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샤] 식스센스

  그는 여자의 턱을 쓰다듬었다. 가인은 그 행위가 퍽 불쾌했다. 그는 웃고 있었고, 여자는 기분좋은 듯한 표정이었다. 가인은 반 강제적으로 그의 옆이 아닌 여자의 옆에 앉아야 했다. 소파의 빈 공간이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당신의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어줬으면 해.”

  “무슨 소리야?”

  “연인 앞에서 다른 이성을 만지는 행동은 그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는 일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은거야.”

  “이성?”

 

  그의 손이 멈추었다. 가인의 불쾌지수를 올리는 행위 자체는 끝이 났음에도 가인의 기분은 좋아지지 않았다. 여자는 큰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말했잖아. 이 앤,”

  “또 그 지긋지긋한 이야길 꺼낼 참이야?”

 

  당신 앞에 있는 그 여자가 인간이 아닌 고양이라는 소리 말이야. 가인은 질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는 살짝 인상을 썼다.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러는거야? 알고 있어? 뭘, 나는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걸까. 가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납득하지 못한 일을 알고 있는 일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건가?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당신 미쳤어?”

  “뭐?”

  “당신 옆에 있는 그 여자는 말이야,”

  “여자라니?”

  “인간이라고!”

 

  누가 봐도! 가인이 쨍한 목소리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호피 무늬의 옷을 입고 있을 지라도, 그것은 결코 호피 무늬의 '짐승' 가죽이 될 수는 없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선명하고 귀의 모양도 짐승의 그것이 아니다. 꼬리같은 것도 있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는 여자가 짐승이라고 한다.

 

  “제발. G, 조용히 해. 나르샤가 놀라잖아.”

  “무슨 상관이야!”

 

  가인의 외침과 동시에 육중하고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일순 정적이 흘렀다. 탁상에 놓여있던 백과사전이 소파 아래쪽에 떨어져 있었다. 그가 그토록 짐승이라고 우기고 싶어하는 여자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에 맺히는 물기며 일그러지는 입술로 드러나는 선명한 표정은 그녀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데도 그는,

 

  “옳지, 저 사람은 널 해치지 않아. 진정해.”

  “당신 정말…!”

 

  그의 팔 안에 안겨있는 그녀는 겁먹은 눈으로 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가인은 가볍게 욕을 내뱉으며 소파에 자신의 몸을 내치듯 기대었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좋아, 됐지? G가 사과했어. 잘됐네.”

 

  이제는 그가 미친 것인지 자신이 미친 것인지, 가인은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자신이 미쳤거나 그와 나르샤라는 여자가 동시에 미친 것이거나. 아무도 미치지 않았다는 명제는 성립조차 불가능하다. 가인은 소파의 손잡이 부근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굈다. 

 

  “잘 지내면 좋을텐데. 예민한 아이라고 했잖아.”

  “그리고 나는 분명 당신한테 말했을텐데. 나한테 그런 일을 절대로 기대하지 말라고.”

  “왜 그렇게 날이 서 있는거야?”

  “몰라서 물어?”

  “알면 묻지 않아.”

  “이걸 주제로 얘기했다간 우린 평생 끝나지 않는 토론을 해야 될거야.”

  “G, 요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거 알아.”

 

  그는 나르샤의 등 뒤로 손을 뻗어 가인의 손을 잡아당겨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우리와 이 애의 일은 별개야. 알잖아?”

  “모르겠는데.”

  “거듭 말하지만 이 앤 인간이 아니야, 네가 질투할 대상이 아니라고. 알겠어?”

  “유감이지만 그것도 모르겠어.”

  “그냥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운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어딜 보나 인간 여자인데 고양이라고 생각하라고?”

 

  여자 본인은 진짜로 자신이 고양이라도 된 마냥 행동하긴 하지만, 그거야 뭐 어떠한 정신 이상이라고 치부해놓고 보면 외면의 껍데기는 결코 인간임을 부정할 수 없다.

 

  “G, 그렇다고 나르샤를 버릴 수는 없어. 알지?”

  “….”

  “버리라고?”

  “쟤가 없어지면 당신이 미쳐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참는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무서운 소리 하지 마.”

 

  그의 손이 가인에게서 벗어나 나르샤의 머리 위로 향했다. 그는 나르샤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이 앤 ‘상징’이야…”

  “드디어 알았다. 어디서 미친 교주 한 놈한테 세뇌라도 받아온 모양이지? 그 새끼가 뭐래? 돈 갖다 바치래?”

  “돈은 필요 없어! 거짓말도 아니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야. 나르샤는, 그래, 자유야.”

  “도대체, 당신….”

  “자유 그 자체란 말야!”

 

  언제부터 그는 정신이 나가기 시작한 걸까. 바보같을 정도로 착했던 나의 연인은. 나르샤를 만난 후부터? 아니면 나르샤를 인간이 아닌 이질적인 무언가라고 믿어버리기 시작한 이후부터? 아니면 애초부터 미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내가 그걸 깨닫는 게 늦었거나, 콩깍지가 씌여 여태껏 느끼지 못했거나. 가인은 그의 눈에서 광기란 것을 보았다.

 

  “JB! 시간이 됐어!”

  “아, 지금 나가!”

 

  광기어렸던 그의 눈은 금세 원래의 순박한 눈으로 돌아왔다. 가인은 그 급격한 변화가 소름끼친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인과 시선을 마주치고 베시시 웃었다. 언제나의 다정했던 연인이었다. 가인은 말문이 막혔다. 

 

  “제발, G, 잘 부탁해.”

 

  차마 거절조차 하지 못했다. 가인은 반 강제적으로 나르샤를 떠맡게 되었다. 그는 겉옷을 챙겨입고 재빨리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방 안은 다시금 정적으로 뒤덮였다. 몸을 웅크린 채 왼손을 할짝이는 나르샤를 보니 혐오감이 솟구쳤다. 젠장. 가인은 고개를 틀었다. 오늘은 휴일이라는 것을 며칠 전부터 몇 번이나 못박아둔 상태였기 때문에 딱히 핑계댈 일도 없었다. 꼼짝없이 발목 잡힌 셈이었다. 

 

  “미야오.”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허벅지에 닿는 손길에 가인은 소름이 끼쳤다. 숨을 멈춘 채 무의식 중에 손을 휘둘렀다. 유쾌하지 않은 통각이 느껴졌다.

 

  “제기랄.”

 

  소파 아래쪽에 주저앉아 소파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나르샤를 보고 가인은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 나르샤의 얼굴을 억지로 들게했다. 그새 뺨이 붉어졌다. 가인은 그의 반응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졌다. 가인이 왼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는데 나르샤가 가인의 오른손에 얼굴을 부벼댔다. 가인은 짜증스레 손을 치웠다.

 

  “하지마.”

 

  나르샤는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 네가 어떻게 동물일 수가 있어?”

 

  황당함을 담아 말했지만, 나르샤는 금세 가인에게 흥미를 잃은 듯 바닥에 내팽개쳐진 백과사전을 뒤적이고 있었다.

 

  “진짜 짐승이라면 이렇게 무방비해서는 안 되는 거 아냐? 자기한테 악의를 품고 있는 사람한테 그렇게 아무런 의심없이 다가오다니,”

 

  넌 야생이었으면 벌써 죽은 목숨이라고. 알아? 나르샤의 등 뒤에 대고 중얼거리던 가인은 아무런 대꾸가 돌아오지 않는 잠깐의 텀을 두고 혀를 쯧 찬 후 다시 고개를 틀었다. 말귀도 못 알아듣는 미친 여자한테 이딴 말을 해봤자지. 나도 JB한테 세뇌되어서 잠깐 좀 돌아버렸던 거야.

 

  잠시 고개를 돌리고 있던 가인은 흘끗 나르샤를 쳐다보았다. 나르샤는 백과사전의 한 페이지를 펼쳐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문자는 읽을 수 있는건가, 가인은 살짝 고개를 숙여 나르샤가 내려다보고 있는 책의 구절을 훑었다.

 

 

재규어  jaguar 

 

명사 

 

<동물> 고양잇과의 동물. 표범과 비슷한데 몸의 길이는 1.4미터 정도이며, 노란 갈색에 검은 얼룩무늬가 표범보다 크고 거의 네모진 고리 모양으로 되어 있다. 네 다리와 꼬리가 표범보다 짧고 머리는 큰데 눈 턱에 돌기가 있다.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강 유역 밀림에 분포한다. [비슷한 말] 아메리카표범. (Panthera onca)

 

 

  “재규어…?”

 

  나르샤가 고개를 홱 돌려 가인과 눈을 마주쳤다. 가인은 당혹스러워 시선을 피했지만, 나르샤는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인의 무릎에 얼굴을 부벼댔다.

 

  “그런 건 JB한테나 해…!”

 

  가인은 나르샤를 살짝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르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가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양이나 자유 좋아하시네…!”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나르샤의 얼굴을 보면 가끔씩 그의 얼굴이 겹쳐보일 때가 있었다. 아무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천진한 그 표정은 이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만을 온전한 가해자로 변모시켜버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인은 옆의 테이블을 발로 찼다. 나르샤는 몸을 움찔 떨고 몸을 웅크렸다. 가인은 씨근거리며 허리를 숙여 나르샤의 턱을 잡고 자신을 보게 만든 채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넌 인간이야. 알아?”

 

  나르샤의 눈 속에는 공포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이라고!”

 

  고양이나 ‘상징’ 따위가 아니라! 그런데도 나르샤는 갸냘픈 울음소리를 냈다. 고양이의 울음소리 말이다.

 

  “사람 말을 하란 말야!”

 

  마지막 말은 거의 울부짖듯 하는 애원이었다. 나르샤는 욱욱거리며 억눌린 울음을 토해냈다. 씩씩거리던 가인은 한참 후에야 진이 빠져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나르샤는 지금 가인이 왜 자신한테 화를 내는 것인지도 모를 터였다. 사실상 지금까지 쌓여왔던 스트레스의 화풀이를 나르샤한테 한 것밖에 되지 않았다. 가인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뜨거웠다. 나르샤의 약한 흐느낌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정신이 몽롱했다. 잠깐 동안은 눈앞까지 뿌얬을 정도였다. 가인은 머리를 관통하는 듯한 두통에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온전히 정신을 차렸다. 나르샤가 발치에 웅크려 있었다. 가인은 어이가 없었다. 왜? 이 정도까지 했으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내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것쯤, 그 이상으로 혐오한다는 것 쯤 알 법도 한데. 

 

  “….”

 

  가인은 뚫어져라 나르샤를 바라보았고, 이내 시선을 느꼈는지 가인과 같이 잠들었던 나르샤는 퍼뜩 잠에서 깨자마자 가인의 눈치를 보며 떨어졌다.

 

  “…. 내가 좋냐?”

  “….”

  “난 네가 싫은데?”

 

  상반된 두 말 중 어떤 말에도 나르샤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을 빛내며 가인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의 화를 참는 톤이 아닌 일상적인 말을 하는 억양의 가인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접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인이 그런 목소리로 나르샤에게 말을 걸어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눈치라곤 죽에 쒀먹을래도 없는 것까지 JB랑 닮았군.”

 

  가인은 자신과 아주 조금 떨어진 곳 소파 아래쪽에 앉아 자신의 눈치를 보고있는 나르샤를 흘겨보다, 나르샤의 머리칼을 자신의 검지에 돌돌 말아 살짝 잡아당겼다. 머릿결은 뻣뻣했다. 

 

  “머리카락은 짐승 털 같긴 하네.”

 

  진짜 야생의 짐승의 것에 비할 건 아니지만. 가인이 먼저 한 첫 접촉에 나르샤는 다시 살짝 가인 쪽으로 다가왔다. 나르샤는 처음 본 순간부터 가인이 퍽 마음에 든 참이었다. 자신에게 가장 다정한 사람과 많이 닮았기 때문에, 사실 막연한 호감을 품고 있었다. 다만 가인의 자신을 향한 적대감이 너무도 적나라했기 때문에 쉬이 표현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가인은 나르샤의 피부가 살짝 다리에 닿는데도 이번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네가 자유의 상징이라고?”

 

  자유 그 자체? 가인의 손에서 나르샤의 머리칼이 빠져나갔다.

 

  “지랄.”

 

  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박차고 방을 나섰다. 나르샤는 멍한 얼굴로 방 안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 닫힌 문만을 넋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인은 혀를 찼다.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을까. 오랜만의 운동은 기껏해야 20분도 채 되지 않아서 막을 내려야 했다. 가인이 숙소로 발걸음을 틀고 몇 발자국 걷지 않았을 때부터 빗줄기가 굵어졌다. 잠시 스치던 이슬비라고 생각했던 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세차고 거세게 내렸다. 가인은 금세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었다. 축축하게 젖어들어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의 감촉이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결국엔 뛰어서 숙소로 돌아온 가인은 연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문을 벌컥 열었고, 평온할 것이라 생각했던 숙소는 혼돈 그 자체였다. 거대한 사내 대여섯이 불안한 표정으로 사방에서 숙소의 온 문을 벌컥벌컥 열어제끼는 꼴은 보기에 그리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리, 뭘 하는거야?”

 

  가인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내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반쯤 얼이 빠져있는 듯한 사내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나르샤가 없어졌어, G, 못 봤어?”

  “뭐?”

 

  어딜 갔을까. 나르샤가 갈 데라곤 잘 알고있는 여기밖엔 없을텐데.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중얼거리면서 리는 자리를 떴다. 가인은 잠시 멍해졌다. 나르샤가 없어졌다, 라는 단 두 어절을 받아들이고 납득하는 데에 쓸데없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없어져? 그럴 리가! 가인은 다시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냥 왠지 숙소 안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나르샤가 펼쳐보던 백과사전 페이지가 떠올랐다. 재규어.

 

  가인은 아무 생각도 못한 채 자신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JB는 숙소에 있지 않았다. 나르샤가 사라진 걸 알고 있을까. 벌써 찾으러 나간 것일까. 만약 내가 나르샤를 혼자 놔두었다는 걸 알면 원망하고 질책할까. 혹여 진짜로 영원히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가인은 입술을 깨물고 또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흘러들어오는데도 인식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나르샤…나르샤…!”

 

  가장 마지막에 나르샤와 같이 있었던 것은 자신이었는데 리는 그것에 대해 추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내가 마지막 목격자라는 걸 모르는 걸까…가인은 눈을 질끈 감고 뛰기 시작했다. 가인이 뛸 때마다 질척거리는 흙탕물이 사방으로, 또한 가인의 발치로 튀었지만 그것에 신경쓸 여력조차 없었다.

 

  “나르샤!”

 

  기껏해야 자리를 비운지 30분이다. 인간으로써 사고하지 못하는 그 여자가 자의로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가인은 시야를 가리는 빗물이 짜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숲의 안 쪽, 더 깊은 안 쪽으로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나르…!”

 

  얼마나 걸었을까. 지형이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 발을 디뎠다는 걸 자각했을 때, 가인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르샤다. 나르샤가 있었다. 커다란 바위덩이 옆에 몸을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인은 안달이 나 성큼성큼 나르샤에게로 걸어갔다. 빗소리에 묻혀 인기척따윈 들리지도 않았을텐데 나르샤는 고개를 돌려 가인과 눈을 마주쳤다. 잠깐 놀란 표정을 해보이던 나르샤는 이내 생긋 웃었다. 비 때문인지 그 모습이 희미했다. 나르샤에게로 다가간 가인은 신경질적으로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일어나!”

 

  나르샤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가인은 안도감과 짜증이 동시에 치밀었다.

 

  “왜 여기 있어!?”

  

  젠장! 가인은 나르샤의 손목을 붙잡고 숙소 쪽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낑낑거리는 소리에 무심코 걸음을 늦췄다. 만약…다친 곳이라도 있으면…. 가인은 고개를 돌려 나르샤의 얼굴을 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어쨌든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는 없음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가인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나르샤는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가인의 손에 이끌려 따라왔다.   

  

*

 

  가인은 나르샤를 숙소의 안으로 밀어넣고 자신 역시 가쁜 숨을 내쉬며 닫은 문에 등을 기댄 채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체력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정신적으로 단기간에 너무 많이 압박받고 위축된 것의 후유증이었다. 나르샤! 리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를 기점으로 다른 방들을 샅샅이 뒤지고 있던 사내들도 안도감섞인 목소리로 하나 둘씩 나르샤의 이름을 불렀다. 나르샤에게 다가온 리는 멀뚱히 서 있던 나르샤의 뒤로 주저앉아 있던 가인을 발견하고 놀란 눈을 했다.

 

  “G가 찾아온 거야? 엄청 젖었는데…괜찮아?”

 

  가인은 손을 설레설레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온 몸이 피로했다. 

 

  “감기 걸리겠다.”

 

  리가 모습을 감춘 것과 동시에 가인이 기대고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아.”

 

  JB의 목소리였다.

 

  “저기, 이건, 그”

 

  가인은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가인은 타고난 천성 자체가 거짓말에 약했다. 게다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 일은 어떤 변명을 해도 납득받을 수 없는, 온전한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기껏해야 5% 정도는 가인이 나르샤에게 가지고 있는 적대감을 알면서도 나르샤를 가인에게 맡겨버린 JB의 탓일지 몰라도.

 

  “산책 갔다왔어?”

 

  하지만 JB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JB는 나르샤의 턱과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리고 나르샤갸 갸르릉거리며 기분좋은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덧붙였다. 흠뻑 젖었네, 산책 한 번 요란하기도 하지. 가인은 김이 샜다.

 

  “G도 많이 젖었네.”

  “….”

  “빨리 씻어야지.”

 

  지레 겁을 먹었던것과 달리 다정한 JB의 목소리는 안도감과 같이 허무감을 가져다 주었다. 가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세우고 있던 무릎에 머리를 콩, 찧었다. 오히려 JB의 그 태도가, 가인에게는,

 

  “…나 때문이야.”

  “음?”

  “내가 나르샤를 혼자 두고 나가서, 그래서….”

 

  자칫했으면 영원히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가인의 목소리와 몸은 떨리고 있었다. 비를 맞아도 하나도 추운지 몰랐는데, 이제서야 오한이 들었다. 가인은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깨물고 또 깨물었다. JB가 살짝 웃으며 가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크고 따뜻한 손이 가인의 뺨을 어루만졌다.

 

  “G, 나르샤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어. 절대로.”

 

  그는 단호했다.

 

  “하지만 진짜로 잃어버릴 뻔 했는걸…”

  “저 앤 저 애 나름대로 널 찾으러 갔을 뿐이야.”

 

  가인은 멈칫했다. 나르샤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젖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없는 듯한 그 태평하고 태연자약한 얼굴에 가인은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날 찾으러 나간 거라고, 쟤가.

 

  “그럴 리 없잖아.”

  “어째서?”

  “그거야…나는…나르샤를……”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나르샤가 고개를 돌려 가인과 JB의 쪽을 바라보았다. 가인은 뒷말을 덧붙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JB는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나르샤는 널 좋아해, G.”

  “말도 안 돼.”

  “진짜야. 그것보다 빨리 씻는 게 낫겠어. 나르샤도 너도 말이야.”

  “나보고 쟬 씻기라고…!?”

  “남자들이 할 순 없잖아.”

 

  JB는 난감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가인은 내키지 않았지만 JB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JB가 나르샤의 손을 가인에게 쥐어주었다. 가인은 더 이상 저항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친 얼굴로 나르샤의 손을 잡고 욕탕으로 향했다. 나르샤는 숙소로 올 때와 똑같이 아무런 반항없이 쫄래쫄래 가인을 따랐다. 병신같다. 가인은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찾지 말걸. 차라리 거기서 죽….

 

  다른 애들한테는 내가 얘기해둘 테니까 천천히 씻고 나와. JB의 배려대로 넓은 욕탕은 텅 비어 있었다. 탕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후끈한 열기는 가인에게는 안락함을 선사했지만, 나르샤는 그런 공기가 거북스러운지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꾸만 바깥으로 나가려 들었다. 가인은 짜증이 났다.

 

  “가만히 있어!”

 

  그러나 그런 가인의 불호령에 몸을 흠칫 떨고 눈치를 보며 저항을 멈춘 나르샤의 모습을 봐도 그다지 산뜻한 기분은 아니었다. 가인은 한숨을 내쉬며 나르샤의 호피무늬 탱크탑 끈에 손을 댔다. 같은 여자이고, 심지어는 그 여자 본인은 자신이 짐승이라고 믿고있는 약간의 정신이상자-어디까지나 가인의 예상이지만-임에도 타인의 나체를 봐야한다는 것이 가인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씨발..”

 

  가인은 두 눈을 감고 나르샤의 탱크탑을 천천히 벗겨낸 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리고 매끈한 허리를 더듬어, 골반께에 걸쳐져있던 팬츠도. 잠깐 비틀거린 나르샤의 손이 가인의 어깨에 닿자 소름이 돋았지만, 가인은 그 혐오감을 꾹 참아냈다. 가인은 나르샤의 발목께에서 팬츠까지 빼낸 후 나르샤의 등을 살짝 탕 쪽으로 밀었다.

 

  “들어가.”

 

  그러나 나르샤는 탕과 가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안절부절 못한 채 머뭇거렸다. 들어가는 것도 못해? 짜증이 섞여 날선 가인의 목소리에 나르샤는 두려운 듯한 표정으로 탕의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인은 이번엔 자신의 옷가지를 벗어 던져놓고, 나르샤보다 한 발 먼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나르샤는 흠칫거리며 물에 손을 뻗었다가, 그 물에 닿을 세라 금세 손을 떼는 행위를 반복 중이었다. 

 

  “….”

  “….”

  “이런 것도 혼자 못해?”

 

  무리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알아서 탕에 들어오라 했을 뿐인데! 가인은 화가 울컥 치밀었지만, 그 울분을 나르샤에게 풀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 수 있었다. 가인은 짜증스레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 물에 살짝 맞은 나르샤는 히스테릭할 정도로 깜짝 놀랐다. 그러나 가인은 개의치 않고 나르샤의 팔을 잡아당긴 후, 자신 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울어졌을 때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아 물 안으로 들어오게끔 유도했다. 물에 닿은 나르샤는 기겁을 하며 버둥거렸지만, 가인이 허리를 놓아주지 않고 가만히 버티고 있자 금세 얌전해졌다. 시종일관 겁먹은 표정으로 움찔거리긴 했지만. 가인은 그제서야 나르샤를 놔주고 고개를 돌린 채 턱을 굈다. 모든 게 하나같이 귀찮기 짝이 없었다. 

 

  “….”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조금이나마 편안해질만도 한데 가인은 오히려 신경이 더욱 바짝 곤두섰다. 휴식답지 못한 휴식이라는 게 의미가 있긴 한가? 그때 살짝 팔에 닿은 살갗에, 가인은 소스라치며 팔을 내쳤다, 아니, 내치려고 했다. 그랬어야만 했을 터였다.

 

  “야….”

 

  나르샤는 등을 돌려 탕의 바깥쪽에 엎드린 채 과할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몸의 떨림이 육안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제서야 가인은 나르샤가 울음을 참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나, 나와.”

 

  먼저 탕의 바깥으로 나선 가인이 나르샤의 팔을 잡아당겼다. 나르샤는 탕의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진정됐는지 금세 멀쩡한 얼굴이 됐다. 가인은 당황스러웠다.

 

  “뭐야…?”

 

  그렇지만 어쨌든 나르샤에게 이상이 없다는 안도감이 한 발 앞섰다. 가인은 노곤해지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이깟 여자한테 휘둘려야만 하는 생활이라니, 끔찍했다. 가인은 나르샤의 손목을 잡고 자리에 앉혔다. 좋고 싫음을 떠나 해야할 일은 해야 했다. 가인은 그런 성정이었다. 일단은 나르샤의 머리를 감길 생각이었고, 실제로 그건 그다지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르샤가 자꾸만 버둥거리며 벗어나려던 것만 빼면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외였다.

 

  타인의 나체를 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심지어 타인의 몸까지 씻겨줘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욕이 나왔다. 가인은 나르샤의 몸에 애꿎은 물만 자꾸 끼얹었다. 결국엔 나르샤가 하악질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까지.

 

  가인은 샤워볼에 바디워시를 묻혀 거품을 냈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 이후가 심히 내키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르샤는 손에 묻은 물기를 할짝이거나 머리를 부르르 흔들며 물기를 털어내거나를 반복하다가 시간이 좀 지난 후에는 말똥한 눈으로 가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왜 이런 것까지 내가 해야 하는거야…?!”

 

  짜증이 치밀었지만 어디도 도피할 수 있는 구실은 없었다. 가인이 체념하고 현실에 순응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인은 일단 샤워볼로 나르샤의 왼쪽 팔부터 문질렀다. 이 부근은 그다지 문제가 없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나르샤가 간간히 짜증을 내긴 했지만. 묵묵히 움직이던 가인의 손이 가슴께에서 멈칫했다. 새끼 짐승같은 행동과는 달리 굴곡있는 몸매는 이미 다 장성한 여인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어 거북살스러웠다. 가인은 눈을 감고 손을 움직였다. 가슴, 배, 허리, 허벅지, 다리, 다리 안쪽에 손을 향해야 했을 때에는 고개를 돌렸다. 움찔거리던 나르샤가 가인의 목을 안아왔고, 가인은 말없이 나르샤의 몸에 물을 끼얹었다. 산만한 아이처럼 가만있지 못하는 나르샤의 어깨를 꾹 눌러 제지하면서 가인은, 무의식적으로, 나르샤의 목에 손을 향했다.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차라리….”

 

  뒷말은 끝맺어지지 못한 채, 가인의 손은 스르르 흘러내려갔다. 나르샤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천진한 표정이었다. 가인은 처음으로 느낀 살의가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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