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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서 죽기를 바라는 고스트

당신을 처음 본 것은 당신의 기억보다 빨라요.* 내가 확신할 수 있는 수많은 참인 기억들 중 하나이죠. 창 너머로, 유리창 너머로 본 작은 초등학교 양호실에서 흰가운을 입고 바삐 움직이던 당신. 그날따라 하늘은 그 이름답게 활짝 피어서 어느 상처 하나 꿰멘 하얀 자국 없이 새파랬어요. 겨울의 오후 네시 즈음, 적당히 길게 들어온 햇빛은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니 그것은 창을 타고 넘어, 벽을 타고, 천장을 타고 들어왔죠. 유리 장식장안의 약물들이 보글보글 놀아대었고요. 그런 당신에게 '아름답다'는 말은 너무나 완벽한 수사이지요. 당신의 외모가 눈부시다는 뜻이 아니에요. 백의를 입은 당신의 발걸음, 땀 내음, 아이들에게 건네는 표정들, 그 모든 것들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순간 깨달은 것이어요.

나는 당신의 죽음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나는 당신의 창가를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창가에 옅게 비추어지는 나의 모습이 가끔 초라해질 때도 있었지요. 차마 용기내서 창가를 두드리거나, 일부러 소음이 나도록 빠르게 위잉, 위잉 날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창가에 비를 가득 머금고 자란, 일층보다 낮은 화분 사이에 숨어서 당신을 지켜보기에 바빴죠. 나에게 발이 있었다면 까치발을 살짝,들고,그렇게,바라보았을 거에요. 당신이 이 하얀 방안에 들어오고, 하얀 의(衣)를 입고, 다시 하얀 방이 까매질 때 까지 무슨 일을 하는지…어떤 아이가 당신의 방에 침입하는지…전부 말이에요.전부.

그러다 당신이 나를 알아본 것은 분홍과 빨강이 어울리어 일렁이는 태양이 열리는 여름이었습니다. 당신이 아닌 아이들이 나를 먼저 발견한 것은 지금 생각하면 천운이었지요. 홀로 다니는 '나'같은 것을, 탑 위에서도, 인류의 전쟁터에서도 먼, 이 작은 아이들의 배움터에서 보는 것은 그들에게도 희귀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나를 발견하고는 시끄럽게 짖어대며 (그들 딴에는) 기분 좋은 함성을 내질렀지요. 정말로, 너무나도 시끄러워서 인간의 귀라면 내이 전정기관이 엉뚱히도 고장났을 것만 같은 울림들이었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나는 당신을 유리창을 사이에 두지 않은 채 볼 수 있었지요. 처음으로 말이에요. 당신의 백의는 햇빛에 반짝이었고 그림자진 얼굴에선 여전히 빛이 났습니다. 몇겁층은 들뜬 아이들을 진정시키면서도 잃지 않았던 당신의 미소. 웃음. 먼지조차 죄송스러워 앉지 못하고 날아갈 의(衣). 당신이 움직일 때마다 따라 움직이던 그림자는 그 고운 모양새를 낮은 화분들의 푸르름과 모래바닥의 연갈빛에 수놓으라 바빴습니다. 해는 가만히 서서 그렇게 당신을 반짝이게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이내 당신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잠잠히 제 교실로 돌아갔으며, 그리하여 나와 당신은 온전히 우리가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우리는 '우리'라 이름 붙일 만한 장소성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기적은 없었습니다. 나에게나 당신이 특별했지, 당신에게 나는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그저 당신도 아이들처럼, 그러나 살짝 놀라고는 평범한 것들을 물었습니다. 나는 특별히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저 페이지 모서리에 적어놓은 다음, 세모나게 그 끝을 접어서 숨기고는 태연하고도 평범하게 대답을 이어갔습니다. 아아, 그러나 그 말 만큼은 숨기기가 힘들어서 자꾸 접힌 마음 페이지 구석이 팔랑이더군요.

"당신의 수호자는 어디 있나요?"

어느 사명을 띄든 잘 해내리라고 이름 붙인, 태초의 우리가 선물받은 의체의 이름은 팔방미인입니다. 아주 하이얀 색을 띄었지요. 마치 당신의 백의처럼요. 당신이 내 수호자를 찾을 때 나는 내 마음 한 페이지에 낙서처럼 번진 그 이름을 다시금 목에 삼키고 말했습니다. 예, 그렇게 나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나는 제 일(一)의 사명을 포기한 팔방미인을 연기하였습니다. 이 때가 우리의 처음이었고, 나는 처음 극의 무대로 올라서었습니다.

당신은 교장을 너무나도 쉽게 설득해서 나를 당신의 하얀 방에 존재토록 하였습니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보이지 않는 상처라도 알아채는 것은 우리의 기본 시스템이니 나는 당신에게 유용했습니다. 아이들도 처음에는 당신 방안의 나를 보고 두 눈을 반짝이며 짖어댔지만 그건 처음뿐이었습니다. 이내 나는 알록달록한 학교 안의, 하얀 방의 하얀 덩어리 하나가 되었지요. 그들의 눈에 더이상 반짝이는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무렴 상관 없었습니다. 당신 곁에서 이리 있는데 말이에요. 아아, 나는 극 위에서 모든 조명을 하나로 받고있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정말로 우리 제 일(一)의 사명을 잊어버린 것만 같은, 예, 나는 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하얀 방을 하이얗게 채울수록…….

당신이 죽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그렇게 내 마음 접힌 페이지안에 낙서 하나가 또 그 공간을 매꾸었습니다.

그 마음들은 아무리 두껍고 무거운 문진을 올려놓아도 자꾸만 팔랑거려 큰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말이지요. 날을 더할수록, 월을 곱할수록, 해(年)를 제곱할수록 나는 극 위에 있는 것이 익숙해졌고 조명은 나만을 비추었으며 그만큼 제 일(一)의 사명은 마음 속에서 또렷이 자라났습니다. 다시 말하건데,

당신의 죽음을 고대하는 일말입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것은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아이들이 떼떼거리는 소리는 가을의 코스모스들이 바람에 무어라 속삭이는 소리를 닮았고, 작은 상처에도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들은 퍽 귀엽게 느껴졌습니다. 언제는 축구를 하다가 다리를 크게 다친 아이가 황급히도 들것에 실려왔는데, 나도 모르게 들것의 뜀박질에 맞추어 하얀 방에서 뛰쳐나가 그가 정확히 어디를 어떻게 다치었는지 스캔하였습니다. 당신이 부탁하기도 전에 말이지요. 그 아이가 큰 병원으로 무사히 실려간 후에야, 피와 땀에 젖은 백의의 당신은 나를 조용히 쓰다듬어 주었습니다…….아, 해는 여전히 그 위상을 내뿜으며 찌르렁 거리는 대낮에. 구름 하나 용납 못 하는 확고히도 제 위광을 뽐내는 파랑-하늘에. 여름의 빨간 장미가시가 번뜩이는 그런 날에. 나를 쓰다듬는 당신의 손길은 정말이지…….행복하였습니다. 행복하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더러 내가 극 위에 서있음을 잊게 만들어버리는 추억을 쌓았습니다. 그 추억에는 늘 당신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공고히 쌓은 접힌 페이지들을, 극의 구성품들을, 섬세하고도 거룩하며 부드러운 손길로 허물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이 때 만큼은, 내 제 일의 사명을 잊어도 좋을거라 하는 착각에 빠지어 극에서 내려올 뻔 하였습니다. 예, 그만큼 당신은 눈부셨습니다. 이 것은 내가 참이라 생각하는 수많은 기억들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함께한 해가 제곱된 만큼 그 해들이 부숴지는 것은 순식간이니.

……이것은 참인 기억입니다. 엘릭스니들이 최후의 도시에 들어온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종자들 중 탑을,최후의 도시를 떠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화는 새로운 종착지를 찾지 못했지요. 그들의 물리적인 종착지도요. 제 아무리 선봉대가 빛의 가문과, 새 기갑단 제국과 강화를 맺었다 하여도 잔챙이는 있는 법. 그들은 결국 그들을 지킨다는 사명아래 도시 외곽을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예, 우리는 도시 외곽에 있었습니다. 굴러다니는 고철덩어리를 엮어 만든 총과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어설픈 군대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으나 작은 아이들과 그들의 보호자에게 가하는 치명성은 말할 필요조차 없지요. 그 때만큼은 우리의 하얀 방도 온통 시뻘겋고 어두웠습니다. 그저 이들이 빨리 지나가기를 하얀 구체에게 빌고, 빌고, 빌었습니다. 나는 극에서 내려와 내 제 일의 사명을 미리 다하지 못함을 처음으로 한탄하였습니다. 우리는 밀리고, 밀리고, 밀리어서, 최후의 하얀(그러나 지금은 어두컴컴한) 방까지 밀리었습니다.총소리는 멀리서부터 천천히,그러나 확실히 다가왔으며, 나는 부상자 중 급한 순서를 선별하였고, 당신은 나의 순서를 따랐습니다. 저기서 소리 없는 죽음이, 때로는 천장을 찌르는 비명이, 깨지는 숨통의 소리가. 멀리서. 다가왔습니다. 당신의 백의는 이미 생생한 붉은 빛으로 물들었고 나는 십육방향으로 바삐 움직였습니다. 

이젠 가까이 그들이 옵니다.

그들의 총보다 엉망인 바리케이트는…….

당신은 나섭니다. 바리케이트 바로 앞으로 나섭니다. 내가 말리는 뜻으로 당신 주위를 빙빙 돌았지만 당신의 그 숭고함을 차마 이길 수 없었습니다. 바리케이트가 낑낑 힘든 소리를 몇 번 내더니 이내 산산이 부수어지고 맙니다. 그들이 도착했습니다! 목적도 없이 제자리에, 장전, 발사! 제자리에, 장전, 발사! 아아, 당신의 호흡에, 장전, ……. 

…………당신의 마지막 숨이 울컥.

나는 더이상 극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조명이 꺼지고 나는 극에서 내려옵니다.  

그렇게 나는 고스트 제 일의 사명을 지켜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지키지는 못하였습니다. 제 마음 접힌 페이지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비밀입니다. 나는 당신을 영영 잊을 작정입니다. 당신과의 추억은 소중하지만, 나는 당신이 더욱 소중하니 영영 이 기억을 묻고 흘러보낼 터입니다.)

영영.

아주 영영.

엉엉 울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의 수호자, 눈을 뜨세요.


* 러블리즈, 안녕(Hi~) 인용 후 일부 수정 URL:

아래는 사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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