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라의 분석과 해석 _ 모티프와 균열의 서사
바라봤을 뿐인 얼굴
떠오르지 않나요? 네.
꺼림칙한 건 나인데
신경 쓰이잖아요?
희미해져 가는 게
사라져 없어져 버린다는 게
망설임은 항상 내 편
물어 볼 수 조차 없죠
대체 어디로들 가는 건 지 몰라
인생 마지막의 숨을 든 채로
몸을 던져 버리잖아
색 바랜 기록 위에 눈물 닿아도
빛은 돌아오지 않아
구겨진 기억만을 안고 살고 싶다면
누구에게 말해야만 해?
가장 바라고 가장 두려운 것은
마음의 저편에
두고 온 나인데 어느 새 손 에 쥐어져
거짓말처럼 아 아미타
(그래요 그래요 좋아요 좋아요 나예요 나예요)
Amita Amita
바라지 않는 거라도 좋아.
(그래요 그래요 좋아요 좋아요 나예요 나예요)
Amita Amita
두려워도 괜찮을 거라고
(위로하는 그 소리) 거짓말
(뻔한 엔딩 그 스토리)
타임라인 저 아득히 아래 쌓여버리겠지
처음으로 지은 표정
귀엽다고 해줘요? 네.
거짓말 하는 건 난데
회자정리인가요?
슬그머니 거릴 두는 게
당신이 먼저 다가왔던 건데
배신감은 항상 독차지
칠흑같은 관계의 색
대체 언제 그렇게 발라 둔 지 몰라
인생 마지막 순간인 것 처럼
눈을 감고 다니잖아
관계도 처럼 줄이 그어져 있어
너와 나 어느 사이에
뒤틀린 추억만을 공유하고 싶다면
누구에게 말해야만 해?
가장 바라고 가장 두려운 것은
마음의 저편에
두고 온 나인데 어느 새 손 에 쥐어져
거짓말처럼 아 아미타
(그래요 그래요 좋아요 좋아요 나예요 나예요)
Amita Amita
바라지 않는 거라도 좋아.
(그래요 그래요 좋아요 좋아요 나예요 나예요)
Amita Amita
두려워도 괜찮을 거라고
애써 연기를 해도 가면을 쓰고 하면 어떡해?
정론이지만 해답으로선 오답인거네
한 치 틀림 없이 어긋난
관음 관심 관용 관세음 너와 나의 추종자가
숨을 손에 품고 귀의를
잃어버린 꿈에 미련은 없는거야
후회는 하지만
사랑했었지만 사랑받은 기억은
거짓말처럼 아 아미타
(그래요 그래요 좋아요 좋아요 나예요 나예요)
Amita Amita
바라지 않는 거라도 좋아.
(그래요 그래요 좋아요 좋아요 나예요 나예요)
Amita Amita
두려워도 괜찮을 거라고
(위로하는 그 소리) 거짓말
(뻔한 엔딩 그 스토리)
타임라인 저 아득히 아래 쌓여버리겠지
0. 사설
기본적으로 시의 맥락은, 작가의 목소리를 특정한 유형으로 고정화시키는 게 유의미한 일이냐는 차치하고, 사회 윤리 맥락적으로 강력한 내러티브를 갖거나 혹은 정서를 표현하는 데 주력을 둔다. 이에 전자는 참여시 계열이 두각을 나타내며 전후는 서정시가 대표적이다.
그렇기에 참여시의 계열은 작가의 뚜렷한 목소리가 어떤 식으로 사회 인식에 기여하느냐를 주력 기제로 분석하게 된다면 서정시는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들이 어떤 이미지와 은유들로 환기되는 지를 파악하는 것이 주력이 된다.
물론 이건 창작자 - 시인, 작사가, 작곡가 만의 역할은 아니다. 그런 은유들로 새로운 의미를 도출해 내는 것은 향유자들의 시선이 그 의미를 대체하는 경우도 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수능 문제로 나왔는데 다 틀렸다라는 이야기는 수능의 문제점을 꼬집는 농담만으로 보기에는 너무 나이브하다.
염라가 다루고자 하는 화자의 환부에 대한 고백과 불교적인 구원의 모티브, 그리고 죽음에 대한 내러티브들이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의미를 형성한다. 이 것이 어떤 식으로 구조화 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화자의 정서 : 불안
작사는 화자의 역할이 가장 강력한 운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화자가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부르기 때문이다. 3인칭의 작사를 보기 힘든 이유는 이 때문이다. 물론 그런 시도가 없는 건 아닐테지만, 보통 남의 이야기를 애틋하게 부르는 건 그다지 효과적이진 않다. 이야기의 형태를 띄는 것이면 몰라도.
염라에서 다뤄지는 정서는 타자와의 관계가 뒤틀려있음을 직접적으로, 또 암시적으로 표현한다. 각 문단은 화자의 정서적 불안과 통증을 파편적으로 제시하며, 이 것들은 각각의 몇가지 기법을 통해 구체화된다.
a)
바라봤을 뿐인 얼굴
떠오르지 않나요? 네.
꺼림칙한 건 나인데
b)
관계도 처럼 줄이 그어져 있어
너와 나 어느 사이에
이 부분에서 타자의 존재와 관계성이 제시된다. 떠오르는 얼굴을 보며 꺼림칙해하는 화자는, '어느 사이엔가' 맺어진 관계성을 상기한다. 이 자의적으로 조정할 수 없는 관계성은 그 자체로 화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된다. 애초에 스스로 조정할 수 없는 것이란 불안감의 원천이 되기 마련이다. 이런 화자의 손을 벗어난 불안감을 다음에 이르러 명확해진다.
c)
가장 바라고 가장 두려운 것은
마음의 저편에
두고 온 나인데 어느 새 손 에 쥐어져
거짓말처럼 아 아미타
마음의 저편에 파묻어버린 것은 어느샌가 자신에게 자신의 손으로 돌아와 상기된다. 그 것이 가장 바라고, 두려운 것이라는 양면성을 통해 대조되는 것은 화자의 뒤틀린 불안의 암시이자 상대와의 일말의 관계성을 내포한다. 이 것들을 마음의 저편에 묻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자신의 손에 쥐어지는 현상은, 이 자의적으로 조정할 수 없다는 불안감의 발로이다. 그 것이 구원의 맥락을 가진 아미타라는 감탄사로 표현되는 것은 반어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d)
구겨진 기억만을 안고 살고 싶다면
e)
뒤틀린 추억만을 공유하고 싶다면
그리하여 구원받기를 원하나 구원받을 수 없는 화자가 최종적으로 종착한 곳은 균열을 껴안은 채로 살고 싶다는 좌절감어린 방백이다. 균열이 생긴 순간 이후로부터 망가졌음을 체념한 채 이어지는 삶은 원래의 형태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런 망가진 형태의 관계성을 얼핏 보면 이치에 맞지 않은 아이러니한 표현으로 화자는 구체화하고 있다.
2. 모티프 : 구원 모티프
염라의 맥락은 담백하게 보자면 사실 불교의 교리적인 이야기와 상당히 거리가 멀다. 내적인 수행으로 이치를 깨우쳐 부처로 승천한다는 이야기와는 정 반대로 헝클어지고 불안정한 화자의 정서를 표현할 뿐, 타자와의 관계성에 집중함에 있어 상당히 이질적인 용어를 사용했다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 차용된 종교적인 언어들은 맥락들과 융화되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데 이는 다음의 이유와 같다.
1) 비극적 정서와 구원의 모티프의 대비.
2) 죽음의 내러티브와 종교와의 연관성.
3) 반복적인 차용을 통한 모티프 효과.
첫 번째로 상처와 망가진 관계성이 내포하는 부정적인 정서는 작 중 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아미타불의 존재를 통해 대비된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아미타불의 존재를 대상물로써 차용하는 것이 아닌, 화자의 탄식으로써만 제시될 뿐이라는 것이다.
f)
가장 바라고 가장 두려운 것은
마음의 저편에
두고 온 나인데 어느 새 손 에 쥐어져
거짓말처럼 아 아미타
g)
사랑했었지만 사랑받은 기억은
거짓말처럼 아 아미타
h)
(그래요 그래요 좋아요 좋아요 나예요 나예요)
Amita Amita
바라지 않는 거라도 좋아.
(그래요 그래요 좋아요 좋아요 나예요 나예요)
Amita Amita
두려워도 괜찮을 거라고
이를 통하여 화자의 발화로써 존재하는 아미타불은 그 세계에 구원으로써 작동하지 않는다. 단지 화자의 자신의 처지를 대비적으로 보여주는 대상물로써 존재할 뿐이다. 그리하여 불교가 갖는 구원의 모티프는 그저 화자의 불안정한 관계로 인한 피해를 확장시켜주는 데 기능할 뿐 그 자체로만은 작동하지 않는다.
염라에서 아미타라는 단어는 총 15번을 사용한다. 같은 단어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그 의미를 강조하는 효과를 갖는다. 또한 지속적인 반복으로 작품 전반에 그 분위기를 부여하여 모티프로써 기능하기도 한다. 그렇게 화자가 체념처럼 반복하는 아미타라는 단어는 구원을 바라지만 이뤄질 수 없는 환상처럼 지속적으로 상기됨과 동시에 불교라는 테마를 형성하는 모티프로써 작동한다.
g)
한 치 틀림 없이 어긋난
관음 관심 관용 관세음 너와 나의 추종자가
숨을 손에 품고 귀의를
그리하여 한 치 틀림 없이 어긋난 허상의 아미타를 찾아 너와 나의 추종자가 귀의한다는 것은, 종교적인 모티프를 강화함과 동시에, 화자가 가진 불안이 단지 화자의 것만이 아님을 암시함으로써 배경으로의 확장을 시도한다. 이 지점에서 추종자가 든 숨이라는 단어는 의미심장하다.
3. 죽음의 내러티브 : 그리하여 아무 의미 없는.
h)
타임라인 저 아득히 아래 쌓여버리겠지
먼저 결말부터 짚고 가자. 타임라인이라는 단어는 넓게보자면 역사라는 거시적인 흐름으로 볼 수도 있고 좁게 보자면 트위터라는 SNS 내의 트윗들이 쌓여가는 타임라인이라는 용어를 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개인의 존재는 사소해지며 결국 무수한 타자들의 목소리에 파묻혀 복기될 가망도 없을 것 같은 아득함 아래로 떨어져버린다는 것, 그 것을 전제로 삼는다는 것은 일종의 체념이라고 볼 수 있다.
i)
망설임은 항상 내 편
물어 볼 수 조차 없죠
대체 어디로들 가는 건 지 몰라
인생 마지막의 숨을 든 채로
몸을 던져 버리잖아
j)
배신감은 항상 독차지
칠흑같은 관계의 색
대체 언제 그렇게 발라 둔 지 몰라
인생 마지막 순간인 것 처럼
눈을 감고 다니잖아
하지만 이 체념이 유효한 까닭은, 화자와 동일한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지금껏 존재했으며, 그들 역시 스러짐을 택해왔음을 상기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체념의 정서가 발화된 공간은 기묘하게도 생과 사의 경계선에 서게 되는 공간이자, 화자가 마지막으로 선택하게 되는 스스로에 대한 심판의 공간이 된다.
k)
잃어버린 꿈에 미련은 없는거야
후회는 하지만
사랑했었지만 사랑받은 기억은
거짓말처럼 아 아미타
심판의 선고는 명확하다. 미련은 없지만 명백하게 미련을 토로하는 아이러니는 스스로가 가졌던 연민임과 동시에 상처의 원인이다. 탄식처럼 발화하는 아미타라는 말은 깊은 깨달음이 아니며, 스스로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그렇기에 아이러니로써 잔재하는 감정이 남아있는 한 화자는 무간지옥에서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화자는 아미타가 될 수 없으며 스스로를 심판하는 염라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감정들은 타임라인 아래에 쌓여 잊혀질 것이다. 잊혀지게 된다면 편해질까? 그 것은 알 수 없다. 향후는 염라인 화자에게 달려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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