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샤] 팬텀 1-6
아마 타그룹 리네이밍으로 본사람이 더 많을지도 하지만 둘다 접니다
1.
중학교 강당 주제에 넓긴 드럽게 넓네, 효진은 중얼거리며 어두운 관객석을 더듬더듬 찾아 들어가 맨 안쪽에 자리잡고 앉았다. 동행한 친구들 역시 효진의 왼쪽 좌석부터 차례대로 하나하나씩 앉기 시작했다. 효진은 들어올 때 받은 팜플렛을 대충 살폈다. 딱 중딩 수준의 아마추어 퀄리티로, 나름 힘내서 뽀샵질을 한 것 같긴 했지만 그 '누가 봐도 열심히 한 것이 확연히 티나는' 그 느낌이 오히려 더 팜플렛을 촌스럽게 만들었다. 하긴, 고작 취미 수준으로 할 중학생 연극에 품격높은 고퀄리티를 기대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 효진은 하품을 했다. 사실 이 곳에 발걸음을 하는 자체도 그닥 내키는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이랑 선배들이 하도, 그러다 혹시 모를 원석을 다른 학교에 빼앗기기라도 하면 네가 책임질거냐, 한 번쯤 아마추어의 무대를 보고 초심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좋은 일 아니냐, 등등 반 협박과 반 설득을 해대는 것에 못 이겨 강제적으로 이끌려 왔을 뿐. 이럴 시간에 대사 한 줄이라도 더 외우면 우리도 다른 명문고 못지 않을텐데. 절로 혀가 차지지 않을 수 없었다. 좀 말려줬음 하는 선배란 작자들은 오히려 1학년들보다 더 눈을 빛내며 미리 앉아있던 1열의 중딩들 자리를 빼앗아 들떠있질 않나. 아, 쪽팔리다 쪽팔려.
이윽고 막이 열렸고, 무대는 뭐 대충 효진이 짐작했던 대로였다. 그야말로 초짜 아마추어의 딱 중딩 수준, 그 정도의 연극. 아무리 생각해도 중딩이 하기엔 무리일 것 같은 오페라의 유령을 한다기에 무리수 아닌가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무리수 정도를 넘어섰다. 라울 역의 남자애는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서 아까부터 국어책만 읽고 있고, 에릭이 크리스틴의 목소리에 반한다는 것이 전혀 설득력 없을 정도로 크리스틴 역의 여자애는 쇳소리 가득한 목소리에 노래를 부를 때는 기본적인 음정조차 맞지 않았다. 어이구, 고문이다 고문. 효진은 귀를 틀어막고 싶어지는 것을 겨우겨우 참았다. 효진이 적어도 최소한의 예의는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연극에서 그나마 눈에 띄는 사람이 있느냐 하면 단연 에릭이었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흰 가면이 썩 잘 어울렸고, 무엇보다 희소성 있는 음색이 돋보였다. 노래도 곧잘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배우로써는 한계가 보이는 것 같았다. 효진이 에릭만을 시선으로 좇는 것을 보았는지 옆자리에 앉아있던 제아가 효진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소곤거렸다. 쟤 괜찮지? 선배들이 제일 눈여겨보고 있는 애래. 효진은 저가 나타낼 수 있는 최대한의 의문을 담은 표정을 지으며 어이없다는 듯이 하아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내년 신입생은 그렇게 인재가 없나.
“왜, 잘 봐봐. 노래도 잘하고 목소리도 좋잖아.”
“그럼 가수를 하든가 해야지. 배우로썬 영.”
“네가 너무 까다로운 거 아냐?”
까다로운가? 효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좋게 봐줘도 장점이라 볼 수 있는 건 끽해야 대사 치는 호흡이 좋은 것과 그나마 라울 역의 애처럼 국어책읽기는 안 한다는 것 정도인 것 같은데. 어쨌든 그 무엇도 효진의 흥미를 돋굴 정도는 되지 못했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꽤 듣기 좋았으므로 자장가로 삼기엔 좋을지도. 효진은 바로 옆에 있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엊그제부터 잠이 부족했으므로 부족한 잠이나 채울 생각이었다.
효진이 다시 눈을 떴을 때도 연극은 아직 끝나지 않은 참이었다. 옆좌석의 제아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관극을 하고 있었지만, 효진이 보기엔 무대 위보다 그런 제아를 보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았다. 불편한 자세로 자서 그런지 몸이 뻐근해, 효진은 팔을 앞으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날 위해 노래해!!”
그 때 들려온 소리에 효진은 깜짝 놀라 움찔했다. 그 목소리는 뭐랄까, 야수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느낌이기도 했고 지금까지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던 짐승이 폭발하듯 모든 감정을 터뜨려버리는 느낌이기도 했다. 기껏해야 다른 배우들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라고 생각했던 에릭 배우가 꼭 각성이라도 한 듯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무대 위를 종횡무진 누비기 시작했다. 충혈된 눈에서부터 크리스틴을 향한 독점욕이 드러났다. 노래하는 내내 에릭은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고 크리스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질투와 분노에 치를 떨며 크리스틴의 어깨를 밀치는 모습은 야성적이었고, 무섭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어딘가 모르게 동정심과 연민을 이끌어내는 부분도 있었다. 효진은 그것이 주연으로써의 자질이라고 생각했다. 관객을 홀려 제 편으로 설득할 수 있는 힘.
선배들이 눈여겨보고 있었던 이유를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효진은 호기심이 생겼다.
*
예의상으로 끝날 뻔 했지만 후반 에릭의 각성으로 이끌어낸 진짜배기 커튼콜이 끝나고, 관객석 쪽의 불이 켜진 후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친구들이나 선배들은 역시나 저마다 에릭 역의 아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효진은 팔짱을 낀 채 비어버린 무대 위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옆에서 나갈 통로가 뚫리길 기다리고 있던 제아에게 넌지시 물었다.
“에릭 역 애. 이름이 뭐야?”
“오, 흥미가 생겼어?”
“빨리.”
“손가인.”
“손가인…?”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효진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여자애였어!? 안 그래도 머리도 짧은데다가 가면으로 얼굴도 가리고 있었고, 의상조차 몸매 라인이 드러나는 옷이 아니었고 심지어는 목소리마저 낮고 허스키해서 영락없이 남자 아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더 잘 됐다. 여자애라면. 효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아직 사람들이 빠져나가지 않은 틈새를 막무가내로 밀치면서-사방에서 욕지거리와 비명소리가 난무했지만 효진은 개의치 않았다- 강당을 빠져나와 문 앞에 섰다.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있자니 효진에게 밀쳐진 학생들은 슬금슬금 눈을 흘기고 지나가거나-효진이 워낙 인상이 세게 생긴 편이라 그런지 함부로 개기진 못하는 듯 했다, 거기에 입고 있던 고등학교 교복도 한 몫 했을 테고.- 가끔씩은 교복과 얼굴, 명찰을 번갈아 보며 혹시나 제가 아는 그 박효진이 맞는가 하고 의아한 시선을 던져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효진은 그런 호기심이 썩 나쁘지 않았다. 주연 배우의 천성이라고나 할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으쓱하니 기분이 좋아지는.
어느 정도 기다렸을까, 중딩들 사이에서도 효진에 대한 소문이 흘렀는지 강당 주변에는 사람이 없어지긴 커녕 오히려 전보다 더 드글드글 몰려들었다. 그것도 누구 하나 효진의 앞에 나서는 사람 없이 벽에 다닥다닥 붙어서 힐끔힐끔 쳐다보거나 교실 앞, 뒷문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상황을 살피려 들거나. 어이구, 귀엽다 귀여워. 고작 중딩들 상대로 시비를 걸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효진은 자비롭게 넘겨주기로 했다. 그리고 드디어 효진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상대가 모습을 보였다.
에릭 의상을 입고 있을 때도 남자애치고는 선이 가늘다고 생각했지만, 의상을 벗으니 한 결 더 얇고, 하얗고, 갸름한 학생이 마지막으로 강당을 나왔다. 효진이 기대고 있던 벽에서 등을 떼자 사방에서 작은 목소리로 오오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효진은 하얀 학생의 명찰을 확인했다. 손가인. 틀림없었다. 에릭이었다. 효진은 가인의 손목을 덥썩 붙잡았다. 꺄아아, 하는 환성이 터져나왔다. 바람에 나뭇잎 굴러가는 것조차 우스울 나이라서 그런지 소녀들은 참 활기가 넘쳤다. 가인은 난감한 듯한 표정으로 효진을 바라보았다. 효진이 입고 있던 고등학교 교복만 아니었음 당장이라도 뿌리치고 누구냐고 시비를 털었을 눈빛이었다.
“에릭 역 했던 애 맞지?”
“…맞는데요.”
“내년에, 은진여고.”
예에? 황당함이 섞인 목소리로 가인은 그렇게 되물었지만, 효진은 더 이상의 미련은 없다는 듯이 홱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 잠시 멍하니 서 있던 가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야 황급히 효진의 뒤를 따라가 효진의 손목을 낚아챘다. 효진의 고개가 다시 가인 쪽으로 돌려졌다.
“잠깐만요, 그게 무슨…”
효진이 가인과 눈을 마주치고 베시시 웃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가인의 셔츠 칼라-에릭 의상에서 급하게 갈아입은 흰 와이셔츠-를 멱살잡듯 꽉 쥐고 잡아당겼다. 효진의 얼굴이 거의 가인과 닿을 듯 근거리로 다가왔다. 진한 향수냄새가 훅 끼쳤다. 고등학생답지 않은 뭔가 성숙한 향이었다. 붉은 장미가 연상되는 짙은 향에 취할 것 같아 가인은 정신이 없었다. 효진이 가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날 위해 노래하라구. 달콤한 미성이었다. 그리고 왼쪽 눈을 찡긋, 하며 윙크를 날린 후 넋이 나간 가인을 내버려둔 채 아무렇지도 않게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효진이 말한 그 대사가 자신이 무대 위에서 했던 대사였다는 것을 가인이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
가인과 효진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가인만 몰랐을 뿐, 효진은 아무래도 이 근방에서는 꽤 유명인사인 듯 싶었다. 하지만 가인은 여전히 경황이 없었다. 박효진은 뭐고 은진여고는 무엇인가. 기억에 남는 건 야살스런 고양이같은 그 얼굴이 짓는 미소와 짙은 향수 향밖엔 없었다. 가인이 넋이 나가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새 쪼르르 몰려든 친구들은 가인을 둘러싸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하나씩 툭툭 던져주었다.
“은진여고 박효진, 유명하잖아.”
“왜 유명한데?”
“너 그걸 몰라? 연극한다는 애가?”
“알아야 돼?”
가인은 철저한 개인주의자였다. 적어도 오늘 효진을 만나기 전까지는.
“은진여고 자체가 생긴지 얼마 안 된 데잖아. 근데 뭐라더라? 교장이 연극을 좋아한댔나 뮤지컬을 좋아한댔나? 아무튼 그래서 그쪽에 지원을 진짜 철저하게 해준대. 다 퍼다 준다더만. 그래서 그 쪽 지망하던 웬만한 유망주들이 상당수가 그 쪽으로 빠졌고, 극단이나 기획사 관계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데려갈만한 애들 물색하고 그런다던데.”
“벌써 접선 끝난 애들도 많을 걸? 어떻게 알아, 남몰래 계약이고 뭐고 다 끝냈을지. 시치미 떼고 있으면 끝이지.”
“박효진은 그 중에서도 신예 유망주인데, 보통 노래가 되면 연기가 안 되고 연기가 되면 춤이 안 되고 춤이 되면 노래가 안 되고 뭐 그런 애들이 많은데 박효진은 올라운드 플레이어란 말야. 당연히 노리는 데도 많지.”
“벌써 몇 차례 캐스팅 들어왔대. 근데 다 거절.”
보통은 물밑에서 작업하는 게 보통이지만, 박효진은 그런 작업이 들어오자마자 단칼에 거절하고 수면 위로 이야기를 퍼뜨린다나. 나 어느 기획사가 꼬시려고 하는 거 깠다, 이렇게. 가인은 흐응, 하면서 책상 위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거 성격 드럽네.
“근데 하나 이상한 건..”
친구들 중에서도 소식통으로 유명한 은지가 눈치를 보다 말을 꺼냈다. 이상한 긴장감이 흘렀다.
“정작 그 완벽하다는 박효진 무대를 본 사람이 얼마 없다는 거지. 여기서 혹시 본 사람?”
기이하게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고등학교라 해도 그 은진여고다. 다른 건 몰라도 연극에 관해서는 관객이 많은 게 경험에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내세우는 학교라 연극부 관람은 그다지 제한없이-설령 타 학교라도, 고등학생이 아니더라도- 개방되어 있는 곳이어서 가인의 학교 학생-가인의 친구들을 비롯한-들도 자주 발걸음을 하는 곳인데 나름 에이스 취급 받는다는 박효진 무대를 본 사람이 한 명도, 단 한 명도 없다니.
“…잘한다는 거 다 개뻥 아니야?”
캐스팅 들어온 거 깠다는 것도 그렇고. 하긴, 이런 현실성없는 이야기는 믿는 것보다 거짓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이 더 맞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먼저 이야기를 꺼냈던 은지가 이번에도 뭔가 심각한 분위기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치만 너네 박효진 은진여고 어떻게 들어갔는지 알아?”
“어?”
“은진여고 날고 긴다 하는 3학년 선배들이 중딩 박효진 찾아가서 제발 우리학교 와달라고 부탁했다던데.”
“뭐어? 뭘 보고?”
“그 때도 박효진네 학교에서 뮤지컬을 했던가? 박효진 주연으로.”
얼마나 잘했길래 고작 중딩한테 우리 학교 오라고 사정을 했지? 제각각 다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아까부터 묵묵부답이던 지윤이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가인이도 마찬가지잖아? 가인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아니, 난. 딱히 사정한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사람이 대뜸,”
내년에, 은진여고. 다시 한 번 그 미성이 가인의 머릿속에서 효진의 목소리로 뇌내재생되었다.
“그래서 손가인 어쩔건데? 은진여고 갈 거야?”
“어, 어? 생각 좀 해보고….”
그 대단하다는 박효진 무대를 한 번 보고싶긴 하지만 그거 하나에 대뜸 자신의 인생을 걸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못 들은 셈 치고 지나치자니 그 여자가 남긴 인상이 너무 강했고, 또 다시 효진을 볼 수 없다면 자신은 분명 후회하고 말리라는 자각도 있었다. 아, 모르겠어 정말. 가인이 책상에 엎어진 채 뒹굴자 친구들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치만 난 왠지 가인이 어떻게 할지 알 것 같아.”
“어, 나도 나도.”
“나두. 아마 손가인만 모를걸.”
뭐? 니네가 날 어떻게 알구. 벌떡 일어나 그렇게 묻자, 친구들은 서로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의뭉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치만 손가인은.”
“미인에 약하잖아.”
뻔하지 뭐.
2.
소문이라는 건 무섭다. 그리고 박효진은 그 두 배 더 무섭다. 가인은 솔직히 말해 박효진이란 이름 석 자의 파급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 몰랐다. 학교 건물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모든 대화가 멈추고 어수선하게 술렁이는 그 분위기란. 가인은 지금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뛰쳐나가고 싶었다. 입학 첫 날부터 이러면 나중엔 어떻게 버티나.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복도를 걷기 시작하는데, 바글거리던 사람들이 가인을 가운데에 놓고 양 옆으로 쫙 갈라지기 시작했다. 와, 나 무슨 모세의 기적인 줄 알았잖아.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기분에 가인은 착잡한 심경이었다. 탑스타도 아닌데 레드카펫 밟는 기분이다.
쟤가 그 손가인이야? 수군거릴 거면 작게라도 말하던가. 장본인 귀에 다 들려올 정도의 목소리로 말하면 귓속말을 하는 의미가 없지 않나. 아무리 박효진이 미인이었다 한들, 또 아주 조금은 제 취향이었다 한들 이 학교를 온 것은 역시 잘못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후회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가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자 잠깐 조용해졌던 복도가 다시금 수군거리는 목소리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한숨을 쉬었어. 왜 저러지? 이제 가인의 행동 하나 하나를 다 관찰해서 중계할 모양이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오로지 자신에게만 향하는 듯한 열렬한 관심이 부담스럽기 그지없었기 때문에, 입학식이 생각보다 일찍 끝난 것은 가인으로썬 쌍수들고 기뻐할 만큼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끝은 절대로 끝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입학식은 교사들의 턴이 끝난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선배들의 턴. 사실 이 쪽이 부담스럽기로는 더 장난이 아니었다. 동아리 부원모집 경쟁에 눈을 까집고 달려드는데, 말이 선배지 아주 짐승들이랑 다를 바가 없었다. 신입부원에 굶주린 짐승. 그런데 의아한 건, 가인이 그렇게 유명인사가 됐는데도 이상하게 동아리 가입권유를 해 오는 선배들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다들 힐끔힐끔 눈치만 보고, 행여 누구 하나가 가인에게 팜플렛 하나라도 건네줄라 치면 곁에 있던 사람들이 식겁해서 새하얘진 얼굴로 뭐라고 소곤거리고, 건네주려던 사람까지 새하얗게 질려 홱 뒤를 돌아 가버리기 일쑤였다. 뭘까. 나 혹시 왕따당하나…? 난생 따돌림 한 번 당해본 적 없던 가인은 조금 쭈그러들었다.
“어, 여깄다.”
그리고 또 다시 모세의 기적. 잔뜩 쫄아있던 가인은 육성으로 히익, 하는 소리를 냈다. 순식간에 가인을 둘러싼 무리는 뭐랄까, 한 마디로 정말이지 일진스러웠다. 양아치. 노는 언니들. 화장 진하고, 머리는 길고, 다 풀어 헤쳐져 있고, 교복 치마는 짧고, 마이는 어디다 팔아먹었나 싶은 언니들도 여럿. 가인은 제가 살면서 무엇을 그리 잘못했는지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아닌데, 그래도 나 정도면 좀 착하게 산 것 같은데.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 게중에서는 그래도 그나마 제일 복장이 양호해보이는 언니가 네가 손가인이지? 하고 물어왔다. 가인은 입을 일자로 다물고, 최대한 눈을 동그랗게 떠 순한 인상을 만들며-눈이 작고 가늘어서 걸핏하면 왜 야리냐는 시비를 들어온 기억이 있어서- 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예?”
“어머? 연극부 들어올 거 아니었니?”
연극부? 가인은 멍해졌다. 그러고보니 이 학교 온 목적이 그거였던가. 하지만 그럼 이 언니들이 싹 다 연극부? 이 무서운 언니들이? 가인은 연극부고 나발이고 자퇴 욕구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가인이 그런 생각을 하든말든 제일 무섭게 생긴-화장이 제일 진한- 언니 둘이 가인의 양쪽 옆에서 팔짱을 끼고 몸을 바싹 붙여왔다. 이건 마치, 경찰이 범죄자를 연행해가는 그런 모습... 가인은 혼이 나가 언니들이 이끄는 대로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연극부실로 향하는 줄 알았더니, 언니들이 데리고 간 곳은 다시 강당이었다. 조금 정신을 차린 가인이 여기 강당 아니에요? 묻자 그나마 착하게 생긴 언니가 강당 겸 연극부실이라고 대답했다. 하긴, 이 강당도 완전 연극에 특화되어있는 것처럼 만들어지긴 했다. 교장이 연극을 좋아한댔던가? 그렇다면 애초에 연극부실로 잡고 만든 것을 나중에서야 강당으로도 써도 무리없겠다고 판단해 연극부실 겸 강당이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등 뒤에서 미는 것에 떠밀려 강당 안으로 들어선 가인은 머리가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강당 무대 아래에 모여 앉아있던, 넉넉히 잡아도 족히 50명은 넘을 듯한 사람들이 일제히 가인을 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무대 위에선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이 봐도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주목을 받는 건 영 내키지 않는다. 게다가 오늘 겪었던 수모를 생각하면 더욱 더.
“자~ 올해의 차세대 에이스~”
누구 맘대로!? 가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보다 애초에 자신은 아직 연극부에 들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연극부 부원들은 하나같이 다 친화력이 장난이 아닌지, 선배 하나가 가인에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인은 질질 이끌려가면서도 다 뿌리치고 도망치고 싶은 맘 뿐이었다.
“어? 효진이는?”
가인이 정신줄을 겨우겨우 붙들 수 있었던 것은 그 이름 석 자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지금도 효진의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야 빠져나갔던 혼이 아주 조금 육체로 돌아왔다.
“효진이 교실에서 잔다던데.”
하지만 너구리를 닮은 언니가 하는 말에 맥이 탁 풀려버렸다. 그게 표정에 다 드러났는지 선배 몇이 키득거리며 어머, 쟤 실망하는 거 봐. 하고 놀려댔다. 그렇지만 지금 그런 말은 가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박효진 때문인데. 다 박효진 때문이었는데. 여기 온 것도, 그 수모를 당하며 버틴 것도. 근데 나는 이런 개고생을 하는데 박효진은 교실에서 속편히 잔다니!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가인도 그다지 순순하기만 한 성격인 것은 아니었다. 곁에 있는 건 선배들이고 자신은 이제 막 입학했을 뿐인 신입생이니 괜히 처음부터 눈 밖에 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을 뿐.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억누르고 있던 성질이 돋궈지기 시작했다.
“박효진 선배.”
“응?”
“박효진 선배 몇 반이에요?”
학년은 알고 있었다. 가인이 중학교 시절 때부터 워낙 유명인사셨어야지. 가인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는 걸 눈치챘는지 선배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픽 웃었다. 어머, 쟤 성깔있는 거 봐.
“2학년 3반.”
“모셔올게요.”
그 한 마디만 남겨두고 홱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가버리는데, 가인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자마자 강당의 부원들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대박, 물건 하나 들어왔네! 애기 박력있는 것 좀 봐. 아, 역시 기 꿀리는 애들보단 저런 애들이 재밌지. 효진이 첨 들어올 때 못지않은 포슨데. 제각각 한 마디씩을 던지며 가인을 평했다. 처음엔 선배들 사이에서 기가 좀 죽었나 했더니, 어디 가서 당하고는 안 살 타입이라며, 마지막 모셔올게요가 압권이니 생활력이 강할 것 같다느니 여기저기 호평일색이었다.
*
길을 좀 물어보고 올 걸 그랬다. 빡친다고 무작정 나온 다음 복도를 헤매고 또 헤맨 다음에야 가인은 후회했다. 밖에서 건물을 볼 때는 그다지 크지 않은 것 같았는데, 안에서 돌아다니니 컸다. 넓었다. 무지막지하게. 가인은 또다시 저에게로 쏠리는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돌아다니다가, 이러다 정말 교내에서 미아가 되겠다 싶을 때 즈음 해서야 가장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보이는 여학생 하나를 붙들고 2학년 교실이 어디냐고 물었고 그녀는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쪽을 돌아보자 바로 가인의 눈 앞에, 차례대로 2-1, 2-2, 2-3반의 교실이 늘어져있는 것이 들어왔다. 아나, 쪽팔리게 진짜. 가인은 대충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허둥지둥 2학년 3반의 교실로 달려갔다. 신입생들은 동아리 가입권유에 시달리고, 2, 3학년들은 가입권유를 비롯한 동아리 활동을 하느라 웬만한 교실들은 다 비어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예의란 게 있으니까. 가인은 소심하게 2학년 3반의 뒷문을 똑똑 노크하고 드르륵, 문을 열었다. 텅 비어있는 교실에서 유일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창가 쪽 맨 뒷 자리의 여학생. 책상 위에 올린 가방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듯한, 웨이브기가 도는 긴 머리가 허리까지 족히 닿을 듯한 일진스러운 분위기가 아무래도 그 때 봤던 그 박효진이 맞는 것 같았다. 어차피 깨워야 할텐데, 왠지 모르게 가인은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효진에게로 다가갔다.
블라인드를 내린 창 틈새로 비치는 황금색 햇빛이 효진의 머리칼에 닿아 부서지고 있었다. 뭔가 굉장히, 비현실적이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별 것도 아닌데. 어느새 효진의 자리까지 다가간 가인은 천천히 효진이 엎드려 자고 있던 효진의 책상에 손바닥을 짚었다. 깨워야 겠지. 좀 빡돌아서 눈에 뵈는 것 없이 무작정 오긴 했는데, 막상 잠들어 있는 효진을 마주하니 깨우기가 굉장히 거식했다.
“…배.”
“…….”
“박효진 선배님…-”
“아, 썅.”
헐. 효진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던 가인은 부드럽고 고운 목소리로 나오는 날카로운 욕지거리에 그대로 행동을 멈추고 얼음 상태가 되었다.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뭔데, 씨…”
잠이 덜 깬 듯한 눈으로 효진이 가인을 째려보았다. 원래부터가 눈이 큰 거 같고, 눈꼬리가 올라가있는 것 같고, 지금은 또 화장까지 풀메이크업으로 한 것 같고, 고로 되게 쎈 언니 같고.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지금 효진의 얼굴이 아주 무섭다는 뜻이었다. 가인은 말문이 막혔다.
“너 누군데? 1학년?”
명찰을 힐끗 본 효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1학년 손가인인데요…”
“손가인이 누구야.”
헐. 아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헐 소리가 났다. 날 모른단 말야?? 가인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작년, 세화중, 오페라의 유령…”
뭔가 억울하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너무 억울해서 말이 제대로 문장으로 바뀌지가 않았다. 효진은 뭔 개소리냐는 듯이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 표정을 짓고 싶은 건 난데! 가인이 당황해서 어버버거리자 효진이 한심하단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팔짱을 끼고 잠깐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눈을 반짝 뜨고,
“아, 에릭.”
바로 그거라고! 가인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로 왔구나아.”
…그게 끝이야? 되묻고 싶었지만, 효진은 별 흥미가 없는 듯 하품을 했다. 결국은, 억눌렀던 감정이 북받쳤다.
“야!! 너 때문에 왔다고!!!”
3.
강당 안에 들어선 가인과 효진은 누가 보더라도 서먹한 분위기였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효진은 그저 잠이 깬 것에 조금 짜증이 났을 뿐이고 가인만이 일방적으로 어색해하고 있는 것 뿐이었지만. 3학년 선배들은 둘을 보고 수군거렸다. 멱살잡이라도 한 번 했나? 그리고 둘의 성격만을 놓고 봤을 때는 그런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여론이었다. 가인은 효진의 눈치를 보며, 최대한 그녀와 떨어진 곳에 앉았다. 아, 미쳤지 손가인. 선배한테 너라고 한 것도 모자라서 반말까지. 막상 효진은 조금 표정을 굳히며 허어? 한 것밖에 반응이 없었다지만, 그게 더 무서웠다. 혹시 모르잖아, 뒤끝 쩔어서 저거 하나 약점 잡고 평생 갈지. 가인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런 일과는 별개로, 가인이 체감하는 분위기로는 확실히 효진은 연극부 내의 톱스타였다. 오자마자 모든 사람의 관심사가 효진으로 쏠리는 느낌이랄까. 졸리고 지루해 죽겠다는 똥씹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효진에게 3학년 선배들은 툭툭 장난을 걸었고, 효진은 으르렁거리면서 반응했다. 아니, 톱스타…? 가인은 제 머릿속에 내려놓은 정의를 약간 수정했다. 갖고 놀기 좋은 장난감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인기가 좋은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효진은 그런 선배들이 영 귀찮은 듯, 옆에 앉아있던 2학년 여자 선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가인의 자리에서는 멀어서 들리지 않았지만, 그 광경 자체가 조금 의외였다. 완전 독고다이 스타일이라 친구같은 건 하나도 없을 것 같이 보였는데. 하지만 더 경악하게 된 것은 그 후였다. 효진의 옆에 앉아있던 선배가 무어라 대꾸하자 효진이 고개를 들고 생긋 웃었던 것이다. 악의없는,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그런 미소! 가인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저렇게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어?
“신입생 환영회에서 할 연극을 정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놀란 것도 찰나, 부장 선배-라고 소개받았던 사람-가 하는 말에 가인은 또 깜짝 놀라 퍼뜩 부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입생 환영회? 아니, 내 자신이 신입생인데 누구 환영회를 한다고?
“이번에 잘해야 신입부원도 많이 들어올테니까 잘해야 된다, 너네.”
네~. 진심이라고는 1g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부원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가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보다, 슬며시 손을 들었다.
“저기, 선배님.”
“응~ 우리 가인이.”
언제 봤다고 우리 가인이래. 연극부원들의 친화력은 정말이지 놀랍기 그지 없었다.
“저도 신입생인데요? 저도 해야하나요?”
“너는 연극부원 아니니?”
“아직은 아닌데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미혜야, 입부서 좀 갖다줄래?”
아니, 그런 문제냐고. 내 의사는 그 어떤 곳에도 반영되지 않는 거야? 가인은 황당했지만 미혜라고 불린, 효진의 옆에 있던 여학생은 별 망설임도 없이 강당 무대 위의 왼쪽 구석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효진이 유독 살갑게 대하던 그 사람, 이름이 미혜였구나. 그 생각을 하다 가인은 또 제 의견을 피력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어영부영하다, 미혜가 가지고 온 입부서를-철저하게도 볼펜까지 챙겨 왔다- 작성한 후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종이를 부장에게 건네주고 가인의 입부 이야기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하지만 뭐, 사실 연극부가 아닌 다른 동아리를 찾아 가입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기는 했다. 좋게 생각하자, 좋게. 가인은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추스렸다.
“그래서, 뭐 했으면 좋겠니?”
“가인이가 첨으로 들어왔으니까 가인이 메인으로 해.”
“그래, 그래.”
선배들의 말은 귀찮고 성가신 일은 후배한테 미루자라는 의도가 다분해보였다.
“오페라의 유령 하면 되겠네, 가인이 했었잖아.”
“그래, 그거 좋네.”
“잠깐, 잠깐만요…. 그래도 너무 갑자기.”
하반기 학교 축제 때 했던 거라 그렇게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하라고 하면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하기 싫어?”
하지만 신입생 입장에서야, 선배님 말씀은 하늘과도 같은 것이라서. 부장 선배의 하기 싫어? 라는 말과 눈빛에는, ‘내가 이 나이를 먹고 이제는 곧 수험생이 되어 대한민국의 벼슬 중 벼슬이라는 고3의 자리까지 오르게 됐는데 새파랗게 어린 후배들 두고 별 것도 아닌 이벤트에 직접 나서서 장기자랑 같은 걸 하는 꼴을 보여야 겠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듯 해 가인은 마지못해 아닙니다, 하고 대답한 후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이 중학교 때부터 그려왔던 꿈같은 고등학교 생활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왠지 처음부터 꼬일대로 꼬여버린 느낌이었다. 이게 다 박효진 때문이다. 괜히 억울해져서 효진 쪽을 째릿, 노려봤는데 어떻게 그 시선을 또 캐치했는지 효진이 눈을 마주쳐와서 가인은 화들짝 놀라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럼 가인이가 에릭 하고, 크리스틴은”
“크리스틴은 효진이가 책임지고 해~ 에릭 데려온 사람이 해야지.”
“싫어요, 오디션으로 정해요.”
퉁명스런 어투에 가인은 또 다시 염통이 쫄깃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역시 좀 화났나? 이래서 맞은 사람은 편히 자도 때린 사람은 발 못 뻗고 잔다더니. 그러니까 왜 성질 한 번 못 죽여서! 가인은 끊이지 않고 자책했다.
“효진이 웬만한 무대 잘 안 서는 거 아시면서 그러세요.”
“아니, 그래도 이번엔 자기가 데려온 애가 있으니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구만.”
미혜와 부장이 그런 말을 주고받는 것이 가인의 귀에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애초 이 학교에 들어왔던 궁극적인 목적은 그것이었다. 효진의 무대를 보겠다는. 물론 다른 소소한 이유도 많았지만, 어쨌든 가장 큰 목표로 잡았던 것은 그 대단한 박효진의 무대를 한 번 보겠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대단한 무대는 못 볼 지 모르지만, 오디션으로나마 효진의 실력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인은 가슴이 떨렸다.
“그러면 오늘은 크리스틴이랑 라울만 오디션으로 잠깐 정하고 가자. 크리스틴 역은 일단 효진이랑, 인나랑, 선영이랑….”
“근데 오페라의 유령은 뮤지컬이잖아요. 노래로 해요?”
“그게 메인이니까 그게 낫겠지?”
“가사 알아? 다들?”
“나 몰라.”
흥미없다는 듯 효진이 대답하자, 다시 미혜가 아까 입부서를 가지러 갔던 곳으로 돌아가 이번에는 웬 종이뭉치 하나를 가지고 왔다. 아마도 대본인 듯 싶었다.
“The Phantom of the Opera로 부탁해.”
“누구부터 할래?”
“나 맨 마지막.”
효진이 그렇게 말하며 뒤로 빠지고, 미혜는 뻘쭘히 서 있던 인나와 선영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인나를 먼저 지목했다. 가인은 그녀를 너구리 닮은 사람2로 기억했다. 너구리 닮은 사람1의 제아와 좀 인상이 비슷한 것 같아 곁에 있던 선배에게 쌍둥이냐고 물었다가 박장대소를 당한 것은 좀 트라우마가 됐지만. 그리고 듣자하니 인나와 선영 역시 1학년인 가인과 동갑으로 신입생은 신입생이었지만, 은진여고의 부속 중학교 출신으로 중학교 때부터 거의 부원과 다름없는 활동을 한지라 그다지 신입생 취급은 받지 못한다고 했다. 중고 신입생 같은 것이라고.
이윽고 목소리를 가다듬던 인나가 대본을 들고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목소리는 예쁜데, 고음에서 약간 찢어지는 목소리로 들려 호불호가 나뉠 수는 있겠다 싶었다. 가인의 곁에 있던 선배가 인나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인나는 연기만 전공하는 애라 노래는 좀 약할지도 모르는데, 그래두 배우 꿈꾸는 애가 노래까지 저 정도면 굉장한 거지. 그치? 가인도 솔직하게 동의했다. 노래가 끝나고 멋쩍은 듯 베시시 웃는 모습은 귀엽기도 했다. 남자들한테 인기 많겠네. 그리고 뒤이어 선영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이 쪽은 인나보다는 조금 더 안정적이었다. 목소리에 힘도 있고. 아쉬운 게 있다면 고음이 시원하게 올라가는 느낌이 없다는 것. 그렇지만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주 양호한 편이었다. 잘만 갈고 닦으면 뮤지컬 쪽으로 나갈 수 있겠다고 가인은 생각했다.
“좋아, 잘했어. 마지막 효진이.”
효진은 한숨을 내쉬며 귀찮다는 듯 어슬렁어슬렁 미혜 쪽으로 걸어와 선영에게서 대본을 받아들었다. 탐탁찮은 표정으로 대본을 훑던 효진이 대충 주위를 걸으며 노래를 시작했다.
In sleep he sang to me…in dreams he came,
that voice, which…calls to me…and speaks my name
더듬거리며 부르는 그 노래는, 더 이상 노래라고 부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음정 박자도 맞지 않아 엉망이었고, 굳이 따지자면 노래보다는 랩이나 국어책 읽기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연기에 집중하고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효진은 시종일관 불쾌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고 있었고, 노래도 더 이을 생각이 없는 듯 입을 다물고 끝났는데요? 하고 부장을 향해 말했다. 가인은 넋이 나갔다. 자신이 기대했던 효진의 무대는 이런 게 아니었다. 그 대단하다던 박효진인데? 하지만 지금의 짤막한 오디션은 누가 봐도 인나와 선영의 먼저 무대만 못했다. 이게 뭐지? 가인은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기를 바랐다.
나는 겨우 이런 무대를 보려고 이 학교에 온 거야?
4.
가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자, 대강 분위기를 알아챈 선배 몇몇이 서로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효진은 개의치 않고 미혜의 뒤에 앉아 미혜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효진이 잘하든 못하든은 이제 아무 상관이 없었다. 적어도, 가인의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더라도, 객관적으로 봐도 못하더라도 효진은 그러면 안 됐다. 적어도 성의는 보였어야 했다. 자신의 의지로 데리고 온 후배 앞에서라면 더더욱. 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장 선배의 앞에 섰다.
“선배님.”
“응?”
“죄송합니다만, 입부서 돌려받고 싶은데요.”
“어, 어?”
“안 됩니까?”
“왜 갑자기?”
처음으로 부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연극부원 선배들 전부, 생긴 거랑은 달리 살갑게 가인을 대해준 것엔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했지만 가인에게는 이미 미련이 없는 상태였다.
“하고 싶지 않아져서요.”
해야 할 의미도 없어졌고. 적대심을 담아 가인은 효진을 흘겨보았다. 미혜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만 돌려 가인을 바라보고 있던 효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정말 저 사람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거하게 실망을 한 이상,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 본심이었다. 부장이 우왕좌왕하다 어쩔 수 없이 가인의 입부서를 다시 건네주었고, 가인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강당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서야 신입생 환영회의 주역이 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연극부가 괜히 연극부는 아닐 것이다. 가인이 없어도 지금까지 잘해왔으니 유지되고 있는 부서였을테고, 그것도 그 유명한 은진여고의 연극부인데 가인의 대체재는 찾아보면 얼마든지 많이 있을 것이다.
강당을 나와서도 복도 한 가운데를 빠르게 가로질러, 맨 끝의 창가에까지 도달했을 때에서야 가인은 억눌렀던 심정이 왈칵 북받쳤다. 이러고 싶지 않은데, 눈물이 났다. 사실 제가 제 멋대로 이상의 모습을 그려온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오로지 그것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날 위해 노래해. 달콤했던 미성이 이번엔 다른 의미로 가인의 귓가에 다가왔다. 너는 진짜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평화롭기 그지없는 오후의 일상 속에서 가인은 저 혼자만 끝없는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 같아 더 비참해졌다.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의미도 없어진 것 같았다. 부모님이 그렇게 다른 학교를 권유하는 걸 오로지 고집 하나로 밀고 나가 이 곳에 온 건데. 이래서 어른들 말씀은 틀린 것 하나 없다고 하나보다.
가인은 자꾸만 밀려드는 눈물을 교복 소매로 닦아낸 후, 훌쩍이며 비척비척 자신의 교실로 향했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모든 환상이 부수어져 강제로 현실과 맞대면하게 된 지금, 가인의 눈 앞엔 세상 모든 것이 추하게 비쳐 보였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 하고, 1학년 교실이 있는 2층 복도에 발을 딛고선 또 한 번 왈칵 감정이 치밀었다. 아마도 입부 권유에 성공한 모양인 선배와 후배 페어가 몇몇이나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인이 그렸던 자신의 미래 모습은 바로 저런 것이었다. 아니, 저렇게 친절하기만 하지 않더라도. 그래도, 후배는 선배는 존경하고 선배는 후배를 존중해주는 그런 관계. 하지만 자신에겐 존경이고 존중이고 없었다. 배신의 연발이다. 가인은 심사가 비틀려 더욱 빠른 걸음으로 제 교실로 걸어갔다.
교실 문을 열자 아무도 없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인은 자신의 자리인 창가 쪽 맨 뒤쪽으로 향해 의자를 꺼내 앉았다. 그러고보면 어쩜 자리도, 박효진이랑 똑같은 자리다. 위치 자체도 생각해보면 2학년 3반은 가인의 교실 바로 위쪽이었다. 아마 이제부터 위쪽 교실에서 무슨 소리라도 날 때면 나는 언제나 박효진 생각을 하겠지. 억울했다. 박효진은 절대로 내 생각따윈 안 할텐데. 뭐 이런 질긴 악연이 있나 싶었다. 그것도 한 쪽만 일방적으로. 가인은 책상에 무너지듯 엎드렸다. 착잡하고 비참했다.
*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가 나기에 가인은 퍼뜩 고개를 들고 아직 젖어있는 눈가를 황급히 소매로 훔쳤다. 동급생이 우는 이유를 물어보면 대답이 궁해질 것이 뻔했고-사실 그대로 대답하기엔 자신이 너무도 참담해질 것 같았으므로-, 선생님이어도 난감한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일부러 태연을 가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너무도 의외인 존재라서, 가인은 나오던 눈물도 쏙 들어갔다.
박효진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맘속으로 원망하고 있던 박효진이 여전한 무표정으로 성큼성큼 가인의 자리에까지 걸어왔다. 가인 역시도 이번엔 당황하지 않고 뚱한 표정으로 효진을 무시하듯 고개를 돌린 채 다시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고로 들리는 소리만으로 감안컨대, 효진은 가인의 앞자리 의자를 꺼내에 앉은 듯 했다.
“야.”
“…….”
“어쭈.”
“…왜요.”
하여튼 이놈의 연공서열, 빌어먹을 대한민국. 억울하기 그지없다.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도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니. 가인은 고개를 들고 일부러 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어 효진을 쳐다보았다. 효진은 딱히 불쾌한 기색은 없는 듯 보였다.
“너때문에 혼났어, 나.”
“…….”
그럼 아무리 오디션이라도 그딴 무대를 해놓고 그냥 넘어가길 바랬단 말야?
“처음이야. 선배들한테 혼난 거.”
그 말을 듣고서 가인은 어이가 승천하는 듯 했다. 아, 그렇게 오냐오냐 자라서 이 사람이 이 모양인걸지도 모른다. 처음엔 잘했을지도 모르지. 가인은 절대로 내뱉을 수 없을 불만을 속으로만 중얼중얼 토로했다.
“니가 데려온 애니까 다시 책임지고 데려오래서 오긴 왔는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그런 것 치고는 전혀 난처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지만. 가인은 효진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효진은 가인의 앞 자리 의자에, 몸을 돌려 가인과 마주보는 상태로 의자 위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키는 좀 작다고-그래봤자 자신과 얼마 차이나지 않겠지만- 생각했지만, 저렇게 쪼그려 앉아있는 걸 보니 몸집이 더 작아보였다.
“내가 뭘 어떻게 해주길 바래?”
“……그 때 왜 나한테 그 말 했어요?”
“무슨 말?”
“선배를 위해 노래하라고 했잖아요.”
무슨 자신감으로.
제일 치밀어오른 질문이 가인에게는 그것이었는데, 효진은 자기가 그 말을 했다는 것도 기억조차 못하는지 가물가물한 얼굴이었다. 그게 더 가인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효진은 한참 후에야 아, 하고 알았다는 듯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냥 네가 잘하는 게 노래밖에 없길래.”
“…네?”
“몰랐어? 너 그 때 발성도 딕션도 표정도 구렸는데, 노래는 잘했어. 목소리가 좋더라고.”
양심도 없다고 생각했다. 가인은 자신이 후배 입장만 아니었더라면,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계급장 다 떼고 니가 할 말이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럼 왜 저보고 이 학교 오라고 하셨어요.”
노래밖에 볼 게 없었으면. 연극부에서 부를 이유라고는 하나도 없었을 것 같은데. 아무리 뮤지컬도 자주 겸임하곤 하는 은진여고라지만, 어디까지나 간판은 연극이었다. 효진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가 대답했다. 잘생겨서.
“네??”
“네가 라울 하는 남자애보다 잘생겨서. 그래서 불렀어.”
“그게 무슨….”
황당한 이유에요, 그렇게 대꾸하고 싶었지만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마스크는 중요해. 아무리 정석적 미인 상이어도 소화해낼 수 있는 역할에 한계가 주어지는 페이스도 있거든. 근데 넌 뭘 시켜도 잘할 거 같아서. 그래서 내 취향이었어.”
“…….”
의외로 설득력이 있는 것도 같아서 가인은 입을 다물었다. 연극을, 아주 가볍게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구나 하고, 조금은 안도하는 마음도 있었다.
“나 너 데려가야 돼.”
“…싫어요.”
“하기 싫어졌다고 했던가?”
“…네.”
누구 때문에.
“나 때문에?”
가인은 흠칫했다. 혹시 독심술을 하나? 그래도 예의란 게 있어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효진은 분위기 상으로 긍정을 캐치한 모양이었다. 잠시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깔렸다. 숨막힐 듯한 답답함이었다. 가인은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아무것도 이야기하기 싫고, 이야기 할 마음도 없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얼마나 조용했으면 벽에 붙어있는 시계의 시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째깍, 째깍, 째깍. 그래도 그 소리라도 있는 게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정말 이 어색함에 질식해버리고 말았을거야.
그리고 그 때, 일순 시계가 멈추었다.
I was like peace in a groove
on a Sunday afternoon
You were there so was I
in the park 4th of July
I was chillin' with my Kool-Aid
when miss Chilli came to relay
That you had a thang for me
Finest thang you'd ever seen
갑작스레 들려온 노랫소리에 가인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효진은 고개를 돌려 문이 열려있는 창가 너머를 바라보며, 그렇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가볍게, 꼭 공기에 목소리를 싣는 것처럼 대충 부르는 것 같은데도 발음이 또렷하게 들려오는 것이 신기했다.
I must admit to you
I've heard them lines a time or two
Although for some apparent reason
Monkey lines are now in season
Lights off, lights on
I guess the groove is on so I am
Diggin' the scene
Diggin' on you
Diggin' on me
Baby bay-ooo-baby baby
It's on like that
It's on like that
I gotta be in love or somethin' like that
Diggin` On You, 가인도 종종 듣던 노래였지만, 효진의 노래는 원곡보단 Be the voice가 리메이크한 버전에 가깝게 경쾌한 느낌이 강했다. 효진의 미성은 그다지 목소리가 큰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목소리에 집중하게 되는 효과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효진의 목소리를 한 마디로 평하자면 그저, ‘예뻤다’ 그 한 마디밖에 할 말이 없었다. 가인의 취향 스트라이크존에 직구로 들어오는 스타일이었고, 더불어 아까 전 오디션에서 국어책 읽기로 노래라고도 할 수 없는 노래를 한 사람답지 않게, 음정 박자도 제대로 맞추어서 하는 노래였다. 물론 오페라의 유령같은 뮤지컬계 노래와는 차이가 있는 팝송이지만, 그래도 차라리 이렇게 오디션을 봤더라면 크리스틴은 단연 효진이었을 것이다. 가인은 확신할 수 있었다. 효진은 오디션 때와는 그야말로 딴 사람 같았다. 벅차오르는 흥분감이 가인의 몸을 지배했다.
아, 난 역시 이 사람을 보기 위해 이 곳에 온 거구나.
틀리지 않았구나. 내 선택은. 안도감과 패배감이 뒤섞인 기묘한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할 수 있었으면서.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효진의 의중을 도무지 모르겠어서 가인은 노래를 멈춘 효진을 미묘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효진은 가인의 마음을 또다시 읽기라도 했는지 가인이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말했다.
“나는 미혜 시나리오가 아닌 무대에는 안 서.”
미혜, 잠시 생각하다 가인은 미혜가 효진과 유독 친밀해보였던 선배라는 것을 떠올렸다. 가인에게 입부서를 건네주었던. 아마도 배우가 아닌 시나리오 담당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겸임하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하지만 효진의 대답은 가인에게 있어 온전히 납득이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건 이상해요.”
“뭐가?”
“선밴 적어도 내가 이 학교에 있을 때 만큼은 무대를 서야 해요.”
“내가 왜?”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한 눈동자에, 가인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나쁘지만은 않았다. 도전정신이 일깨워지는, 그런 느낌이기도 했으니까. 가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앉아있는 효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난 선배 때문에 여기에 왔어요. 선배를 위해 노래를 하러. 오로지 선배 때문에요.”
“근데?”
“그럼 저한테도 오는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선밴 연기를 해야 해요. 날 위해서요.”
미혜 선배랑은 아무 상관이 없어도, 나랑 상관이 있으니까.
“…….”
팔짱을 낀 효진이 야릇한 표정으로 가인을 올려다보았다.
“미혜는 천재야.”
“그건,”
제 눈으로 확인하기 전엔 객관적 사실로 칠 수 없는 일이구요, 하고 대꾸하려 했다. 하지만 말을 못한 것은,
“넌 천재야?”
날 움직일 수 있을만큼? 효진의 그 한 마디가 서늘한 칼날같이 가슴에 박혀왔기 때문이었다.
5.
어쨌든 선배는 무대를 서야 한다, 싫다, 넌 빨리 연극부로 돌아오기나 해라, 싫다, 그런 끝나지 않을 듯한 실랑이가 끝난 것은 효진이 결국 초강수를 두었기 때문이었다. 야, 너 안 오면 나도 연극부 그만둔다고 할 거야. 그리고 왜냐고 물어보면 손가인 때문이라고 할 거야. 그 한 마디에 가인은 두 손을 들고 항복 선언을 했다. 교내에서의 효진의 유명세는 무서울 정도로 실감한 바가 있기 때문에, 진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가인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자신이 없었다. 아마 교내 뿐 아니라 교외에서도 쟤가 그 유명한 박효진을 연극 그만두게 한 장본인이라며? 수군거릴 모습들이 눈에 선했다.
“그치만 진짜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이건.”
“후배란 게 다 그래. 선배들한테 당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거거든. 불만있음 너도 후배 들어오면 써먹어.”
“전 선배가 졸업하자마자 연극 그만둘 건데요?”
언제나 태연한 태도의 효진이 얄미워서 조금 도발해볼 생각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효진은 그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면서 가인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가인은 조금 기가 죽었으면서도 여기서 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일부러 더 가슴을 더 쭉 폈다. 뭐, 뭐! 어쩌라고!
“너 그딴 자세로 연극 할 거면 하지 마.”
가인은 말문이 막혔다.
“아니, 선배가 할 말이에요?”
“내가 뭐.”
“오디션을 그렇게 봐놓고? 오디션 때 선배한테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말이네요, 내가 후배만 아니었어도.”
“..지금 다 했잖아.”
그건 그렇네. 나오는 대로 막 내뱉은 것을 후회하면서 가인은 조금 효진의 눈치를 보았다.
“말했잖아, 난 미혜 시나리오 아니면 무대 안 선다고.”
“똑같네요 그럼. 나도 선배 없는 무대는 흥미 없어요.”
그 말에 효진이 굉장히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껄끄러운 듯, 황당한 듯. 너 혹시 나 좋아하니? 팔을 엑스자로 엇갈려 손으로 자신의 팔을 쓸어내리면서 소름돋는다는 제스처를 해보이는 것에, 가인은 참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자뻑도 정도가 있지. 그렇게 대꾸해줄 생각이었는데, 잠시 또 진지하게 생각해보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과 호감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둘 다 관심이 있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으니까.
“왜 고민하는데.. 나 무섭다, 좀.”
께름칙한 표정을 짓는 효진을 보고 가인은 생각했다. 거 시끄럽네. 진짜로 확 덮쳐버릴까 보다.
“선배 때문에 여기 온 거라고 했잖아요.”
“그거 말인데, 진짜 믿어도 되는 거야? 솔직히 말이 안 되지 않나, 어떻게 나 하나만 보고 자기 진로를 결정해?”
내년 은진여고, 영문도 모를 한 마디만 대뜸 던진 사람이 할 말인가?
“선배가 되게 유명해서, 선배 무대 한 번 보겠다는 목표 하나로 온 거라구요.”
“나 무대 잘 안 서는데?”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억울하겠냐고. 가인은 울분을 토해냈다.
“괜찮아, 나 졸업하기 전에 한 번쯤은 보여줄게.”
선심쓴다는 듯한 태도가 가인을 더 열받게 했다. 안 괜찮아.
“그치만 지금은 안돼.”
“왜요.”
“오페라의 유령은 취향이 아니야.”
“연극 할 때마다 취향 따져가면서 할 거에요?”
“응.”
“그게 된다고 생각해요?”
“너 나 박효진인거 모르니?”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한 태도로 대꾸하는 말이, 사실상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이 더욱 분했다. 하긴, 수많은 기획사가 효진 하나를 픽업해가기 위해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는데. 각본 고를 권리 정도야 기본으로 따라붙는 옵션이겠지. 웬만한 아마추어들은 프로의 세계로 입문하기 위해서 그렇게 개고생을 하는데, 박효진은 출발선상 자체가 프로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뮤지컬이잖아, 그건. 왠지 말하기 싫은 듯 고개를 틀어 창문을 보고 툭, 던진 한 마디가 가인에겐 의아하게 다가왔다.
“뮤지컬이면 안 돼요? 노래 잘 하잖아요. 목소리도 예쁘고.”
“목소리 예쁘고 노래 잘 하는 건 나도 알고.”
아, 그러세요. 정말 사람을 질리게 하는 타입이다. 도대체가 칭찬할 맘이 안 들게 해.
“목이..”
“네?”
“예전같지 않아서.”
“..?”
“함부로 쓰면 안 돼.”
금방 훅 가버리거든. 멋쩍은 듯 딴청을 피우면서 효진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가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이유라면 더 할 말이 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는 기필코 효진의 목소리를, 노래를 들어야 했다.
“그거 금방 낫는 거 맞죠?”
“몰라.”
“내 연극 인생이 달려있는 거라구요.”
“모른다니까.”
“선배 몸을 선배가 모르면 누가 알아요!”
교실이 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소리치자, 효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막았다. 너 목청 좋은 건 알고 있으니까 쓸데없이 뽐내지 말아줄래? 가인은 민망해져서 큼큼 헛기침을 했다.
“진짜 몰라, 그렇게 궁금하면 나중에 병원 가서 얘기 듣고 알려줄게.”
“병원까지 가야 할 정도에요?”
미운 정이라도 든 모양인지, 가인은 좀 걱정스러워지는 마음에 인상을 썼다.
“가벼운 감기에 걸려도 병원은 가는데. 야, 그것보다 빨리 가자고. 선배들 화낸다고.”
“무서워하지도 않으면서.”
“귀찮잖아.”
잔소리 듣기 싫어. 그 한 마디가 참으로 박효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차게 입부까지 번복하고 온 마당에, 효진이 가자는 한 마디를 했다고 벌떡 일어서서 쫄쫄 따라가기엔 좀 멋쩍기도 하고 쪽팔린거 같기도 해서 가인은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밍기적거렸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효진이 짜증을 내며 가인의 손목을 낚아채 일으키고는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고 가인도 그다지 반항할 마음은 없어서 어, 어, 아이 참, 하면서도 순순히 따르는 체 했다.
*
어, 왔다왔다. 야, 낼 매점에서 빵 사와라. 아나 진짜. 가인은 제가 한 일이 있는지라 굉장히 무서운 분위기가 됐을 거라고 예상했던 연극부실-그러니까 강당- 안이 생각 외로 화기애애한 것에 당황했다. 아니, 어두운 분위기보다야 훨씬 낫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 처음 들어온 신입생의 컴백 여부를 두고 내기를 하는 것은 낙천적이라고 해야 할지,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지. 가인은 착잡했다. 성격들은 참 좋은 것 같은데, 너무 마이페이스 스타일로 좋다.
“용케 데리고 왔네, 효진이.”
“쟤 짜증나요..”
완전 성가셔. 효진이 부장 선배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대고선 가인 쪽을 흘겨보며 말했다. 가인은 어이가 없었다. 후배만, 후배만 아니더라도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고 쏘아붙이기라도 했을 것을.
“그게 널 처음 봤을 때의 우리들 마음이었단다.”
“그래, 그래. 지금 어떤 기분인 줄 알아? 말 안 듣는 딸내미한테 맨날 너도 너 똑 닮은 딸 하나 낳아서 키워봐라, 하고 노래를 불렀는데 그 딸내미가 진짜로 자기가 똑 닮은 딸 낳아 데려온 그런 기분이란다.”
효진이 그게 뭐냐고 볼멘 소리를 할 틈도 없이 3학년들 사이에서 웃음과 환성이 터져나왔다. 딱이네, 비유 존잘이네.
“그랬던 애가 이렇게 크다니, 언니는 감개가 무량하다.”
부장선배가 효진의 엉덩이를 툭툭 치자 효진이 짜증을 내며 떨어졌다. 하는 꼴이 진짜로 딱 사춘기 절정의 딸내미같다고 가인은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저 정돈 아닌 거 같은데. 내 쪽이 훨씬 양호하지 않나.
“사실 효진이 첨 들어왔을 때보단 가인이 쪽이 훨씬 나은 거 같긴 해.”
여기 부원들은 남의 마음 속 읽는 게 종특인가? 제일 일진스럽게 생긴 선배가 머리를 잡고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으며 가인의 마음 그대로를 대변해주었다. 아니, 조금 다르긴 했지만. 지금도 보통은 아닌데, 처음 들어왔을 땐 지금보다 더 했다니, 선배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가인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짠해져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난 처음 들어오자마자 때려친다고 나가진 않았어..”
“아냐, 그랬어.”
“어? 그랬어?”
당황한 효진이 재차 물었지만 효진을 제외한 2, 3학년 부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박효진, 나한테 뭐라 할 처지도 안 됐잖아. 가인은 생각했다. 신입생 입장에서도 지금과 별다를 바 없이 참으로 패기넘쳤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주역이 왔으니 효진이 뜻대로 대역은 안 서도 되겠네.”
“예?”
가인은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부장 선배에게 되물었다. 부장 선배는 어머, 몰랐나봐 하고 황급히 입을 가렸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다. 효진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가인이 못 데리고 오면 신입생 환영회 무대는 네가 대신 서야 된다고 못박아 뒀었거든. 그랬더니 어찌나 땡깡을 피우던지.. 데리고 오면 될 거 아니에요! 하고 나간 거 아냐, 저거.”
우리가 딸 하나 키운다 정말. 덧붙인 말에는 그야말로 진심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가인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선배, 그래서 온 거에요…?”
“아니 뭐,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 그것도 있고, 뭐….”
효진이 당황해서 안절부절 못하자 곁에 있던 선배들이 다 깨소금 맛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거에는 효진이 이런 식으로 선배들을 물먹인 전적이 있음이 분명했다.
“효진이 저렇게 꼼짝 못하는 거 처음 본다, 야.”
“잘됐네, 앞으론 가인이가 꽉 좀 잡아줘라. 쟤는 우리론 안돼.”
선배를 선배로 보는 애가 아니라서. 얼마나 당한게 많았으면 선배들이 입을 모아 똑같은 소리를 하는지. 가인은 비틀린 존경심이 담긴 눈으로 효진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생각난 것이 있어 옆자리의 선배를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어차피 효진선배는 그런 무대 못 선다면서요? 미혜 선배 시나리오가 아님 무대 안 서고, 지금 목도 안 좋다고….”
“그런 말을 하디? 목도 잘 안 쓰는 게 안 좋을 이유가 뭐가 있어.”
“예에에?”
가인이 효진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병원까지 가본다고.. 그래서 전 무슨 병이라도 있나 하고,”
“아, 병은 있지. 꾀병. 근데 그건 불치병이야.”
뭐야, 그럼 무대 하나 서기 싫다는 이유로 날 속인거야? 가인은 뚫어져라 효진을 노려보았지만 효진은 아예 가인 쪽에서부터 몸을 틀어앉은 채 딴청을 피웠다. 아, 박효진 저거. 다음 생에서는 꼭 내 후배로 태어났음 좋겠다. 가인은 생전 처음으로 기도란 걸 해볼 생각을 했다.
6.
잘 하네, 효진은 신입생 환영회 무대 위 가인을 보고 솔직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가인은 효진이 발성도 딕션도 표정도 구렸다고 한 게 한이 서렸는지, 울분을 토해내듯이 제 모든 것을 쏟아붓는 느낌으로 무대에 임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무대에 섰던 같은 주연 급의 아이들-크리스틴 역의 선영이나, 라울 역의 주영이나-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발성은 아직 과제가 많이 남은 것 같지만, 딕션이나 표정은 꽤, 라는 평가 정도는 받을 수 있을 법 했다. 하지만. 효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좀 더, 가다듬어지진 않았어도 조금 더 재밌는 연기를 하는 애라고 생각했는데. 의아했다.
무대 위 가인의 매력 중 효진이 가장 크게 꼽았던 것은 생동감이었다. 무대 위에 흩뿌려지는 듯한 재기 발랄함. 자신과 서 있는 다른 모든 이들을 압도하는. 하지만, 뭔가, 이번엔. 분명 잘하기는 하지만. 효진은 탐탁찮았다. 같은 무대에 서 있는 사람들을 이기는 게 아니라 무시하는 듯한 그런 떨떠름한 느낌이 있었다. 대사를 주고받아도, 갈등을 빚어도. 가인 혼자만이 어떤 다른 선상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저 잘 했죠?”
하지만 무대 위에서 내려오자마자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그리 말하는 가인의 기를 굳이 죽여놓을 필요성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자신감은 중요하다. 고운 후배든, 밉살맞은 후배든 간에. 효진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가인이 기분좋은 듯 소리내어 웃었다. 기분 탓인지, 가인이 웃는 것이 오랜만으로 느껴졌다. 웃으니까 귀엽네. 후배답고.
“효진아, 잠깐.”
미혜가 손짓해 부르기에, 효진은 가인을 1학년들 쪽으로 보낸 다음 미혜에게로 향했다. 미혜 역시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옛날부터 호흡을 맞춰온 일이 많아서 그런지, 같은 연극부원 중에서도 미혜와 효진은 유독 마음이 잘 맞았다. 무대를 보고 내리는 평도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다른 선배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미혜만큼은 역시나 이번에도 효진과 뜻이 맞았음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혜는 가인이 말인데, 하고 운을 뗐다.
“뭔가..”
“아깝지.”
“응.”
유일하게 긴 말을 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는 미혜가 효진은 편했다. 척 하면 척 하는, 그런 사이. 효진은 뭐든지 길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간결하면서도 뜻은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게. 미혜와는 그런 대화가 가능했다.
“다음에 올릴 건 솔직히 너랑 가인이랑 투톱으로 세울 생각을 했는데,”
“다 썼어?”
“어느 정도는. 퇴고는 해봐야겠지만.”
은진여고의 연극부가 이 정도까지 발전한 것은 미혜의 공이 크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효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 근방 고등학교의 연극부는 웬만해서는 창작극은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고전 명작을 패러디하거나 리메이크하는 게 고작. 그 이유는 배우로썬 활약할 사람이 많아도, 시나리오를 전문으로 담당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오리지널로 만들기엔 시간도 많이 걸리고. 하지만 미혜는 원체 글을 쓰는 속도가 빨랐다. 거기다 재능도 있어서, 스토리 자체가 재밌기도 했다. 효진은 미혜의 시나리오 무대에 서는 게 가장 즐거웠다. 효진의 취향에도 가장 맞았고.
“무슨 내용인데?”
미혜는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도 자신들에게 주의를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효진의 귓가에 대략적인 줄거리를 설명해주었다. 잠자코 듣고있던 효진은 잠깐 미간을 좁혔다.
“남자 역?”
“할 수 있잖아?”
“할 수는 있겠지만.”
내키지 않았지만, 그 내용대로라면 가인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싶기는 했다. 효진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미혜의 어깨를 툭, 쳤다. 네가 자꾸 재밌는 거만 안 써도 2학년은 그냥 놀고 먹으려고 했는데.
“선배들 들으면 운다.”
“늙어서들 유난이야.”
기껏해야 한 살 차이면서, 미혜가 웃었다.
*
“손가인.”
물을 마시고있던 가인이 효진의 부름에 급하게 사레가 들려 켁켁거렸다. 효진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가인을 쳐다보았다. 물도 하나 제대로 못 마셔서 어째, 저거. 어따 써먹어.
“지금까지 딴짓하고 있다가 갑자기 부르니까 놀라서 그렇죠,”
가인이 랩하듯 숨도 안 쉬고 빠르게 대꾸했다. 야, 너 랩퍼해도 되겠다. 효진이 비아냥거렸다.
“후..그래서 왜요.”
“선배한테 말하는 말본새 봐.”
“선배가 할 말이에요?”
“그 말 한 번만 더 하면 백 번 채우겠다, 너.”
“천 번은 채우려구요.”
따박따박 말대꾸. 나도 저렇게 재수없고 귀염성 없었어요? 아닌 거 같은데? 그런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3학년 선배들을 돌아보자, 선배들은 넌 한층 더 했다는 표정으로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말아야지. 효진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손에 들려있던 두꺼운 종이뭉치 두 권 중 한 권을 가인에게 건넸다.
“이게 뭔데요?”
“연습용 대본.”
“선배 연습도 해요??”
말도 안 돼. 가인은 이 학교에 발을 들인 후 가장 놀랐다.
“난 안 해도 되지만 넌 해야될 것 같아서.”
“왜요, 나 잘했는데?”
가인이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유독 좋아서, 스텝 하나까지 가볍고 대사도 술술 나와서 자신 나름대로는 성공적인 무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효진이 잘했다고 한 소리는 그냥 빈 말이었던 걸까.
“잘했는데..”
효진은 딱 짚어 어떻다고는 설명하지 못했다. 자기가 느낀 바를 논리정연하게 풀어 가인에게 납득시킬 자신도 없었고. 에이 몰라, 선배가 까라면 까고 하라면 하는거지. 그게 후배지.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고, 자신의 신입생 시절은 완전히 배제해버리는 효진의 태도에 3학년 선배들은 하나같이 기가 막혀했다.
“상대해준다고 할 때 곱게 들어, 나도 아무나 상대해주고 그러는 거 아니야.”
대본을 넘기며 한 효진의 말이, 왠지 가인의 가슴에 깊게 파고들었다. 의외였다. 그러고보면, 그렇다. 효진은 다른 사람의 연기에 대해 이렇다 할 반응을 하는 게 없었다. 모든 중심축은 자신이라-고 가인은 생각했다- 타인에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그것이 효진의 기본적인 태도인 것 같았다. 효진이 유일하게, 적게나마 연기에 대해 반응한 것은 또 효진이 말했듯 상대해주기까지 한 것은 동급생이나 선배들 중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후배 중에서는 아직까진 가인 뿐이었다. 주위에서 흥미어린 눈빛을 보내던 선배들도 한 마디씩 보탰다. 그래, 효진이는 대본 리딩도 지 혼자 하는 앤데. 널 맘에 들어하긴 하나보다. 부러움섞인 1학년생들의 시선에, 가인은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이걸 그래서, 읽으면 돼요?”
“안 읽고서도 할 수 있음 그래도 돼.”
“거 정말.”
걸고 넘어지기로는 효진 역시도 가인 못지 않았다. 가인은 다시 부루퉁해진 얼굴로 대본을 넘겼다.
“제가 어떤 거 해야 하는데요?”
“……, 잠깐만, 나가서 하자.”
“아, 왜~”
효진이 다시 대본을 덮고 가인의 손을 잡아당기자,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이건 아직 미공개 시나리오란 말예요.”
“미혜가 보여주지 말래?”
“네.”
“그럼 할 수 없지..”
왜 내 말은 안 들으면서 미혜 말은 들어? 효진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효진은 가인에게 대본을 덮으라고 일러준 뒤 가인의 손을 끌고 강당을 나섰다. 신입생 환영회가 막 끝난 참이라, 뒷풀이 명목으로 남은 학생들이며 하교 준비를 하는 학생들이며 유난히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효진이 나오자마자 그 수많은 학생들이 양 옆으로 쫙 갈라지는 걸 보고 가인은 또 질겁했다. 모세의 기적 시즌 투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그에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당연하다는 듯 의연하게 가인을 데리고 그 사이를 걷는 효진의 태도였다. 가인은 여차하면 효진의 발 밑에 투명색 레드카펫이라도 깔려있는 착각이 들 것 같았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가인은 효진에게 물었다.
“선밴 이거 무슨 내용인지 알아요?”
“어.”
“미혜선배한테 들어서?”
“어.”
“둘이 친한가봐요.”
“걔는 특별해.”
단순히 친하다 따위로 정의될만한 관계가 아니다.
“…나는요?”
“어?”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이 튀어나왔는지, 가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변명하듯 덧붙였다. 그냥 해 본 소리에요, 무시해도 괜찮아요. 잠깐 가인을 돌아봤던 효진은 다시 고개를 돌려 바삐 걸으면서 대꾸했다.
“안 그랬음 내가 이렇게까지 할 이유도 없잖아.”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이렇게까지 효진의 흥미를 끄는 존재가 있다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걸 특별하지 않다고 한다면 효진에게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미혜마저도.
“원래는 잘한다 못한다 같은 말도 안 해, 난.”
“그런 말 들은 거 같기도 해요.”
“내가 하는 행동으로 미칠 영향이 싫으니까. 망하든 말든 걔 사정이기도 하고.”
“매정하긴..”
“근데 넌,”
몰라,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어. 참견하고 싶어져. 마지막 계단에 발을 딛으며 효진이 한 말이 유독 인상깊이 남았다. 이유모를 열기가 오른 몸을 서늘한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효진과 마주잡은 손은 바람도 식히지 못할 것 같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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