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해 보자
웨이닝과 에리아나-3
언젠가 끝은 온다. 이를 알면서도 영원을 약속하는 것은, 인류사 아주 오래되고도 고귀한 거짓말이다. 그래도 다 괜찮았다. 거짓말의 색은 중요하지 않았다. 영원을 약속하는 순간은 펼쳐져서 비선형의 도형을 이루리라.
“为了我们的宁。” (우리의 안녕을 위하여.)
술잔이 몇 번 넘어갔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네가 있으니 다 되었다.
언제였을까? 너와 함께 보았던 영화가 생각났다. 예술계는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새로운’ 마법을 내놓았으니. (여기서 외압이란, 대부분 여행자의 축복을 말한다.) 인간 나이 삼백이 되어서야 죽는 마당에. ‘새롭다’라고 칭할 만한 작품이 틈없이 솟구쳐 나왔다. 놀랄 일이었다. 클리셰가 그럼에도 굳건히 살아있어서. 몇백을 넘어 몇천과 몇만, 수십만개의 사랑이야기도. 모두에게.
그래, 이것이 인류가 처음 내린 오답이었다. 클리셰를 묻힌 사랑 이야기는 인류 정도의 지성체-종족에게도 ‘팔린다’는 오류. 유일하게 인류만이 유독 감정을 안다. 엊저녁에 끝난 자유주의와도 같은 무지하며 게으른 아이디어는 그렇게 스스로 종말을 맞이했다. 군체 노예가 중력을 이해해도 사랑이 왜 살생과 엮이지 않는지 절대 모르듯이. 기갑단에게 토로바틀은 명분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이.
그러니 내 너를 얼마나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지를 설파할 필요 없다. 굳이 한다면, 이 총의 이름을 그리 짓는 것이 나쁘지 않다.네가 몇번이나 술을 엎지르던 날. 취한건 너임에도 내 시야가 세상과 반대 방향으로 돌던 날. 어색하게 쭈뼛거리는 너의 말. 행동. 태도. 실실 웃던 너는 “为了我的宁。”(나의 안녕을 위하여.)/(나의 닝을 위하여.) 이라며 나의 이름을 가지고 살살 놀리기도 했다. 장난끼 담긴 말에도 사랑을 숨기지 않았던 말까지. 다 좋았다. 정말로 괜찮았다. 전부 너였으니까.
“为了我们的宁宁。” (우리의 닝을 위하여.)
그런 네가 우리 사이만의 이름을 달게 부를 때에는 말이지…….
나는 다시 일어선다. 너를 생각하니 이럴 수 밖에 없다. 일생 다할때까지 아물지 않을 상처. 터진 그 이름마저도 전부 네 것이다. 그러니 달려간다. 너에게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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