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로데즈_아트치료_전력60분
고흐의 자연은 단순한 초록색이 아니다. 그의 자연에는 옅은 연두색부터 진한 녹빛까지 온갖 초록색이 들어있으며, 붉은색과 노란색, 검은색, 파란색, 흰색, 보라색, 수천 수억 가지의 색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고흐의 붉은 자연을 보고 미쳤다고 말한다.
아르토는 고흐를 통해 자연을 다시 본다. 아르토의 자연은 잔혹하다. 포도주 대신 피로 적셔진 붉은 들판이 있고 탐스러운 열매가 아닌 불타버린 나무가 있다. 아르토는 붉은 흙길을 걸어간다. 무대 위를 걸어가는 배우의 발에 온통 붉은 흙이 묻었다. 그의 손은 재와 먼지로 얼룩졌다. 그의 의상은 열병을 앓으며 토하고 바닥을 뒹굴고 분열한 덕분에 토사물과 온갖 분비물로 더럽혀졌다. 아르토의 모습은 잔혹하다. 동시에 숭고하다.
자연의 잔혹함을 온몸으로 일깨워 지나치게 깨끗한 문명에서 탈피하는 것, 사회가 묻고 외면한 오점을 잡아 벌려 새로운 언어를 전염병처럼 퍼뜨리는 것, 인간 스스로 세상 너머의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 그걸 그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르토가 걸어가는 길 끝에 고흐가 서 있다. 혹은 고흐가 걸어가는 길 끝에 아르토가 서 있다.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본다.
널 정말 만나고 싶었어, 빈센트 반 고흐.
너의 이름을 물어도 될까?
앙토냉 아르토. 난 연극을 해.
박사는 그림 밖에서, 극장 밖에서 그 모든 것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박사에게 그들은 그저 광인일 뿐이다. 그들의 주장은 박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의미라는 것은 말의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시작되므로, 그렇다, 박사는 그들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박사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는 말에 담긴 정보다.
고흐의 그림이 붉은색이든 초록색이든 그건 상관할 바가 아니다. 고흐가 붉은 물감을 원하든 노란 물감을 원하든 그건 알 바가 아니란 말이다. 중요한 것은 색깔이 아니고 환각과 환청이 얼마나 구체화되었는지의 분석이다.
빌어먹을 물감이 초록색이든 붉은색이든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다.
아르토 혹은 고흐의 손에서 초록색 물감이 뚝뚝 흘러내린다.
“박사님. 붉은 물감을 달라고 했잖아요.”
“어제 당신이 붉은 물감을 다 써서 없어요, 아르토. 내일 사다 드리죠.”
“고흐가 달라고 한 건 붉은 물감이에요.”
붉은색과 초록색은 아주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어요. 박사님은 색깔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나요. 물론 모르시겠죠. 초록색의 언어를 말해야 하는 자리에 붉은색의 언어를 칠하면 그건 의도한 그림이 될 수 없어요. 박사님의 언어는 한 가지뿐이니 이해할 수 없겠지만요.
아르토는 쉬지도 않고 종알거리고 박사의 이마 위로는 핏줄이 연하게 돋아난다. 초록색 물감이 바닥에 커다란 얼룩을 만들었다. 아르토는 박사의 구둣발이 물감을 짓뭉개 얼룩을 바닥에 펴 바르는 것을 목격했다.
아하하, 박사님! 당신도 그림을 그리고 싶었나요?
박사의 눈썹이 미간에 주름을 깊게 만들며 좁게 모여든다. 아르토의 말이 심기를 건든 것인가? 놀랍지는 않다. 이 환자는 성질을 긁어대는 것에 특출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박사님, 저는 성질을 긁지 않아요. 당신의 마음속에 아직 남아있는 시를 살짝 건드려 상기시키는 거죠.
목덜미가 뻐근해져 온다. 다행스럽게도 박사의 가면은 단단하다. 이 정도 도발에 벗겨질 정도로 약하지 않다.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쓴 박사가 손수건으로 아르토의 손을 닦아냈다.
“아르토, 이 초록 물감은 필요 없는 것 같으니, 제가 가져가도록 하죠.”
“붉은 물감을 주세요.”
“아르토.”
“고흐는 붉은색으로 나무를 그리길 원해요.”
“당신의 환각이 점점 구체화되어 가고 있군요.”
“이건 환각이나 환청 따위가 아니에요. 우린 붉은 물감이 필요해요, 박사님. 나무는 붉은색이에요.”
“붉은 물감은……. 아르토, 자연은 붉은색이 아닌 초록색입니다.”
“그런가요?”
“그래요, 아르토. 자연은 초록색이에요. 자연을 초록색으로 그리지 않으면 당신은 치료되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박사님,”
평소에는 자연이 어떤 색이든 신경 안 썼잖아요?
아르토가 웃는다.
당신이 나의 그림을 신경 쓰게 된다면 당신도 우릴 이해하고 싶어질 거예요.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