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엾은 소년은 빈 집에 갇혔네

가상의 ‘영화론’ -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나 영화에 대한 평론/에세이를 씁니다.

유리 수조 by 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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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금실로 커튼을 내리는 듯 찬란한 오후, 한 여자가 결혼을 올린다. 무수히 많은 하객들, 만면에 넘치는 웃음와 축하의 목소리, 흘러나오는 현악 4중주 음악……. 나열하자면 끝이 없는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하루다. 그리고 그 자리의 주인공으로 자리하고 있는,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한 쌍의 커플. 나열한 묘사로는 그 어떤 것도 나쁠 것이 없으나 누구 하나 흠 잡을 것 없는 이상이란 언제나 깨지기 위해서 이야기의 무대에 선다. 행복하거나 적당한 일상은 빠르게 스쳐지나가고, 그 이후 어느 하루. 여자는 무언가를 참을 수 없다는 듯 화장실로 달려가 구역질을 해대고, 그의 남편은 괜찮냐는 물음을 던진다. 그는 걱정스러운 듯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지만, 그와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내심 기대하는 듯한 구석이 보인다. 괜찮아. 여자의 대답은 간결하다. 그러나 그 대답의 이전에 관객들은 섬뜩한 시선을 먼저 마주하게 된다. 창백하고 고운 선의 여자가 욕망으로 눈을 치뜬 모습이 거울 속에 형형하다. 그리고 그 거울의 한켠에서, 샤론이 있는 쪽으로 걸어들어오는 남편의 모습을 떨리는 카메라로 클로즈업하다 화면은 전조없이 암전된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고, 이후 정자체로 반듯이 적힌 타이틀이 올라간다. 영화 〈상냥한 포식〉은 이렇게 시작된다.

식욕 이전에

자리하는 것

이 이야기에서 샤론이 차지하는 역할은 언뜻 단순해 보인다. 남편을 살해하고 소년을 취하는 괴물 같은 여자.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사람을 현혹하고, 그를 해치는 자. 여성 살인자 캐릭터가 으레 그러하듯이 샤론에게도 마녀, 괴물, 또는 팜므 파탈의 칭호가 적절하게 비춰진다. 한없이 행복한 웃음을 짓다가도 칼을 빼들어 흰 목덜미를 갈라 피와 살을 황홀하게 들이 마실 법한 여자. 베일 너머의 시선은 포식자이자, 완전히 인간에서 동떨어진 자로 비춰진다. 하지만 과연 그게 진실일까.

문화가 바뀌며 언어 또한 변화하며 성숙한다. 그 과정에서 어느 새인가 잘 쓰지 않게 되는 단어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전에는 강아지가 되었든 고양이가 되었든 집안에서 키우는 동물이라면 전부 ‘애완동물’이라고 불렀으나, 이제는 ‘반려동물’이라 칭한다. 애완愛玩의 완은 완구를 칭할 때도 동일한 한자를 쓰는 데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놀이하고, 장난치며, 희롱하는 것을 뜻한다. 이전에는 많은 동물들이 멋대로 입양되었다가 멋대로 버려지고, 사고 파는 상품이었으니까. 이제 와서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라고 하여도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를 지칭한다는 인식의 변화가 언어를 변화하게 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동물들에게 반려라는 이름을 선뜻 붙인다. 굳이 그리 먼 옛날 이야기도 아닌 것을 새삼스럽게 꺼내든 것은, 이 영화에서 샤론과 아현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또래와 놀지 못하고 그늘 한 구석에서 친구들을 우두커니 지켜만 보고 있는 아현을 데려오는 샤론의 모습은, 아이를 납치하거나 누군가를 해 끼칠 의도로 행동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기대감과 다정함으로 가득 한 온화한 표정이다. 관객조차도 그 이전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한, 샤론이 아현을 납치해서 데려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불길한 무언가가 아니라 지극히 한가롭고 일상적인 묘사의 연장선상에서 그려지는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애초에 샤론에게는 이 일이 ‘납치’보다는 강아지를 데려오는 일에 가까웠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고. 아이들이 뛰놀고 있는 놀이터를 거대한 펫숍처럼 생각하고 있는 여자. 섬뜩한 일이기는 하지만 백주대낮에 바로 부드러운 손길로 이끌어 아이를 납치하는 심리로는 안성맞춤이다.

샤론은 애초에 아현을 해칠 생각이 없다. 자신이 허락한 정원 안에서만 뛰놀고 자랄 수 있다면 무엇이든 내어줄 수 있었고, 그 어떤 순간에도 심장을 취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의 감정은 시종일관 보이지 않는 레이어를 한 겹 덮어 모호하게 또는 신비하게 그려지지만, 그 어느 순간에도 목숨이나 살을 취할 의도를 띠며 다가가는 법이 없다.

만약 영화가 앞에서 직관적으로 제시한 것처럼 그저 샤론을 마녀이자 괴물로 규정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단순해진다. 아현은 그의 피해자로서 자신을 지켜내 도망치고, 이윽고 마녀가 되는 샤론을 무찌르며 해피 엔딩에 도달하게 되리라. 그 과정에서 샤론의 죄는 낱낱이 밝혀지고, 세상은 그 여자의 잔혹함과 야만성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 것이다. 이는 거의 동화에 가까운 구성이다. 디즈니의 〈백설공주〉, 내지는 〈라푼젤〉의 오마주가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예로부터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살해한다는 것과 가장 밀접한 테마였다. 식욕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를 살생하고 도축해야 했고, 그것은 지금에 와서는 죄악감과 자주 연결되곤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소년, 아현을 죽이는 것은 여자의 식욕이 아니다. 식욕은 샤론을 죽일 수 있는 위협요소로 남았으면 남았지, 아현을 죽일 요소는 아니다. 영화의 제목부터가 〈상냥한 포식〉임은 이것이 이유가 되리라. 열병처럼 끊임없이 지독하게 시달리는 욕망, 내달리는 환각과 교차되는 목소리. 그 끝의 끝까지 절대로 상대를 해하지 않는 불가해한 여자.

이를 확실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장르 규정을 하자면, 망설임 없이 한 단어를 꺼내들어야만 하겠다: 이 영화는 스릴러를 가장한 로맨스 영화라고.

그리고 로맨스의 형식을 가장 강렬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두 사람이 하는 일의 본질은 이른 바 ‘권력 투쟁’이다.

공간이 그 자체로

규칙이 될 때

샤론은 작 중에서 시종일관 아현을 미세하게 조종한다. 입어야 할 옷에서부터 먹게 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거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마음대로 하고, 그가 어긋난다 싶으면 언제든지 손을 끌어 다른 곳으로 데려다놓을 권리도 있다. 이 전제는 관객에게 있어서 온당하게 느껴진다. 납치해온 아이고, 언제 어디에서 정보가 새어나가면 샤론은 위기에 처할 지 모르는 것이 아닌가. 아이가 바깥에 나가는 것도, 바깥의 소식을 너무 많이 접하게 되는 것도 당연히 피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샤론을 범인, 그리고 아현을 피해자로서 해석하면 이 논리는 너무나도 범상한 것이 된다.

하지만 ‘작품 내부의 논리가 정말 그런 규칙으로 움직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분명 저택 밖에는 일반적인 세상이 펼쳐져 있겠지만, 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샤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발각과 진실이 아니라, 아현에게 작용할 매혹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확히 이 지점이 이 영화를 로맨스로 규정하게 만든다.

샤론은 바깥 세상의 윤리와 도덕으로 구속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것은 샤론이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는 거대한 사유공간의 소유자여서이기도 하지만, 처벌 이외의 영역에서 말해보자면 샤론은 타인을 신경 쓰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최소한의 존중이라는 것은 사회의 보편윤리에 기대기도 하지만, 사람이라는 것은 고립을 두려워하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누군가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고 행동할 시 그 사람에게 법적인 처벌이 가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 간의 갈등은 흔한 일이고, 무거운 죄목 없이 공권력이 전부 개입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집단 내에서의 위치가 곧 권력과 입지가 되는 사회에서, 인간이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그 집단 바깥으로 쫓겨나는 것을 인간은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샤론은 어떤가. 그는 고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한 차례의 결혼이 실패로 무산되고, 정숙한 아내로서의 역할은 스스로가 포식해버렸으니까. 그 상황에서 그의 아버지가 선택한 것은 일종의 유폐나 다름이 없다. 샤론은 그 안에서 자유롭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지만, 동시에 그림자와 고독을 파트너로 삼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 상황에서 아현을 데려온 것은 샤론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당연한 선택이었다. 외로움이 샤론에게 있어서 치명상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을 씹어삼키며 견딘다 해도 그의 굶주림이 해소되지는 않을 테니까. (실제로 샤론은, 아현으로 식욕을 해결한 뒤 단계를 밟아 결국 연인이 되고 만다.) 그 누구도 배려할 필요 없는, 자신이 온전히 주인인 외따로 떨어진 섬 같은 저택에서 샤론은 기실 사람이기보다는 고독한 신에 가까운 위치를 점한다.

그 전제를 모두 받아들였을 때, 남는 질문이 있다. 샤론이 이 공간의 온전한 신에 가깝다면, 샤론은 어째서 죽어야 했는가?

그 죽음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승패를 가르는 것은

죽음 너머에

결국 이 이야기의 본질이 권력 투쟁에 있다고 전제한다면, 두 사람이 하는 것은 결국 싸움이라는 말이 되겠다. 두 사람은 이 이야기 내에서 어떻게 싸워나가는가.

샤론이 자신의 수단으로 빼든 칼날은 ‘지배’다. 아현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자신의 입맛대로 조정하고, 알 것과 알지 않아도 되는 것을 그의 동의 없이 분류하는 것. 그러나 샤론은 아현을 패배시키고 무릎을 꿇게 만드는 것에 그 수단을 이용하지 않는다. 샤론에게 있어 지배란 사랑의 가장 궁극적인 형태이고, 원하는 모습의 사랑을 이루어내기 위한 수단일 뿐, 권력 그 자체에 집착하는 자가 아니다. 오히려 샤론은 사실 권력 따위는 어찌 되든 좋은 자다. 태생적으로 권력과 함께 태어나 삶을 함께 했으므로(그리고, 일정 시점 이후로는 자신의 삶에 권력 이외에는 쥔 것이 없게 되었으므로) 그것밖에 수단을 모를 뿐, 그것을 목적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 때는 단 한 번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호흡이나 식사와 같은 것이고, 태도라기보다는 이미 삶 전체에 배인 습관에 가깝다. 그렇다면 아현이 사용하는 수단은 어떤 것인가.

아현은 저택 외부의 인물에게서 도움을 받는다. 문대와 그 이외의 인물들로부터 발견되고, 그들이 먼저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잘라 샤론을 시험하고, 야위어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본다. 그 과정에서 아현은 샤론과 관계까지 가지게 되는데, 그의 목적이 탈출과 자유라면 이것은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을 납치하여 조종해온 자에게 굳이 자신을 안도록 내버려두어, 만족감을 가지도록 둘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저 탈출을 위한 한 차례의 웅크림이나 기다림으로 해석하기에는, 아현의 내리 뜬 눈을 클로즈업하는 쇼트는 차갑거나 타자화된 시선이 아니라 다소 감상 쪽으로 치우쳐 있다. 거기에다가 결정적으로, 이 모든 일련의 과정 속에서, 아현은 한 번도 자신이 먼저 도움을 요청하거나 행동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외부의 개입일 뿐, 그가 직접 나선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이 모든 것이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정리되는 일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현에게 필요했던 것은 탈출이 아니라 진실이었고, 단절이 아니라 승리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영화의 끝에 암전되기 전까지, 편지를 읽고 난 뒤 그런 번뜩임이 시선 안에 깃들 이유가 없다. 저택의 그림자 아래에서 창백한 피부의 소년으로 자라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끈질기게 빛나는 깨달음이, 그 정도의 선명함으로 화면에 담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알고 싶었던 것이다. 샤론의 방에 무엇이 있는지. 샤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왜 자신이어야 했는지. 그 모든 과정에서 자신의 무엇이 가장 간절했는지. 자신이 당신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작용했던 것은 식욕이였는지 애욕이었는지…….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하는 질문으로 적절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 사람이 자신의 연인에게 묻는 질문으로서 합당하다.

그러니, 아현이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탈출이 아니었다. 그는 이 관계의 전제조건에 대해 질문해야 했다. 자신이 품고 있는 의문에 응당 대답을 하도록 요청해야 했다. 문대를 통하여 저택을 빠져나가는 것도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가 만약 샤론에게서 승리를 쟁취하고 이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었다면, 그러니까 ‘사랑을 사랑인 채로 두되 자신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면’ 그런 방법은 악수였다. 아현은 책임을 요구해야 했다. 사랑하는데도 왜 말해주지 않는 진실이 있느냐고. 그러니까, ‘당신은 정말로 나를 사랑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지’를 물어 상대를 사랑의 기준에서 재단해야 했던 것이다. 불을 지르고 저택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샤론이 가진 언어고, 자신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범죄 스릴러 영화로서의 외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시 이 영화의 엔딩은 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사랑으로서 승리를 쟁취하는 흐름으로 본다면 그것은 지극히 온당하다. 결국 연인의 사랑 싸움이라는 것은 이 이야기를 어떤 전제로 진행시킬 것인지, 누구의 언어가 더 중심을 잡고 있는지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사적인 다툼에는 심판과 정당성이 개입할 여지가 줄어들고, 결국 그 관계에서 더 중요한 키워드를 빼 드는 것만이 승패를 판가름 짓는다. 이것은 그런 싸움이다.

그러므로 아현은 자신의 언어를 갈고 닦는 데에 있어 패배했다. 일생을 고독할 지언정 승리하며 살아온 여자를 상대로는 당연한 일일지 모르나 일기일회의 사랑이었으므로 아현에게는 다음 기회조차 없다. 다른 싸움과 달리 이것은 생사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샤론은 죽음을 판돈으로 내걸어 승리를 쟁취했다.

샤론이 죽었다 해도 아현은 영원히 갇혀 살게 될 것이다. 진실을 탐구하지 못했으니, 그것은 영원히 자신의 안에 맺힌 의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의문은 비좁다. 왜 비좁은가 하면 그것은 아현에게 있어 어린 시절의 현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깥으로 탈출했고 저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넓은 세계를 발 디딜 곳으로 얻었으나, 날아서 다른 나라를 가보아도, 눈에 담아본 지평선이 얼마나 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현은 그 의문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유폐한 그 오랜 시간이 잊힐 리 없으니, 연월을 통해 무소불위의 힘을 얻은 그 저택은 아현의 마음 속에 깃들어 불쑥불쑥 청년이 된 그를 집어삼킬 것이다. 악몽처럼, 혹은 영화처럼.

감금을 선택하지 않은 샤론은 영리하다. 욕망의 대상으로부터 아현을 단절시켰더라면 분명 아현은 타는 열망으로 바깥 세상을 바랐을 것이다. 동경에는 불이 지펴지고, 금지된 것에 끌리는 마음은 사랑을 훌쩍 뛰어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샤론은 그러지 않고, 그를 대신하여 자기 자신의 몸을 불살라 사라진다. 초상화는 저택과 함께 불타 사라지고,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남은 것은 자신의 글씨체를 모조한 가짜 편지 뿐. 이마저도 자신의 그림자를 모방한 것일 뿐, 온전한 샤론의 자취가 아니다. 다시 확인하고 들여다볼 방법이 없는 것은 빠르게 왜곡되고, 미화되며, 결과적으로는 그 자체가 미스터리로 남는다. 부정확한 기억 속에서 아현은 길을 더듬어 나아가며 혼란스러워 하게 될 것이다.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억측이었나? 자신을 해치지 않았던 사람을 버려두고 나왔던 자신이 잔인한 것인가? 이성적이었던 판단은 무너지고, 눈가 가까이에서 불을 당기는 매혹은 이제 아지랑이가 되어 흐리게 사라졌다.

가장 완벽한 방법으로 가엾은 소년은 이제 빈 집에 갇혔다. 사랑을 잃었으니 그는 써야 하리라. 가장 넓은 세상을 가장 비좁은 방으로 바꿔버린 여자에 대해서. 기이하고 뒤틀린 사랑이 자신조차도 바꿔놓았던 그 오랜 세월에 대해서. 그러나 아무에게도 증언할 수 없을 테니, 스스로를 기억에 가둔 채 더듬거리며 문을 잠글 수밖에.¹

1. 기형도, 빈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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