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베

조용

두 걸음 사이에는 불쾌하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무언가를 만들어 써내야 할 필요조차 없는 평온이 이어졌다.

상록 by 수림

짧지 않은 정적 속에서 미묘한 평온이 흐른다. 공상을 공유하는 자들의 공존은 늘 그러한 식이었다지만, 피부에 느껴지는 평온의 온도가 퍽 다르게 느껴짐은 역시나 상황의 특수성 때문이었을까-혹은 계절에 의해 밤의 공기가 차게 피부 위를 흐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덕택에 그 살갗 아래를 기는 체온의 존재감은 더욱 뚜렷하다. 단순히 살아있다는 감상만으로는 다할 수 없는 감각일지언정 말재주가 뛰어나지 못해 괜스레 '아, 살아 있구나.' 따위의 말을 혀 끝에서 굴린다. 결국 목소리로 화하지 못한 몇 단어는 제법 의아한 흐름 끄트머리에서 피어난 것이므로 그는 그 생각의 가지를 단호히 잘라내기라도 하듯 눈을 강하게 여닫아 의도적인 단절을 거듭했다.

식스 센스, 이름을 들어 본 적은 있는 것 같아. 두 명의 창작자가 볼 가치가 있다고 이야기한 영화라면 한 번 즈음은 볼 법 한 영화겠는데? 네가 이야기해 준 내용을 생각하면서 감상해 보면 좋을지도 모르겠어. 이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자연히 뒷목을 짓눌렀다. 이해의 부재에 대한 가능성, 그 영화 자체에 대한 생각과 수많은 가정이 조수처럼 들어찼다 소강하기를 반복한다. 상대가 건넨 필요에 대한 말에는 나즈막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건 꽤 기쁜 일이라고 생각해.' 따위의 감상을 남겼다.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주는 물 몇 병이나 듣고 싶지 않은 속삭임 따위를 쫓아내는 알약 몇 알 따위와는 다른 무게의 필요였으나, 앞으로도 이어질 사소한 필요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면 자연히 수많은 것들이 요동쳤다. 적어도 그 필요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한 그 사이의 연결이 아주 끊어지는 일은 없겠지.

내가 외출을 한다고 해 봤자 이런 산책에 불과한 일이겠지만 말이야. 너도 약속을 즐긴다니 꼭 약속을 피할 필요는 없겠지……. 우리 마을이 마음에 든 나머지 떠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하며 몇 주 더 머무르게 되는 약속에 없던 일을 저질러도 괜찮으니 편하게 생각해 줘.

나도 기다리고 있을게. 마을에 들어오는 다른 사람들의 배를 보기만 해도 그 위에 네 모습이 있는지부터 살펴보게 될지도 몰라. 아, 아예 항구 쪽으로 집을 옮기게 되는 건 아닐까 몰라. 그리 농담을 내뱉고는 특유의 청명한 웃음소리로 말을 맺었다. 이후, 상대의 입에서 결국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흐르기 전까지는 한 마디조차 내뱉지 않았다. 그 사이를 메우고 있는 파도의 소리-점점 멀어지는 거리감의 음 하며 바람이 스치듯 절벽 아래를 메웠다 밀려나는 소리에 이르기까지의 다채가 그 정적을 풍요롭게 해 주었으니. 무엇보다 상대와 흘려 보내는 정적은 그리 어색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사뿐히 이어지는 제 옆의 발걸음이 지니는 존재감 덕택에 수다쟁이는 간만에 침묵을 찾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누구나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을 거듭하는 때가 있지.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 그 역할에 대해서, 혹은 스스로 그 자체에 대해서. 머릿속으로는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 하나를 택하지 못해 맴돌게 되는 때도 있고 말이야. 입으로는 '나는 나야.' 라고 이야기할지언정 마음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겠지.

사오토메 헤르츠-그는 머릿속으로 그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현재의 이름과 비슷한 음절을 지니고 있을지언정 그 주파수에서는 꽤나 답답하고 습한 내음이 풍겨져 오는 것도 같았다. 누군가는 달을 그저 우주 위에 남겨진 거대한 돌덩이라 여기듯이, 하츠카 헤르츠라는 이름이 지니는 온화한 큰 달의 빛과, 그것이 이어나가고 있는 수많은 통함과는 달리 그저 흉터가 그득한 구체의 모습만이 어둑한 구석을 구르고 있는 듯 하다. 그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양 짤막한 한숨이 흐른다. 그는 가장 낮은 주파수가 파도의 흐름과 공명한 탓인가…….

이러나 저러나, 달은 달이지. 그 모습이 밤을 밝게 비추는 온달의 모습이건, 수많은 흉터와 상처로 가득한 뒷면의 모습이건 말이야. 그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 줄 필요는 없어. 꼭 그것을 받아들이려 조급하게 느낄 필요도 없고. 너 스스로가 그 그림자 뒤의 흉들을 받아들일 마음이 생기거든 천천히, 한 구석씩 그것들을 받아들이면 되겠지. 무엇보다 지금의 네게는 다른 친구들이 있잖아. 네가 어둠 속으로 내쫓기거든 각자의 방법으로 너를 다시 빛 아래로 끌어올리려 할 친구들 말이야. 나도 그 중 하나고. 바란다면 늘 돕기 위해 남아 있을테니 그것만은 기억해 줘.

그는 분명 포용하고 이해하는 자였으나 적극적으로 타인을 그림자로부터 끌어내는 이는 아니었다. 어쩌면 스스로 그런 일을 다할 정도의 힘을 가진 것은 아니라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유독 한 자 한 자를 내뱉는 목소리가 신중한 것은 제가 흘린 말이 상대를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이끌 것에 대한 조심스러움이다. 바다를 끌어당기는 것은 달의 중력이라지만, 그것들을 닮은 인물들이라 하여 그 관계를 아주 따르는 것은 아닐테니. 상대가 저를 이르는 명칭에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린다. 길을 걸으며 더하는 생각은 한결 무게감이 덜어진 것-편지지의 색 따위를 고민하는 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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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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