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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

#로데즈_아트치료_전력60분

주절주절 by Ζ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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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색의 화실. 또는 검은색의 극장. 고흐는 이곳에서 그림을 그린다. 아르토는 이곳에서 고흐를 만난다.

박사, 등장.

고흐. 당신은 정상적인 자연을 그려야 합니다.

아르토. 여긴 극장이 아닙니다. 당신도 배우가 아니고요.

박사님. 전 언제나 자연 그대로를 그리고 있어요.

박사님. 당신도 가면을 쓰고 있다는 걸 인정하세요.

고흐. 정신착란 증세가 악화되고 있군요.

아르토. 당신은 고흐처럼 미쳐가면 안 됩니다.

몇 번이나 말을 해야 할까요! ‘우린’ 미치지 않았다고!

‘우리’?

박사님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하얀색의 병실. 박사는 이곳에서 환자를 만난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가슴 속 시는 감겨있다. 그의 마음은 하얀 방이다. 어떤 환자가 지나가든 항상 일정하게 정리되어 복구되는 하얀 방. 하얀 병실.

아르토가 병원에 입원했다. 하얀 병실을 배정받는다. 리빙 시어터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아르토는 자신이 서 있는 공간을 전부 무대로 바꾸어 놓는다.

고흐가 병원에 입원했다. 하얀 병실을 배정받는다. 자연의 소리를 듣는 화가의 삶을 살아가는 고흐는 자신이 보는 공간을 전부 캔버스로 바꾸어 놓는다.

하얀 방이 요동을 친다 하얀 방이 새까매진다

하얀 방이 흐느낀다 하얀 방이 비명을 지른다

시간이 허물어지고 공간이 사라져간다

파장이 몰아치고 중력이 뒤틀린다

하얀 방이

요동을 친다

하얀 방이

새까매진다

하얀 방이 흐느낀다

하얀 방이 비명을 지른다!

박사의 시가 비명을 지른다!

이곳은 무대다. 그리고 화실이다. 무대 중앙에 캔버스가 걸려있다. 그 아래에는 물감이 놓여 있다. 사방에는 연극을 할 때 필요한 소품들이 늘어져 있다. 제의를 위한 촛불이 있다.

박사의 하얀 병실이 전염되었다. 박사, 물감을 닦는다. 가벽을 들어낸다. 자신의 하얀 병실로 되돌리려고 노력한다. 실패한다. 안돼! 병실 양옆으로 무대막이 드리워진다. 커다란 캔버스에 그림이 그려진다. 극장. 또는 화실. 아, 박사님! 당신도 우리의 언어에 전염이 되었군요?

고흐, 아르토. 아르토, 고흐. 그들에 빠져들면 결국 미치게 될 거야. 그들은 미치지 않았어. 그들을 동경하는가? 그럼 그들처럼 잘라버려라! 나를 둘러싼 썩은 찌꺼기 같은 기억들을! 저 어둠 속에 빛나는 촛불은 극장이란 마술을 위해 온몸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라!

박사는 생각한다. 나는 누구지? 너는 누구지? 나는 어째서 여기 있지? 너는 왜 여기에 있지? 너는 미쳐있나? 아니 나는 미쳐있나?

누군가 발을 구른다. 쿵. 촛불이 일렁인다. 쿵. 무대가 울린다. 쿵. 물감이 흐른다. 쿵. 시곗바늘이 돌아간다. 쿵. 와인색의 길이 노크한다. 쿵. 저승의 문을 지난다. 쿵. 내세의 문을 마주한다. 쿵.

촛불이 모든 경계를 불태운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 흩어진다. 세 사람, 트랜스 상태가 된다. 발을 구른다. 원형을 잃은 것들이 사라진다. 세 사람, 아니, 한 사람. 불타 없어진 문을 향해 날아오른다. 또는 추락한다.

아르토, 아직 불태울 것이 남았다.

손을 뻗어 촛불을 움켜쥔다.

일렁이는 촛불 위로 올라가 다시 발을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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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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