?”
상념에 젖어있던 여자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예상치 못한 메뉴에 고운 아미가 밉게 찌푸려져 있었다. 타인이 옆에서 무얼 먹든, 신경쓰지 않던 사내였으니 필시 무슨 맛인지 상상하고 있을 터다. 하기야 이름으로 유추하기에는 기묘한 이름이다.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 사이트를 보여주니 시선이 빠르게 글자를 훑는다. 「체리, 오렌지, 멜론, 블루 하와이, 포도 등 7가지 맛을 고를 수 있으며 선명한 색감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요컨대 말만 무지개일 뿐, 평범한 크림 소다라는 소리다. 짙은 체리빛 눈동자 위로 엉뚱한 것을 보는 듯한 감정이 스친다.
“도시락은 유부초밥이랑 양배추롤이랑 닭튀김이랑, 입가심용으로 과일도 가져왔는데 못 먹는건 없죠?”
“……둘이서 먹는거 기억하고 있지?”
“물론이죠♬”
“날 돼지로 만들 셈이냐는 뜻이었는데.”
“에!?”
상술에 놀아나는 고객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찔끔 고개를 숙인 여자가 슬쩍 말길을 돌렸다. 세 칸을 가득 채운 도시락통이 둥그런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아기자기한 체크무늬 도시락통을 가만 노려보던 아키토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음료수는 내가 살게.”
“도시락 때문에요? 이건 제가 하고 싶어서 만든 건데,”
“그래도 이게 편하니까.”
그래서 진짜 그거 마실 거야? 으음, 역시 오늘은 레모네이드로 할까요. 크림이랑 밥을 먹기는 좀. 거봐. 언제나처럼 가벼운 투닥임이 이어진다. 일상과 같은 이런 순간순간들이 소중하게 느껴지고 마는 것은,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기 때문일까.
익숙하면서도 색다른 마음을 기쁘게 그러모아, 그녀가 웃었다.
“다 먹으면 돌고래 쇼를 보러 갈까요? 요즘은 우비랑 우산을 배치해둔대요.”
“젖을 각오로 맨 앞줄에 앉을 셈인가.”
“가까이서 보면 좋을 것 같아서….”
“하긴, 넌 작으니까 멀면 곤란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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