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샤] 팬텀 7-13
백업하면서 봤더니 이거쓴게 2014년임. 충격
7.
쌩 초짜 신입생이랑 선배가 투톱으로 하는 작품은 좀처럼 없다고 했다. 보통은 같은 학년끼리 묶거나, 기껏해야 어렸을 때부터 무대를 많이 밟아본 숙련된 2학년과 3학년이 하거나. 그럼 제가 처음인 거에요? 들뜬 마음으로 가인이 그렇게 묻자 효진은 무슨 개도 안 할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니, 난데?
“은진여고 연극부 역사는 내 역사라고 봐도 무방하지.”
“헐.”
하지만 저 소리가 확실히 근거있고 증거있는 말이라는 게 더 분했다. 은진여고 연극부가 ‘그 유명한’ 은진여고 연극부가 된 것은 효진의 덕을 톡톡히 보았을 것이다. 효진은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인과 효진은 지금 학교 뒷편 농구장 벤치에 앉아있었다. 은진여고 농구부는 여고치고는 꽤 강세인 편이라, 연극부가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학교의 간판 노릇을 했었다. 가인은 자신의 눈 앞에서 대본을 속독하며 왔다갔다 하는 효진에게 말을 걸었다.
“저도 선배처럼 그렇게 산만하게 움직여야 돼요?”
“이씨.”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는 것처럼, 배우가 대본을 읽을 땐 건드리는 게 아니라며 효진은 화를 냈다. 아니, 그럼 그렇다고 먼저 말을 해 주던가. 가인은 입술을 삐죽이며 자기 대본을 펼쳤다. 어렴풋이 줄거리만 파악해 본 결과, 주인공은 둘이었다. 희대의 엽색꾼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카사노바와 돈 주앙. 아직 철없고 인생 경험도 적은 청년인 돈 주앙이, 여자 꼬시는 것에 있어서는 따를 자가 없다는 카사노바를 쫓아다니며 여자와 사랑을 배우는, 뭐 그런 내용인 듯 했다.
“선배, 선배가 카사노바인 거에요?”
효진이 눈을 세모꼴로 치뜨면서 소리쳤다. 그래! 아니, 왜 화를 낸담. 그리고 어차피 대답해 줄 거면 그냥 좀 다정하고 친절하게 말해줘도 되는 거잖아. 가인이 속으로만 중얼중얼 불평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다. 으앜, 가인이 펄쩍 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뭐, 뭐예요.”
왜 그렇게 놀라? 미혜가 가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시원스레 웃었다. 효진과는 달리 이래도 허허, 저래도 허허 하는 편인 미혜는 효진과는 다른 의미로 신입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효진이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워 멀리서만 지켜보며 동경하게 되는 장미같은 존재라면, 미혜는 상냥하고 다정해 친해지기도 쉽고 어울리기도 쉬워 후배라는 입장을 내세워 잔뜩 어리광부릴 수 있는 그런 친근한 백합같은 존재랄까. 그리고 그 성격에 대해 개인적인 호감도를 매기자면, 가인은 단연 미혜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박효진이 조 선배를 발톱의 때만큼이라도 좀 닮았으면 좋겠다. 지겹도록 붙어다니면서 왜 그런 건 안 닮는대. 하긴, 그러고 보면 그것도 의외였다. 성격이 저렇게나 다른데 어떻게 그리 친하게 지낼 수가 있는 걸까. 것도 껌딱지마냥 찰싹 붙어서는.
“리딩 중이야?”
“그런 줄 알았는데 효진선배 혼자 저러고 있는데요.”
저래서야 굳이 날 데리고 온 의미가 없지 않나.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미혜가 온 것은 가인에게 있어선 퍽 달가운 일이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미혜에게 다 물으면 되니까. 암만 배우가 줄거리를 확실하게 파악한다 한들, 저작자만 못할 것은 변치 못할 사실이고. 다른 건 몰라도 시나리오의 내용에 있어서는 효진보단 미혜가 믿음이 가는 이유도 있었다.
“조 선배, 근데 있잖아요.”
“응?”
캬, 이 반응! 가인은 감격했다. 그래, 후배가 질문을 하면 이런 반응이 나와야지! 친절하고 다정하고, 얼마나 좋아! 목소리만 들어도 이 쪽에서 먼저 굽히고 들어가고 싶어질 정도다. 같은 선밴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효진 쪽을 흘겨보자 귀신같이 눈치는 빠른 효진이 뭘 봐, 하면서 으르렁거렸다. 사납기는. 가인은 고개를 돌렸다.
“카사노바도 돈 주앙도 남자잖아요, 그쵸?”
“그치.”
“근데 효진선배가 카사노바를 한단 말예요?”
안 어울릴 것 같은데. 가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머리도 저렇게나 길고, 어쨌든 효진이 남자 역을 한다는 것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가인이야 오페라의 유령에서의 팬텀으로 남자 역은 이미 한 번 경험해봤다 쳐도.
“그렇구나, 가인이는 모르겠구나.”
“네?”
“효진이 1학년 때 했던 어린왕자가 참 평판이 좋았…”
“야,”
어느샌가 다가온 효진이 다급히 미혜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가인의 호기심에는 이미 불이 붙었다. 어린왕자요? 내가 아는 그 어린 왕자? 생텍쥐페리의? 가인이 자꾸만 질문을 던지자 효진이 원망하듯 미혜의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야. 어쩔거야, 야.
“왜, 그 때 반응 좋았는데. 좀 더 자랑스러워해도 돼.”
“그건 흑역사야.”
하기 싫었단 말야, 난. 효진이 짜증을 내며 벤치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이미 나온 화제에 대해선 별 도리가 없는지, 미혜가 그 이야기를 더 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미혜는 본격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미혜 왈, 연극부에서 올리는 작품의 남자 역은 대부분 하는 사람이 한다. 그러니까 남자 역과 여자 역이 나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리고 효진의 경우는 원체 타고난 목소리가 높은지라 여자 역을 주로 맡곤 했지만, 그 때 미혜가 써 놓은 어린왕자(리메이크 버전)의 시나리오를 본 선배들이 이건 죽어도 효진이가 해야 한다고 우겼다나 뭐라나. 하지만 효진은 고전 명작 같은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때도 한참 안 한다고 뻐팅겼는데,
“부장 선배가 효진이한테 네가 안하면 난 이제 연극부 때려칠 거라고 협박을…”
가인은 왠지 기시감을 느꼈다.
“선배….”
너 안 돌아오면 나도 연극부 그만둔다고 할 거야, 그리고 손가인 때문이라고 할 거야. 그 때의 그 초강수는 아무래도 부장 선배에게서 배워온 방법인 듯 했다. 아니, 그 선배는 좀 더 좋은 걸 가르치지는 못할 망정 왜 후배한테 저런 거나 가르치고 앉았어. 그 불똥이 자신에게로 튄 거라고 생각하니 또 억울했다.
“그런 선배들한테 결국 져주는 것도 후배들 전통이야.”
불만 있음 너도 후배 받고서 써먹어. 얄밉게도 효진이 말했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근데 의외로 효진이 숏컷이 잘 어울려서 반응이 좋았지. 선배들 뒤집어지고 난리 났잖아.”
미혜의 말에 따르면 효진의 숏컷 가발은 여린 미소년 느낌이 나서, 한동안 남자를 못 보던 선배들이 눈이 까뒤집혀 달려들었다고 했다. 운동부도 아닌데 연극부 연습까지 쫓아와 관람하거나, 음료수나 과자같은 먹을거리를 손에 쥐어주거나, 아무튼 스타를 대하는 팬의 그것과도 같은 진풍경이었다고.
“그치만 먹을 걸 받아도 한 번도 먹은 적 없었어. 뭐 탔을 거 같아서 께름칙했대.”
“아니 근데, 효진선배가 그걸 가만 냅뒀어요?”
“냅뒀겠니.”
그럴 줄 알았다. 안 그랬음 서운했을 뻔 했다. 얘기를 듣자 하니 효진의 그 팬클럽 비스끄므리한 무리가 해체된 것은, 어린왕자를 끝낸 다음 무대에서였다. 의외로 텀이 짧네요, 가인이 중얼거렸다.
“그래? 난 박효진 성격에 그 정도 견딘 것도 용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래요.”
효진과 미혜 못지 않게 가인과 미혜도 죽이 맞는 것 같았다. 특히 효진에 관해서는. 효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미혜의 코트 주머니에서 캔 음료를 가져갔다. 아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조 선배 코트에 저거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대.
“내가 사오랬으니까 알지.”
“선배들 이제 좀 그 독심술 같은 것 좀 그만해요.”
무서울라 그래. 가인은 몸을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네가 엄청 알기 쉬운 표정을 하고 있으니까.”
“헐. 거짓말.”
“그런 소리 처음 들어?”
“네, 진짜.”
“헐. 거짓말.”
가인이 했던 말과 표정을 그대로 재연해보이는 게, 리얼하게 얼빵해 보였다. 내가 방금 저런 표정을 지었다고? 진짜? 가인은 믿고 싶지 않아서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 암튼. 다시 얘기로 돌아가서, 그래서 그 선배들 어떻게 떼놨는데요?”
“무대 하는데 캠코더 들고 녹화하는 사람이 있었어.”
은진여고의 연극부 무대는 관람 기준에 대해선 느슨한 편이지만, 촬영 같은 신사적이지 못한 행동은 칼같이 제지한다. 하지만 그 날은 2학년들의 수학여행인가가 있어서, 평소에는 그런 감시를 해 주시던 고문 선생님이 자리에 안 계셔서 겁도 없이 그런 짓을 한 것 같다고 미혜는 말했다.
“생각만 해도 무섭네요. 그래서 효진선배가 어쨌는데요? 무대 하다 말고 내려와서 후려쳤나?”
“내가 무슨 깡패니?”
성격만 보면 주먹만 안 쓰는 깡패랑 다름없다고 가인은 생각했지만 그래도 돌아가는 머리가 있기에 그 말을 내뱉는 대신에 입을 다물었다.
“무대는 계속 했지. 보는 내가 조마조마해서 정말, 나도 가인이 얘기처럼 효진이가 그럴까봐...”
“너넨 도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그래도 기특하게 참고 무대는 끝내더라고.”
“그래서 효진선배는 언제 깽판을 쳤나요?”
안 쳤다고, 효진이 불만스레 말했지만 미혜의 표정으로 짐작컨대 그건 오로지 효진의 기준에 불과함이 틀림없었다.
“무대 끝나고 커튼콜 할 때 갑자기 객석으로 내려가더니 그 선배 캠코더를 확 뺏어서,”
“히익.”
“부쉈어.”
“캠코더를요!?”
“아니. 테이프를. 밟아서 부쉈지. 잘근잘근.”
“히이익..”
“무표정으로 그러니까 진짜 무섭더라. 싸이코패스인줄.”
효진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아 가인은 소름이 돋았다.
“오버 좀 하지 마.”
“쟤는 저렇게 말하는데, 그 다음 날부터 그 많던 선배들이 싹 해산한 것만 봐도 그 임팩트가 어땠는지는..”
말할 것도 없겠지, 미혜가 눈빛으로 그렇게 말해오기에 가인은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함부로 개기지 말아야지, 가인은 다짐했다.
8.
연극부에서는 무대에 올릴 연극이 정해진 후부터, 자기가 맡은 배역에 익숙해지라는 의미 반 장난 반으로 배우 성에 배역 이름을 붙여서 부르곤 한다. 이를테면 가인이 팬텀 역을 맡게 됐을 때 손팬텀 손팬텀 하고 부르는 식이었다. 그리고 가인은 개인적으로 그 호칭을 질색했다. 오글거린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후배가 질색한다고 그런 전통 겸 재미있는 놀잇거리를 포기할 선배들이 아니었다.
“손주앙아, 이리 좀 와봐.”
게중에서 가인에게 유독 심하게 구는 것은 단연 효진이었다. 평소에는 이름 한 번 불러줄까 말까였으면서 돈 주앙이라는 배역이 주어지자마자 손주앙아 이것 좀 해라 손주앙아 저것 좀 봐라 손주앙아 거기 좀 가봐라 단순히 별명으로 놀리고 싶을 뿐인 말들에 휘둘려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쓸데없는 일까지 배로 더 했다. 원래는 가인이 할 일이 아니었음에도. 효진은 가인을 골리는 것에 아주 재미를 붙였다. 반응이 즉각적이고 감정표현이 솔직하기 때문에 놀리는 맛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주앙아, 하고 부르면 가인은 언제나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다. 심통이 난 뾰로통한 얼굴이다.
“그냥 불러봤어. 다시 가”
이런 일도 비일비재했다. 붉으락푸르락하면서도, 지금까지 겪어온 경험으로 '연극 중에 후배는 선배에게 개기지 않는다'라는 연극부의 모토를 습득한 가인은 후배된 도리로 치밀어오르는 화를 꾹 참아 누른다.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려던 후배가 그렇게 순순해지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아무튼 효진은 즐거운 참이었다.
“박카사야 너도 이리 좀 와봐.”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인에게 한정된 얘기고. 마이웨이 파인 효진은 연극부의 모토고 뭐고 싫으면 싫다는 표현을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효진 역시도 성에다가 배역 이름을 붙이는 것은 질색이었다.
“싫어요. 선배가 오세요. 그리고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처음 효진이 그런 대꾸를 했을 때 가인은 당연히 아니 뭐 이런 일이, 하고 반발했다. 왜 너는 거부권이 있고 나는 없냐, 가 주된 내용이었지만 효진은 가볍게 무시했고 그런 효진을 선배들은 또 가볍게 무시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효진을 불렀던 선배는 자신이 직접 오긴 오면서도 박카사야 소리는 절대로 그만두지 않았다. 언제나 그런 패턴의 반복이었기 때문에, 가인 또한 효진과 자신의 관계 역시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더 이상 반항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쟤 짜증나지?”
소도구 담당이 해야 할 일을 효진의 명령 때문에 군말않고 이행하고 있던 가인의 곁에 다가온 부장 선배가 그렇게 말을 걸었다. 조금 멀리 떨어져있는 효진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뒷담인 걸 티내지 않기 위해 표정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과연 연극부원이었다. 무섭기까지 했다. 가인은 며칠 간 심히 시달린 탓에 퀭한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됐어요 이젠, 포기했어요….
“네가 이해해, 쟤도 당한 게 있어서 너한테 분풀이삼아 그러는거야.”
“당한 게 있다구요….”
말도 안 된다. 박효진은 당하고만 살 위인이 아니었다. 보복을 해도 두 세배는 더 갚아줄 사람이지.
“미혜한테 예전 얘기 들었다며?”
“무슨 얘기요?”
“왜, 어린왕자나. 너 그 때 얼마나 웃겼는지 모르지? 박왕자야, 이장미야, 한여우야, 아주 장관이었…”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요?”
풉, 터져나오려던 웃음에 급히 입을 틀어막은 것은 환한 미소를 지은 효진이 가인의 등 뒤에서 어깨동무를 해 왔기 때문이었다. 효진의 환한 미소라 함은, 말그대로 아무 흑심 없이 좋은 기분에 짓는 웃음이 결코 아니었다. 효진은 기분이 좋을 때는 절대로 그렇게 웃지 않았다. 자칫하면 비웃는다 의심사기 딱 좋은 비틀린 미소를 지을 때, 그 때가 진심으로 웃을 때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환한 미소는 무엇이냐 하면, 이미 나는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하고 왔고 남은 것은 너를 갈구어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을 담고 있는 아주 심오한 감정 표현의 방법 중 하나였다. 가인은 자신의 어깨 위에 얹힌 효진의 팔이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이 기분 탓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뭐, 그냥 귀여운 후배 좀 달래주느라 그런거지.”
“귀여운 후배 달래는 데에는 내 과거사가 꼭 필요한 썰인가 봐요?”
“그때 안 그래도 안 하겠다는 애 억지로 시킨거라 그렇게 부를때마다 애가 아주…”
“선뱃,”
학창시절의 선배라는 존재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절대강자라고도 할 수 있다. 언뜻 휘둘려 주는 듯 싶으면서도 결국 효진을 휘어잡곤 하는 선배들의 테크닉을 볼 때마다 가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중에서도 효진을 아주 손바닥 위에서 굴리다시피 하는 사람 중 하나가 부장이었다. 놀리고, 달래고, 놀리고, 어르고 하는 그 스킬은 가인으로썬 섣불리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아니 근데 내가 처음 가인이 들어왔을 때는 드디어 박효진한테 맞먹을 존재가 들어왔구나 했는데 말이야.”
효진이 멈칫했다. 도전적인 시선이, 어디 한 번 더 지껄여 보시죠 하는 얼굴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배가 선배 앞에서 지을 표정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가인이가 훨씬 기특하지. 말도 잘 들어, 착해, 귀여워.”
“아, 그러세요.”
물론 그런 말 따위에 기죽을 박효진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자존심에 스크래치는 갔을 것이다. 형제 있는 집안에서 큰애한테 작은애랑 비교하지 말라는 이유가 바로 그것일 터다. 은진여고 연극부는 일종의 대가족과도 같은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다. 3학년은 2학년을 쪼고, 2학년은 1학년을 갈군다. 1학년은 3학년에게 어리광을 피우고, 3학년은 1학년을 마냥 귀여워한다. 2학년과 3학년 사이에는 전우애 비슷한 동료애가 있다. 세 자매로 치환하면 금세 이해가 가는 그런 관계다. 장녀에게 막냇동생과 비교당하는 차녀는 어른스럽게 넘길 아량이 없다. 동생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을 뿐 어린 건 마찬가지고, 지금껏 동료애를 품어왔던 언니에게 배신감도 느끼는 것이다.
“파업할꺼야 나.”
효진이 들고 있던 대본을 집어던졌다. 어디 한 번 둘이 잘 해보란다. 어린애가 따로 없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가인은 효진보다는 부장 선배가 원망스러웠다. 부장 선배는 어머, 삐졌다 한 마디만 남긴 채 살랑살랑 손을 흔들고 다른 선배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번 연극에 3학년은 참가하지 않는다. 효진과 가인을 투톱으로 한 1, 2학년들의 무대였고 고로 가인의 연기 지도는 효진이 전담해서 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원흉이었던 선배 덕분에, 가인은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 좀 웃었다는 죄로 온갖 벌을 뒤집어 써버리고 말았다. 가인은 황당했다. 역시 선배란 작자들은 3학년이고 2학년이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선 똑같았다.
“아니, 선배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게 맘에 안 들어. 당연히 내 편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가인이가 훨씬 기특하지 라는 말이 시작되던 순간 질겁을 하며 제가 어디 효진선배만 하겠습니까, 하는 소리를 했어야 한단다. 어이가 없었다. 왜냐면 가인이 생각하기에도 효진보다는 자신이 더 기특했기 때문이다. 툭하면 연습을 내빼기를 해,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 파업을 하기를 해. 나같은 후배가 세상 천지 어디 있냐고 따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갑자기 그러시는 게 어딨어요.”
“여깄다 왜.”
유치찬란했다. 요즘은 초딩도 콧방귀를 뀔 논리를 들이대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상대를 해주셔야 제가 연습을…”
“혼자 해.”
“아, 거참…”
접이식 철제 의자에 거꾸로 돌아앉은 효진이 가인을 빤히 바라본다. 배째라, 어떻게 할래. 그런 표정이었다. 효진이 가인의 표정을 쉽게 읽어낸 만큼, 가인도 시간이 흐를수록 효진의 표정을 대충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가인은 나몰라라 다른 선배들 틈에서 웃고 있는 부장 선배를 원망스런 시선으로 노려보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 효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잘못했어요.”
뭘 잘못했는지는 하나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게 끝이야?”
“저같은 게 어디 효진선배 발끝에나 미칠 수 있겠습니까.”
“좋아, 더”
“위대하신 선배님께 감히 비교대상이 됐다는 게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음.”
효진이 흡족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웃긴 사람이었다. 가인의 표정이 일그러져있는 것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좋아, 용서해 주지. 그리고 하나만 더 약속해.”
가인은 심적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효진을 상대하는 건 언제나 지쳤다. 몸도 마음도 고달프다. 하지만 이 곳에 발을 들인 것이 온전한 자의란 것을 생각하면 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물론 가끔씩 보여주는 효진의 노래나, 연기나, 아무튼 무언가를 볼 때마다 벅차오르는 감격을 느끼곤 하지만 그건 아주 적었던 것에 비해 서러웠던 날은 압도적으로 많았다. 아주 제 무덤을 판 격이었다.
“뭔데요…”
“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만 들어.”
알았어? 확신을 얻으려는 듯 효진이 물었다.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어…그치만 만약 제가 보기에도 선배가 잘못한 거라면요,”
“그래도.”
“네?”
“그래도 내 편 들라고. 내가 잘못을 했든, 무슨 죄를 지었든 간에 너는 내 편을 들라고.”
우리가 무슨 사이던가. 가인은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나도 모르는 새에 이 선배랑 백년가약이라도 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기도 안 차는 기억은 없었다. 기껏해야 같은 동아리 선후배 사이일 뿐인데 왜 나는 좀 (아주 약간 일방적인)호감을 가지고 있을 뿐인 선배한테 모든 죄를 덮어주고 편을 들 일을 강요되고 있는가.
“어…선배가 만약 범죄를 저질러도요?”
“살인을 저질러도.”
아니 무슨 그런 무서운. 가인은 입을 떡 벌렸다. 효진은 인상을 썼다.
“내가 진짜 그런다는 게 아니잖아. 만약 그렇게 큰 일이 있더라도, 의 얘기지.”
“아니, 왜…”
“너 나 때문에 여기 온 거잖아. 아니야?”
물론 맞다. 그 일이 지금 가인의 고달픈 인생의 모든 원흉이었다.
“그럼 여기서만큼은 날 위해서 살아야지.”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한 억지였다.
9.
“여유가 없는 남자는 낭만이 없고, 낭만이 없는 남자는 매력이 없지. 매력없는 남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있을 리 없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일단은 심호흡을 해. 아니, 진짜로 하란 게 아니라. 말이 그렇단 거잖아. 여유를 가져, 자신감을 가지라고. 여자를 사랑하기 전에 우선 너 자신을 사랑해.”
“전 저를 충분히 사랑하는데요.”
“정말?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넌 시종일관 안달하고 있잖아. 저 여자를 어떻게 꼬시지? 어떻게 한 번 만나볼 수 없을까? 말이라도 걸어볼까? 그게 눈에 다 보인다고. 네 자신에 대해 충분히 자신감을 갖고 있다면 그렇게 될 리 없어. 왜? 저 여자는 나에게 넘어오는 게 당연하니까!”
가인은 숨이 찼다. 효진의 호흡에 채 따라가지 못하고 압도된 탓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벅차오르는 감격을 억누르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효진이 대본 리딩에서 '제대로 된' 상대를 해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효진이 해주는 '상대'란 가인의 연기에 맞춰 본인은 국어책 읽듯이 대본을 술술 읽어내려가는 것, 그것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기를 했다. 가인의 연기에 맞추어 대사를 받아치고, 그에 맞는 표정을 지었다. 가인에게는 정말 일순으로 느껴졌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싹했다. 대본을 쥐지 않은 효진은 강당을 무대삼아 한 시도 멈추지 않고 바삐 걸어다녔다. 카사노바가 되어 때론 윙크를 던지고, 때론 찡그린 표정으로 못마땅함을 표했다. 가인은 마치 자신이 카사노바에게 홀리는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 박효진의 저력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미혜 대본에 대해서 하나 알아 둬.”
“네?”
“걔는 기본적으로 관객이나 배우에 대한 배려가 없어. 자기가 느낌 오는 대로 써내려가는 거라 호흡이 무지 빨라. 숨쉴 틈도 없지. 여차 하면 대사 놓치기도 부지기수야. 관객은 차라리 낫지, 흐름을 놓쳐도 아예 보는 걸 포기하거나 옆 사람에게 물어보거나 하는 게 가능하고 이게 또 줄거리에 무슨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니까. 근데 무대 위에선 아니잖아. 한 사람 호흡이 무너지면 전체적인 흐름이 무너져. 무대 망치는 거 순식간이야.”
“...”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
알고 있다. 연습이라 넘어가 주었지만, 무대 위에서 숨이 차다는 이유로 호흡을 놓치는 것 따위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는 것. 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벅차오르던 감정이 조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효진이 베시시 웃었다.
“그래도 뭐, 잘했어. 합격.”
앗싸, 가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칭찬은 커녕 쓴소리만 퍼붓던 효진이었다. 연기 왜 하니, 이 정도로 하는 애들 널렸는데, 박효진 이름값을 감수하고서 데려온 애가 무대 위에서 이따위로 하면 내 평판도 어지간 하겠다, 독설과 충고의 미묘한 경계에서 놀랍도록 균형맞추어 널을 뛰는 말들의 연속이었다. 연습기간 중 효진에게 품었던 가인의 감정을 일기장에 쏟아낸다면 족히 두세권은 채울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랬던 효진이 처음으로 인정을 한 것이다.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배우한텐 체력도 중요해. 호흡도 컨트롤 할 수 있어야 되고, 알고 있겠지만 무대 위에 조명은 뜨거워. 그 열을 견뎌 가면서 무대 위에서 시종일관 종횡무진해야 하잖아. NG가 나면 다시 찍으면 되는 영화 드라마랑은 또 다르고. 무대에 서는 순간 기회는 한 번 뿐이니까..”
효진이 가인에게 들고 있던 이온음료를 건넸다. 스트로를 물고 음료를 마시면서, 가인은 얌전히 효진의 이야기를 들었다. 연기할 때랑은 다른, 평소와 똑같은 무표정이면서도 태도가 진지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가인은 저도 모르는 새 생글생글 웃어버렸다. 적어도 효진이 무대를 가볍게 취급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효진은 그런 가인의 표정이 불쾌했는지 가인의 손에 들려있던 이온음료를 빼앗아 들고 스트로를 빼 가인에게 쥐어준 후 들이켰다. 아, 선배. 가인이 탄식했다.
“그러니까.. 운동도.. 해 둬.”
급하게 마시느라 턱으로 흘려내린 음료수를 훔쳐내며 효진이 미간을 좁힌 채 더듬더듬 말했다.
“선배도 운동같은 걸 해요?”
“헬스나 요가.”
“와.”
많은 것들이 의외였다. 대본을 쥐어줘도 더듬거리며 읽는 일이 다반사였던 효진이 오늘은 모든 대사를 통째로 외워온 것 하며, 운동을 한다는 것 하며.
“선배는 사람을 참 많이 놀래키네요.”
“나한텐 별 거 아닌 일이 사람들한텐 놀라운 일인거야. 그러니까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되는거고”
뻔뻔한 건 여전히 변치 않았지만.
“숙제를 하나 내줄게.”
“네?”
“그 대본, 오늘 딱 세 번 읽어. 처음엔 맘속으로 속독해서, 두 번째로는 랩 하듯이 입으로 최대한 빠르게 읽고, 세 번째론 연기를 하면서 읽어. 앞엔 상대역인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세 번.”
“처음부터 끝까지요?”
“처음부터 끝까지.”
“막히면 전화해도 돼요?
“싫은데.”
효진은 정말로 대놓고 싫은 티를 냈다. 하지만 겨우 그깟 일로 상처받기엔 가인은 어느 정도 효진을 파악하는 게 가능하게 됐다. 말은 저렇게 해도, 진짜로 전화를 하면 마지못해 받아줄 사람이다. 물론 그 전에 전화번호를 따야겠지만. 가인은 스마트폰을 들고 초롱초롱한-제 딴에는- 눈망울을 하고 효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효진은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불편한 표정, 짜증나는 표정, 미간이 점점 좁혀지다가 어느 순간 탁 풀린다.
“학교에 폰 가져오면 안 되는 거 몰라?”
압수, 하면서 가인의 손에 들려있던 스마트폰을 빼앗아간다. 그리고는 말과는 다르게 액정을 보면서 터치. 번호를 저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질리지도 않고 꾸준히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다. 예상대로 얼마 있지 않아 싱글싱글 웃고 있던 가인의 손에 스마트폰이 돌아왔다.
“열한 시 쯤에 막힐 것 같아요.”
“싫어. 아홉 시에 잘거야.”
“그런다고 선배 키 안 커요.”
“네가 뭘 알아. 어떻게 알아.”
“척 하면 척이죠.”
“짜증나..”
그럼 선배 의견과 내 의견을 조율해서 10시로 쇼부보죠, 어때요? 효진은 대답하지 않고 가인의 어깨를 밀치려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익숙해졌기 때문에 가인은 가볍게 몸을 틀어 효진의 손을 피했다. 손이 허공을 가르자 효진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선배, 집에 같이 가요.”
“한 대만 곱게 맞아주면.”
“……딱 한 대면 돼요?”
“아니 딱 서른 대만 때리게 해줘.”
“왜 30배가 불죠?”
“그 정도는 맞아야 말을 들을 것 같아서.”
“언제는 제가 말을 안 들은 것처럼,”
“그럼 들었어?”
아니 무슨, 뇌 속에 자기가 유리한 일만 빼놓고 다 지워버리는 지우개가 있나. 가인은 뼛속깊이 황당함이 사무쳤다. 가인의 기억에는 효진의 말에 고개를 저은 적이 손가락에 꼽힐 정도인데. 설령 불합리한 일일지라도 말이다.
“…가방 갖고 데리러 와”
작은 목소리로 한 마디만을 남겨놓곤 효진은 성큼성큼 먼저 강당을 빠져나갔다. 가인은 그런 효진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 반 헛웃음 반을 흘렸다. 저 제멋대로인 선배님이 뭐가 좋다고 이렇게 휘둘리는지 모를 일이다. 생각과는 달리 입꼬리는 슬금슬금 올라가고 있었지만.
*
창문 너머로 효진의 얼굴이 비친다. 웃으며 들어가려던 가인은 그 앞에 있는 세 명의 여학생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효진이 비틀린 미소를 짓는다. 효진과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여학생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비일상적인 마찰음이 울린다. 가인은 눈을 크게 뜬다. 효진의 얼굴이 돌아가 있다. 생각이 멈춘다. 가인은 반사적으로 문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에 여학생들은 한결같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씨발, 조용한 교실 안에 욕지거리가 울렸다. 가인이 다가가자 손을 올렸던 여학생은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더니, 양 옆 여학생들을 데리고 피하듯 자리를 나섰다. 효진의 뺨을 어루만지던 가인이 잠깐, 하고 불러세우려 했지만 효진이 가인의 손목을 잡아당겨 제지했다. 여학생들은 큰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나갔다. 가인은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채 안절부절 못했다. 이게, 잠깐, 무슨…. 정작 피해자인 효진은 자신의 자리에 앉은 채 태연자약한 게 더 당혹스러웠다. 가인이 알고 있는 효진이라면 설령 자기가 잘못한 일이라도 못해도 두 세 대 정도는 갚아줘야 할 사람이었다.
“갈까.”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요. 잠깐만…”
효진이 책상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가인은 어쩔 줄을 몰랐다. 알고 있는 것은 적어도 이 상태로 하교하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사실 하나 뿐이었다.
“괜찮아요? 왜..”
“원래 단체생활에서 튀는 사람은 배제당하기 마련이야.”
닫혀있는 교실 문을 보고 한숨을 내쉰 효진이 가인을 자신의 자리에 앉혔다. 가인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반항할 수 없었다. 효진은 가인의 허벅지 위에 옆으로 앉은 채 가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생각보다 가벼웠고, 효진을 처음 만났던 그 날부터 가장 인상깊었던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빨갛게 부어오른 효진의 뺨을 보고 가인은 아연해졌다.
“왜 그걸 그냥 냅둬요.. 선배 그런 사람도 아니면서..”
자신이 맞은 것도 아닌데 괜히 울컥했다.
“열등감에 찌든 애들은 네 생각보다 훨씬 많거든.”
그러나 효진은 여전히 태연했다.
“그런 애들한테 낭비할 정도로 내 감정이나 시간은 가치없지 않아.”
효진과 가인의 눈이 마주친다. “꼭 자기가 맞은 표정이네.” 중얼거리며 효진은 울상을 짓고 있는 가인의 눈두덩을 문질렀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못생겼어.
“화나니?”
“그럼 화가 안 나게 생겼어요, 그게..”
“속상하고?”
“당연한 걸..”
“좋잖아, 그럼.”
그런 감정을 쓸데없는 곳에 폭발시키지 마. 배우가 감정을 폭발시켜야 할 때는 무대 위에서 뿐이야. 이런 데서 터뜨린들 무슨 이점이 있어? 같이 싸대기를 날릴까? 그럼 걔네랑 똑같은 수준밖에 더 돼? 내가 잘났고 걔네가 못나서 열등감에 몸서리친 것 뿐이야, 나는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 하면 되고 걔네는 열등감에 못 이겨 손찌검까지 했다는 사실에 실컷 죄책감이나 패배감을 느끼면 돼. 그렇게 끝날 일이잖아.
“그렇게 끝낼 수가 없으니까..”
인간인 거잖아요. 가인은 고개를 떨구었다. 때로는 감정에 못 이기기도 하고 그래야, 인간다운 걸텐데.
“똑같이 상대해봤자 메리트가 없으니까. 적어도 내가 맞대응하지 않으면 나는 피해자, 저 쪽은 가해자고.”
“나나 다른 선배들이 그랬음 가만 안 있었을 거면서..”
“그거랑 이건 다르지.”
“뭐가 달라요..”
막무가내이고 제멋대로인 게 박효진이라 생각해 왔는데.
“물론 네가, 아님 미혜가, 아님 선배들이 날 그렇게 때렸음 반항했겠지. 화도 내고, 나도 한 대 쳤을지 모르지.”
“그러니까 왜..”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니까.”
내 감정이나 시간을 소비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니까 상대하는 거라고, 효진은 말했다. 이유없는 적의나 열등감같은 게 아닌 걸 아니까,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거고 그건 결국 나를 위한 걸테니까.
“근데 저런 애들은 아냐. 쟤넨 그냥 자기들 열등감을 풀기 위한 만만한 화풀이 대상이 필요한거야. 정말 쓸데없는 감정낭비지.. 어울려주는 순간 나까지 질이 떨어질 것 같다고.”
가인은 그제서야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박효진답지 않으면서도 박효진다운 이유라고 생각했다.
“너도 기억해둬, 감정 컨트롤은 중요해. 그런 얘기 못 들었어? 연예인 누구가 가족이 상을 당했는데도 녹화 중에는 계속 웃을 수밖에 없었다던지.. 마찬가지잖아. 만약 객석에서 계란이 날라와도 감정에 못이기는 순간 그 무대는 끝이 나는거야”
“그래도 화가 나는 걸 어떡해요.”
“묻어둬, 잊진 말고 묻어두고만 있어. 그리고 무대 위에서 털어내야지, 상대역한테.”
그리고 지금 네 상대역은 나고. 효진은 가인의 턱을 잡고 자신의 얼굴을 보게 만들었다.
“지금 네 감정이 쏟아질 곳은 오로지 나여야만 한다는 소리야.”
10.
“선,”
10시 안 됐어.
매정하게 전화가 끊긴다. 가인은 액정에 뜨는 시간을 확인했다. 9시 58분. 아니 뭐 이런 유도리 없는 사람이 다 있나. 2분 쯤, 그냥 넘어가면 덧나나? 가인은 애꿎은 대본만 힘주어 넘기다가 찌익, 하고 약간 찢어지는 소리가 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쳐 쥐었다. 테이프, 테이프…. 서랍에서 스카치테이프를 꺼내 대충 처치를 하고 나자 10시 2분이었다. 가인은 심호흡을 하고 효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할 일도 없냐. 너는.
“선배는 무슨 할 일 있는 것처럼.”
난 많거든.
“9시면 주무신다면서요.”
…….
왜 뻔히 들킬 거짓말을 하는 걸까? 그리고 저렇게 말문이 막히면 언제나,
시끄러.
예상과 똑같은 말이 가인의 입을 막았다.
“근데 그런 것치곤 별로 안 졸리신 목소리네요.”
사실 9시에 안 자.
“이제야 순순히 실토하시는군요.”
뻥친다고 해서 뭐 무지막지한 손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제 안의 선배 이미지가 손상당했다구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생각보다 늦었네.
말을 말아야지. 가인은 침대에 드러누워 대본을 펼쳤다.
“리딩 도와주실거죠?”
두 번 읽었어?
“넵”
그럼 다 외웠겠네, 대본.
“대충은?”
어디서 막혔는데?
“첨부터요?”
까분다.
“진짠데.”
선배가 도와줄 줄 알고 세 번째는 아직 안 했어요. 흐흐 하고 가인이 웃는 소리와 효진의 한숨소리가 교차된다.
그럼 내 맘대로 할거야.
“예에?”
48페이지.
“아, 잠깐만요.”
대본 내려놔.
“아이, 선배.”
꼼수부릴 생각하지 마라? 내일도 할거니까.
“으으.”
가인은 얌전히 대본을 침대 옆 책상에 내려놓았다.
연기까지 하라고는 안 할게. 진짜 외웠는지 시험만.
“괜히 전화했어..”
맞아. 지 무덤 팠지 뭐.
흐으, 가인은 우는 소리를 하며 몸을 뒤집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조용해진 수화기 너머에서 왠지 팔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선배는 대본 보고 해요?”
어.
“아니 왜? 그런 게 어딨어요?”
불만 있어?
“다앙연하죠오.”
알았어, 나도 안 봐 그럼.
“어?”
박효진이 이렇게 순순하게 나올 사람이 아닌데.
대신 난 아는데 넌 모르면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
“대본 들고 하세요. 제발요.”
늦었어.
“선배 요새 나 엄청 늙는 기분...”
나 1학년 때 선배들도 그 소리 했는데 그래도 죽는 사람은 없더라.
누구 하나가 죽어야 멈춘단 소린가? 가인은 등골이 오싹했다. 박효진이라면 진짜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아서 더.
..주앙, 저기 저 여자를 봐. 어떻지?
“음……다리가 예쁘네요.”
맙소사 주앙, 이건 말도 안 돼.
“예?”
하나만 묻지. 만약 저 여자가 네게 ‘눈이 참 예쁘시네요’하고 말했어. 넌 뭐라고 대답할거지?
“어……감사합니다?”
젠장, 자넨 소질이 없어.
“아니 왜요!?”
반대로 생각해 보라구, 만약 네가 그녀에게 눈이 참 예쁘다고 말했어, 그런데 그녀가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면 넌 뭐라고 말하겠어?
“엄….”
마찬가지 아니겠나?
10p
어떤 사람인지 말이나 들어보지.
“그녀는 말이죠, 아주…아주 예뻐요. 아무튼, 많이, 굉장히, 엄청, 여튼간에 너무 예쁘단 말이죠!”
수식어가 너무 저렴한 거 아닌가?
“하지만 정말 아름답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는걸요.”
그녀의 눈 색은 어떻지?
“짙은 푸른 색이죠.”
나라면 그걸 바다같다고 표현했을거야, 주앙.
“오 세상에.”
느낀 걸 솔직히 말하게.
“토할 것 같아요!”
아, 중요한 건 그거지! 자네가 어떻게 느끼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중요한 건 여자가 어떻게 느끼느냐지! 낭만과 느끼함은 한 끗 차이야. 로맨티스트와 저질도 말이야.
“하지만 어떻게 맨정신으로 그런 말을 하죠!?”
그렇다고 술의 힘을 빌릴 수는 없는 거 아닌가? 혼자만 취하는 건 매너없는 짓이지. 하지만 말이야, 같이 취하면 괜찮아.
“술을 마시란 소린가요 마시지 말란 소린가요?”
꼭 술에만 취할 수 있는 건 아니지. 분위기에 취하게, 주앙. 그녀를 먼저 취하게 만들어,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란 말야. 그럼 언젠가 그녀는 만약 네가 그녀의 눈동자에 대해 바다를 넘어서서 보석같다고 유치한 묘사를 할지라도 홀딱 넘어갈 타이밍이 올 거야! 그 타이밍을 잴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걸 놓치지 않고 눈 딱 감은 채 아주 잠깐만 미친 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야 뭐가 무서울 게 있겠나?
“정말 모르겠군요! 여자란 왜 그렇게 복잡한거죠!?”
그러니까 여자지!
92p
저 마담에 대해 최대한 낭만적으로, 느끼하게, 자네가 느끼는 기준에서 토할 것 같을 정도로 다정하게 칭찬해 보게.
“그러니까, 어…. 까무잡잡한 근육질의 다리가 아주 섹시…”
잠깐, 잠깐. 이봐, 주앙….
“예?”
여자가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챠밍포인트와 콤플렉스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할 거 아닌가?
“독심술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콤플렉스를 어떻게 압니까?”
척 하면 척이여야지! 여자란 아주 섬세해! 그녀들은 “나 오늘 뭐 달라진 거 없어?”하고 페디큐어 색이 달라진 것을 눈치채지 못하면 화를 내는 존재란 말이야. 그녀에 대해서 그녀보다 더 빠삭하게 알고 있어야지 그 마음을 움직일까 말까란 말이지.
“제기랄, 차라리 삼합회에서 마약을 사는 게 더 쉽겠네요!”
221p
“엌, 잠깐만요…너무 많이 건너뛰었는데?”
그래서 기억 못 해?
“아니, 누가 그렇댔나. 잠깐만요. 스탑, 스탑…. 전 제 머리를 믿어요. 믿는다구요..”
별로 안 믿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 진짜로. 금방 생각 날 것 같아요. 미치겠네. 아 선배, 나 진짜 알아요. 알거든요? 아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기억력 용량이 별로야.
“기억, 기억나쓰요. ‘하지만 그녀는 유부녀잖아요’, 맞죠?”
……유부녀는 여자가 아닌가?
“임자가 있잖아요?”
그녀가 그 가문에 어떻게 시집갔는지 알고 있나, 주앙?
“음, 그러니까…아주 어릴 적에, 가세가 기울어져서 팔려가듯이….”
콘스탄 공작과 공작부인의 나이차가 얼마나 나는지는?
“열 여덟 살? 아, 도둑놈이었군요.”
그녀는 행복했을까?
“적어도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을테니 그렇게 불행하지도 않지 않았을까요?”
모든 사람은 다 다르게 설계되어 있지. 그 중에서도 여자는 좀 더 세분화되어 있어. 한결같지가 않다는 뜻이네. 한 여자의 대화에서 이 대답이 먹혔다고 또 다른 여자에게도 그 대답이 먹히냐 하면, 그건 아니라는 거지.
“그거야 그렇겠지만요.”
물질적 풍요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질적으로는 부족해도 정신적 풍요를 원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지.
“콘스탄 공작 부인은 후자구요?”
드디어 한 가지를 가르쳐주면 적어도 한 가지는 알게 되었군.
효진이 말을 멈추었다. 가인이 선배? 하고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어, 진짜로 잠들었나? 그러나 방금 전까지 멀쩡히 대사를 치던 사람이 잠들기에는 그 간격이 너무 급격한데. 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책상에 놓아두었던 대본을 다시 집어들었다.
…1페이지.
“네? 아, 선배. 잠든거 아니었네요.”
잘 시간 아니라니까.
“갑자기 조용해지셔서.”
이번엔 대본 봐도 돼. 보고 대답해.
다시 책상 위에 대본을 내려놓으려던 가인은 의아해하면서도 대본의 맨 첫 장을 펼쳤다.
자네 취향의 여성상을 말해보게.
가인은 손가락으로 대사를 짚어가며 읽어내렸다. 그러나 가인의 대본에 그런 문장은 쓰여있지 않았다.
“선배, 이거 인쇄가 잘못됐나…”
그런 대사 없는데요? 지금껏 읽으면서 단 한 번도 위화감을 느낀 적도 없었고.
추가될거야. 미혜가 물어보래.
“아, 새로 수정된 거에요?”
응.
“여성상?”
예쁜 사람? 은 너무 단순하고 포괄적인가. 가인은 으음,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존경할 수 있는 사람?”
흐음.
“잘난 척 하는데 진짜 잘나서 미워할 수가 없는 사람?”
음..
“아,”
선배같은 사람요.
…….
“…?”
야.
“? 네?”
네 취향 말고 돈 주앙 취향.
가인은 미친듯이 침대를 굴렀다.
11.
모시러 가도 돼요?
ㄴㄴ
선배네 교실 앞인뎅
ㅡㅡ
와, 직선 두 개가 나란히 찍찍 이어져 있을 뿐인데 어쩜 저렇게 박효진 표정이랑 똑같지? 가인은 정확히 서른 두 번째 똑같은 이유로 감탄했다. 효진의 번호를 얻어낸 이후 휴대전화로 나누는 두 사람의 회화는 거의 정해져 있었고, 대부분은 효진이 저 자신과 똑같은 표정의 이모티콘을 날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일상적인 패턴이었다. 가인은 예의바르게 2학년 교실 뒷문을 똑똑똑, 정확히 세 번 노크하고 제 딴에는 큰 목소리로 들어갑니다아, 말한 후 드르륵 문을 열었다.
교실 안 시선들이 일제히 가인을 향한다. 가인은 급 쪼그라들었다. 방과후이고, 종례시간이 지난지 좀 됐기 때문에 거의 비어있을 거라 생각했던 교실 안은 반 이상이 차 있었다. 이건 상정하던 바 외인데, 가인은 당장 뒤돌아서 튈까 생각했지만 그조차도 불가능케 됐다. 사방에서 가인을 향한 감상평들이 날라왔기 때문이다. 와! 쟤가 걘가봐! 가인이? 와 진짜 하얘! 귀엽다! 가인은 넋이 나갈 뻔 했지만, 선배 하나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서게 됐을 때 효진과 눈을 마주쳤다. 가인은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도와주세여. 제발여. 이제 진짜 말 잘 들을게여. 진짜로여. 잘못했어여. 선배가 안된다 그랬을 때 순순히 말을 들을 걸 그랬다고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 중이라니까요?
“아, 쫌.”
가인의 눈빛을 효진이 읽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대충 도움을 구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전해진 모양이었다. 효진이 짜증을 내며 2학년 학생에게 손목을 붙잡혀 있던 가인의 반대쪽 손목을 잡고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렇게 세게 잡혀있던 것은 아니라서 가인은 어어, 하는 새 금세 효진의 등 뒤로 숨을 수 있었다.
“얘가 가인이 맞지?”
“어.”
“효진이 지금 남친?”
“그런 쓸데없는 말 좀,”
“자, 잠깐만요. 지금 남친이란 게 무슨 뜻이에요? 뭐야? 선배 남친 있었어요??”
“아나.”
“가인아 너 지금 우리 사이에서 완전 핫한거 알아!?”
2학년 교실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정신이 없었다. 사방에서 질문이 날아오고, 그 질문에 답하기도 전에 자기들이 먼저 놀라고 감탄하고 칭찬하고, 감사하다 대답하려는 순간 또 질문이 날아오고. 게다가 그럴 때마다 효진에 대해 쌓이는 의문까지. 그러나 효진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가인은 그 표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폭발 직전인 상태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팬텀 했지, 맞지?”
“아…”
“야 우리가 그 때 효진이한테 너 좀 소개시켜달라고 그렇게 졸랐는데,”
“내 후배를 니들이 소개받아서 뭐하게.”
“저러면서 어찌나 철벽을 치던지.”
그건 진심으로 감사할 일이라고, 가인은 생각했다. 만약 이 학교 교풍에, 또 연극부로 인해 선배들에게 익숙해지지 않았던 때 그런 선배 러쉬를 당했다면 진짜로 혀 깨물고 자살하기를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효진의 그런 배려도 무의미하게, 지금 가인은 오로지 본인의 잘못으로 효진의 말만 들었으면 피할 수 있었을 상황에 맞닥뜨렸지만 말이다.
“와 이거봐 진짜 하얘. 밀가루 같다, 얘. 우와 말랑말랑해”
“자깐만여…”
뺨은 좀 놓고 말씀해주실래요? 비싼 몸인데. 좀 친해진 연극부 선배들이라면 그렇게 농담삼아 어물쩍 넘길 수 있었을텐데, 유감스럽게도 가인에게 이 교실 선배들의 이미지는 지난 번 효진에게 손찌검을 했던 그 여자들의 이미지였다. 물론 지금 그 여자들은 자리에 없는 듯 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금방이라도 질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역한 향수 냄새라든지, 진한 화장이라든지, 빡세게 말고 온 듯한 머리라든지. 사실 그건 연극부 선배들이나 효진과도 차이가 없는 부분이었지만, 편견이란 건 무섭기 마련이다.
“가인이 이번에 효진이랑 같이 무대 선다며?”
“아, 네”
“완전 기대하고 있어요, 팬이에요!”
“가, 감사함당…”
“너 때문에 서는 무대래, 효진이가.”
“야 김유진.”
지금 알게 된 사실인데, 효진은 가인이 2학년 선배들에게 에워싸여 이지메 아닌 이지메를 당하고 있는 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을만한 이야기는 칼같이 자르는 것 같다. 뭐야?? 선배 넘 치사한 거 아니에요? 그런 원망을 담아 가인은 효진에게 눈짓했다. 어찌됐든 효진이 자기 때문에 서는 무대라고 말했단 건 가인에게 있어서는 조금, 아니 좀 많이, 아니 아주 많이 기분이 좋은 얘기긴 했지만.
“야 방금 내 후배님이 눈으로 말씀하셨는데 너네 완전 짱난대.”
“예???”
자신의 눈을 빤히 쳐다보던 효진의 입으로 튀어나온 말도 안 되는 해석에 가인은 급한 패닉을 일으켰다. 혼란에 혼돈이다.
“빨리 꺼졌음 좋겠대. 꺼져 빨리.”
“잠까, 선ㅂ…”
좀 격하긴 해도 마침 하고 있던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뻥치시네. 이렇게 귀여운 애가 어떻게 그런 험한 생각을 하니.”
“니가 눈이 있으면 얘 눈빛 좀 봐. 여기서 나가고 싶어 죽겠단 얼굴이잖아.”
“어딜 봐서..”
유진이라고 불렸던 선배가 미간을 좁히며 가인의 눈 바로 앞에 불쑥 얼굴을 들이댄 채 가인의 표정을 살폈다. 가인은 최대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유지하며 지금껏 연극을 해왔던 소질을 살려 착한 후배의 얼굴을 만들어 보였지만,
“음..애가 좀 얼굴이 회색빛이긴 하다.”
아 좆됨 진짜. 가인은 울고싶었다. 근데 그 이상으로 이 학교에 들어온 후부터 그런 감정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훨씬 더 서러웠다.
*
“선배 진짜 그러는 거 아니에요!”
“내가 뭘. 도와줘도 뭐래.”
“그 무서운 선배들 앞에서! 나 썅년 만들려고!!”
가인은 울부짖었다. 아, 미, 미안해. 우리가 너무 붙잡았지? 어색하고 애매한 미소를 띄면서 뒤로 물러서주던 쎈 언니들의 모습이 가인의 기억 속에 선명했다. 미친, 다 끝났어. 난 끝났다고. 내 인생 끝났음. 디 엔드. 가인은 아프지 않고 빨리 죽을 수 있는 효율적인 자살방법을 고민했다. 유서에는 이게 다 박효진 때문이라고 써놓고 죽어야지.
“손가인 아.”
“네??”
“아 하라고, 아.”
이 시국에 아는 무슨 아야,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가인은 아주 작게-나름대로의 소심한 반항이었다- 입을 벌렸다. 가인의 입 안으로 무언가 동그란 물체가 들어왔다. 무의식중에 입을 다물자, 달콤한 딸기 맛이 났다. 사탕?
“진정해 쫌. 정신없으니까. 걔네 무서운 애들도 아니고, 눈치가 좀 없을 뿐이지.”
그 눈치없음 부분이 최악이다. 그냥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죽을 수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선배들의 눈치없는 친절에 후배는 부담감에 죽어날 수도 있는 법이라고 가인은 역설했지만, 효진이 '내가 그러는 것도 아닌데 나한테 말해서 뭐하게' 하는 말에 김이 샜다. 그거야 그렇지. 박효진은 후배고 나발이고 자신 외의 인간에게는 일절 관심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오지 말랬을 때 곱게 말 듣지.”
“아니 내가 그럴 줄 알았나아..”
“너 어른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 알아 몰라?”
“아는데 선밴 어른이 아니잖아요.”
“너보단 어른이잖아. 여기도 너보다 오래 다녔고. 당연히 너보다 아는 것도 많으니까 내 말을 좀 잘 들으라고. 설마 내가 소오중한 우리 후우배니임한테 해 끼칠 얘기를 하겠니?”
가인은 입 안의 달디단 딸기맛 사탕을 혀로 굴리며 생각했다. 말이야 맞는 말이긴 한데, 이 오묘하게 찝찝한 기분은 뭐지? 효진의 얘기를 잠자코 들었다가 해가 된 일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것 같은.. 그것도 심지어 득보다 실이 더 많았던 것 같은......어쨌든 그래도 이번에는 효진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서 가인은 이쯤에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선배들은, 음, 일단 당분간은 2학년 교실이 있는 복도엔 얼씬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근데 선배 기분이 좀 나빠보이시네요.”
“그럼 좋겠니.”
“왜요? 당한 건 난데.”
“누가 보면 삥이라도 뜯긴 줄 알겠다..”
“정신적 피해로만 치면 삥보다도 심하다니깐요.”
“유난스럽긴.”
“근데 선배는 왜 기분이 나빠요?”
질문과 동시에 효진이 까드득, 하는 소리를 내면서 사탕을 깨물었다. 왜 기분이 나쁘냐면, 대답이 좀 궁해졌다. 그냥 뭔가 꽁기하다. 자신을 배제한 채 가인을 둘러싸고 말을 걸고 칭찬하고 만지고 하는 그 모양새가. 그럼 그게 왜 기분이 나쁜 걸까. 으음, 효진은 막연히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를 상상했다.
“내 소유물이 내 허락없이 나돌아다니는 그런 기분..”
“제가 언제부터 선배 소유물이었죠?”
“그런 기분이라고.”
비유 몰라 비유? 효진의 눈이 이모티콘처럼 직선으로 쭉 찢어진다. 아, 그래 이 표정. 문자나 카톡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보는 이모티콘.
“그러고보니까 선배 이번 무대 저땜에 서는 거란 말도 하셨다면서요.”
“ㅡㅡ”
“안 그런 척 하면서 저 완전 좋아하시네요.”
“ㅡㅡ”
“근데 지금 남친이란 그 얘긴 뭐에요. 선배 남친 있었어요?”
“야 그건 그냥..”
연극 올릴 때 상대역을 농담삼아 그렇게 부르는 거라고 효진은 대답했다. 아마도 가인이 효진을 잘 따르는 걸 아니까, 후배가 귀여운 선배 맘에 골려주고 싶은 의도도 다분히 있었겠고. 물론 자신 외의 사람이 가인에게 그런 감정을 품고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건 또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
“너 앞으로 우리 교실 올 때 애들이 말 걸어도 대답하지마. 입에 자크 채워. 알았어?”
“절 죽이려고 작정을 하셨나봐요...어떻게 그래요! 저 막 점심시간에 옥상으로 불려나가고 그럼 책임져주실거에요?”
“앞으로 네가 걔넬 볼 시간이 더 많을까 날 볼 시간이 더 많을까?”
“엇.”
“효진선배는 가인후배가 그 정도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머리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걸 믿어요”
효진이 가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고 꾹 내리눌렀다. 그리고 쓰다듬는다. 부비부비. 가인이 으으 하고 신음했다.
“선배 그 말투랑 쓰다듬는 방식에서...악의가 느껴져요.”
“짜증나.”
“뭐가요, 또”
“짜증난다고.”
“그러니까 뭐가요.”
“후배란 게 원래 이렇게 성가신거야?”
작년까지만 해도 자신이 신입생이었고, 그보다 더 어렸을 때는 후배고 선배고 발치에 나돌아다니는 찌라시같은 존재라고만 생각해 왔어서 몰랐는데 가인은 효진에게 있어, 뭐랄까 좀, 유별난 존재였다. 이걸 해도 신경쓰이고 저걸 해도 신경쓰이고 좀만 잘해도 기분 좋고 좀만 못해도 서운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 그 어물거리는 어설픈 미소를 지을 때면,
“아님 손가인이 성가신거야.”
“헐. 너무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풀죽은 시늉을 한다. 연극하라고 데려온 연극부에서 이상한 것만 배워와선... 효진은 가인을 흘겨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걔네가 옥상으로 부르거나 학교 뒤쪽으로 부르면 나한테 전화해.”
“선배가 이겨요?”
“당연한 거 아냐?”
이게 고등학교 여학생들이 나눌법한 수준의 대화인지에 대해서는 깊은 의문이 들지만.
심심해요
대본이나 외워
다 외운지가 언젠데. 심심해요
공부해
공부에 취미가 없어서. 심심해요
밥이나 먹던지
먹었어요. 심심해요
올래?
어? 가인은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노란 메시지창에 쓰여있는 저 두 글자는 분명 올래, 그러니까 지금 내가 있는 곳에 올래? 라는 권유가 맞을 터렷다? 가인은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꿇은 후 경건한 자세로 각을 잡은 다음 메시지를 입력했다.
어디를요?
우리집
진짜!?
싫음 말고
제가언제그랬어요갈래요갈래요어딘데요?
…너무 속보이나? 이런 얘기 할때는 15분쯤은 기다렸다가 답장하는게 올바른 밀당스킬이라는 걸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무슨 선후배간에 밀당이람 밀당은. 가인이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 있을 때 까톡, 하는 알람음이 다시 울렸다. 노란 메시지창에 떠 있는 주소는 상세하면서도 퍽 생소한 것이었다.
팬텀.12
효진이 보내준 주소의 아파트는 가인의 집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다만, 어떻게 해도 이 방향으로는 올 일이 가인에게는 없었던지라 이 지구에 발을 들인 것은 생애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가인은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공동현관의 번호키에 효진의 호수를 입력한 뒤 호출버튼을 눌렀다.
우와, 엘리베이터다. 우와, 문이다. 우와, 거울이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 순간까지 가인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했다. 그런 것쯤이야 자기 집에도 다 있는 것인데, 모든 게 생소해서인지 전부 다 신기하게 느껴졌다. 거기다가 효진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니 더더욱 구름 위의 장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박효진효과 굉장한데.
메시지에 쓰여있던대로 가인은 11층에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고작해야 한 층에 집 두 개밖에 없는데 쓸데없이 현관복도는 넓디 넓었다. 괜한 공간낭비 아닌가, 라고 생각했지만 효진의 집 맞은편에는 자전거며 킥보드, 인라인 스케이트 등 짐이란 짐은 한 가득 있는 걸 보니 존재의의가 아예 없는 건 아니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맞은편에 있는 효진의 집은 황량해 보일 정도로 휑하니, 아무것도 없었다. 뭐 박효진 답다면 박효진다운 것 같기도 하고. 가인은 인터폰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막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후드점퍼 주머니에 넣어놨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뭐지? 가인은 핸드폰을 꺼내 액정에 뜬 메시지를 확인했다.
311928
…?
“헐…”
설마 이거 비밀번호야? 가인은 정말 설마설마 하는 마음으로 도어락의 슬라이드를 올린 후 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 슬라이드를 다시 내려 닫자 삐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렸다. 헐. 이런 걸 저렇게 남한테 함부로 가르쳐주면 어떡해? 근데 그것보다 내가 집 앞에 다 온 건 어떻게 안거야? 헐 소름. 가인은 닭살이 돋으려는 팔을 문지르며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신발장에 닿기 전에 또 붙어있는 넓다란 현관에 가인은 학을 뗐다. 아니 복도도 넓구만 뭐하러 이런 현관을 또. 게다가 심지어 효진의 집은 이 현관에조차 아무런 물건도 없었다. 낭비야 낭비…. 가인은 혀를 쯧쯧 차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당연히 반갑게 나와 맞아줄 거라고 생각했던 효진은 웬일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선배?”
큰 소리로 부르자 안쪽에서 무언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사실 환청일지도 모른다. 가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일단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 역시도 심하게 넓은지라 가인은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 가인은 발길이 향하는 곳으로 흘러흘러 걷다, 문이 닫혀있는 방 하나를 발견했다. 여기 있나? 근데 막 벌컥 열었다가 부모님이나 형제분 계시고 그럼 어떡해. 문을 열자마자 맞게 될 어색한 시선교환.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가인은 목을 가다듬고, 최대한 예의바르게 허리를 굽힌 채-그래봤자 안의 사람은 못 보겠지만- 공손하게 노크를 했다.
“효진선배- 계세요?”
문 너머로 또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 효진선배가 맞기 때문에 대답을 한 거겠지? 그런 결론을 도출해내고, 가인은 살며시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으으으?”
그러나 또다시 널찍한 방 안의 침대 위에는, 너무도 예상 외의 인물이 엎드린 채 고개만을 돌려 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 선배?”
미혜가 노트북에서 손을 뗀 후 설레설레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어어어…? 효진선배는요? 여기 효진선배 집 아니에요?”
이 여자 또 뻥친거 아니야!?
“여기 효진이네 맞는데. 난 놀러온거고.”
“아아..”
뭐야, 나만 부른 거 아니었어? 좀 실망.
“너 너무 노골적으로 실망한다.”
“네?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닌데.”
“아니긴 뭘. 너 정말 효진이 말대로 표정 감추는 거 되게 못하는구나.”
“후배 칭찬만 해줘도 모자랄 판에 뒷담까고 다녔어 선배….”
“효진이 입에서 다른사람 얘기가 나오는 것 자체가 대단한건데?”
“이젠 그런 말로 안 풀려요…. 그래서 효진선배는요?”
“효진이 씻으러.”
“아니 무슨 손님을 불러놓고 이제서야 씻으러 가? 2시인데?”
“너 온다니까 씻으러 가버렸어.”
미혜의 말에 가인의 입꼬리가 씰룩씰룩 움직였다. 아 뭐야 나 온다고 씻는대, 어우 왜 나 온다니까 씻어 무슨 데이트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가인아~ 표정관리좀 해”
“어흠, 큼, 크흠.”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전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가인은 금세 시치미를 떼고 평소의 멀쩡한 얼굴로 돌아온 다음 미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선배는 웬일이에요? 언제 오셨어요?”
“웬일은 뭐, 놀러왔지. 어제 여기서 자고….”
“!?!??”
“그렇게 놀랄 일이야?”
“아니 그냥요…. 좀 부…”
“부?”
“부…”
“부러워?”
“부자들만 사는 집 같네요! 여기! 짱 넓다!”
“좀 그렇지?”
가인은 그제야 한숨 돌렸다. 아니 뭐 부럽다면 부러운데, 그게 왜 부러운지에 대한 이유가 생각해보니 빈약했다. 넓어서? 뭐 여기만은 못하지만 가인의 집도 좁지는 않다. 그럼 친구네 집에서 묵고 가는 우정이 부러워서? 뭐 해본 적은 없지만 가인도 가장 친한 친구 몇몇에게 재워달라고 하면 기꺼이 그러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남는 이유는,
“빨리 오셨네, 후배님?”
물기가 떨어지는 머리칼을 수건으로 털어내면서 효진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 선배! 가인은 인사하려 고개를 들어 효진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틀었다.
“뭐야? 인사도 안 해?”
“으아앜!!”
가인은 급격한 패닉을 일으켰다. 뭐야 방금? 나 이상한 거 본거같애. 환각? 환각인가? 선배에 대한 존경심이 너무 흘러넘치는 나머지 좀 약간 성적 욕구로까지 이어지는 바람에 지금 이런 환각을 마주하게 된 건가? 잘못 본 거겠지? 가인은 조심스레 다시 고개를 돌려 효진을 바라봤다. 이번엔 물끄러미. 하나. 둘. 셋.
잘못본거 아니자나!!! 가인은 다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뭐에요 선배!!”
“뭐가?”
“아니, 참나, 다 큰 처자가 지금! 남사스럽게!”
나시티에 속옷 한 장이 웬말이야!
“같은 여자끼리 뭘 그리 유난이야?”
“옷 입어요 빨리!!”
“맞다, 너 나 좋아하지. 와 나 잡아먹힐뻔.”
“지금 그런 농담이 나와요!?”
“안 나올 건 뭐래.”
효진은 여유롭게 옷장을 뒤적이다 박시한 흰 와이셔츠 하나를 꺼내 입은 후 아예 등을 돌리고 서 있던 가인의 눈 앞에 짠, 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됐어 이제? 만족해?”
“만족이고 뭐고 그게 당연한 거잖아요! 현대의 문명인이면!”
“야 얘가 지금 날 원시인 취급한 거 같애. 때려도 돼?”
“어차피 진짜 때리지도 못할 거잖아 너.”
“아 선배!!!”
무의식 중에 효진을 바라보고 있던 가인이 다시 빽 소리를 지른 후, 얼굴을 붉히며 등을 돌렸다.
“왜 또? 옷 입었잖아?”
“바지를 입으라구요 바지를!!! 그게 더 야하자나!!!”
“내가 내 집에서 내 맘대로 입겠다는데!”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요!”
“니가 왜 손님이야?!”
“그럼 난 뭐야!”
“후배지 뭐긴 뭐야! 반말하지마!”
아무래도 대화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둘의 말다툼을 감상하던 미혜가 무의식적으로 흘리듯 말했다.
“너네 호흡 장난아니다, 같이 살면 심심할 일은 없겠다.”
“얘(선배)랑 내(제)가 왜 같이 살아(요)?!”
“아니..그냥 말이 그렇단거지 내가 언제 같이 살라고 했니..”
그리고 정말로 호흡 하나는 죽이는데? 물론 그렇게 말이라도 내뱉는다면 이번엔 멱살이라도 잡힐까 두려워 굳이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빨리 바지 입어요!”
“왜!!”
“다리가 보이잖아 다리가!”
“교복 치마도 다리는 보이거든!?”
“교복이랑 이거랑 같나!”
“다를 건 뭐야!”
“에이씨!”
“이게 선배한테?!”
관둬! 가인은 팩 고개를 돌리며 토라졌다. 미혜는 턱을 괴고 그 싸움을 관람하며 생각했다. 얘넨 무슨 연인 싸우듯이 싸워?
“그럼 나는 슬슬 일어설까, 자, 효진이 양육권은 가인이한테 일임할게.”
자리에서 일어난 미혜는 효진의 양 어깨를 잡고 살짝 가인의 쪽으로 밀었다. 물론 효진은 내가 애냐며 짜증을 냈지만.
“아, 조 선배 가시는 거에요?”
“응~”
“그럼 선배는 잠깐 저랑 심오한 대화를 나눠봐요.”
“잔소리할거지 너.”
“제가 언제 선배한테 나쁜 소리 한 적 있어요? 이게 다 선배 잘 돼라고…”
“니가 무슨 우리 엄마야?”
와, 이번엔 모녀싸움이야. 단 둘이서 싸움의 유형이 참 다양하기도 하지. 미혜는 감탄하면서 현관 앞에 나와서까지 말싸움을 하며 배웅해주는 효진과 가인의 인사를 받고 손을 흔들어 답했다. 물론 밖을 나와 문을 닫는 순간까지 문 너머에서는 큰 소리가 들렸지만 말이다. 아 그러니까 니가 무슨 상관이냐고! 무슨 상관이냐니! 우리가 남이에요!? 그럼 우리가 가족이야!? …싸움의 유형은 다양한데 내용의 수준은 한결같이 초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역시도 신기했다.
13.
미혜가 효진의 집을 뜨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선 가인과 효진은 잠시동안 침묵의 신경전을 벌였다. 누구 하나 물러설 것 같지 않은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효진은 먼저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그와 거의 동시에 가인은 고개를 돌렸다.
“아 진짜!!”
“뭐, 왜, 뭐.”
“허벅지가 다 보이잖아요, 허벅지가!”
쪼끄만게 쫑알쫑알 시끄럽게 유난 떨기는. 효진은 짜증을 내며 침대에 다이빙하듯 풀썩 엎어져 누웠다. 그 소리를 듣고 무심결에 침대쪽으로 시선을 옮겼던 가인은 히이익, 또 한 번 식겁했다.
“팬티 다 보인다!!”
“네가 안 보면 될 거 아냐!”
“보이는데 어떻게 안 봐요!”
“넌 날 보면 팬티만 보이냐!”
“아악!”
결국 패닉을 일으킨 가인이 불안한 듯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정신을 사납게 만들자, 효진은 한숨을 내쉬며 먼저 백기를 들고 이불을 몸에 둘러 감싸였다.
“자, 됐지. 됐어? 지가 무슨 내 남친도 아니고…”
그 말을 듣고서야 가인은 방 안을 맴도는 것을 멈추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제야 효진의 곁에 마찬가지로 걸터앉았다.
“따지고 보면 남친은 아니어도 애인은 맞잖아요.”
“뭐어?”
“상대역을 그렇게 부르는 거라면서요?”
“너 어째 다시 쌩쌩해진 것 같다?”
얍, 장난삼아 바바리맨 하듯 이불 끝을 쥔 효진이 몸을 감싸고 있던 이불을 펼치자, 가인이 또 앜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고개를 틀었다.
“변태! 선배 변태!”
“그런 거밖에 안 보이는 네가 더 변태. 조미료는 몇십 번을 봤어도 아무 소리 안 했는데 넌 왜 그렇게 유난이야.”
“아니 왜 몇십 번이나 봐요? 그리고 몇십 번이나 봤으니까 익숙해진 거겠죠!”
“첨부터 멀쩡했어! 걘!”
까칠하게 대꾸하며 효진은 이불을 다시 몸에 둘렀다. 이래서야 와이셔츠 하나만 가볍게 걸친 의미가 없다. 애초에 더워서 이렇게 입은건데. 잠깐 고민하던 효진은 짜증섞인 손길로 가인을 밀치듯 살짝 밀어내고, 다시 옷장으로 향해 남색 핫팬츠 하나를 골라입고 나서야 다시 돌아왔다. 가인은 여전히 그 노출의 퍼센티지가 퍽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처음부터 그렇게 입고 나왔음 좀 좋아요.”
“아니야, 넌 처음부터 이렇게 입고 나왔음 긴바지 안 입었다고 난리 블루스를 췄을 애야.”
가인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보니, 그랬을 것 같기도 했다. 애초에 거의 나신에 가까운-가인이 생각하기엔- 차림에서부터 하나하나 걸쳐갔기에, 평소보다 용납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진짜 성가셔. 점심은 먹었어?”
“먹고 왔어요.”
“마실 거라도 줘? 맥주 한 캔 할래?”
“네에에에?”
잘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척 보기에 외양에 날티란 날티는 다 내고 다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범법은 저지르지 않는 본성은 착한-그 착한 본성을 가인이 목격한 적은 고작해야 서너 번, 그것도 가인과의 관계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행동을 본 것에 불과했지만-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가인이 입을 벌린 채 충격받은 표정을 짓고 있자, 효진은 약간 기분이 상했다.
“그거 한 캔씩 할 수도 있지 뭘 그래?”
“술이잖아요…미성년자 판매금지 몰라요?”
“술은 무슨. 맥주는 음료야.”
“헐.”
원래도 없던 신뢰도가 더욱 바닥치는 소리가, 가인의 머릿속 어디선가에서 울리는 듯 했다.
“네가 그렇게 따르는 조 선배도 맥주 정도는 마시거든?”
“네? 헐. 그럴리가. 선배도 아니고 어떻게 조 선배가. 나의 조 선배는 그렇지 않아요, 그럴 리 없어요, 모함하지 마세요.”
참나! 효진은 콧방귀를 뀌었다.
“걔가 나보다 술도 훨씬 잘 마셔!”
“왜 미성년자가 그런 걸 알고 있냐구요! …잠깐, 선배들 설마, 조 선배가 선배네 집에서 자고 갔다는 이유가…”
“조미료는 우리 집 오면 꼭 술 마시고 가는데 뭐.”
“아니, 애초에 그걸 사는 것부터가 이상하다니까. 어떻게 그게 뚫려요? 물론 선배가 좀, 나이에 비해 성숙…”
무심결에 가인의 시선이 스르르 내려와 가슴께에 닿았지만, 제가 더 놀란 가인이 퍼뜩 고개를 들고 괜히 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노안인 건 감안하더라도!”
“뭐어어?”
이게 하다하다 황천길 관광에 대한 낭만이 싹튼걸까? 효진은 이 용기가 가상한 후배를 칭찬해줘야 할지, 아니면 쌍욕을 날려 훈계를 해줘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선배한테 술 판 가게 고소할꺼야! 영업정지 영업정지!”
“오버 쩐다 너. 고소해봤자야. 우리집에 있는 술은 다 선배들이 가져다 주는 거니까.”
“…뭐요?”
“선배들이 채워놓는거야. 혼자 자취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술마시러 자주 오거든. 그렇게 선배들이 주는 술 한 잔 두 잔 받다보니 우리도 익숙해진거고.”
“…부장 선배?”
“졸업생 선배들.”
뻐킹! 역시 뿌리부터 썩어있던 양아치들의 공간이었던 거다, 연극부라는 곳은. 어쩐지 하나같이들 가면 수준의 메이크업을 학교에서부터 하고 있더라니. 가인은 발목을 잘못 붙잡혔다며 중얼중얼거렸다.
“됐어, 이 얘긴 끝. 그럼 넌 음료수면 되지?”
“탄산 안 들어간 걸로요.”
“우유 줄까?”
“애 취급 하지 말아주세요.”
“눈치가 빨라졌어. 안 귀여워. 이프로면 돼?”
“네…감사해요”
여전히 뭔가 떫은 기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효진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가인은 침대에 손을 짚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박효진 방이라면 무조건 화려하고 볼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평범하고 심플했다. 벽지를 포함한 대부분의 가구들이 엷은 파스텔 톤인 것도 신기했다. 박효진이라고 하면, 뭔가, 무조건 짙고 강렬한 빨강, 검정 같은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곳저곳을 부유하던 가인의 시선은 이내 책장에 멈추었다. 척 보기에도 고등학생 수준은 아닌, 얇은 하드커버의 고전 명작 동화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하긴 효진이 헤르만 헤세를 읽는 것도 이미지와는 큰 갭이 있었지만.
효진은 가인이 요구했던 이프로 한 캔과, 본인 몫의 아사히 맥주 한 캔을 들고 돌아왔다. 가인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 선배!”
“뭐! 너 잔소리좀 그만해!”
“후배 앞에서 그러고 싶으세요!”
“땡기는 건 땡기는거지!”
이러다가 진짜 누구 하나 성대가 나가야 끝이 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가인은 그다지 효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아까의 차림새 다툼에서 효진이 한 발 양보-라고 할 수 있는 걸지는 모르겠으나-해준 것을 떠올리며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효진은 가인의 그 행동을 보고 이겼다, 고 생각했는지 씨익 미소를 짓고 의기양양하게 캔을 땄다. 가인 역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음료 캔을 따 한 모금 들이키고, 문득 생각난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근데 조 선배는…원래 그렇게 자주 선배네 집에서 자고 가요?”
“조미료 뿐인가, 우리 부에선 우리집이 그냥 뭐 모텔 취급인데.”
“흐음….”
“부러우면 너도 자고 가던지.”
폭탄같은 말을 떨구고, 효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크하, 아저씨같은 소리를 냈다. 물론 가인은 그것까지 신경에 미칠 정도의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웅웅 울리는 말은 너도, 자고, 가던지. 다시금 되뇌이고, 곱씹고, 또 한 번 놀란다. 뭐??? 자고 가라고??? 아니, 어떻게…. 헐, 너무 빠르지 않나? 헐, 완전 빨라. 헐, 자고 가래.
“근데 저, 여분 옷도 안 갖고 왔고, 세면도구도, 어, 저기….”
“왜 농담을 다큐로 받고 그러지? 내일 월요일이야, 학교 가려면 가방도 있어야 되잖아.”
“아….”
“너무 실망한다 너.”
“아니, 참나, 제가 언제요?”
“실망했으면서.”
“아니거든요?”
웃겨 정말, 자의식 과잉이에요 선배 완전. 입이 댓발 나온 가인이 투덜거리자, 효진이 피식 웃으면서 맥주캔을 곁에 있던 책상 위에 탁 내려놓고 다시 침대 위로 털썩 엎어졌다.
“그럼 가방이랑 교복 챙겨 와, 재워줄테니까. 그리고 내일 같이 학교 가게.”
“어…그…그래도 돼요?”
“부모님 허락도 받아오고.”
“그건 저도 자취해서 괜찮은데.”
“어? 정말?”
“네? 어? 말 안했나?”
효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어디 사는데?”
“저기, S아파트 A동…”
“뭐야 가깝네?”
“가깝죠.”
“그럼 나도 너네 집 놀러갈래.”
“오늘요?”
“오늘 말고. 나중에. 오늘은 귀찮아.”
베개에 얼굴을 묻은 효진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일자로 쭉 늘어져 있는 그 모습에서야 매력의 ㅁ자도 찾을 수 없었지만, 허벅지 아래로 미끈하게 쭉 뻗은 다리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살짝만 고개를 틀어 자신을 바라보는 몽롱한 눈빛이, 가인은 조금, 아주 조금, 색스럽…아악! 난 뭔 생각을 하는거야 선배를 상대로!!
“조, 졸리세요?”
“그건 아닌데 좀 피곤해.”
“…조 선배랑 어제 뭘 하셨길래.”
“뭘 하기는? 얘기하고 술먹고 했지.”
“무슨 얘기요?”
“별 거 있나. 학교 얘기, 선배들 얘기, 애들 얘기, 연극 얘기…. 대본 갖고 왔어?”
“다 외웠으니까 필요없어요.”
“오랜만에 손가인 패기 맘에 드는데?”
효진이 베싯 미소지었다. 아 근데 왤케 오늘따라 야해보이지 박효진. 가인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옷차림도 옷차림이지만, 그걸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는 듯……웃음도 평소보다 조금 헤퍼진 것 같고, 목소리도 평소보다 조금 늘어지는 것 같고, ……혹시 술기운 때문인가?
“주앙, 교복을 가져와.”
-주앙, 꽃을 가져와.
-어떤 꽃이요?
-그건 자네가 판단할 일이지. 자네가 생각하기에 그녀와 가장 어울리는 꽃, 그리고 그녀가 받았을 때 가장 기뻐할 꽃을 생각해서 가져오는 거야.
“선배한테 가장 어울리는 것도 가장 기뻐할 것도 모르겠는데요. 어차피 그건 내 교복일테니까.”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손가인 교복을 제일 좋아할지 어떻게 알아?”
“선배 역시 변태였어.”
효진이 작게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빨리 갔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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