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길을 돌아가는 발자국 (下)
열 살에서 열한 살로 넘어가는 겨울, 두 번째
*Warning: 정서학대(정서적 위협, 억제), 위험 상황에 대한 방임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하필 이런 일이 오늘 일어나다니!
졸지에 심판 역할을 연달아 맡게 된 제자는 허공을 향해 형태 없는 장탄식을 흘렸다. 부가주님의 제동기가 되어 줄 가주님이 이 자리에 계시지 않는 이상 누구도 부가주님을 막을 수 없었다. 후계자와 그 파트너 포켓몬의 컨디션이 회복되고 자시고 하기도 전에 당장 결판을 내고자 하는 의지가 결투 참여자 사이에 낭낭하였다. 그는 겉으로는 차분한 태도로 휘몰아치는 배틀의 흐름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을 절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둘 중 어느 쪽이 비이성적인가?
후계자는, 동일 가문의 제자로서 소감을 밝히자면, 저 아이는 제 감정에 꾸준히 휘둘리는 것 같으면서도 확고한 논리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후계자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는 목표의식의 근간까지 방금 공표된 마당에 누가 저 애를 말릴 것인가. 부가주님께는 유감스럽지만 여기 있는 제자들 중 3분지 2 정도는 후계자를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남은 몇몇은 ‘후계자가 철이 없다’든지, ‘무모하다’고 여기고 있을 게다.
하나 확실한 것은 이번 분기 부가주님의 채찍질은 유달리 험난했으며, 다들 알게 모르게 지쳐가고 있는 실상이었다. 이 추위에 이런 강도로 이루어지는 극기훈련이라니, 날짜라도 절반 날아가지 않았다면 너 나 할 것 없이 이탈하려고 들었을 터다.
‘그건 그렇고 하루만에 용의 결투를 두 번이나 진행하다니, 여기서 볼 장은 다 본 것 같군.’
심판은 차츰 사고가 산개되는 것을 느끼면서도 노련한 조련사답게 결투의 현황을 머릿속에 착실히 기록했다. 후계자의 용이 비를 뿌리면 어김없이 판도가 뒤집혔다. 움직이는 속도부터가 빨라져 배틀에서 우위를 점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비바라기 전술은 위력을 최고로 치는 라씨 가문에서는 채용도가 낮은 편이라 한번 걸려들면 쉽게 파훼할 수 없다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나 문제라면.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부가주가 부리는 삼삼드래에게로 향했다.
노련하다못해 드래곤 조련에 잔뼈까지 굵은 인물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였다.
“제 인생을 맡아놓은 것처럼 굴지 마세요! 외할아버지라고 말을 고분고분 들어줄 줄 아셨나 본데, 무슨 권한으로 제 삶을 붙잡고 억누르려고 하시는지 이해를 전혀 못하겠거든요!”
하운의 거칠게 고양된 목소리에 차고 건조한 공기가 섞여 더욱 사납게 울렸다. 비가 한바탕 쏟아붓는 전장 속에서 그의 외조부는 이 외침을 그저 코흘리개의 악바리라고 생각하는 듯이 냉소할 뿐이었다.
“하잘 것이 없는 소리를. 꺾어라, 삼삼드래.”
높은 허공을 거닐던 부가주의 용이 그 거대한 몸통을 아울러 용의 살기를 두르고 표적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그것은 지극히 치명적인 공세가 분명하나, 궤적을 읽기 쉬웠다. 그믐은 주인의 예리한 감각과 더불어 빗물이 더해 준 속력으로 그것을 너끈히 회피하였다. 맹렬한 기세 그대로 땅에 내리꽂힌 삼삼드래가 짧게나마 그로기 상태에 빠진 틈을 하운은 놓치지 않았다. ‘하품’으로 옮겨붙은 졸음기가 삼삼드래의 의식을 차츰 좀먹기 시작한다. 공격의 후폭풍으로 굉음이 동굴 구석구석 퍼지는 가운데서 부가주는 못마땅한 듯 혀를 쯧 찼다.
“그런 잔기술을, 그놈이 널 형편없이 가르쳤군. 섬으로 돌아가거든 당장 네 스승부터 갈아치워야겠다. …아니, 앞으로는 내가 널 직접 지도하도록 하지.”
“…내 말을 하나도 듣지 않았잖아!”
한계점을 훌쩍 넘어 분개한 나머지 아이의 고함이 갈라졌다. 하운은 시야가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킹드라를 향해 일갈했다.
“저 녀석이 절대 깨어나지 못하도록 ‘용의 파동’을 마구 쏴 버려!”
먼젓번의 메아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굉음이 관중석을 덮쳤다. 제자들은 저마다 질린 표정을 지으며 귀를 틀어막거나 고개를 휘저었다. 후계자의 킹드라는 상대방에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것처럼 온 힘을 다해 파동을 쏘아댔으며, 삼삼드래는 재투성이가 되어가면서도 쿨쿨 잠만 자고 있었다. 그림만 보면 확실히 후계자 쪽이 우위를 점한 것처럼 보였다.
“정말 하운 님이 이기시는 거 아냐…?”
“들어보면 우리가 악당이 된 것 같은데.”
“뭐, 근데 나라도 저러겠다.”
제자들 중 그 누구도 후계자가 한참 연장자인 부가주를 상대로 존대를 포기하는 언행에 꼬투리 잡을 생각을 않았다. 저들끼리의 숙덕거림 또한 광기 어린 전장까지 채 닿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를 너끈히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던 심판은 그들과는 다른 의견을 품고 있었다.
‘글쎄, 부가주님은 저렇게 무방비한 배틀을 절대 허용하지 않으셔.’
회의적이지만 주의 깊은 눈길이 땅에 아슬아슬 닿을락 말락 하는 흉악 포켓몬에게 집중되었다. 청보랏빛 파동의 잔해 사이로 악문 이빨이 희미하게 눈에 띄었다. 아무리 공격이 쏟아진들 반격하려는 낌새는 보이지 않고 있으니 잠든 것이 맞는 걸까. 세 번의 파동을 쏟아낸 킹드라는 잠시 호흡을 고르려는 듯 일시로 공세를 멈추었고, 고요가 가라앉을 틈도 없이 조손 간의 열띤 대화가 이어졌다.
“당신이 우리 오빠를 무너뜨렸어. 그 터무니없는 규율이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높새가 죽을 뻔했다고. 대체 뭐가… 당신을 그렇게 잔혹하고 온정 없는 인물로 만들었는지… …아냐, 알고 싶지 않아.”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것의 이해는 필요 없다. 네가 가문의 오점이 된다면 네 오라비의 전철을 밟게 해 줄 것이니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거라.”
“나랑 오빠를 버려놓고 다른 지방으로 훌쩍 떠난 엄마나 아빠도 싫고, 날 막무가내로 몰아붙이고 괴롭히는 할아버지도 싫어. 드래곤 조련사의 명예같은 거 알고 싶지 않고, 갖고 싶지도 않다고! 가문의 오점이라고, 당치도 않은 소리. 그 가문이란 게 내 인생의 오점이야!”
“…자질을 가져놓고, 그 아까운 것을 허투루 내다 버리겠다는 말이냐.”
“그딴 건 단순히 내가 혈육이기 때문에 가문에서 갖다 붙인 허울 좋은 핑계일 뿐이잖아! 줘도 안 가져!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게 그렇게나 싫어? 억울해? 생떼를 쓰고 있는 쪽은 당신이잖아! 당신이 내 할아버지라면, 아니 어른이라면, 날 응원해 줘야 도리에 맞는 거잖아!”
‘우리 이 대화 듣고 있어도 괜찮은 거 맞아?’ 제자들이 난감한 시선을 서로 주고받았다. 당사자들만이 있는 개인적인 장소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할 주제가 공론되다시피 하고 있으니 제 3자들은 무안한 심정이 아니라면 겸연쩍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간혹 부가주를 실망스럽게 쏘아보거나 혀를 차거나 가족 간의 싸움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제자들의 전반적인 감상은 비슷한 궤에 놓여 있었다. 어서 빨리 이 혼잡한 결투가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제자 하나가 슬며시 일어나 군중석을 이탈했다.
“현우 데려올게요. 얘가 어디까지 간 거람….”
“어, 사저, 나도 같이 가.”
“저도요….”
험악한 기류를 견디다 못한 제자 서너 명이 선두의 뒤를 따라나선다. 이제 수가 절반 가량 줄어든 제자들은 멀뚱히 앉아서 전장을 빤히 응시했다. 일찍 빠져나갔어야 하나 싶지만 그래도 끝까지 지켜볼 심산도 있었다. 심판은 허전해진 관중을 등으로 느끼면서 잔잔한 한숨을 뱉은 후 마른 침을 삼켰다. 삼삼드래의 태세를 지켜보며 불길한 감각이 살짝 뒷목을 스쳤지만, 가급적 기우이기를 바랐다. 적어도 부가주가 오랜 뒤에야 낮게 깔린 음성을 뱉을 때까지.
“…좋은 말로는 안 되겠군. 그 오라비에 이어서 스승이란 것의 놀음에 단단히 휘둘린 게지.”
오한이 들 정도로 추운 얼음동굴 속에서도 등골이 쭈볏해질 만큼 오싹한 목소리에 부가주 본인을 제외한 모두가, 심지어는 그를 마주 상대하고 있던 하운까지도 흠칫 떨었다.
“자는 척은 이제 되었다. 슬슬 일어나거라, 삼삼드래.”
가주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삼삼드래의 눈이 희번득 뜨였다. 한창 쏟아지던 비가 이미 그치고 난 뒤였다. 킹드라는 급히 자세를 가다듬어 공격을 날릴 준비를 갖추었으나, 비바라기의 은혜가 끊어진 이상 공격의 주도권은 저쪽으로 넘어간 것이 되었다.
“철없는 것에게 드래곤 기술의 정점을 보여주어라.”
쩍 벌려진 세 개의 아가리에서 세 개의 커다란 에너지체가 둥글게 솟아오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동굴의 천장 가까이까지 높이 치솟았다. 심판은 평균 크기를 상회하고도 끝없이 부풀어오르는 에너지를 보고서야 경악했다. 저것 자체로 하나의 광원이 되어 어두컴컴하던 동굴을 널리 밝히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터무니없을 정도로 밝아서 그 누구도 감히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였다. 하운의 얼굴은 빛을 받은 탓에, 그도 아니라면 다른 모종의 이유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믐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려야 하는데 머릿속에서는 토씨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짙게 몰려오는 패색을 인식할 여념도 없이, 자신의 파트너가 지시를 채근하고 있다는 것도 까맣게 모른 채 그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꽁꽁 얼어붙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하운의 귓가에 소름끼칠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내게는 한참 못 미친다는 걸 알아야 할 필요가 있겠구나, 하운아. 삶이란 눈에 보이는 것만큼 녹록치 않은 법이란다. 신기루나 다름없는 것에 집착하다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거늘, 그에 대한 가르침은 받지 못한 모양이로군.”
하운은 반쯤 초점 풀린 눈길로 외조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얼굴표정으로, 그는 이내 위풍당당하게 도사리고 있는 삼삼드래에게 시선을 돌렸다. 번들거리며 빛나는 검붉은색 눈이 악의를 가득 담아서 잔인한 눈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힘을 해방하여라, 삼삼드래.”
“아, 아니, 안 됩니다, 부가주님……!”
뒤늦게나마 상황을 모두 파악한 심판이 다급히 난입하려 했지만 한계를 돌파한 에너지체가 끝끝내 폭발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 일이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 광원이 수백에 가까운 운석으로 쪼개지며 산탄처럼 퍼져 지상으로 낙하하니, 그 아래 모였던 사람들이 공포 서린 고함이나 비명 따위를 마구 질러대고, 운석 하나하나가 지면을 매섭게 두드릴 때마다 소형 지진이 연달아 일어난다. 전장이 한바탕 아수라장으로 변모한 가운데 하운은 제게 똑바로 내리꽂히는 운석 덩어리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몸이 완전히 굳은 탓에 ‘피해야 한다’는 자각이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참 전이었다. 프테라의 기술 도움을 받아 저들에게 쏟아지는 피해를 막아내고 있던 심판이 기겁했다.
“하운 님!”
이명이 난무하는 현장 속에서 피할 시기를 놓쳐버리고 만 아이가 취할 수 있었던 행동은 단지 눈을 감고 몸을 잔뜩 웅크리는 것 뿐이었다. 끊이지 않는 폭발 때문에 귀는 한창 먹먹해져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눈을 감았기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쉼없이 이어지던 땅의 진동이 점차 잦아들었다. 자신이 혼절하거나 그 이상의 심각한 상태에 빠지지 않았음을 그나마 빨리 깨달을 수 있었던 이유는 매캐하게 피어 오르는 흙먼지로 인해 기침이 곧바로 튀어나왔던 덕분이었다. 그대신 눈코입이 지독하게 매웠다.
“…콜록, 흑, 그므, 그믐… 그믐아, 괜찮, 아……?”
운석이 바로 제 머리 위로 육박했는데 어떻게 멀쩡할 수 있었는지, 하운은 이를 따질 여념도 챙기지 못한 채 정신없이 파트너를 찾으면서 눈물이 배어나오는 눈을 힘겹게 치켜떴다. 그새 목소리가 형편없이 쉬어 있었지만 당장 신경을 쓸 만한 사항이 아니다.
“그믐아, 어디 있어…?”
하운은 도무지 트이질 않는 시야 속에서 정신없이 손길로 앞자리를 더듬었고, 얼마 가지 않아 킹드라의 단단하고 매끈한 비늘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운은 크게 안도하며 제 파트너를 크게 끌어안았다.
“여깄다, 찾았어, 그믐아, 나 여기야. 콜록, 너 무사해…?”
연신 기침을 뱉으면서도 파트너의 안부를 찾던 하운이 우두커니 말을 멈추었다. 미동조차 없는 킹드라의 몸체를 손으로 더듬어 만져보던 그는 기분나쁘게 미끌거리는 감촉에 어깨를 흠칫거렸다.
“……그믐아?”
불길함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머리가 순식간에 멍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믐이 왜 움직이지 않지? 이건 피인가? 숨은 쉬고 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 약해도 되는 건가? 그믐이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믐이 왜 눈을 뜨고 날 보지 않는 걸까? 기절, 그래, 기절한 거지? 괜찮은 건가? 그런가? 몰라, 전혀 모르겠어……
용의 결투 따위는 안중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하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사고의 굴레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하염없이 파트너를 불러댔다.
“그믐아, 나 여깄어. 눈 떠봐, 응? 날 좀 봐봐, 그믐아.”
적막이 덮쳤다. 하운은 몸서리를 치며 자신의 소지품을 뒤졌다. 회복용품은 이번 용의 결투를 시작하기 전에 모조리 거덜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손이 닿지 않은 공간에 무언가가 기적처럼 숨어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이 마음을 좀먹고 있었다. 빈 공간을 확인하는 손가락만 애가 탔다. 멀지 않은 곳에서 으르릉거리는 작은 소음만 없었다면 영원히 빈 가방만 뒤질 기세였다.
“하운아, 무사하느냐?”
“——.”
생각지도 않았던, 듣고 싶지도 않았던 목소리가 바로 위에서 들려오자 하운은 그만 가방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대답을 고르기도 전에 가슴 깊은 곳에서 원망이 마구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무식하게 용성군을 퍼부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안부를 물어?’
“……아뇨.”
하운은 무한히 증식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한음절에 꽉꽉 눌러담아 뱉은 다음 그믐에게 정신을 집중하려 했다. 킹드라의 하반신은 처참하게 망가지고 그을음이 눌어붙은 상태였으나, 하운은 이를 필사적으로 외면하며 생명 반응을 재차 확인했다. 몸은 그나마 따뜻하고, 숨도 약하게 쉬고 있으니, 서둘러서 치료를 받게 해 준다면 무사할 거야. 스스로를 다독여 가며 자기암시 걸듯 하던 하운은 뒤를 이어 오는 물음에 입술을 힘주어 깨물었다.
“네 포켓몬은 어떠냐.”
“……치료 받으려면 센터로 가야 해요.”
증발되기 직전인 인내심을 억지로 긁어모아 문장을 겨우 구사해 낸 하운은 다음으로 들려오는 한숨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편하게 만들어주면 되겠구나.”
그 말뜻을 즉각 이해하지 못한 하운이 입을 멍하니 벌리는 순간이었다. 외조부의 말이 신호라도 된 듯이 새카맣게 벌려진 입이 희뿌연 먼지를 제치고 달려들었다. 아이는 삼삼드래의 톱날같은 이빨이 제 파트너의 목덜미로 향하는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고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다만, ‘그믐을 지켜,’ 무의식이 명령하는대로 몸을 던져서 자신의 용을 포식자의 시야로부터 가리려 했다.
이 순간 하운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그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부터 날아온 암석 무리가 삼삼드래를 덮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운은 까무러치기 직전의 지친 표정으로 그믐의 위에 엎드려서 고개만 모로 돌렸다. 심판이 프테라를 대동하고서 전장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부가주는 휘청거리며 자세를 추스리는 삼삼드래에게 한차례 눈길을 준 뒤 노기가 등등해서 심판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지?”
“심판 결과가 한참 전에 나왔는데 부가주님이야말로 무슨 짓입니까?”
하운은 이 모든 상황을 겪고서도 함부로 졸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부상을 입은 그믐을 살피는 데 온 신경을 쏟아붓느라 심판이 다른 제자들과 함께 부가주에게 항의를 하고 있는 모습에도 주의를 기울일 수 없었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급히 달려오는 발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었다. 공황 상태에 빠져 연신 자신의 파트너를 쓰다듬는 손 옆으로 또 다른 손이 불쑥 튀어나온 것을 보았을 때야 하운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수중에 남은 게 일반 상처약 하나 뿐이지만 이거라도 쓰세요. 여기 만병통치약도.”
“어… …”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건넸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운은 진중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수제자를 마주하며 입을 뻐끔거리다가 약병들을 받았다. 부가주와 결투를 벌이는 사이 어디론가로 사라져서 마음 정리는 다 하고 온 듯, 하운은 그의 차분한 시선을 받으면서 약하게 떨리는 손길로 제 파트너의 상처 위에 약을 뿌렸다. 그 절박함을 알아주기라도 한 것처럼 약한 숨만 쉬던 킹드라가 갑자기 꿈틀거리더니 한결 편안해진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기력은 돌아오지 않았는지 눈은 계속 감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해진 하운이 울 듯 말 듯한 표정을 짓자 과정을 쭉 지켜보던 수제자가 조용히 첨언했다.
“당신을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버틴 모양입니다. 그믐 말예요. 상처약의 효과가 있어 보이니 다행이군요.”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야?’라는 의미가 담긴 시선을 수제자에게 보내니, 그는 겸연쩍은 미소를 희미하게 지어보였다. 현우는 아직껏 불그스름한 눈가를 어루만지고는 복잡한 감정이 훤히 돋아나는 상대방의 얼굴을 가만 쳐다봤다.
“당신 덕분에 저도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 말을 들은 하운이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니 먼저 말을 꺼냈던 이는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다. 이윽고 현우는 설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장소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당신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못하겠군요. 나중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과를…”
킹드라를 몬스터볼 속으로 회수한 하운이 벽력처럼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냅다 질주하는 바람에 현우의 말은 채 맺어지지 못했다. 수제자의 황망한 시선을 뒤로 하고, 하운은 이 파국의 원흉이라고 여긴 인물을 향해 돌진했다. 삼삼드래가 갑자기 제 앞을 막아서고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내는데도 굴하지 않을 정도로 피가 머리 끝까지 끓어오르는 상태였다. “비켜!”
하운은 크게 놀란 제자들의 뒤로 물러나라는 손길까지 내치면서 악을 내질렀다.
“왜 그믐을 주, 죽이려 했어요? 왜? 그믐은 내 소중한 파트너란 말야! 그 정도까지 저질러 놓고도 성에 안 찼어? 똑같은 짓을 높새한테도 저질렀지? 할아버지가 강하다고 해서 어떤 짓을 저지르더라도 전부 납득하고 넘어갈 줄 알아? 할머니까지 다 알고 넘어가시는 거예요? 그러고도 할아버지가, 당신이 드래곤 조련사예요? 명예는 얼어죽을, 이름 내밀 자격도… …!”
주인의 진노를 이어받은 삼삼드래가 꼬리로 지면을 내리찍어 커다란 굉음을 일으킴으로써 어린 인간의 목소리를 끊었다. 땅이 울릴 정도의 충격에 다들 주춤하는 사이 부가주가 힘껏 내리깐 음성으로 밀어붙여 왔다.
“약해빠진 것으로 약해빠진 전술만 구사하고 있으니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려 하였을진대 감히 나를 계속해서 거역하려 드는 것이냐?”
하운은 부가주의 시선이 갑자기 움직이는 방향을 보고 퍼뜩 뒷걸음질쳤다. 그믐의 몬스터볼을 쥔 손에 대고 삼삼드래가 은연 중에 입맛을 다시는 모습도 보였다. 하운은 새파랗게 질려서 허겁지겁 그 자리를 벗어나려 하였고, 사냥감을 놓치는 것이 영 달갑지 않았던 삼삼드래가 아이의 움직임을 좇으려 했다. 제자들의 용 둘이 사냥꾼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하운은 자신을 돕는 제자들에게 미처 감사의 말도 전하지 못한 채 정신없이 달음박질을 쳤다. 그믐이 들어간 볼을 가방 속에 서둘러 여며넣고 동굴의 출입구를 향해 발을 딛는 순간이다.
정체 모를 와지끈 소리가 귀청을 때리며 동시에 발밑이 쑥 꺼지는 느낌이 엄습했다.
제가 조금만 더 민감했더라면,
삼삼드래의 용성군이 곤죽으로 만들어 놓은 땅 위를 가로질러 달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이를 깨닫지 못한 하운은 어째서 동굴의 풍경이며 사람들의 모습이 하늘로 휙 솟는 것인지 의아함을 느꼈다. 자기에게 손을 뻗은 사람이 누구였는지, 직전의 얼굴표정들이 어땠는지 곰곰히 따져보기도 전에 시야 속으로 흑안개가 잔뜩 몰려들었다. 손발 끝부터 차가워지며 요란하게 벼락 치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뭉개졌다. ‘몸을 웅크려,’ 행동에 명령을 내리는 체계가 고스란하다.
그러다 문득, 아주 불현듯, ‘유이가 여기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만일 여행을 계속 이었더라면 지금 이 순간의 일에 함께 휘말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물론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만일’이 이루어졌더라면 애시당초 이 얼음동굴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니.
여기까지가 마지막 기억으로, 아이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제자가 쌍둥이섬으로 합숙 훈련을 떠난 지 일주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그간 공방 일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마감에 쫓기기 일쑤, 집안일도 물론 흐지부지 마무리하고 말았다. 그렇게 일주일 내리 불안해 하고 있으려니, 오늘 와서는 ‘감기 걸리지는 않을까’, ‘밥은 잘 챙겨먹고 있을까’ 온새의 걱정하는 소리를 듣다 못한 안다가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불안해지면 직접 가서 보면 되지 않느냐’고.
“당신은 그애 선생이니까 많이 걱정되는 게 당연하겠지. 그럼 당신이 가서 지켜봐 줘, 어차피 당신은 더 이상 그 가문 사람이 아니잖아? 그러니 규율에 얽매일 필요가 없지. 접근 금지 명령이 떨어진 것도 아닌데 뭐.”
안다의 말이 행동에 불을 지폈다. 온새가 싱크대 안으로 고무장갑을 던져 놓고 허둥지둥 외투를 챙기는 사이 안다는 야도킹의 몬스터볼을 건넸다.
“정확하게는, 가는 게 좋겠어. 실은 꿈자리가 영 숭숭해서…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온새는 잠깐 멍하니 볼을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받아 챙기고는, 아내의 뺨에 가볍게 입맞춤 했다.
“금방 다녀 올게요.”
배웅을 뒤로 하고 바깥으로 달려나와 음번을 꺼내는 행동의 흐름에 초조함이 섞여 들었다. 이제 온새는 남쪽 바다 위의 상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똑같은 경로를 과거 몇 번이고 오갔어도 오늘처럼 까마득히 느껴지기는 또 처음이었다.
안다의 예감은 대체로 들어맞곤 하였으며, 세간에서는 그것을 ‘예지’라고도 불렀다. 예감과 불안이 합쳐지면 안정되지 않은 심리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리는 법이었다. 그럼에도 스승은 제자의 안전을 간절히 기원하며 예감이 틀리기를 바랐다. 음번 역시 매한가지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듯, 수평선 너머로 쌍둥이섬의 윤곽이 보이자 성가신 울음을 냈다. 피막 덮힌 날개가 성급하게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진정해, 음번. 우린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딱딱 이빨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온새는 묵묵히 음번의 목털을 쓰다듬어 주면서 가까워지는 풍경을 둘러보았다. 쌍둥이섬의 해안선은 조용했다. 전설의 포켓몬을 탐색하러 왔던 트레이너들은 이미 섬을 빠져나간 듯 했다. 섬의 정상 부근에 있을 동굴의 출입구를 찾는 눈길에 짧은 회한이 깃들었다.
“알겠어, 온새? 나라고 이 자리에 있고 싶지는 않아. 나도 내 꿈이 있단 말야.”
“그럼 당신의 자리를 힘으로라도 빼앗아 드리겠습니다. 사저한테도 나쁜 조건은 아니지요?”
공백이 잔뜩 섞여든 삶에 노릴 것이라고는 힘과 명예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한 가문의 제자로 입적해 우등의 자리까지는 오를 수 있었으나, 정작 정상에 머무른 자를 도저히 꺾을 수 없어서 악에 받혔던 시절이었다. 긴 열등감에 시달리던 끝에 지른 발악은 파멸이 시작될 무대를 마련하였고–결국에는 서로의 자존심과 감정을 가득 담아 몰아쳤다. 역린이 들끓어 날뛰던 액스라이즈와, 분노에 휘말려 이성을 놓은 음번이 싸움을 멈추었던 시기는 가주의 망나뇽이 난입하여 둘을 뜯어냈을 순간이다. 액스라이즈의 도끼날이 붉은 선혈을 그어내고 음번의 날카로운 이빨이 갑주 틈새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중상을 입혀 이미 늦은 때였다. 혹자는 이 결투를 두고 ‘드래곤의 분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조련사들의 책임이자 잘못’이라고 평했고, 온새는 이 혹평에 백번 동의했다. 이후 후계자는 가문을 떠났고 자신 역시 도망치듯 벗어났다. 제자가 궁금증을 거듭 물어도 자꾸만 얼버무렸던 까닭은 조련사의 자격을 가르치는 자리에 섰으면서도 원칙을 어긴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참 못난 스승이지.’
자신을 찾아온 가주가 당신 손녀딸의 스승직을 제의했을 때도 썩 내키지 않았었다. 드래곤을 통제하지 못해 도망자를 자처한 제자를 찾아왔을 정도로 그렇게 사람이 없느냐고 되물으려던 온새는 ‘아가씨가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깨달았다. 이 아이, 내가 있어야 ‘제대로 된 길’을 찾아갈 수 있겠다고. 달리 말하자면 ‘잘못된 길’, 즉 자신과 같은 길로 빠져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기우에 불과했지만,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사제간의 정도 들 만큼 들어서 그런지 그만큼 안타까움을 느꼈던 대상이기도 했다. 사저, 당신은 자유로움을 찾아서 행복했겠지만 당신의 아이는 고독에 갇힌 어린 시절을 보낼 뻔했다.
음번은 상념에 빠진 주인을 싣고 섬 위를 선회하며 내려설 장소를 찾았다. 예민한 청각이 잡음을 잡아냈다. 여타 야생에서 들릴 소리라고 하기에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맹렬하고 커다란 것이어서 털이 절로 빳빳하게 일어섰다. 파트너의 이상을 느낀 온새가 물었다.
“무슨 일이지?”
음번은 키익 울고는 날개를 홰쳐 급강하했다. 울음소리를 신호로 듣고 자세를 단단히 다잡아 두었던 온새는 잠시 후 동굴이 보이는 평지에 어렵지 않게 내려설 수 있었다. 심상치 않은 땅울림이 곧바로 전해졌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고민할 시간도 갖지 않고 동굴을 향해 뛰었다. 저 안쪽에서 비명이 아스라하게 들렸다.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이윽고 수많은 발자국 소리와 함께 조련사들이 앞을 다투어 뛰어나오면서 저마다 사색이 된 채 외쳐댔다.
“가주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부가주님은 어디 계시죠?!”
“몰라, 그보다 하운 님이…!”
“잠깐 기다려. 하운이가 뭐?”
얼굴이 흙먼지로 뒤덮여 엉망이 된 채 울먹거리던 제자는 어깨가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잡히자 벌벌 떨었다. 상대방이 겁에 잔뜩 질린 상태임을 뒤늦게 깨달은 온새는 그를 내버려두고 대답을 들려줄 만한 사람을 찾았다. 누군가가–당시의 온새는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었고, 지금도 떠올리려고 하면 가물가물했지만 그때 들은 목소리는 비교적 차분하였다–얼른 나서 주었다.
“부가주님과 후계자가 용의 결투를 벌였습니다. 기술이 너무 강력했던 나머지 바닥에 싱크홀이 생겨서, 하운 님이 그 밑으로,”
“너희는 레인저에 신고부터 해. 어서!”
온새는 위험하다며 자신을 만류하는 손길도 뿌리쳤다. 제자들의 아연한 모습을 뒤로 하고, 그는 음번을 불러 동굴 속으로 뛰쳐 들어갔다. 뿌연 먼지가 발 밑으로 자욱하게 깔렸다. 문제의 장소를 오래 찾아다닐 필요도 없었다. 출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지반이 크게 무너져 무저갱같은 아귀를 벌리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떨어졌다고. 온새는 아찔함 속에서 숨을 헐떡이다가 이를 물었다. 책임을 물을 인간을 찾아서 질타하는 일은 맨 나중으로 미루고, 지금 당장은 제자를 찾아야 했다. 음번의 다급한 날갯짓이 주인의 심정을 대변하여 지하로 곤두박질치듯 공기를 수직으로 갈라놓고 지나쳤다.
까마득한 하강기류가 이성마저 흩어놓기 직전에 음번의 날개가 우뚝 멎는다.
“아아…”
지하를 흐르는 폭포와 강의 물결은 잔인할 정도로 거세고 차가웠다. 온새는 소용돌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낙담 섞인 신음을 흘렸다. 그애 오빠를 볼 면목이 없다. 진작 하운이를 따라왔어야 했는데, 이건 모두 내 책임이다. 그애를 가르치겠다고 나설 게 아니라 가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켰어야 했는데, 의미를 잃은 후회가 머릿속을 꽉 채워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으, 음번. 아래쪽으로… 물살이 흐르는 방향으로 가자. 하운이를 찾아야 해.”
그는 제자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메아리치던 소리가 사그러들기도 전에 몇 번이고, 목이 쉴 정도로 외쳐도 돌아오는 응답은 당연히 없었다. 음번은 감정으로 증폭된 소리를 묵묵히 견디며 어두컴컴한 허공을 활강했다. 물안개가 자욱하게 낀 바람에 시각적 정보가 완전히 차단된 상황을 온새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그건 마치 ‘네 제자는 절대 찾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으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추위에 곱아든 손가락 마디가 떨어져 나갈 듯한 통증을 느끼며 다시 한번 목소리를 내기 위해 입을 벌렸을 때였다. 물 위를 배회하던 음번이 활강을 갑자기 멈췄고, 온새는 하마터면 파트너에게 지탱하던 손을 놓칠 뻔하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왜 그러지, 음번? 머뭇거릴 시간이 없는데… ….”
음번은 고개를 휘젓고는 은근히 경계하는 울음소리를 뱉었다. 온새는 제 파트너가 지시하는 방향을 읽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안개 속에서 더 이상 보이는 것도 없는데, 무엇이 보인다는 말인가. 그러나 음번은 주인이 제대로 인식을 했는지를 중히 여기지 않은 듯 비행을 재개하였다. 앞선 비행이 목적 없이 배회했을 뿐이었다면, 이번에는 표지판을 따라가는 것처럼 일관되고 올곧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조심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이의 시야에 약한 빛을 내는 무언가가 흘러들었다.
“…눈결정?”
암중비행이 이어지는 동안 물살이 거칠게 흐르던 소리가 차츰 잠잠해지고 있었다. 온새는 오감을 바싹 곤두세워 사방을 관찰하고자 하였다. 물안개는 여전히 두꺼웠지만 공기 속에 지하 특유의 눅눅함은 섞이지 않았으며, 어디선가에서 외부의 빛이 새어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희붐한 빛깔이 대기에 더해지고 있었다. 그 이전에 이 안개가 자연적인 현상인지 의심이 들 무렵, 희끄무레하던 시야가 갑작스레 밝아지며 주위 풍경이 확 몰려들었다. 그들이 물안개를 뚫고 마침내 다다른 곳은 지하수가 흘러들어 고인 지하 호수, 그리고 눈이 엺게 덮여 있는 뭍이 어우러진 동공이었다. 쌍둥이섬에 이런 장소가 있었는지 감탄할 여념은 없었다.
뭍 언저리에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아이의 형상이 있었다. 음번이 주인을 단단한 지형 위로 바래다주기도 전에, 온새는 성급히 몸을 던져서 위치에 아슬아슬 착지했다. 무릎이 충격을 흡수하지 못해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지만 괘념치 않았다.
“하운아. 하운아? 나다. 온새다. 내 목소리 들리니? 하운아.”
온새는 서둘러 외투를 벗어서 제자의 몸을 꽁꽁 감쌌다. 이 아이가 어떻게 외따로 떨어진 장소까지 흘러왔는지 따져보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지금은 그저 아이가 숨을 쉬고 있음에 감사함을 느껴야 했다.
“……음번, 고생했다. 이만 돌아가자.”
고도로 긴장한 상태에서의 비행을 장시간 한 까닭으로 기진한 드래곤이 주인의 말에 유순하게 울었다. 제자의 행방을 수색하는 데 가장 애를 써준 파트너를 몬스터볼로 회수한 온새는 다음으로 반려의 파트너를 불러냈다. 임금 포켓몬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근엄한 얼굴로 인간을 바라보았고, 온새는 그 눈빛을 보며 문득 안다가 어디까지 예지를 했을까 궁금증을 떠올렸다. 이내 그는 고개를 흔들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상록시티 병원의 응급실로 데려다 줘. 부탁할게.”
온새는 제 품 안에 제자를 안아 올리고 남은 손을 야도킹에게 내밀었다. 야도킹의 손톱이 손바닥에 닿기 무섭게 어두컴컴한 동굴 속 풍경은 사라지고 무채색이 쉼없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그는 공간을 건너뛰는 감각에 의식을 맡기며 품 속의 아이를 꽉 붙들었다. 심상찮게 전달되어 오는 뜨뜻한 체온만큼이나 작금의 상황에서 작용하는 지표란 전무하였다.
여기는 어디지.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동굴처럼 새카맣지만, 앞이 잘 보일 만큼 밝은 장소다.
아이는 단순한 물음을 떠올리고는 곧바로 흘려넘겼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눈앞에 벌어진 일만이 중요했다.
손바닥에 묻은 피가 질척거리는 느낌을 남겼다. 본디 은은한 푸른빛을 내던 비늘이 칙칙한 색으로 물들어 불쾌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이는 두려움을 벗어던지지 못한 채로 하염없이 커다란 용의 몸체를 쓰다듬기만 하였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아이는 이유를 떠올리는 것조차 거부하며 용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믐. 그믐아. 무엇이 목소리마저 강제로 없앤 듯 입술만 뻐끔일 따름이었다만. 아이는 훌쩍임마저 절제해 가며 도움이라도 청하고 싶은 심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커먼 배경 속 온통 폐허가 된 대지 위에 인기척이 남아있을 리가 없는데도, 티끌만도 못한 희망을 움켜쥐고 연신 두리번거리던 아이의 눈에 익숙한 형상이 들어왔다. 아이는 대번에 그 정체를 알아보고 반색했다.
“오빠!”
실제로 목소리가 터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이는 반가움에 젖어 제 오빠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곳으로 달음박질 쳤다.
“오빠, 그믐이 심하게 다쳤어. 도와줘, 응?”
아이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잰걸음을 서서히 늦추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청년은 자신의 동생이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요지부동이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아이는 청년이 무엇인가를 앞에 두고 가만히 꿇어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이는 청년의 손이 자신의 손과 비슷한 색으로 물들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이는 청년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깨닫고 자리에 멈춰섰다.
“…오빠?”
아이는 그제서야 청년의 앞에 널브러져 있는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는 그 형체를 바라보며 뒤에 남겨두고 온 자신의 용을 떠올렸다. 얼굴을 가득 메운 음영 때문에 청년의 표정은 제대로 읽을 수 없었으나 극심한 공포에 가득 절여진 음성만큼은 선명하게 들렸다.
“…가야 해.”
“…도망가야 해.”
“도망가.”
똑같은 내용을 반복하여 중얼거리는 청년의 모습에 기이한 기시감이 든 아이는 그에게 조심스레 손을 내뻗었다.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인지, 무엇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는지, 이외 여러가지 의문이 연달아 떠오르지만 그것들을 모두 입밖으로 내놓기에는 아이의 의식은 한 지점으로만 쏠리게 되어 하릴없이 무산되었다. 바로 근처에서 사나운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던 것이다. 아이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못한 채 몸을 잔뜩 웅크렸다. 다른 때였다면 제 용과 오빠를 데리고 함께 자리를 피하거나 미지의 존재에 맞서 싸우려 들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였을진대, 이러한 반응이 나온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으므로 아이는 자신이 옳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길을 거부하였으니 앞으로 네게는 후회만이 있을 것이다.”
아이는 양쪽 귀를 꽉 틀어막았다. 이러면 듣기 싫은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을 테지. 덩달아서 거대한 운석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굉음도 듣지 못하고, 주위의 모든 것을 휩쓸어 가는 폭열음도 듣지 못했다. 아이는 무력한 꼴로 혼자가 되어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간 속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자신의 용도, 단 하나 뿐인 가족도 사라졌다.
“후회해야 해…?”
아이는 허무 속에서 제가 꺼내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하며 멍하니 중얼거린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찰나조차 흐르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가만히 가라앉는 아이의 의식이 다른 자극에 일깨워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길면서도 짧았다. 아이는 제게 내밀어진 손의 주인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하운, 여행을 시작한 거 후회해요?”
맑은 하늘을 닮은 눈 속에서 신비하게 빛나는 홍채가 진지함을 띠고 물어왔다. 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휘젓고 나서도 쉬이 목소리를 꺼낼 수 없었다. 여행을 떠난 걸 결코 후회하지는 않아. 내가 후회하는 것 딱 하나는…
“우리 약속 잊은 거 아니지요, 하운? 같이 여행하기로 했잖아요.”
침잠된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이 친구가 대답을 채근했고, 아이는 재빨리 친구의 손을 붙잡으면서 강한 긍정을 표했다.
“응, 같이 여행하기로 했지. 유이랑 헤어진 뒤로 쭉 그 생각만 해 왔는걸.”
더 강해지고 싶다, 여행 중에 그 어떤 변수도 우리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공백기 내에 강해지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하지만 강해지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텐데, 아이는 ‘내가 힘을 충분히 기를 때까지 더 기다려줄 수 있어?’라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입술만 잘근 깨물었다.
“으응, 그럼 어서 가요. 유이, 그 동안 아주 많이 연습했으니까 충분히 강해졌다고 자신할 수 있는 거지요!”
친구는 생글 웃으며 손을 놓고 춤을 추듯 달려 나갔다. 마치 술래잡기를 하자는 듯한 몸놀림에 아이는 저도 모르게 친구의 뒤를 쫓으려 했다. 후회가 약속을 저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후회에 몸이 옭아매여 옴짝달싹도 못할 까닭은 없을 것이다. 근심 같은 건 잠깐 뒤로 미루어도 좋을 것이다…
다만, 매우 중대한 무언가를 잠시동안 잊었다가 재차 떠올린 순간의 주저는 그 자체로 형상화라도 된 것처럼 아이의 발목을 붙잡고 구렁텅이 속으로 무자비하게 끌어당겼다. 친구의 뒷모습을 놓치고 암전하는 시야 속으로 아이의 처량한 외침이 섞였다. 그 자유낙하는 끔찍하도록 생경하고도 익숙한 감각을 가져다 주었다.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지 알 도리가 없어, 자의로 졸도하고 싶어도 불가능하여서 아이는 하릴없이 비명만을 냈을 따름이다.
어느 덧 아이가 추락감에 몸을 맡기고 침묵을 되찾을 무렵, 마치 얼음으로 조각한 것처럼 아름다운 푸른 빛을 가진 새가 홀연히 나타났다. 아이는 그 생명체와 시선을 맞추었을 때 문득 실낱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어디서 봤더라… …'
그 생각은 오래 흐르지 않았다. 거대한 날개가 아이에게 성큼 다가와서 감싸안았을 순간에 소스라칠 정도로 포근함을 느꼈던 까닭이었다. 아이는 몽롱함에 금세 젖어 눈을 감았다. 이제는 괜찮다고 누군가가 속삭여 주었던 것 같다.
빙글빙글 도는 천장과, 둔중하게 지끈거리는 머리와, 오감이 제 것이 아닌 마냥 낯설게 느껴졌으며, 매 호흡이 뜨거워서 벅차기만 하였다. 하운은 게슴하게 눈을 떴다 도로 감았다를 반복하며 꿈과 생시를 분간하려 애를 썼다. 마지막 기억과 비교했을 때 꽤 많은 것이 달라져 있어서 이를 파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우선 장소부터가 어둡고 추운 동굴이 아니라 밝은 분위기의 따뜻한 실내 공간이었으며, 제가 누워있는 자리도 딱딱한 바닥이 아닌 푹신한 침대 위였다.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오로지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청각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움직여 보려고 했으나 영 자유롭지 못하게 꿈지럭대기만 하였다. 그러다 불현듯, 손끝부터 압력이 지그시 가해지더니 이윽고 손이 저절로 들어올려지는 것이다. 하운은 반쯤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눈을 굴리다 천천히 고개를 모로 돌렸다. 우는 듯한 미소를 띤 얼굴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신이 드니, 하운아?”
“… …오빠?”
하운은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스스로 흠칫거리면서도 억지로나마 상대방을 불렀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현실로 되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도 훨씬 초췌하고 퀭한 낯이 눈에 띄어 근심이 몰아쳤으나, 제 오빠는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이 웃어 보이고는 다른 손을 뻗어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걷어내 주었다.
“너 열감기 걸렸어. 열이 완전히 내릴 때까진 가만히 누워서 쉬어야 한대.”
“…오빠 학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언제 왔어…? 여기는 어디야? 높새는, 그믐이 어딨어? 무사해? 할아버지가, 삼삼드래가, 그믐을… …”
열에 들뜬 나머지 말을 꺼내는 족족 사고회로가 헛돌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여러 방향으로 흘러넘치기 시작하자, 은엽은 재빨리 동생의 눈을 가리고 손을 도닥였다. 그 손길에 미세한 떨림이 깃들었지만 남매 모두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긴 상록시티 병원이야. 선생님께서 널 데리고 오셨고, 나는 연락을 받자마자 학교를 떠나서 어젯밤에 도착했지. 휴학계를 내고 왔으니 내 걱정은 말고. 나한테 학교보다는 네가 중요하잖아.”
누가 뱉었는지 모를 짧은 한숨이 지나치고, 은엽은 여즉 공황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동생을 위해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주었다.
“그믐도 제때 치료를 받았고, 지금은 포켓몬 센터에서 쉬고 있는 중이야. 마침 선생님께서 그믐을 데리러 가셨으니까 조금 있다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안심해, 하운아.”
제 파트너의 상태를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도무지 안정이 되지 않을 것 같았는데도, 하운은 조곤조곤 이어지는 목소리를 듣는 동안 쿵쿵 뛰었던 심장이 차츰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열에 한창 시달리는 사이에 급격한 심경의 변화가 알게 모르게 피로감을 몰고 왔다. 하운은 힘빠진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눈을 여태 가리고 있는 커다란 손을 치워내려 했다. 힘이 부치는 바람에 결국 제 형제가 스스로 손을 치우고 나서야 비로소 시야를 회복하게 된 하운은 밝은 조명에 눈을 끔벅거리며 중얼거렸다.
“…나, 두번 다시 홍련섬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지나간 일을 가만히 되돌이켜 보던 아이는 하, 하는 숨을 짤막하게 뱉고 나서 두 눈을 꾹 감아 버렸다. 용성군이 남겼던 충격이, 그리고 제 용에게 가해졌던 위협이 뇌리에 쟁쟁하게 남아서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머릿속을 기분나쁘게 쿡쿡 쑤시는 통증이 이제는 관자놀이를 쥐어짜는 강도로 자라나게 되어 맥 빠지는 신음성만 연신 흘러나왔다.
결국 하운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 까닭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심한 두통 외에도, 전장에서 압도적인 힘에 짓눌린 패배감, 소중한 것을 강탈당할 뻔한 공포심,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서 나왔다는 안도감, 진저리쳐질 정도로 갑갑했던 가문으로부터 벗어났다는 해방감, 이 모든 감정을 다스리고 감당해 내기에는 지나치게 버거웠던 것이다. 하운은 이를 조금이라도 해소해 보고자 자그맣게 칭얼거렸다.
“여행 가고 싶어…”
“응, 우선 감기부터 다 낫고.”
“친구들 만나고 싶어…”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친구들한테 연락을 돌려 보는거야. 괜찮지?”
“…오빠는… 빨리 돌아가야 해?”
“아니. 네가 다시 건강해질 때까지는 쭉 여기에 머무르고 있을 거야.”
열기에 시름시름 시들어간 끝에 희미하게 덧붙여진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수마에 다시 이끌려 들어갔다.
“나, 꼭… …강해질래.”
세상은 다시금 침묵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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