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으로 향하는 여정

물결 위의 왈츠

[연교] 하나지방으로 여행간 운유


출항을 알리는 고동 소리가 항만에 울려퍼졌다. 해가 수평선에 기대어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밑으로 구름시티의 정경이 차츰 땅거미 속으로 잠겨들었다. 바야흐로 먼 바다에서 부둣가까지 밀려온 파도가 묵직한 물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바스러질 무렵이다. 부두에 정박해 있던 커다란 유람선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구경꾼들의 탄성과 꼬지보리 무리의 울음소리가 뒤섞이나, 이 모든 풍경과 소음마저 배에 승선한 이들에게는 새삼스런 감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굽이 낮은 신발을 신고 올 걸 그랬어요.” 정장과 드레스 차림 일색의 승객들은 배의 흔들림이 익숙하지 않은 듯이 불안스레 계단을 올랐다. 선실층에서 갑판으로 올라가는 그 길목에 소규모 병목 현상이 일어난 틈을 타서 나는 짐짓 자연스레 에스코트를 건넸고, 유이는 재빨리 내 팔꿈치 사이로 손을 넣고 꼭 붙잡는다. 

“조금 더 있으면 익숙해질 수 있을 겁니다. 뱃멀미, 괜찮겠어요?”

“뱃멀미 했으면 애초 여기 안 왔을 거지만요. 그러는 하운은?” 

“저야 뭐.” 나는 입꼬리를 올려 싱긋 웃어보인 뒤 파트너를 계단 위의 갑판층으로 이끌었다. 실내에 머물러 있는 동안 잠시 가셨던 항구의 내음이 다시금 공기 속에 차올랐다. 우리는 잠시 서먹하게 갑판을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초호화 여객선의 선상파티라. 오랜만에 단둘이서 여행을 가기로 했을 때─”우리, 다른 지방은 다 가 봤는데 하나지방은 간 적 없지 않던가요?”─‘추억을 쌓기 위해 가야 할 곳 리스트’에 넣어볼까 했으나, 로열하나호 승선권의 만만치 않은 가격은 물론이고 예약이 진작에 마감되어 일찍이 단념했었는데 말이다. 궐수시티에서 출발해 지방을 시계방향으로 순회하는 동안에는 그다지 마음에 떠오르지 않는 정도였는데,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고 구름시티로 들어오기 전에 아쉬운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구름시티 앞바다를 가로지르는 유람선은 프로모션이나 여행 다큐 프로그램에서 하나지방을 소개할 때 반드시 언급되던 요소였으니까.

그래서 구름시티 호텔에 머물던 나와 유이의 앞으로 뜬금없는 편지 한통이 전달되었을 땐, 그리고 그 안에서 유람선 승선 티켓 두 장을 꺼내들었을 땐 얼마나 얼이 빠졌었는지 몰랐다. 기한은 당장 이틀 뒤, ‘디너 파티에 드레스 코드가 있으니 참고하라’는 메시지가 얄밉게 첨가되어 있었다. 어떻게 보답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고민하는 것으로 미뤄두고 도심지의 백화점으로 직행하면서 나눴던 대화는 그럼에도 나름 즐거운 기색이었더라. “그래도 이런 깜짝 이벤트 좋지 않아요?” 나는 그녀의 속삭임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만 했는데 실제로 가게 되니 좀 얼떨떨해요.”  

기분을 내서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참석하기에 겨울 밤바다는 분명히 추웠다. 그래서 충분히 두터운 질감의 스웨터에 기반한 세미 정장 차림으로 배에 올라탔는데, 아니나다를까 살짝 드러난 살갗에 닿는 바람이 퍽 매서웠다. “여기 온 것만으로도 꽤 재미난 경험을 한 셈이죠, 보자……” 입구에서 승무원으로부터 받아 온 팜플렛에는 유람선의 구조도와 함께 시간표가 인쇄되어 있었다. 댄스플로어는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배틀필드 역할까지 한다는 건 조금 놀라웠다. 교류와 유흥을 위한 배틀 필드가 마련되어 있다지. 배 위에서 포켓몬 배틀이 가능한 걸 떠나서 운항에는 지장이 없을지, 금세 고민에 잠긴 태가 드러난 모양인지 파트너가 내 옆구리를 콕콕 찌른다. 

“거기 밑에 ‘격렬한 배틀은 금지’라고 쓰여져 있네요. 이만한 크루즈라면 다들 신경을 써줄 거지요. 그럼 별로 걱정할 필요도 없겠죠?” 유이는 생긋 웃어보이고는 바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어?”

“너도나도 배틀하려고 할 테니, 우리가 제일 먼저 스타트를 끊어버리죠. 어서요, 이런 것도 다 추억이라고요?”

유이의 말대로 승객들은 서로를 흘긋거리고 있었다. 배틀에 참가하고 싶은데, 누구를 상대로 골라야 할 지 재어보는 듯한 시선들이었다. 그 가운데를 유이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지나가자 우리에게로 눈길이 쏠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넓은 배틀필드 한켠을 지키고 섰던 승무원이 배틀 순서를 조율해주겠다며 다가왔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두 사람이 배틀 상대가 되어줄 것을 요청해 왔다. 가라르 지방의 갑옷섬 도장에서 온 스승과 제자 관계라고 자신들을 소개한 두 트레이너는 이윽고 몬스터볼을 각자 쥐어들었다. 여러분의 호흡을 보고 싶다며 호기로운 대사를 던지는 그들을 보며, 나와 유이는 참 좋을 때라고 나란히 웃었다. 더블배틀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지지 않을 정도로 우리 둘이서 합을 맞춰왔으나 말보다는 행동으로 표현하는 쪽이 늘 편했다. 필드로 나오자마자 포효하는 두랄루돈과 애프룡을 보며 우리는 말없이 몬스터볼을 던져올렸다. 킹드라와 파비코리가 나란히 나서며 여유로운 자태로 상대 콤비를 굽어보기 시작했다.

"배틀 첫 판부터 드래곤들의 향연이 펼쳐지겠네요."

"아무래도 말이죠."

유람선은 이제야 항구를 벗어나고 있었다. 항해는 생각보다 길게 이어질 모양이다. 드론에 깃든 로토무들이 분주히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사이 호기심과 관심 어린 눈빛들이 이쪽을 향했다. 나는 가볍게 웃었다. "유이 말대로 추억을 즐겨봅시다."


배는 이제 스카이애로 브릿지를 지나쳐서 원더브릿지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고, 우리는 다이닝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서 드론로토무가 개인 기기로 전송해 준 사진과 영상을 한창 돌려보고 있었다. 승부는 좀처럼 나지 못했던 배틀이었으나 구경하던 승객들 사이에서는 감탄이 자자하게 나왔다고 하였는데, 그건 잘 모르겠고 제삼자 위치에서 본 우리의 모습에 서로 새삼스러워하느라 바빴다.

"하운, 배틀할 때 눈빛이 엄청 날카로워진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어... 저도 처음 알았네요. 일부러 이런 표정을 지으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주인 인간들이 무엇에 열중하건 포켓몬들은 허기를 달래느라 마냥 바빴다. 크루아상을 날름 물고 에브이에게로 뛰어가는 글레이시아와, 등에 피츄와 파쪼옥과 누니머기를 태운 채 푸드가 잔뜩 든 바구니를 물고 가는 헬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비스듬히 턱을 괴고 유이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며칠 뒤면 귀국일인데, 그 전에 어디 더 가고 싶은 장소 있어요?"

귀 가까이 대고 속닥거린 게 간지러웠는지 유이는 어깨를 조금 움츠리고 웃었다.

"음~ 글쎄요. 하나지방을 한바퀴 돌다시피 해서 잘 모르겠는걸요. 그보다 벌써 여행이 끝나간다고요?"

아쉬워라. 유이의 눈썹 끝이 살짝 처졌다. 나는 동감의 뜻으로 그녀의 어깨 위에 고개를 툭 떨군 다음 스마트로토무를 띄웠다. 그때부터 대화주제는 지나 온 여행 행적들을 회고하는 내용으로 자연스레 흘러갔다.

"전기돌동굴, 꽤 깊고 넓었죠. 그 부유석 한번 건드렸다가 정전기 때문에 한동안 고생했는데."

"앰버가 부유석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던 것도 꽤 애를 먹어야 했는걸요."

"태엽산은 천관산처럼 눈이 많이 쌓이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풍경은 멋졌지요? 주얼 찾는 데 시간이 그렇게 많이 잡아먹힐 줄은 몰랐지 뭐예요."

"설화시티에서 봤던 눈도 만만찮게 예뻤죠. 다행히 반짝임이 잘 찍혀 나왔네요."

"응, 그리고... 아, 이것도 잘 찍혔다. 신오지방에서는 스케이트를 타기가 영 힘들었는데 여기서 실컷 탈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그 외에도 겨울철 한적한 물결만에서 즐긴 호캉스나 바닷가 산책이라든지, 뇌문시티에 갔을 때 관람차에서 내려다 본 네온사인 가득한 야경이라든지, 숱한 추억들이 한 순간의 파편으로나마 기록될 수 있어서 퍽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언제든 이렇게 꺼내보면서 함께 회고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서. "많이도 돌아다녔는데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렀다는 느낌이에요. 아직 실감이 나질 않네요..."

감상에 젖은 연인의 옆얼굴을 골똘히 내려다보고 있자면 내심 분위기를 잡고픈 충동이 일었다. '사실은 말이죠, 유이가 가장 환하게 웃었을 때가 제게도 가장 즐거웠던 때 같아요. 스케이트 타다가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를 찧었을 때, 당신이 웃으면서 다가와 손을 내밀어주었던 순간? 또는 뇌문시티에서 뮤지컬 무대를 감상하며 조용히 눈을 반짝이던 당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말로써 적당히 풀어 낼 자신이 없으니까 괜스레 외투를 여며주는 행동으로 무마하고 마는 것이다. 유이가 내 손길에 눈을 동그랗게 떴을 차였다.

뱃고동이 길게 울리며 검은 바다 위에 잔물결을 남겼다.

"...이제 돌아가려는 모양이네요."

겨울바람에 차갑게 식었을 뺨을 긁적이니 의외로 따끔거린다. 나를 향해 눈을 도르륵 굴려보이는 유이에게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손을 내밀었다.

"그럼 대미를 장식할 추억을 만들어보러 갈까요?"

한창 클라이막스로 달아오르던 배틀 필드도 어느 샌가 정리되어 댄스플로어로 뒤바뀌어 있었다. 내 시선을 따라갔던 유이는 짐짓 생각에 잠기는 체 하더니 방긋 웃었다. "좋아요. 대신 리드는 유이가 할 거지요."

그건 내가 절대로 거역하지 못할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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