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샤] 바람같은 그대에게
반짝이는 은교에 발을 내딛으며 나는,
바람같은 그대에게
희고 창백한 얼굴은 언제나 창가를 향해 있었다. 얼굴을 정면으로 본 것 자체도 손에 꼽지만, 나에게는 그 애의 인상이 유독 흐릿했다. 사람 얼굴과 이름을 외우는 것은 내 특기 중 하나였는데도 말이다. 이유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내가 사람을 외우는 방식은 첫인상이다. 그 첫인상이라 함은 누구는 얼굴로 정해지고, 누구는 목소리로 정해지고, 누구는 분위기로 정해진다. 그런데 그 애는 모든 것이 흐렸다. 아무것도 선명한 것이 없었다. 목소리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잘 자. 이마에 키스를 남긴 후 미혜는 병실을 나갔다. 같은 병실을 쓰던 조그만 사내아이는 퇴원했고, 시름시름 앓으며 골골거리던 노인은 사라졌다. 누구도 그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 해준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리 좋은 결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이야기를 굳이 해주지 않은 것은 나에 대한 배려였을 테고, 나는 잠자코 그 배려를 받기만 하면 되는 입장이기 때문에 억지로 캐묻지 않았다. 그 애는 언제나 모든 일에 무심했다.
오늘은 그 애와 나 단 둘만이서 병실을 차지하는 첫 날이었다. 나는 몸을 웅크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사실 나는 미혜를 붙잡고 싶었다. 그 애와 단 둘일때면 어쩐지 섬찟하고 서늘한 오한이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나는, 밤을 좋아하지 않는다. 침대 옆 탁상에 놓여진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마음 같아서는 건전지를 빼버리고 싶었지만 왠지 그 애가 신경쓰여 그러지 못했다. 몸을 뒤척였다.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그 애의 뒷모습이 보였다.
언제나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고개를 돌려 창가 너머를 바라보곤 하던 아이였는데, 이번에는 아예 창가 쪽으로 돌아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달빛을 받은 그 애의 희미한 머리칼이 반짝였다. 흰 피부는 오늘따라 유독 더 하얗게 빛났다. 왜 자지 않는 걸까.
그 애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언제나 흐릿했던 인상은 오늘만큼은 선명하게 내 눈에 각인되었다. 무심한 눈동자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애는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창가 너머를 가리켰다. 멍하니 그 손끝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애에게로 다가갔다. 그야말로 홀렸다, 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내 의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지만 나는 그 애가 앉아있는 옆에 섰고, 그 애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 애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달이 밝아.”
“그러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나눌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이 대화가 우리의 최초의 대화였다. 그런데도 회화의 흐름은 물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나는 그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이상했다.
“달 좋아해?”
“별은 좋아해..”
“밤을 싫어하지?”
문득 이 애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지금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막연히 상상하던 그대로의 목소리라 낯설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낮고, 허스키하고, 미묘하게 앳된 목소리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밤이 되면 항상 이불을 뒤집어 쓰잖아.”
나는 몇날며칠 같은 병실을 쓰며 얼굴조차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아이는 나의 사소한 행동을 잘도 알고 있었다.
“이름이 뭐야.”
“효진..박효진. 너는?”
“가인.”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뒤이어 나이를 물으려다가 멈칫했다. 왠지 그냥, 본능적으로, 그건 물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인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다. 온몸으로 달빛을 받고있는 것 같았다. 나도 따라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따스한 황금빛의 무언가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달은 널 좋아하는데.”
가인의 목소리는 어렴풋하면서도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넌 밤을 싫어해서 서운해 해.”
눈을 감은 지 채 1분도 안 됐을텐데도, 어쩐지 몽롱한 기분으로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누가..달이?”
“그래, 달이.”
나는 무생물의 의인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일만큼 어린애가 아니다.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인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냉소적인 편이다. 그런데도 가인의 말은 묘한, 또한 강제적인 설득력이 느껴졌다. 그 말을 부정하면 안 될 것만 같은. 가인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살풋 웃는다. 어린애같이 웃는 낯은 앳되고 귀여웠다. 평소에 느껴졌던 서늘함과는 달리 따스함이 느껴졌다.
“밤은 널 잡아먹지 않는대.”
“….”
“그래도 무서워?”
고개를 끄덕였다. 가인은 다시 빙긋 웃으면서도 어쩐지 씁쓸한 표정이었다.
“나는 아침이 무서운데.”
“왜?”
“왤까?”
아마 너랑 비슷한 이유일거야, 가인은 눈을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조용하고 나지막한, 잔잔한 음악이었지만 한 번도 들어본 기억은 없는 낯선 노래였다. 왠지 눈물이 났다.
“나 산책을 할 건데,”
깜짝 놀라 가인을 돌아보았다. 지금 시간은 못 해도 새벽 세 시였다. 이런 늦은 밤에? 그것도 어리고 여린 여자애 혼자서. 하지만 그런 걱정 이상으로 무서웠던 것은 깜깜하고 휑한 넓은 병실 안에 혼자 우두커니 남아있게 될 공포였다.
“같이 갈래?”
하지만 짙게 어둠이 깔려있는 밖의 밤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망설였다. 머뭇거리고 있자 가인이 침대 시트를 잡고 있던 내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부드럽게 감싸잡았다.
“이러면 덜 무서울까?”
가인의 손은 차가우면서 따뜻했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나는 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인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같은 어둠을 견뎌야 한다면 혼자보단 가인과 함께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가인은 내 손을 잡지 않은 오른쪽 손의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병실 문고리에 손을 댄 가인은 아주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려 천천히 열었다. 병실 너머는 그야말로 어둠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고, 병실 밖으로 발을 내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 무서, 싫어, 무서워, 싫어….”
“괜찮아, 쉿.”
뒷걸음질치는 나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으며, 가인은 내게 바짝 붙었다.
“봐봐. 달빛.”
가인이 귓가에 소곤거렸다. 병실 너머의 창가로 하얀 달빛이 복도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서운 건 없어.”
전혀.
가인은 조심스레 발을 내딛었다. 나도 천천히 한 발자국씩 가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병실 밖을 온전히 나왔을 때에는 기묘한 성취감마저 느껴졌다. 우리는 달빛이 쏟아지는 병실의 복도를 우리들만의 것인것마냥 거닐었다. 아니, 그렇게 거닐었던 것은 가인 뿐이다. 나는 오로지 가인에게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의지하기 바빴다. 야릇한 달빛의 낭만을 즐길 새도 없이 나는 치밀어오르는 공포를 견뎌야 했다.
“흐윽, 흐, 으으….”
“괜찮다니까.”
발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으나, 이내 곧 그게 더욱 무서운 어둠이라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다시 눈을 떴다. 가인은 병원 밖까지 나를 이끌었다.
“네가 밤의 아름다움을 알아준다면 좋을텐데.”
가인의 손이 아스라이 떨어졌다. 가인은 두 팔을 벌린 채 나풀나풀 움직이며 몸을 가볍게 빙글, 돌렸다. 황금색의 달빛은 오롯이 가인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가인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똑같이 따라했다. 별. 수많은 별. 반짝이며 수놓인 그 다채로운 빛은.
“공기가 좋아.”
숨을 들이마셨다. 밤의 공기를 맡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한동안은 밤에 밖에 나올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랜만의 밤공기는 조금 색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하늘에 붕 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병원은 지루하잖아.”
그치? 가인이 동의를 구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이나 그림보다 눈에 직접 새기는 풍경이…가장….”
어떤 감정이 북받친 듯 가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넋을 잃고 그저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하늘만 바라보던 가인은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시 내게로 시선을 주었다.
“조금은 밤이 무섭지 않게 됐을까?”
새벽 세시 반,
너는 다시 흐릿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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