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TINY

오르는 자는 전부 한데 모인다

Destiny2 : The Drifter x Jud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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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데가 포타온에 참가했던 글입니다. 후편 쓴다 해놓고 까먹은 채로 1년이 됨… . (실환가?) 시간 나면 이어 쓸 것 같네요.

*이름 없는 남자 로어를 기반으로 한 스포와 날조 뿐. 공수는 어디까지나 임의적인 구분이며, 관계성 역시 크게 타고 있지 않습니다.





**

"우리 시대의 문제는 미래가 예전의 미래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폴 발레리



저 밖의 승천자들? 놈들이 이 녀석이었다면 진작에 죽었겠지. 놈들은 전쟁밖에 몰라. 반면 이 남자는 살아남기 위해 애쓰지.

이 사람을 구하고 싶어했지? 이게 성공하더라도, 이 친구가 내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진 못할 거다. 자신처럼 사는 방법은 말이야.

그건 너 때문이지."

—고향, 4부 中








비쩍 마른 암사슴 한 마리가 앙상한 수풀들 사이를 헤치며 걸어나왔다.

겨울철의 고즈넉이 얼어붙은 삼림에서 한 줌 남짓한 어린싹들과 거슬거슬한 나무껍질을 좇아 정처 없는 산행을 이어오던 그것은, 강의 하류와 마주 보는 길목에서 오래전 잊어버린 무언가를 떠올린 귀향자처럼 멈추어 섰다. 검고 반질반질한 눈동자로 강의 흰 입김이 피는 살여울을 응시하다, 이윽고 강변을 향해 차분히 걸음을 옮기는 그것의 둥그스름하게 부푼 배는 금방이라도 눈밭에 질질 끌릴 듯이 아래로 처져 있어 꼭 물을 가득 채운 천 주머니 같았다. 지난한 난임을 거듭한 끝에 비로소 생명의 결실을 본 사슴의 배는, 달이 수십 번 차오르고 다시 기우는 동안 일찌감치 사냥꾼의 덫에 절명한 옛 수컷의 빈자리만큼의 각별함을 품은 채로 추를 매달듯 그 무게를 착실히 더해가고 있었다.

사슴이 등지고 선 산맥에서는 옅은 찬바람이 불어왔다. 폭설의 조짐이었다. 사슴이 미동 없는 수면을 기웃거리는 동안에도, 부슬부슬 흩날리기 시작한 싸락눈은 빗자루의 모처럼 뻣뻣하고 붉은기가 도는 그것의 털결에 소복이 눈 외투를 짜고 있었다. 사슴은 문득 보이지 않는 목줄이 당겨진 듯 긴 두 귀를 쫑긋 세우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사위는 그저 고요했다. 칼바람이 헐벗은 나무들을 모질게 타작하는 소음과, 제각기 흰 눈 지붕을 얹은 침엽수 잔가지들이 이따금 매질에 휘청이며 눈방울을 흩뿌리는 소리만이 적막 사이로 드문드문 들려올 따름이었다. 사슴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다시금 물가로 고개를 수그렸다. 매끈한 검은 수면 위로 그것의 너울거리는 상이 드리웠다. 마치 고대의 거울 속에 주박 당한 영혼처럼 기구한 형상이었다. 그 표면으로 사슴의 주둥이가 입맞춤하듯 천천히 가까워지던 찰나였다.

바람을 휘리릭 가르며 쏜살같이 날아든 화살이 사슴의 허벅지에 쐐기처럼 턱, 박혔다.

거울 속 형상이 순식간에 이지러졌다. 사슴은 별안간 불씨가 옮겨붙은 것처럼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사슴의 새된 비명이 팽팽한 공기를 깨뜨렸고, 그에 검은 수목 사이로 몸을 감추고 있던 갈까마귀들이 질겁하여 일제히 하늘로 솟아올랐다. 사슴이 어쩔 줄 모르고 제자리에서 겅중대는 사이, 남루한 행색의 사내가 뒤편의 풀숲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입에 문 화살을 재빠르게 바꿔 거는 사내의 손놀림은 노련했다. 솜씨는 그에 상응하듯 한치의 빗나감도 없었다. 아직 울분이 풀리지 않았음을 경고하듯 활시위가 빠드득 이를 가는 것도 잠시, 연달아 사내의 두 번째 화살이 복부를 정확하게 꿰뚫자 사슴은 크게 울부짖으며 비틀댔다. 세상을 보지 못한 태내의 어린 혼이 방금 떠나갔음을 직감한 듯했다. 그것은 공황에 빠져 머리를 마구 흔들어대더니, 고삐가 풀린 말처럼 몸을 홱 틀어 지평선 방향으로 튀어나갔다. 그 뒤로 바짝 붙어 쫓는 사내는 흡사 이 불운한 짐승을 채찍질하려 내려온 간수의 자태였다. 이는 퍽 적절한 비유였다. 탁월한 사냥꾼인 사내는 눈동자 속에 가늠쇠를 품고 있었다. 아득히 먼 선조로부터 대물림 되었을 그의 본능은 범인凡人들이 육안으로 가늠할 수 없는 깨달음까지도 측정하는 연장이었다.

사슴의 꽁무니가 불현듯 묘연해질 즈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사내는 멈춰섰다. 잿빛의 갈대로 물결치는 습지대가 그를 반겼다. 사내는 네커치프를 목 위로 당기며 잇새로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바람을 타고 희미한 혈향이 그의 코를 잡아끄는 것을 느꼈다. 발자국은 진입로에서부터 뚝 끊겼으나 나무딸기 같은 핏방울들이 서리 낀 자갈들 위로 유혹의 표식처럼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핏자국은 갈대밭 어드메로 쭉 이어졌고, 그는 가슴을 간지럽히는 색 바랜 줄기들을 헤치며 한참을 나아가다, 풀이 유독 비스듬히 누워 있는 곳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그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비린내가 점점 진해졌다. 이윽고 완전히 멈춰선 사내는 긴 숨을 내뱉으며 그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수풀에 길게 누운 그것은 비로소 어떤 고비에 다다른 듯 보였다. 맥없이 호흡하는 암사슴의 배가 크게 부풀다 꺼지며 구멍에서부터 검붉은 피를 죽죽 뱉어냈다. 사내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암사슴의 동태를 살폈다. 검은 눈이 갈피를 잃고 자꾸만 오락가락하며 불거진 휜자를 내비쳤다.

사슴은 입가와 발목 안쪽이 유독 희었고, 처음 붉다고 생각했던 털은 가까이에서 보니 오히려 아주 짙은 적갈색에 가까웠다. 이 낯선 발견이 사내를 사로잡았다. 사내는 경련하는 사슴의 목을 받쳐 쥐고 그 밑을 가볍게 들추었다. 퉁퉁 불은 젖꼭지 끝이 헐어 있었다. 오래 젖몸살을 앓은 흔적이었다. 아마도 첫 번째 임신이 아니었을 거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 계절에 들짐승이 유산하는 일쯤이야 발에 채이듯 흔했다마는… 사내는 죽어가는 사슴을 보며 뇌까렸다. 그의 가늠쇠는 이제 또 다른 가능성을 좇고 있었다. 한들한들 흔들리는 갈대의 움직임에 맞춰 깊은 생각에 잠긴 사내의 머리칼도 함께 흐트러졌다. 그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침내 그것의 숨이 멎고 눈이 까뒤집힐 때까지.

등 뒤에서 선명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바람 소리와는 확연하게 분간되는 무엇에 사내는 얼어붙었다. 곧이어 그는 잽싸게 바닥으로 몸을 낮추고, 고개를 위로 살짝 틀어 한 뼘 남짓한 거리에서 흔들리는 갈대 무더기를 노려보았다. 그는 숨을 죽인 채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손 안에 서늘한 무게감이 들리자 오한과도 같은 긴장이 삽시간에 그의 온몸을 감쌌다. 무언가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보폭으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는 낮게 욕을 짓씹으며 어깨를 바짝 당겨 붙였으나 눈동자 속 가늠쇠는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견고했다. 사내의 곁에 나란히 누운 사슴은 창백한 시선으로 그런 그를 응시했다. 그가 앗아간 제 목숨을 포함하여, 그의 앞으로 남겨질 몫 따위는 절대 없음을 선고하고 싶어하는 듯이.

발소리가 점차 수풀을 가르며 가까워졌다. 사내는 제 손 안의 쇠붙이를 그러쥐었다. 그리고 곧 들이닥칠 무언가를 기다렸다.




오르는 자는 전부 한데 모인다

Everyone That Rise Must Converge




이 기원을 알 수 없는 격동의 시대에 다다르기 전까지 옛 인류가 도달하지 못한 곳은 없었다고들 했다. 그는 늘 그게 오래된 농담 같다고 생각했다. 붕괴 이전의 삶을 기억하는 족속들은 죄다 화마 속으로 나자빠진 데다, 그처럼 삶의 첫 단추를 과거의 단절로서 끼운 자들은 대부분 그 편린조차 쥐고 있지 않은 이가 태반이었으므로. 재로 돌아간 과거로 현재의 괴리를 논해 봤자 향수가 솟아날 리는 만무했다. 사내는 추위에 튼 뺨을 손등으로 슥 훔치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익숙하고 거대한 구체가 시야에 가득 들어차자 약간 현기증이 일었다.

사내는 어깨에 둘러멘 사슴을 다시 고쳐 안곤 왼쪽 갈림길로 방향을 꺾어 인적 없는 오솔길로 들어섰다. 그에겐 기십년부터 손 안의 손금처럼 훤해진 샛길이었다. 성미 급한 여행자들은 그 아래 누군가가 살고 있으리란 생각조차 못 하고 지나치기에 십상이나, 실은 언 땅 위로 울퉁불퉁 튀어나온 뿌리들이 절벽 아래로 그리는 약도를 쭉 따라가다 보면 감쪽같이 숨겨져 있던 이튼의 허름한 나무 대문이 귀환객을 슬그머니 반겨오는 것이었다.

문어귀에서부터 풍겨오는 모닥불의 냇내에 벌써부터 코가 근질거렸다. 그는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튼에서는 동절기의 방한 작업이 한창이었다. 빛바랜 화폭처럼 차분히 가라앉은 계곡의 잿빛 정경 뒤로, 아낙들과 장정들이 너나 할 거 없이 잡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봐, 저드슨이 돌아왔어."

그 중 하나가 그를 보더니 외쳤다. 저드슨은 그쪽으로 대충 손을 휘저어 보이고는 어치정어치정 불가로 향했다. 먼발치서 인부들이 그를 보더니 너도나도 할 거 없이 일감을 팽개치곤 모닥불로 하나 둘 씩 모여들었다. 그들은 저드슨을 둥글게 둘러싸고, 그가 사냥감을 바닥에 내려놓는 것을 저마다 관심 어린 눈으로 기웃대더니 한 마디씩 거들었다.

"가기 전에 큰소리 떵떵 치더니 기어코 잡아왔네그래."

"어째 못마땅해 보이는데. 자네 몫이 아니라 배알이 꼴리는가?"

"설마. 그나저나 참 희한하게도 생겼군. 이런 건 처음 봐. 털 빛깔이 꼭 벽돌 같구먼.”

"글쎄. 내 눈에는 자네 머리만큼 붉어 보이네만.“

"이 건방진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에이, 시끄러워 죽겠네. 다들 저리 비켜 봐."

머리에 새치가 그득한 여자가 아웅대는 그들의 어깨를 밀치며 타박했다. 여자는 넝마주이 같은 앞치마에 그을음 낀 손을 거칠게 문질러 닦곤, 부지깽이로 불씨를 휘젓듯 사슴의 엉킨 털을 뒤적이고 몸뚱이를 양껏 그러쥐어 무게를 대중했다. 저드슨은 그녀가 그러도록 내버려두었다.

“어머나, 웬일이람. 실하기도 하지….“

여자의 시선이 문득 그 옆에 나란히 누운 다른 무언가에 닿았다. 그녀가 고개를 틀어 저드슨을 올려다보았다.

“게다가 두 마리나 되네.“

“이걸로 빚은 갚았겠지. 마사.“

“두말하면 잔소리지.” 여자가 웃었다. “참, 이럴 때마다 잭슨이 당신 반만 닮았어도 좋겠다 싶어진다니까.”

“아, 눈만 오면 다리가 쑤시는 걸 난들 어째?“ 옆에서 짝다리를 짚은 잭슨이 투덜거렸다.

마사가 한심한 것을 보듯 눈을 부라렸다. “누워서 밥만 축내는 인간이 하루가 다르게 엄살만 늘어.”

“마누라가 뒷바라지는 못 해줄지언정 구박만 해대는구먼. 서러워서 살겠나.“

“너무 타박하진 마셔요. 잭슨이라고 일부러 그러겠어요.“ 지켜보던 다른 여자가 말했다.

마사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이구, 언제부터 저 푼수 편을 들었다고?“

“지금 나보고 푼수라고 그랬어?“

잭슨이 따졌다.

“가끔은 너그러워지자는 거죠. 그래도 아직 남자 구실 해보려고 애쓰는 모양이니.“

“맞아요. 너무 괴롭히진 마요. 오죽하면 허릿심도 예전만 못하다면서요.“ 다른 여자가 거들었다. “반네 말로는 밤마다 들려오는 소리가 숫제 새끼 염소 같다던데.”

여자들이 나불대자 잭슨의 표정이 떫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사가 요란하게 깔깔대며 말했다.

"세상에, 소리가 거기까지 들린다니? 미안하게 됐네."

"미안이고 나발이고, 대체 남의 가랑이 사정에 관심은 뭐하러 둔담?" 잭슨이 툴툴댔다.

"틀린 말도 아닌데, 뭘."

부부 싸움에 끼어 있기 피곤했던 저드슨은 뒷목을 문질렀다. "계속 남편 바가지 긁을 거면 집 가서 마저 하지그래."

“왜? 당신도 슬슬 장가갈 때가 됐잖아.” 마사가 그의 등을 두들겼다. “이참에 많이 봐 둬."

"필요 없어." 저드슨이 딱 잘라 말했다.

"여기 아직 시집 안 간 시퍼런 처자들도 있는 거 잊지 마셔요."

새빨간 머리의 여자가 실쭉실쭉 웃으며 귀띔했다. 그녀가 입을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뺨에 뿌려진 주근깨들도 덩달아 씰룩댔다. 마찬가지로 그 곁에 있던 다른 검은 머리의 여자가 그런 홍당무의 옆구리를 찌르며 청승을 떨기를,

"어머 정말 얘도 참,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내가 뭘 어쨌다고?" 홍당무는 시치미를 뗐다.

"도저히 못 봐 주겠군. 다들 얼른 썩 꺼져."

잭슨이 벌컥 짜증을 터뜨리자 여자들이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뭐가 그리 좋은지 서로의 어깨를 야단법석 밀치며 다시 일터로 향했다. 웃음소리가 서서히 멀어지자 저드슨은 뒷목을 긁적였다.

잭슨이 혀를 찼다.

"오늘따라 다들 뻗대는군. 자네, 저 여편네가 새 약점이라도 잡았나?"

"무슨… 덫 삶느라 고작 자네 집 솥 한 번 빌린 게 다일세." 저드슨이 팔짱을 끼고는 눈짓했다. "그래서 자네 눈에는 어떻지?"

"나쁘지 않아. 살이 좀 내리긴 했지만, 겉가죽은 그럭저럭 멀쩡하고." 잭슨이 암사슴과 나란히 묶인 어린 것을 살폈다. 그것의 부러진 목을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그나저나 답지 않게 새끼까지 잡은 건가?"

"보면 모르나?"

"낚시꾼들도 씨가 마른다고 어린 걸 놓아주는 판에 자네 같은 위인이 그리 매정해졌다는 게 놀라워서 그럴세. 옛 사냥꾼 철학도 한물갔군."

"우리 처지에 작은놈도 가릴 형편은 아니지 않나."

"하긴, 금수야 피라미보다는 보신할 거리가 있지."

"키울 수도 있었을 텐데요."

좀전부터 옆에서 대화에 끼어들 틈만 노리며 안달을 내던 유가 말했다. 저드슨은 뒷짐을 지고 주변을 알짱거리는 계집애의 머리를 밀어냈다.

"아서라, 여물값이 더 들겠다."

"제 밥을 양보해 주면 되잖아요."

"나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요 어린 녀석이 어디 어른들 대화에 끼어들어."

잭슨이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으려 하자 아이가 슬쩍 피하며 재빠르게 말했다.

"마을 아저씨들이 아저씨 이야기를 했어요."

"뭐라던?“

"기를 써봤자 고작 오리 한 마리뿐일 거라 하던데요. 계곡이 다 말라버렸으니까요."

"세상에 다리가 네 개 달린 오리도 있나 보군."

"전 엘크에 걸었어요." 유가 가슴을 폈다. "아저씨는 늘 뭔갈 잡아오잖아요."

"꿈도 크시군. 그건 내기에서 이긴 상이냐?"

저드슨이 유의 손에 들린 감자를 가리켰다.

"애나 씨가 주던데요." 유는 손에 든 감자를 내려다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저드슨 쪽으로 감자를 내밀었다. 우툴두툴한 표면에 작은 유치 자국이 나 있었다.

"드실래요?"

"됐다. 벼룩의 간을 빼먹고 말지." 저드슨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애나가 요즘 몸이 달았는지 주변 사내놈들한테 공들이느라 열심이거든. 이참에 어떻게든 자네 관심도 좀 끌어보고 싶어하는 것 같던데."

잭슨이 목소리를 낮추고 어깨너머를 곁눈질하며 킬킬댔다. 저드슨은 별 감흥 없이 돌아보았고, 바로 좀 전의 검은 머리의 여자가 그를 엿보는 시선과 마주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여자가 수줍은 기색으로 기름진 머리칼 한 줌을 살포시 귓바퀴로 넘겼다. 저드슨은 고개를 다시 돌렸다. 그리고 가시밭길을 예견하는 근엄한 현자 같은 얼굴의 잭슨과 마주쳤다.

"뭐야?"

"저 여자들 말 절대 귀담아듣지 말게."

"그런 적 없네. 앞으로도 그럴 일 없고."

"푼수 잔소리라고 넘겨짚지 말고 내 말 들어. 결혼은 미친 짓이야."

저드슨이 코웃음을 쳤다.

"날 허투루 봉 잡힐 사람으로 봤다니 놀라운데."

"아직도 뭘 모르는군. 원래 여자들 객기가 가장 무서운 법일세.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혈기왕성한 젊은이 하나쯤은 고꾸라뜨리고도 남아." 잭슨이 거뭇한 수염이 올라온 턱을 쓸었다. "내 평생의 후회가 그날 밤 홧김에 마사의 술잔을 받은 일이었다는 이야기를 자네에게 했던가?"

"그 뒤로 제 발에 저려 그 여자와 살림 차렸다는 것도 알지. 여전히 주색가 버릇은 고치지 못한 것 같지만." 저드슨이 그저 으쓱했다. "됐고, 어르신은?"

"깨어 계시네."

"음."

"자네를 보고 싶어 해."

"죽을 때가 다 되더니 회광반조가 돌았나 보군."

"그래. 제레미 말로는 곧이라던데."

"뭐라고?"

일순 저드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잭슨이 황급히 덧붙였다.

"그러지 말게. 이 근방에 의사라곤 그뿐인 걸 알잖나."

"그래서 나 없는 새에 마을에 또 그 사짜 놈을 들였다?"

저드슨이 눈을 치떴다.

"장난해?"

잭슨이 혀를 쯧쯧 찼다.

"친구, 어르신은 중풍에 걸리신 거야. 고뿔이 아니라."

"애시당초 노친네가 앓아누운 것도 그 너구리 같은 놈의 침술 때문인데, 그 말을 또 믿으라고?" 저드슨이 으르렁거렸다. "개소리. 헛간에서 가축 똥이나 치우던 놈팡이가 무슨 의사 행세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라 그러지."

잭슨이 으쓱했다. “그새 잊어버린 모양인데 우리 마누라 사마귀 진료도 그 짝이 봤다네."

저드슨이 손가락질했다. "자네 다리가 그런 반병신 꼴이 나도록 내버려둔 것도 그놈 아니던가?"

"뭐, 나야 엄살 부릴 나이는 이미 지났으니까 됐네."

“퍽이나.”

저드슨이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잭슨이 한숨을 쉬었다.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게다가 요즘은 멀쩡히 살아만 있어도 기적인 판 아닌가. 다리 좀 저는 게 뭐 대수라고."

"저도 그 아저씨 싫어요. 기침에 잘 드는 약이라고 저한테 이상한 쓴 풀 같은 걸 먹였단 말이에요." 유가 덩달아 징징댔다.

그런 건 몇 밤 자면 금방 싹 나아." 저드슨이 침을 탁 뱉었다. "놈이 다음번에도 그러면 그 딸기코를 확 비틀어 버려."

"그래서 아저씨가 요즘 안 오나 봐요… 아저씨가 아저씨의 코뼈를 부러뜨려서요."

"이런 제기랄, 이러다 날 새겠군." 잭슨이 푸주다운 솜씨로 사슴을 어깨에 짊어지며 어깨 뒤를 가리켰다. “됐고, 넌 이만 저메인한테나 가 봐. 곧 손질해야 해서 바쁘니까.”

유가 토라진 얼굴을 했다.

"몰라요. 아까 전부터 어디 가셨는지 안 보이던데요."

"나무라도 하러 갔나 보지.”

유가 찡그렸다. "하지만 장작은 어제 다 팼는걸요."

"넌 옆에서 구경만 했잖으냐."

"저메인 아저씨도 저한테 도끼는 절대로 안 넘겨주신단 말이에요." 유가 투덜거렸다.

"아서라, 그랬다간 너희 어머니가 그이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잭슨이 말했다.

"그 물러 터진 녀석은 내가 찾아보지. 어차피 맡긴 게 있거든."

유가 황급히 저드슨의 옷 끝을 붙잡았다. "아저씨한테 대신 말해주셔야 해요. 저도 배우기만 하면 뭐든 쓸 줄 안다고요."

저드슨은 인상을 찡그렸다.

"왜 다들 나한테 그 녀석을 맡겨둔 것처럼 구는 거지?"

"그야 저메인 아저씨랑 가장 친한 건 아저씨잖아요."

"어린 게 이상한 구석에서 영악하다니까."

잭슨이 못마땅한 눈치로 유를 흘겼다. 저드슨은 유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그의 대답이 떨어질 때까지 꼼짝 않고 버틸 기세였다. 유가 재차 통보하듯 물었다.

”그래 주실 거죠?“

“봐서 전해주마.“

”그럼 됐어요.“ 유가 얌전히 손을 놓으며 말했다.

”이 고집쟁이 녀석, 얼른 집으로 돌아가." 잭슨이 유의 등을 훌훌 떠밀며 저드슨을 흘긋 보았다. "자네도 마저 일 보고."

"그래."

"…이보게, 저드슨."

돌아서는 그를 잭슨이 불러 세웠다.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자네 어르신을 너무 탓하진 말게. 원래 나이가 들수록 만사가 혼란스러워지는 법이야."

저드슨은 대꾸하지 않았다. 잭슨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더니 여자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사라졌다. 저드슨은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잠시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윽고 그 역시도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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