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심덕] 장마
날조한 짧은 이야기.
하늘이 무너진 듯 비가 쏟아져 내렸다.
심덕은 천둥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미닫이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좁은 복도 너머 창으로 비가 들이닥치고 다다미가 조금씩 젖어도 심덕은 가만히 문 앞에 앉아 어딘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가꾸어진 일본식 정원은 거세게 몰아치는 비로 망가져 갔지만 장마가 그치면 곧 고향에서 돌아온 충실한 관리인이 다시 아름답게 정리하리라고 심덕은 생각했다. 장마가 시작된 지 사흘째였다.
1921년의 도쿄의 여름은 덥고 습했다. 심덕과 우진 그리고 명운은 그들이 빌린 일본 가옥에서 연습과 숙식을 해결하며 더위를 이겨내려 노력했다. 정원의 푸르른 나무 그늘서 웃고 노래하고 연기하고 언제나 좋은 동반자로서 서로에게 존재했다.
달구어진 공기 속에서 마주치는 눈은 종종 여름날의 햇볕보다 뜨거워서 우진과 심덕은 명운 몰래 작은 방 안에서 뜨끈한 숨을 나누곤 했다. 이미 닿은 몸에도 애가 닳아 옷 위를 성급히 쓸어내리며 우정 아닌 다른 것을 내비쳤다.
그리고 우진은 고향에 다녀온다며 부산행 관부연락선을 타고 떠났다. 장마의 첫날이었다.
심덕은 우진이 고향에 다녀온다고 했지만 실은 그의 처와 부모에게 인사하러 가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그의 일본인 애인에게도 다녀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심덕은 자신의 순위를 조용히 매겨보다가 그가 묻히고 올 향수 냄새를 상상하며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빗방울이 심덕의 치맛자락을 적시고 머리칼을 적시고 속눈썹을 적셨다. 심덕은 자신이 얼마나 오래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지 가늠하지 못했다. 끊임없이 튀기던 찬물이 손끝에 닿지 않자 심덕은 삼 초간 숨을 멈췄다가 고개를 들었다. 명운이었다. 심덕은 일그러지는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늘 입던 양복과 머릿기름을 발라 고정했을 머리가 젖어 척척하게 달라붙은 채 앞을 막고 있었다.
“... 비켜, 한명운.”
심덕은 젖은 얼굴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명운은 심덕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멀거니 바라보다 다 젖은 손수건을 꺼내어 그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심덕은 명운이 하는 양을 내버려 두었다. 젖은 천이 얼굴을 약하게 문질렀다. 이래서는 젖은 얼굴에 물칠을 하는 꼴이었다. 명운은 문지르던 손수건을 거두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신발을 벗고 복도를 가로질러 심덕의 옆에 자리 잡았다. 문은 닫지 않았다. 심덕이 바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심덕은 몸을 구기고 제 옆에 앉은 명운을 잠시 응시했다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안개로 자욱해진 먼 곳을 바라보던 심덕은 온기가 그리웠다. 습하고 찬 공기 대신 자신을 감쌀 수 있던 것들을 그렸다. 마주 했던 우진의 눈빛이나 닿는 손길에서 느껴지던 열감. 옆에서 번져오는 미약한 체온에 심덕은 천천히 명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명운은 심덕의 자그마한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움직이는 인형이라도 된 양 부자연스럽게 왼손을 올려 어깨를 감쌌고 그들은 조선의 화가가 그린 수묵화처럼 가만히 고요한 시간을 보냈다.
심덕은 어깨를 감싸는 명운의 손에서 우진과 비슷한 열기를 느꼈다.
장마가 나흘째 되었을 때 심덕은 정원 너머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행동을 그만두었다. 명운은 우진이 부재한 모든 공간 안에서 심덕과 함께했다. 넓은 가옥 안에서 그들은 술잔을 나누거나 노래하며 이야기를 만들었고 때때로는 아무런 말 없이 타자기 소리만 울려 퍼졌다.
심덕은 타자기를 두드리는 명운의 등을 바라보며 우진을 생각했다. 우진이 도망치듯 고향으로 간 것은 명운이 이폴리타를 이야기한 후 며칠이 지나서였다. 손에 잡힌 술잔을 돌리다가 내려놓고는 명운에게 다가가 기대며 목을 감싸 안았다.
“무엇을 써?”
심덕이 명운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채 속삭였다. 명운은 우진이 쓸 법한 금테 안경을 쓰고있었다. 안경 아래로 눈을 비비며 그는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대꾸했다. 심덕이 비켜나지 않자 명운은 종이를 서랍 안에 밀어 넣고 펜을 던지듯 굴렸다. 심덕은 명운의 등에 몸을 더욱 붙여 안경을 벗기고 싫은 것을 치우듯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심덕아, 너 취했다.”
명운은 심덕에게 덤덤히 말했다.
“너는 왜 여기 있어?”
심덕이 명운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물었다.
“네가 여기 있을 걸 아니까.”
명운은 어깨에 올려진 심덕의 머리에 볼을 기대었다. 곧 심덕의 입술이 명운의 목덜미에 닿았고 명운은 그대로 그를 안아 책상 위로 올려 마주 보았다. 붉게 열이 오른 눈가에 입을 맞추며 명운은 심덕의 머리칼을 쓸어내렸고 심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속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명운의 눈을 마주했다. 처음이 누구라 할 것 없이 동시에 입술을 물고 혀가 얽혔다. 심덕은 미온의 타액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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