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하는 남자, 그는 한 쪽 무릎을 꿇고

가상의 ‘배우론’ -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나 영화에 대한 평론/에세이를 씁니다.

유리 수조 by 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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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순간에도 존재감이 부족한 배우였던 적은 없으나, 가장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기 시작한 기점은 누가 무어라 해도 〈이터널 댐네이션〉이 아닐까. 적어도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느낄 것이다. 영미권에서는 이미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나 동아시아권에서는 좀처럼 이름을 알리기 어려웠던 것은 그의 까다롭고도 첨예한 작품 선정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능하다. 일정 이상의 인지도가 쌓였는데도 불구하고 예술 영화를 일부러 골라가며 출연해왔으니. 그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신인 시절이 없는 것 같은 배우’였고, 이미 자신이 골라야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국내에는 영화가 들어오기도 까다롭고, 들어와도 오래 걸려있을 새가 없으니 그의 이름이 뇌리에 남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 그가 대형 히어로물 프랜차이즈에 출연하게 되었을 때의 놀라움이란! 우리야 그가 그것으로 ‘유명해졌다’고 인식할 지도 모르지만…… 기실 그간의 그가 쌓아온 성취나 연기의 기술적 측면을 생각하자면, 그것은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에이드리언이라는 배우가 가히 히어로물에 ‘강림’했다고 해도 좋을 법한 정도의 이야기였다고 인식한다면 너무 과장된 이야기일까? 하지만 그 정도의 충격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나 뿐은 아닐 것이다.

강렬하고 오연하되

어디까지나 처절할 것

그에 대한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자주 언급하는 〈이터널 댐네이션〉에서의 효과가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른 바 ‘에이드리언 효과’라고 부르는데 요지는 이렇다. 첫번째, 영화 내내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을 주는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2시간 41분에 이르는 영화의 러닝 타임 중 사실 그가 출연하는 시간은 37분 정도라는 것. 두번째, 메인 빌런으로서 출연하는 배우이기는 하나, 그가 화면 내에서 ‘슈퍼 파워’를 남용하거나 직접적으로 무력을 행사하는 장면은 단 세 장면 정도에 그친다는 것. 액션 배우로 난다 긴다 하는 경력을 가진 상대방과 단번에 나란히 서고, 한 순간은 그를 상대로 압도할 수 있으리라고 믿게 한다.

그는 배역의 강렬함, 우아함, 그리고 사악함까지 단번에 믿게 하지만, 배우 본인의 힘을 생각하면 그것은 자연스럽다. 정말로 신기한 점은 따로 있다. 사람들은 이 빌런의 매력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기도 하지만, 또한 그의 패퇴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것이다. 가끔 악역에 집어 삼켜지는 영화들은 사람들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악의 패배를 성공적으로 관객들에게 납득시키지 못해 실패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꽤 중요한 부분이다.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닐 지도 모른다. 관습적으로 히어로 영화들은 언제나 히어로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기게 만드는 법이고, 관객들은 그것을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서는 것이니까. 게다가 상대는 무엇보다도 이미 액션 배우로서 이름을 몇십 년째 날리고 있는 거장이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간판 스타 자리를 당연하게 받아드는 그이니, 그것을 당해내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에이드리언이라는 배우여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렇게 글줄로 늘어 놓으면서도 제대로 믿어지지는 않는다. 어쨌건 영화 내에서 보이는 장면들로만 판단했을 때 두 사람의 존재감은 거의 동등했고―심지어 등장하는 시간 자체가 불공평한데도 말이다―, 심지어, 정의의 히어로로서 내세우는 논리로 상대의 이야기는 거의 0점에 수렴했으니까. (대관절 누가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를 선의의 설득으로 쓴다는 말인가?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제목이 〈이터널 댐네이션〉인 이유가 아닌지?) 그렇다면 그의 패배는 어떻게 설득되어지는가?

나는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오랫동안 훈련되고 학습된 절망의 정서가 그에게 배우로서 ‘맞는 옷’으로 곁들여져 있기 때문이라고.

로맨스와의 거리,

‘실패하는 남자’이기에

배우는 그저 배우일 뿐이지만, 엄격한 예술 소비자의 자의식 아래에서 스스로를 잘 다스리지 않는 이상, 대중들은 자주 배우 본인에게서 배역의 얼굴을 본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을 제한하고 싶어하는 듯이 보인다. 토크 쇼에 나와서도 연애나 파트너 이야기를 하지 않고, 결혼에 대해서는 더더욱 언급하지 않는다. 가족사에 대해서도 대체로 숨기고 있고, 사람들 사이에서 있는 것을 싫어해 도시에서 떨어진 교외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다. 예술 순수주의자가 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연기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 인물에 대한 깊은 독해가 필요하다. 감정을 잘라 순간을 소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야기하는 그는, 말도 많고 오해도 많지만 누가 뭐라도 21세기 엄격한 메소드 연기 계파의 적자처럼 보인다. 스스로를 잘 정제된 흰 도화지로 쓰는 것만 봐도 그렇다.

새로운 히어로 영화에 나온 뒤로 우후죽순 생겨난 팬들이 요구하는 배역으로서의 팬 서비스도 단호하게, 하지만 정중하게 거절한다. 그런 그는 배역을 이상화하지도 않고, 자신을 그 연장선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배역이 실패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 모습 또한 다종다양하다. 시스템의 피라미드 위로 기어 올라가려다가 모든 것을 잃거나, 현재의 인류를 받아들이지 못해 모든 사람들의 방향성을 바꾸려 들었거나, 자기 자신이 쌓아올린 성과를 너무 굳게 믿어서 발 밑이 무너지는 사람이 되거나……. 그 모든 상황에서 그는 너무나도 절망이라는 무거운 단어에 합당한 표정을 짓는다. 그토록 그림자와 한 몸인 것처럼.

이런 성질은 그의 필모그래피에 하나의 특징을 남기는데, 그것은 바로 그에게 로맨스나 멜로의 부재다. 7년 전까지를 기점으로 잡았을 때, 그는 준수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출연하는 작품에는 유독 사랑과 연이 없었다. 그는 실패한 아들, 망가진 남자, 뒤섞여 혼란스러운 단독자가 될 수는 있었어도 로맨스 작품의 성공적인 연인이 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야기의 끝에 도달했을 때 그는 무언가 얻고 성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추락하고 상실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로맨스의 플롯 안에서 그는 매력적인 상대가 되기 어렵다. 필연적으로 손아귀에 아무것도 쥐지 못할 법한 자를 상대로 삼는 것은, 고전적인 연애 이야기에서의 백마 탄 왕자님이나 ‘벤츠’까지는 커녕, 일반적인 행복한 연애 이야기까지도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법 아닌가.

그럼에도, 그에게 남는 것이 있다.

비극의 남자,

고전은 다시금 새로이

그에게 맞지 않는 옷처럼 보였던 멜로가 새로운 출연작으로 찾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감독은 각본을 작성할 적부터 에이드리언을 상정해두었다고 인터뷰했고, 사람들은 의아함을 표시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하게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이 사랑일진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그간의 연기 경력 안에서 그것을 전부 비껴간 남자에게 배역을 내정한다니. 그러나 극장에 들어앉은 지 10분, 관객들은 얼음 송곳 같이 차가운 색을 띠던 눈동자에서 불꽃이 점화된 것을 보았다.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는 그 불꽃을 들어 스스로를 데우고, 태워서, 이윽고 질식시키는 모습까지도. 〈어느 추락에 관하여〉 에서 ‘닥터’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겪은 것은 정확히 그런 과정이다.

초반의 닥터는 사실 에이드리언이 맡아왔던 그 많은 역할들과 그렇게 크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는 간결한 몸짓을 좁은 범위 내에서 구사하고, 말도 그다지 많지 않으며 눈빛으로 거의 모든 이야기를 구사한다. 많은 언어는 강압적이지는 않으나 대체로 지시문이고, 의문은 세계나 그에 준하는 힘 앞에서만 발화된다. 그런 그가 겪게 되는 사랑 이야기의 중심이란 다음과 같다. 짝사랑하던 여인의 영원한 변질. 그러나 겉모습은 변하지 않고, 그에게는 이전에 없이 다정하다. 시들지 않게 된 껍데기 아래에 괴물이 깃들었으므로. 그의 사랑은 타인에게서 거리를 두는 자를 대상으로 삼았을 때 이미 패착이었고, 그나마 그 여인이 변하지 않은 순간에 말해지지 않았으니 업보이며, 그 뒤의 모든 일들은 비겁한 남자에게 쏟아지는 벌 내지는 별처럼 보인다.

세계와 인물의 마음가짐, 혹은 사랑이 등치되는 많은 폐쇄적인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반대로 폐허적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의 사랑은 세계가 멸망하고 사랑하는 여인이 결정적으로 죽고 나서야 가능해졌고, 그것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랑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이 반푼어치도 안 되는 사랑을 하려면 세계를 배반해야 한다. 극단적인 절망과, 가장 완전한 대안. 그런 상황에서 그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얼핏 보면 단 한 가지의 선택지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이샤믈라’이든 ‘스카디’이든, 그는 그의 고독을 달래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멸망해가는 세계라도 마지막 남은 그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세계이다. 왜? 이 별 어딘가에 어떤 가능성이 있을지 그 혼자서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니까. 이 망해버린 세계라 해도 사실 그 ‘다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가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무언가가 가능할 지도 모르는 세계를, 자신의 무력함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은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마지막 남은 그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세계이고, 살아있는 세계라 하더라도 혼자 남은 이상 놓아버리면 패퇴하게 되는 것이다. 그 대신 세계를 구하기로 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그 어떤 성과도 약속받지 못한 채 또 한 번의 실연이다. 사랑을 잡는다 해서 그가 보답받을 방도가 있을까. ‘닥터’라는 정체성 아래에서, 그는 어느 쪽으로 가든 절망이다. 그 뇌 아래에서 아직도 선명하게 잠들어 있는 유창하게 과학 수식을 읊든, 이제는 아무도 모를, 복잡하고 번뜩이는 이론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들어줄 사람도 이루어줄 사람도 이제는 남지 않았으니까. 이 이야기 논리의 내부에서, 그는 행성과 명운을 같이 한다고 봐도 좋다. 그가 자결한 것은 스스로의 생을 마감한 것으로 끝이 아니리라. 닥터는 그렇게 세상과 사랑을 자신의 목숨 하나로 한꺼번에 장사 지낸다.

그가 내보이는 절망은 늘상 성질이 이런 것이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실제로 기능하지 않는 고장난 것이다. 사랑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과, 의무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 그는 어느 쪽도 진정한 선택지가 아니라는 것을 진즉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택해야 하는 운명을 바꾸어 버리기에는 너무 멀리 온 사람을 연기하고는 한다. 그 무엇이 창작자들에게 이토록 고약한 운명만을 에이드리언이라는 배우에게 내주게 하는지는 몰라도, 절망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유의 매혹이 있다는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런 에이드리언의 인기도, 〈어느 추락의 대하여〉의 예상치 못한 흥행도, 나는 그 연장선상에 있지 않은가 추측한다.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랑 이야기도, 피라미드를 기어 올라가 성공한 이야기도, 이제는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라고. 크리스마스 캐롤로 떠들썩한 환성과 즐거운 노랫소리 대신 다소 슬픈 가사의 노래가 유행으로 흐를 때부터 대중은 비극이라는 이야기의 원점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었는지도 모른다. 성공하는 남자에 대한 반감이 실패하는 남자에 대한 애틋함을 넘어선 지는 오래. 얼음 같던 눈동자 아래에 새로운 물길을 발견하고, 관객은 에이드리언에게 마음을 내어줄 준비를 끝마쳤다. 이 다음은 무엇이 될까? 작품 활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원체 조용한 배우이니, 기다리는 입장에서도 그저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을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린 만큼의 보답은 이루어질 것을 알기에, 인내심을 발휘해보자. 또 모르지 않는가? 이번에도 그라는 배우를 위해서, 대추락의 헬터 스켈터가 기다리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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