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TINY

젊은 늑대가 먼저 올 것이다

13시즌 살라딘x여워록. 3년 묵은 글이라 퇴고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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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그 전설을 아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검을 들고 타오르는 세계를 가로질러 정의와 피를 인도했다." —살라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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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을 반으로 가르는 긴 식탁 위로 양모처럼 두꺼운 먼지 더께가 쌓여 있었다. 테이블보 하나 깔리지 않은 표면은 먼지로 도포되어 얼굴이 비치지 않았다. 오래도록 광을 내지 않아 부식된 목재 프레임은 원목의 본래 색깔이 어땠는지 짐작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수호자는 식탁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시선은 한구석의 잡동사니에 고정되어 있었다. 낡은 전술 보고서 뭉치, 유통기한을 추정할 수 없는 마쉬멜로우 시리얼 박스, 직경을 불문하고 뒤섞인 고대 무기 부품, 그리고 마른 음식물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는 놋쇠 그릇 따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수호자는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그마저도 빛바랜 상표가 그려진 종이 박스 틈으로 빼끔 기어나온 더듬이 한 쌍과 직면하자 금세 흐물흐물 무너져버렸다. 수호자가 물때 낀 글라스에 한가득 담긴 볼트와 허망하게 눈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이 부엌으로 살라딘 경이 들어왔다. 극대화된 일상적 불결함 앞에서 충격을 집어먹고 석순처럼 굳어버린 그녀를 못마땅하게 흘기더니 말했다.

"거기까지 손댈 필요는 없어."

"하지만 이 위에 있는 물건들을 조금이나마 치워 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수호자는 자신의 말이 무례한 언사처럼 들리지 않길 바라면서 최대한 순종적인 태도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그 말은 뜻밖에도 강철 군주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일순 남자의 미간 주름이 깊어지더니, 곧 약에도 못 쓸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구겨진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음, 네, 그렇다면 혹시 시장하시진 않으세요?"

"자네가 주의력이 뛰어났다면 그 많은 그릇을 앞에 두고도 그런 소리를 하진 않았겠지."

수호자의 얼굴이 뜨거워지건 말건 살라딘은 그녀로부터 관심을 거두고 돌아섰다. 빈집의 고독을 통솔하는 발걸음을 질질 끌며 소파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좀 전과 같은 자세로 오래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수호자는 한숨을 내쉬며 빈 그릇을 치웠다. 그릇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자리에 원 자국이 남았다. 그릇 안쪽에 말라붙은 건더기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의식하며 식도가 일어나기 전에 개수대에 던져 넣었다. 싱크대 안쪽에서 찍찍거리는 잡음과 함께 시커먼 덩어리가 뭉클거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손놀림이 다소 거칠었는지 곧장 잔그릇끼리 부딪히며 신경을 긁고 피부에 싹을 틔우는 파괴적인 소음이 일었다. 수호자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녀는 온종일 심기가 불편했던 집주인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얼굴을 식탁 끝의 거실로 돌렸다.

숙소 구석에 쭈그려 앉은 살라딘 경은 수호자 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는 앉은뱅이 탁자에 앉아 행성계 전역의 기갑단 병력 이동을 전송하는 홀로그램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심란한 옆모습에 수호자는 자신이 막연히 상상했던 강철 군주의 이미지와 일상적 범위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실감하며 속으로 한탄했다. 겸허하고 지혜로운 옛 노장의 방이라기보단 되려 처분되지 못한 쓰레기 더미가 범람하는 무인도에 더 가깝게 보이는 숙소의 위생적 실태는 새내기 수호자인 그녀의 말문을 틀어막기에 충분했다. 수호자가 자신의 호기심을 저주하기에 앞서 결정을 번복하는 고민에 빠진 연유가 바로 그러하다. 청소에 열성적인 수호자들을 극구 모집한다는 영문 모를 전언을 선봉대로부터 수령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불미스러운 상황은 그녀의 예측 범위 이외였으니.

"자네들도 알다시피, 그분은 우리들의 도움이 필요하네."

일생일대의 기회를 논하는 책략가처럼 아이코라 레이는 엄숙하게 말했다. 그녀의 화력팀이 호출을 받고 아이코라의 개인 서재에 집결했을 무렵이었다. 선임들이 선봉대장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수호자는 은신자들의 미심쩍은 눈초리가 뒤통수에 따갑게 달라붙는 것을 느꼈다. 굴러들어온 이물질을 감식하는 듯한 눈빛으로 일행을 주시하는 요원의 집요함에 기가 질려버린 덕택에, 아이코라의 연이은 말은 그녀 머리에 한 박자 느리게 입력되었다.

"경께서는 성실하고 열성적인 새로운 빛을 몇 찾아줄 수 있겠냐고 내게 자문을 구하시더군."

"하지만 요 녀석은 고작 타워에 들어온 지 한 달밖에 안 됐는걸요. 이런 어린애에겐 너무 자극적인 풍경이 아니겠습니까?"

정적을 먼저 깬 쪽은 그의 위기감 없는 선임이었다. 건장하고 쓸 만한 사내인 그는 천성부터가 뻔뻔한 헌터였고 언제나 경망스러울 만치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는 웃을 때마다 잘 빠진 건치를 육감적으로 드러내곤 했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인상적인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었다. 헌터는 종종 이 이빨을 믿음의 보증수표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자랑하고는 했고, 그녀는 어느 정도 그 말에 동의할 수 있었다. 실제로도 그의 미소는 어디에서나 잘 먹혔다. 가령 지금처럼 엄격한 상관의 면전에서 그녀를 대놓고 주무르면서도 이 행동이 마치 전우애의 부심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띄울 수 있는 것처럼.

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멀뚱히 서 있는 수호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녀의 턱 끝을 간질이며 장난스럽게 답했다. 그의 순진하고 천박한 몸가짐에 아이코라는 못내 희미하게 웃음 지었으나, 감출 수 없는 지성이 번득이는 그녀의 고학자 같은 얼굴에는 드물게도 송구하다는 기색이 배어 있었다. 그 온후한 광경에 수호자는 절로 그녀의 고상함을 받드는 기분이 되어 척추를 반듯이 세웠다.

"그래서 더 적격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오래도록 근속한 수호자로서 후임에게 명석한 시범을 보여줄 수 있을 거로 생각하네."

그녀는 그들을 차례로 훑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한창 바쁠 시기에 이런 부탁을 하게 된 건 유감일세. 하지만 자네들도 알다시피 요구받은 인원을 충당하기엔 도시의 사정이 좋질 않네. 또한 경께서 말은 그리하셨으나……. 실제로 그 약조를 지키실지는 의문이라 섣불리 수호자를 보낼 수가 없어."

아이코라의 부드러운 눈이 그녀와 시선을 맞춰왔다.

"헌데 다행히도, 자네들은 이 방면에서 경험이 있지."

"아, 저흰 괜찮습니다. 아이코라님의 은혜롭고 널찍한 아량이야 도시의 수호자라면 응당 모르는 바가 없지요. 다만 경께서도 참… 어련하시네요. 아주 한결같으십니다."

"아이코라님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군, 친구여."

"하지만 이런 부탁을 하시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나. 친우여?"

"두말하면 유분수지."

그 말을 하는 타이탄은 그보다 다섯 기수 정도는 앞선 베테랑으로, 어깨가 떡 벌어졌고 얼굴이 검붉게 상기된 남성이었다. 대화 내내 그는 지루하다는 듯이 두툼한 손가락으로 콧수염을 연신 비비 꼬았는데, 만사 중에서도 특히 헌터의 거지발싸개 같은 농담에 질렸다는 얼굴이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다른 이들은 그 속뜻을 쉽사리 눈치채지 못하기 일쑤였다. 아마도 그의 얼굴 골격이 자아내는 강렬한 인상 때문이리라. 제초되지 않고 인중에서부터 턱까지 길게 자란 콧수염 덕분에 그는 때때로 반격의 적시를 기다리는 지휘관, 혹은 승전보를 기다리는 이국의 장수처럼도 보였다. 물론 어느 쪽도 그의 본질에 부합하는 묘사는 아니었다.

그녀는 타이탄의 간결한 대답에서 역력한 성가심을 읽어내고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순히 팀원의 불손함이 발각될 위기를 우려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평소에도 얄팍한 성정을 감추지 못하고 성난 들소처럼 서로를 치고 박으며 말싸움을 벌이기 일쑤였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폭력을 동반한 잡스러운 언쟁마저 충분히 우정의 주먹다짐으로 포장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오직 그녀만이 유일하게 발언권을 가지지 못한 인물이었다. 타이탄이 질책하듯 헌터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가볍게 찍는 동안에도 그녀는 한결같은 침묵을 고수했다. 헌터가 과장된 악 소리를 내며 타이탄의 쌍판을 비실비실 흘겨보고, 은신자의 차가운 배웅 앞에서 쫓겨나듯 서재를 나오면서, 마침내 헌터가 욕봤으니 이젠 뒤풀이하러 가야지, 땅꼬마들아. 운운하며 그들을 시장으로 끌고 갈 때까지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나저나, 살라딘이라고요? 설마 그 강철 깃발의 살라딘 경?"

그녀가 비로소 입술을 뗀 건 저녁의 선술집에서였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음색이었다. 잔에 밀주를 붓던 타이탄의 시선이 그녀 쪽으로 도르륵 굴러갔다. 헌터가 황당하다는 투로 너털웃음을 흘렸다.

"넌 지금까지 뭘 들은 거냐? 그래. 우린 지금 그 좆나게 대단하신 강철 군주의 처소로 들어가는 거라고. 뭐, 뜨내기 수호자 흉내 내기엔 그간 처먹은 짬밥이 영 섭섭하긴 하네."

"네가 별스러운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별종일 줄은 몰랐다. 귀는 어다가 두고 다니는 거야?"

"대관절 무슨 영문으로 남의 집을 급습해야 하는지 설명을 해주시진 않았는걸요."

"하긴, 넌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모를 만도 하지. 그래도 왕년에 강철 깃발깨나 뛰어본 수호자들은 암암리에 다 안다고."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 노친네가 신입들 끌어다가 자기 집 청소 시키는 거 말이다."

타이탄이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그에 수호자는 반사적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수호자들 사이에선 그런 속설이 있지, 군주의 제단에 횃불은 붙이되 사원의 문지방은 함부로 넘지 말라.""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그쪽 라인하고는 안 엮이는 게 상책이라 이 말이야… 너 저장고에 방랑자 봤지? 엔간해선 그 새끼보다 더 돌았으면 돌았지 낫지는 않아. 암흑기 수호자랑 일면식 떼어봤자 괜히 연소자의 예의범절 두고 꼬투리나 잡히고 만다니까."

"완전히 고참 수호자 같은 감상의 정석이다, 그거."

헌터는 귀에 손가락을 쑤셔 넣고 시큰둥하게 후볐다. 그 꼰대 영감 성질머리 받아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누굴 씨발 시간 남아도는 용역으로 아냐고. 세간 살림 치우는 데 굳이 프레임 안 쓰고 아직 싹수 시퍼런 꼬맹이들 갖다 놓겠다는 게 뭐겠어? 산전수전 다 겪으신 군주에게 니들 같은 꼬맹이들은 좆밥이라 이거지. 늙었으면 슬슬 곱게나 갈 것이지, 어째 되먹지 못한 성질만큼은 아직도 죽지 않는 모양이야. 헌터의 장광설이 길어질수록 수호자의 안색이 차츰 어두워졌다. 

지위를 이용한 착취라니!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런 불공정한 명령이라면 왜 불복하거나 항거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 말에 헌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타이탄과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더니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가래 끓는 듯한 폭소와 기침 소리가 사내들의 목청에서 연달아 터져 나오는 동안 수호자는 토끼처럼 둥그런 눈을 멍하게 껌벅였다.

"얘 좀 보게, 완전히 얼어버렸잖아.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그렇게 웃지 마세요. 전 진지하다고요. 경을 그리도 싫어하신다면, 굳이 왜 이런 일을 하겠다고 자처하셨던 건데요?"

"당연한 걸 묻는구먼. 뭐긴 뭐겠어, 당연히 쩐 때문이지."

"...네?"

"…너 진짜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제길, 이 빙충맞은 새끼 양을 어쩌면 좋을까!"

이제 헌터는 거의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다. 그녀는 생리적인 불쾌감과 모욕당한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벌게졌다.

"그 강철 군주의 집이라니. 완전 따놓은 노다지잖아. 물론 집구석 냄새는 쓰레기장이 따로 없이 구리지만… 좀만 참고 뒤져보면 아주 금광이며 거미 자식 보물전이 따로 없다니까. 그 쓰레기 더미에서 몇 개만 빼돌려도 돈벌이가 쏠쏠할걸."

헌터는 옷소매로 입을 닦았다.

"뭣보다도 팩션 쪽에는 그런 것들에 환장하는 변태 새끼들이 꽤 많거든. 수호자 기준으로는 그냥 엊다 써먹을 데도 없는 골동품인데, 저들 딴에는 사료적 가치가 있다나, 뭐라나…."

"본전을 까놓고 보면 허울 좋은 개소리일 뿐이긴 하다만. 나쁠 건 없지."

"아, 선배들.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하하, 현역도 아닌 영감이 그런 잡동사니들을 모아둬봤자 어쩌겠어? 여느 노친네들 습관이 다 그렇듯 방구석에서 썩어갈 때까지 가만 냅두고만 말지. 그렇게 방치해두느니 차라리 그게 필요한 놈팡이들한테 갖다 바치는 편이 더 낫지 않겠냐는 말이야. 겸사겸사 요 주머니도 채우고."

"하지만 어느 쪽이든 도둑질인 건 변하지 않아요. 전 그러지 않을 겁니다."

도덕적 올바름으로 충만한 그녀의 음성은 흔들림 없이 견고했다.

"다른 이들에겐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물건처럼 보일지라도, 경께는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이 소중한 자산일 수도 있잖아요. 절도 행위는 수호자로서 옳지 않은 일입니다."

"너무 그렇게 내빼진 말고 한 번 생각해 봐. 그 책상물림들은 원하는 걸 얻고, 넌 미광체를 싹싹 긁어모으는 동시에 헛똑똑이들의 산타 노릇도 하는 거야. 생각해 봐, 그 누가 강철 군주의 움막에 납시겠다 자처하겠어? 들이는 수고에 비하면 이런 건 진짜배기 나쁜 짓 축에도 못 들지… 아니면, 그 영감을 구워삶을 다른 속셈이라도 있는 건 아니지?"

수호자의 로브 아래를 난폭한 손길로 들추며 헌터는 실없이 웃었다.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걸 무심히 지켜보던 타이탄이 덧붙였다.

"다른 건 다 괜찮지만, 대신 다락은 들어가지 마. 괜히 이것저것 들쑤시고 다니다가 노친네한테 깽값 물기는 싫으면 그 예쁘장한 두 다리 간수 좀 잘하는 편이 좋을 거다."

"영감 성격에는 부러뜨리고도 남을 것 같은데."

"어쩌면 그것보다 더 심할 수도 있지."

"휘유, 상상만으로도 끝내주는군."

그러더니 뭐가 그리 또 재밌는지 그녀를 곁눈질하며 서로 시시덕거리는 것이었다. 수호자는 희미한 혐오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사수들이 나누는 지저분한 농담은 그녀의 실질적인 직업적 자부심에 아무런 여파도 끼치지 못했다. 그들 행동의 거칢은 그녀와 살아온 삶의 방향성이 다르기 때문에 빚어진 성격의 일부였다. 그들이 수호자라는 미명하에 천박한 태도를 가장할 뿐임을 그녀는 알았고, 따라서 금수 같은 사내들의 상습적 일탈을 제지하는 매 순간마다 무한한 인내심과 포용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부활한 이래로 여행자의 이름 앞에서 항상 결백했으며, 그녀가 수호자로 간택된 것은 남모를 특별한 사명이 따르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어쩌면 그녀는 불특정한 빈민의 구제자가 되기 위해 무덤가에서 소생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미 수호자의 존재 의의에 필참되는 세 가지 덕목—헌신, 자기희생, 그리고 죽음—에 극렬하게 심취해 있었다. 물론 동료들의 낙관은 때때로 그녀를 피로하게 했지만, 그녀는 그들이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에 열중하는 여분의 시간마저 무익하게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늘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만 했다. 비록 정신적 피로감이 만만찮더라도 그녀의 노력에 결실로서 동반되는 일말의 성취감은 그간의 고통을 선회할만치 충분히 달콤했다.

손에서 잔을 돌리며 수호자는 마지막 강철 군주에 대해 생각했다. 이따금 타워에서 목이 빠져라 몇 번 올려다본 것이 전부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강철 군주에 대해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그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내면에서 헤아릴 수 없는 연민의 감정과 존경심이 샘솟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위를 통한 착취가 뭐 어떻단 말인가? 그저 전언을 수령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누적되었을 뿐, 실제로는 그의 독신 생활을 보조할 사람이 그저 필요했던 것일 뿐이리라.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를 전쟁지능에 모조리 잃은 경험은 범인으로서는 도통 상상할 수 없는 종류의 고통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슬픔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강철 군주의 명맥을 잇는 살라딘의 의지를 그녀는 내심 흠모하고 있었다.

삿된 생각을 환기하자 그녀의 가슴이 새로운 의지로 가득 차올랐다. 비록 동료들은 자신을 세상 물정 모르는 계집이라고 비하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신실한 믿음만은 황혼이 저무는 순간까지도 불변할 것이었다. 그녀는 타는 듯한 눈으로 희망했다.

자신도 그런 수호자가 될 수 있을까?

"아무튼 터는 건 우리 몫이야, 넌 얌전히 고개만 끄덕이면 돼. 그게 네 쓸모의 전부니까."

…그럴 수 있을까? 제 허리께에 은근히 감겨오는 헌터의 팔 안에서 그녀는 몸을 떨며 생각했다.

다음 날, 그들은 펠윈터 봉우리로 출발했다. 철의 신전은 코스모드롬 역병 지대 인근의 고지대에 위치한 강철 군주의 본거지였다. 올드 러시아의 분지가 기계 역병에 침식된 이후로 사원을 오가는 방문객의 수는 안전상의 명목으로 한결같이 제한되어 왔다. 그녀는 부활한 이래 딱 한 번 정도 사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격리 구역 순찰 보조 업무로 봉우리에 파견되었을 적이었다. 얕은 경력이 경력이었던지라 그녀의 역할은 현장 전투가 아닌 단순한 브리핑에 그쳤을 뿐이었지만, 그 사실에 크게 아쉬웠던 적은 없었다. 본디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큼 자신의 존재를 가장 증명받는 기분을 느끼는 일도 없을 테다. 또한, 당시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금의 동료들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보상은 거진 충분한 셈이었다.

훈련을 끝마치고 비로소 화력팀에 정식으로 합류했던 기쁨의 순간을 회상하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동료와의 일체감으로 그녀는 미소지었다. 그런 연유로 수호자에게도 강철 사원은 의미가 남다른 장소였다. 난생 처음으로 사원의 웅장한 정취를 목도하고 금방이라도 질식할 듯한 기분이 되었던 것을 그녀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신전의 돌계단 하나하나가 그녀의 방년 육개월짜리 삶보다 두어 배는 큰 역사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

일순 선체가 흔들리는 진동에 상념이 멎었다. 그녀는 창밖의 설원을 바라보았다. 미립자에 신체가 개조된 스플라이서들이 붉은 검날을 들고 눈 덮인 황무지를 배회했다. 그들은 날갯짓 한 번으로 병균을 흩뿌리는 지저분한 조류 떼처럼 저마다 목 관절을 빼밀고 러시아 영공을 가로지르는 우주선을 좇았다. 육화된 신체를 저버리고 원리에 몸을 의탁한 어리석은 영혼들을 주시하며, 그녀는 뜻밖에도 사원의 풍경을 떠올렸다. 그리고 문득 쓸쓸한 기분이 되었다.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심과 비교하면 보수 직원들이 사실상 없다시피 하는 편임에도, 제단의 심부로 이어지는 복도 곳곳에는 꾸준하게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낡고 투박하지만 남모를 정성이 느껴지는 공간 속에서 그녀는 깊은 고독을 읽었다.

선체가 봉우리의 착륙장 방향으로 하강하기 시작하자 수호자는 차가운 유리창에 가볍게 이마를 눌렀다. 간혹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그녀는 출처를 유추할 수 없는 서글픔에 걷잡을 수 없이 휩싸이곤 했다. 우주선이 지면에 천천히 상륙하는 동안 그녀는 쇠락해가는 사원을 갈고 닦는 관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성소에 낀 거미줄을 손수 닦아내는 쓸쓸한 인영과, 기계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정성스러운 섬세함을. 고철로 뒤덮인 황야와는 달리 그곳에는… 적어도 인간성이 있었다.

반면, 살라딘의 처소는 사원으로부터 걸어서 약 십오 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증축된 단독 주택이었다. 도시 내부에서도 연식이 긴 수호자가 노동 환경과 보급형 생활관을 별개로 분리하는 경우는 그리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현관에 당도한 순간부터, 아이코라의 말이 헛된 충고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그녀의 뇌리를 날카롭게 스쳤다. 강철 군주의 실거주지는 당사자의 이름에 따라붙는 휘황한 수식어가 가히 무색하리만치 빈곤하고 허름했다. 관리 상태로 보아 최소한 몇 개월, 혹은 몇 년 동안 방치된 것 같았다. 진입로에 쌓인 눈은 발목까지 차오르는 동안 제설 작업을 전혀 거치지 않았던 것처럼 푹푹 밟혔고, 아마도 화분으로 보이는 석재 박스에는 누렇게 시든 잡풀들만 가득했다. 칠이 벗겨진 외벽은 초라한 속을 훤히 내보이고 있어 집주인이 그리 건실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만 같았다. 멀리서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언제부터 때기 시작했는지 모를 굴뚝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주먹으로 문을 두들기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건너편에서는 인기척만 느껴질 뿐 통 대답이 없었다. 아, 또 시작이시네. 결국 짜증스레 목을 몇 차례 가다듬은 헌터가 군주를 호명하는 우레같은 외침을 뽑아냈고, 그제야 녹슨 철문이 삐걱대며 어두컴컴한 속을 내보였다.

살라딘은 평복 차림이었다. 오가는 이 없는 성전을 자리보전하는 기사의 육중한 갑주 대신, 양 소매가 해진 플란넬 셔츠를 걸친 그는 평소보다 확연히 덜 위압적인 외형이었다. 더는 지상의 어떤 전쟁과도 무관하며, 그저 요양지에서 삶의 말년을 준비 중인 연로한 노인처럼 보였다. 그러나 문이 열리기 직전, 살라딘이 등 뒤로 산탄총을 슬며시 감추는 모습을 그녀는 똑똑히 보았고 긴장으로 뒷목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로한 강철 군주는 불시의 방문객들을 위아래로 훑더니, 미간을 살풋 좁혔다. 눈 밑이 풀썩 꺼진 추레한 얼굴에 나뭇결처럼 미세한 잔주름이 졌다. 모로 봐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기색이 역력했다.

"난 자네들을 부른 기억이 없는데."

"안녕하십니까, 로드 살라딘. 여전히 정정하시군요."

헌터가 느물느물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살라딘이 눈살을 찌푸렸다.

"청소 건으로 온 거라면, 분명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네."

"하지만 경의 어린 여우께서는 전혀 다른 의견이신 듯 보이던데요."

"아, 젠장. 아이코라."

살라딘은 앞통수가 지끈거린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늘진 얼굴에서 깊은 탄식이 우러났다. 헌터의 얼굴이 서서히 희열로 들뜨기 시작하는 것을 그녀는 걱정스레 지켜보았다.

"서로 생각이 일치하지 않으셔서 참으로 아쉽게 됐습니다."

"태평한 소리는 집어치우게. 내 집을 치우는 데 이만한 인원들은 필요 없어. 그게 자네들 같은 수호자라면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저희가 이대로 돌아가면 아이코라님이 슬퍼하실 텐데요."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지. 아이코라가 고작 이 정도 변덕에 흔들리기엔 지나치리만치 대범한 인물이라는 걸, 자네들이 모를 리는 없을 텐데?"

"아, 당연히 알면서도 해 보는 말이지요. 부탁드리건대 좀만 봐주시지 그러십니까. 게다가, 저희야 뭐 경의 처소에 한두 번 들락거린 게 아니지 않습니까?"

"똑같은 말을 두 번씩이나 하는 취미는 없네. 이만 얌전히 꺼지지 않으면… 나와 의전을 벌이겠다는 의향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지. 자네 빛과 내 주먹 중 어느 쪽이 더 빠른지 겨뤄볼 텐가, 헌터?"

"윽, 그건 극구 사양입니다만."

"진짜 이러시기입니까? 저희가 이 추운 바깥으로 싹 내쫓겨도 좋으시다고요?"

"내가 자네처럼 약해지기 시작했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젊은 늑대들의 흑심을 파악하지 못할 만큼 늙지는 않았어. 하지만 자네들이 정 그렇다면…."

그녀는 일순 경직되었다. 살라딘이 그녀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노인의 동굴 같은 눈동자가 그녀를 가리켰다.

"그 옆에 있는 새로운 빛을 데려가도록 하지."

한동안 정적이 일었다. 

헌터가 비틀린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애써 웃었다.

"진심입니까?"

"진심이 아닐 이유가 있나?"

"오, 이럴 수가."

"아니, 아니, 아니… 하지만 도움이 안 되실 텐데요. 저 말라빠진 뼈대를 좀 보세요. 척 봐도 육체 노역에는 쥐약인 계집이지 말입니다."

"그러면 이참에 단련시키면 되겠군. 들여보내게."

그리고 자네들은 이만 가보고. 살라딘의 축객령에 헌터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으나, 살라딘은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들은 덩그러니 현관에 남겨졌다. 헌터는 홀연히 집 안으로 사라진 노인을 쏘아보며 낭패라는 듯 머리를 벅적벅적 긁었다. 아 씨발, 망했네… 폭력적인 어조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추접스런 욕지거리와 더불어 헌터가 사납게 이를 가는 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타이탄의 불만스러운 숨소리도. 그녀의 허벅지를 아프게 꼬집으며 헌터는 일갈했다.

"고생깨나 하겠구나, 예쁜아. 알아서 살아나오기를 빈다."

그녀의 귓가에 훅 바람을 불어 넣으며 헌터는 동정 조의 말을 건넸으나, 안광은 그녀를 조소하듯 싸늘했다. 감히 군주의 처소 앞에서 그녀를 대놓고 꾸짖을 배짱은 없었던 것일 테다. 수호자가 미처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헌터는 그녀를 밀치고 돌아섰다. 그들은 미련 없이 그녀를 두고 떠났고, 그녀는 사수들이 멀어져가는 광경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그들은 발걸음을 물리기 전까지 그녀에게 아무런 부탁도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귀중품을 빼 오라는 불경한 요구조차도. 그녀는 서글픈 기분으로 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녀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지나치게 신실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차가운 현관에 한참을 서 있다가, 살라딘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현재 여기.

"오늘은 이만 가보게, 워록."

목소리는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그녀는 퍼뜩 상념에서 빠져나와 돌아보았다. 살라딘이 팔짱을 끼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몸은 소파에서 반쯤 틀어진 채였다. 홀로그램은 어느새 꺼져 있었다. 업무를 끝낸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보였다. 수호자는 자신이 장장 몇 시간 동안 제자리에서 망부석처럼 서 있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살라딘이 해명을 요하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녀는 몸을 움츠리며 힘겹게 말을 끄집어냈다.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았는데…."

"자네 선임들이 나한테 퇴박맞은 걸 보고도 아직 그런 소리가 나오나?"

살라딘의 음성은 차갑고 건조했다. 수호자는 살라딘의 얼굴에 서린 경계심을 똑똑히 읽었다. 그녀가 살라딘의 개인실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부터 줄곧 봐왔던 얼굴이었다…….…아니, 그건 아니었다. 살라딘의 냉정한 시선은 순전히 그녀의 말실수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의 그녀는 동료들에게 버림당한 충격으로 결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책 없이 군주를 좇아 들어간 그녀의 동공에 그만 폭력적인 수준의 살풍경이 들이닥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차례로 벽에 핀 흰곰팡이를 보았고, 거스러미가 일어나고 좀먹은 마룻바닥을 밟았으며, 의자에 걸린 낡은 털 망토에서 풍기는 시큼한 악취를 맡았다. 방치당한 환경의 열악함이 그녀의 숨통을 죄었고 갈라진 입술을 밀랍처럼 봉했다.

그녀가 버벅이는 사이 살라딘은 구석에 놓인 빗자루를 가리켰다. 정 필요하다면 알아서 가져다 쓰게. 하지만 미리 말해두지. 난 자네들을 초대한 적이 없어. 그러니 앞으로 자네가 여기서 뭘 하든 나는 신경 쓰지 않을 걸세. 적당히 할 일이 끝났다는 판단이 든다면, 바로 떠나. 지시를 내리는 살라딘의 태도는 담담했다. 그녀가 정말로 집안을 치울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시큰둥했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는 군주로부터 두툼한 신뢰를 벌기 위해서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그에게마저 버림받을 수는 없었다. 수호자는 동료들과 처음 악수를 나누었을 때처럼 부드러운 억지 미소를 띄우려 노력했다. 봄볕이 쏟아지는 빛바랜 창틀 너머로 그를 부르는 듯한 미소였다. 수호자는 벨벳처럼 부드러운 자신의 언사가 고독하고 소외된 노인의 정신을 침투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입술을 뗐다. 맡겨만 주세요. 제가 이런 데에는 서툴지만, 일가견이 있거든요….

'이런 집에서는 홀몸을 보전하기 힘드실 텐데, 어째서 프레임을 쓰시지 않는 거죠?'

튀어나온 것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살라딘은 인상을 찡그렸다. 강철 군주의 눈에 과녁을 비추듯 예리한 섬광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 표정을 잘 알았다. 삶의 판도를 뒤바꿨던 경험을 복기할 때 사람들은 보통 그런 얼굴을 했다.

'기계를 맹신하는 것만큼 퇴로를 말살하는 패착도 없지.'

의미심장한 대답에 수호자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강철 군주의 얼굴에 깊게 팬 주름에 깃든 고통을 주시하며 다시금 사원의 풍경을 떠올렸다. 제단을 돌보는 애정 어린 손길과 대체 불가능한 섬세함 따위를. 모든 것은 심상의 변환을 거쳐 물줄기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그녀가 본 적 없는 순간들을 조명한다. 어둠을 살라 먹을 기세로 타오르는 제단. 부르튼 손으로 가묘를 매만지는 노쇠한 뒷모습. 잊힌 날붙이처럼 서늘하고 축축한 동공. 눈물 자국이 버석하게 말라붙은 노인의 양 뺨. 닫힌 문 너머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전우들의 혈류를 타고 맥동하는 미립자. 원리를 신봉하는 미천한 영혼들이 뻗어나간 물줄기처럼 황야에 범람하기 시작하고, 남겨진 목숨들은 돌이킬 방도 없이 벼랑으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현재 여기.

마침내 뇌전 같은 깨달음이 수호자를 관통했다. 복숭아처럼 익은 그녀의 뺨이 하얗게 질렸다.

실언이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수호자는 자신의 목을 조르고픈 충동에 휩싸였다. 수호자는 살라딘에게 애써 사과하고 싶었지만, 실상 그녀의 머릿속엔 이곳에 도달하기 직전 예비해둔 자질구레한 인사치레들만이 왕왕 떠오를 뿐이었다. 당신을 돕고 싶어요. 비록 제 화력팀원들은 당신을 배반할 궁리만을 했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저는 수호자니까요. 저는 경을 존중하고 경이 겪었던 일에 큰 유감을 느낍니다. 경은 훌륭한 수호자세요. 그리고 저는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그녀는 혀를 굴리려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녀가 멍청하게 우물거리는 사이 살라딘은 평이하게 그녀의 뒷말을 잘랐다. 성가심이 역력한 어투였다.

"두 번 말하지 않겠네. 이만 가보게."

그 모든 말들은 나오지 못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수호자는 떠밀리듯 집에서 나왔다. 미련스레 청원하기도 전에 그녀의 면전에서 문이 거칠게 닫혔다. 수호자는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잠긴 문을 바라보았으나, 건너편에서는 더는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적막 같은 침묵이 이어졌고, 비로소 그녀는 시큰해진 눈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마중 나온 이 하나 없는 길을 혼자 오래도록 걸어서 도시로 돌아갔다.

*제목은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집 'Lame Shall Enter First' 에서 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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