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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로데즈_아트치료_전력60분

주절주절 by Ζ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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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너희들은 중력이다! 우리가 날아오르지 못하도록 헐뜯고, 물어뜯고, 으르렁거리는 존재들!

박사는 그들을, 아르토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일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므로 그 부분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관습과 제도. 그 둘은 문명을 이룩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 아니던가. 그걸 어째서 중력으로 표현한단 말이지? 아니, 애초에 왜 중력을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단 말인가. 중력이 없다면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갈 수 없을 텐데. 아르토가 원하는 건 뭘까. 이해할 필요 없어. 아르토의 정신은 썩었으니까! 자신의 욕망만을 생각하고 고통을 마주할 용기조차 없는 그가 무얼 원하는지 알 게 뭔가! 그런데 아르토의 욕망이 무엇이지? 나는 아르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지?

음, 음음. 음…….

병실에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쾅! 쾅! 쾅! 쾅! 쾅!

극장에서 고함이 터져 나온다. 아니, 고함?

까아아악! 까악!

들판에서 까마귀가 날갯짓한다. 아니지, 아르토가 소리를 지른다?

박사는 자신의 언어를 지키기 위해 땅에 두 발을 단단히 박아 넣는다. 중력이 없어져도 떨어지지 않게, 어떤 일이 있어도 다리가 빠지지 않게, 깊숙이.

박사의 가면은 오늘도 단단하다. 아르토는 박사의 가면에 몇 번이고 금을 내었지만, 박사의 가면이 깨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박사는 매일, 매시간 가면의 흠집을 보수하고 고친다. 가면 안의 모습은 금이 가고 깨어졌다 다시 붙은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만, 도금한 겉면을 보라. 그 누구도 저 가면에 흠집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가면의 흠집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가면을 자각한 사람, 아르토뿐이다.

박사님. 가면에 금이 갔어요.

아르토, 저는 가면 같은 것을 쓰고 있지 않아요.

박사님은 아직도 두려워하시는군요.

제가요?

네. 가면을 썼다고 인정하는 게 그렇게 두려운가요? 박사님의 가면을 보세요. 온통 망가졌어요. 금이 가고 깨어진 것을 억지로 붙여 페인트칠했네요. 흠집 사이로 들어간 페인트가 뭉쳐져서 볼품이 없어요. 가면을 불태우고 새 가면을 만드는 법을 모르니까 그렇겠죠. 새로운 가면을 쓰세요, 박사님. 권위와 지성으로 가득한 새 가면이요.

음……. 아르토? 당신이 말하는 잔혹연극론은 실패했다고 그랬잖아요. 사람들은 가면 따위를 쓰고 있지 않아요. 당신이야말로 당신이 만든 가면을 쓰고 있지 않나요?

제가 가면을 쓰지 않았다고 한 적이 있던가요? 저는 가면을 썼어요. 그 가면을 쓰고 맨얼굴로는 저항할 수 없는 공포, 두려움, 나약함에 저항하고 있죠. 박사님도 그렇지 않나요. 제 병실에 들어올 때면 가면을 더 깊게 눌러쓰죠. 제 생각에 물드는 걸 아주 두려워하고 계시잖아요. 아니면 제가 박사님의 가면에 자꾸 흠집을 내서 그러는 것이군요. 알겠어요, 박사님. 흠집 내지 않을게요. 가만. 저는 박사님의 가면에 손을 댄 적이 없는데요. 박사님 스스로 제 생각을 받아들이며 가면을 깨뜨리고 있는 거잖아요?

아르토! 아르토. 당신의 정신은 이미 썩었어요. 제가. 그런 당신의 생각을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나요. 썩어있는 물을 좀 빼내야 할 것 같네요. 약을 증량해 드리죠. 그럼, 오늘 상담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박사님. 가면이 깨지겠어요. 오늘은 새 가면을 만드셔야 해요.

아르토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박사는 차트에 정신분석학의 언어를 쏟아내 아르토의 상태를 낱낱이 분석하고 기록하며 자신의 가면에 흰 페인트를 덧칠한다. 가면이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 덜그럭거린다. 위험하다. 박사는 바닥 깊이 다리를 심었음에 안도한다. 중력에서 벗어나도 땅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을 수 있음에.


아르토, 고흐와 만난다. 세상이 뒤집힌다. 중력이 뒤틀린다. 어디가 바닥이지? 아래? 위? 오른쪽? 왼쪽? 가운데? 사방? 중력이 작용하는 곳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박사는 땅에 발을 붙이고 있다. 아르토와 고흐가 한없이 가벼워져 날아가는 동안 박사는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다. 걷거나 뛸 수도 없다. 너무 깊이 묻혀있기 때문이다. 박사는 그들처럼 가벼워지고 싶다. 그러나 중력이 박사의 발목을 낚아채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땅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써 보아도 쉽지 않다.

마침내 박사의 시야에서 그들이 완전히 사라진다. 이제 남은 것은 극장과 화실뿐이다. 다시 중력이 작용한다. 박사는 그제야 땅에서 나올 수 있다. 신발을 벗는다. 한없이 가벼워질 수 없다. 어떻게 해야 가벼워질 수 있는 거지? 너무 두꺼워진 가면을 벗어 내팽개친다.

나는 누구지? 난 왜 여기 있지?

박사는 날갯짓한다. 한없이 가벼워지기 위해서. 이 거추장스러운 중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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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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