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메아리
아르키메데스의 모래알
*S님 커미션
이 사랑에, 거짓말쟁이는 힘이 없었다.
*
너무 직조실에 오래 있지 마. 가끔 그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라고… 여기서 밖이란 게 너머가 아니라 안쪽을 말하는 거 알지? 식사 잘 챙겨, 건강해야지. 혹시 몰라서 모비우스한테 부탁해 뒀으니까 점심 거를 생각은 하지 마. 물론 나도 나 알아서 잘하고 있어. 정말이라니까.
눈이 멀어버릴 빛은 우리 세상의 종말이오, 귀를 찢어버릴 듯한 굉음은 초세기를 멈추지 않았다. 직조기 위에서 영원한 쳇바퀴를 굴리던 TVA는 오랜 의무의 끝을 보았다.
그 아름답고 끔찍한 죽음의 형태에 누구도 눈을 떼지 못하고 탄식만을 반복할 때, 트루디는 필사적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다.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이 세상을 창조했다. 또한 세상의 종말이 제면기에 들어간 밀가루 반죽 같은 형태로 찾아오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의식적으로라도 멍청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고작 며칠도 되지 않은 일상들이 떠올라서 견딜 수 없었다. 포기하고 온 세월이 아까운 게 아니야. 그 짧은 며칠과 앞으로, 함께 걸어 나갔을 시간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 트루디는 참을 수 없었다. 우리의 노력은 헛된 것이었나? 그 어린 질문에 단호하게 아니라 말해줄 수 있는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트루디는 고개를 돌렸고, 보이는 광경에 맥없이 헉, 하는 소리를 뱉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가이드북을 집어던지고 달렸다. 로키, 뭘 봤어요?
곁에 서 있던 사람이 5피트는 넘게 멀리 있어, 이제 제한 구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또다시 타임슬립을 한 거죠? 신이 세 발을 걸어 나갈 때, 인간은 여섯 걸음을 뛰었다. 직조기의 붕괴음과 함께 숨을 한 번 내쉬면 당신은 절망에 빠진 인간의 침음을 뱉고, 폭발하는 광원에 다시 눈을 한 번 깜빡이면 당신은 해답을 찾아낸 영웅의 눈을 했다. 찰나의 순간 마주친 시선에서 트루디는 그 눈을 바로 보았다. 그 표정을 알아. 이별의 전날 저녁에는 언제나 외로운 웃음이 있었고, 그러면 그는 나와 함께 내일 아침을 맞이해주지 않았다. 비틀거리면서 계단을 뛰어내려가 그의 이름을 외치며 트루디는 육천 개의 질문을 던졌다. 로키, 그 미래는 모두가 행복한가요? 어린 인간은 기어코 그 배려 없는 보폭을 따라잡았고, 사려 깊은 신은 등 뒤에서 끌어안아 붙잡는 그 미약한 온기에 멈춰 서 주었다. 로키, 그 미래에- 당신이 있나요?
“그러지 마요.”
머리를 쓰다듬는 차가운 온기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미약하고 어색해서, 트루디는 정말이지 형편없는 목소리로 거의 애원을 했다.
“트루디.”
“가지 마세요. 그렇게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아요.”
“…….”
“약속했잖아요.”
끔찍한 예감이 들었다. 만일 당신이 찾아낸 해답이 단 한 사람의 희생으로 모든 일을 끝맺는 것이라면, 그건 진정 끝난 비극이라 할 수 있는가? 트루디는 레버를 향해 뻗는 손을 붙잡았다.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가? 언제나, 스스로를 제물로 삼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놓아주지 않는 길은 없는가?
“그 약속은 휩쓸려 갈 정도로 가벼웠나요?”
“트루디.”
“그럼 대답해 주세요—”
장난과 거짓말에게 진실을 요구하자 돌아온 것은 세상에서 가장 쓴맛의 키스였고, 트루디는 덮어버린 침묵 속에서 생각했다. 당신이 대답하지 않은 모든 기억 중, 가장 최악으로 회상되리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언제나 서늘한 겨울의 향이 나는 사랑의 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짠맛이었다, 지독하게도!
“미안해.”
손을 뻗으면 차가운 철문이 손끝에 부딪혔다. 잔상처럼 남은 입맞춤에 손가락은 잠시 입술을 스쳤고 그대로 목을 향했다. 숨조차 터져 나오지 못한 통곡은 소리가 없어 떠난 이를 부를 수도 없다.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목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홀로 열 걸음을 더 걸어 나갔고, 뒤따라온 실비와 모비우스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마주친 시선은 언제나의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바로 그 눈이라…
“내가 어떤 신이 되어야 할지 알아.”
두께 12cm 납유리 너머, 웃는 얼굴이 너무나도 흐릿해서 트루디는 이번에야말로 저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희를, 모두를 위해서.”
스스로를 불살라 바치는 사랑을…….
*
아이는 그 찰나에도 궁금해했다.
*
너는 왜 항상 모든 시간에서 나를 바라보는 걸까? 답은 이미 애저녁에 들었는데도 항상 궁금해, 이건 아마 두 시간 전에 들은 잘 자라는 말을 또 듣고 싶어서 깨어난 꼬마애 같은 유치한 생각일 테지. 생각은 이제 그만 하라고? 알겠어, 나의 작은 잔소리쟁이.
모비우스 M 모비우스의 일상은 여전히 쳇바퀴처럼 흘러갔다. 아침이면 창문 앞에 앉아서 저 지독하게 아름다운 세계수만 바라보고 있는 신입 요원에게 빵과 커피를 억지로 쥐여주었고, 점심 무렵에는 문서고에서 가져온 종이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무언가를 찾고 있는 신입 요원의 옆에 샌드위치를 챙겨두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인다. 쉬어가면서 해.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러나 미미하게 끄덕이는 고개와 순식간에 갈 길을 잃어버린 펜촉을 볼 수 있겠지.
스텔라 트루디 우드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된다. 직조실─이제는 다른 이름을 찾아야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창문 너머 뻗어나가는 나뭇가지를 향해 손 뻗어 인사를 한다. 한 번 죽었다 살아났기에 더욱 열렬히 균형을 원하는 세계는 대답이 없다. 다 식은 커피에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면 토마토가 있었다… 그리고 트루디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내가 토마토 들은 샌드위치를 안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는 건 한 사람밖에 없었어. 체다 치즈와 햄의 짠맛으로도 가리지 못한 야채를 씹어 삼키며 다이어리에서, 오늘도 실패한 목표 하나를 죽 지워 없었다.
□ 비교하지 않기
정말로 어려운 일이야. 생각하고, 트루디는 밑에 하나를 더 적어 넣었다.
□ 아카이브 요약 자료 만들기
자고로 얄궂은 생각은 바쁜 일로 치워 없애야 한다. 트루디는 샌드위치를 세 입 더 베어 물고는 그대로 쟁반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다시 책상에 얼굴을 떨어뜨리고 보고서의 사본 한 귀퉁이에는 계속해서 낙서가 그려진 것을 영원히 볼지도 모르지. 검은 고양이, 까마귀, 황금색 뿔투구, 성냥, 팝콘, 누군가의 얼굴, 그 아래 작은 글씨- Loki, God, Odinson, Laufeyson 마지막 이름에 트루디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다시 줄을 그었다. 모비우스의 '피곤해 보인다'는 말이 으레 하던 걱정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그런 모양이지. 유리창에 반사되어 비친 얼굴은 스스로 놀랄 만큼이나 무표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감정을 눌러 가리고자 하는 시도였음이 틀림없다. 펜을 내려놓고 팔짱을 끼고는 얼굴을 묻었다. 살짝 고개를 돌리면 호흡하는 듯 심장이 뛰는 듯, 규칙적으로 맥동하는 나무가 시야를 가득 채웠고 트루디는 눈을 감아버렸다.
귀를 기울여야만 들릴 손목시계 초침 소리만이 끊이지 않고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시공간의 바깥에는 밤도 낮도 없으니 사람이 이전보다 미묘하게 더 피곤해 보인다던가, 문 너머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들에 질질 끌리는 소리가 추가되는 것으로 하루의 끝을 알 수 있었다. 일과가 마칠 시간의 트루디는 언제나 가볍게 졸고 있었고, 깨우는 것은 언제나 같은 목소리였다. 이 작은 아가씨, 또 졸고 있는걸. 트루디, 저녁 먹자. 일어나-
—나 왔어.
그리고 오후 다섯 시 반, 마치 환청을 들은 듯 벌떡 일어났을 때 트루디는 삐뚤어진 안경 너머 환상 속 그 사람이 아니라, 다시 한번 (깜짝 놀란 수염의) 모비우스를 보았다.
일어나 있을 줄 몰랐지. 흔들어 깨우려 했던 듯, 어깨를 토닥이고는 머쓱하게 말 꺼내는 이의 옷차림은 상당히 가벼워 보였다. 늘상 입고 다니는 고동색 양복에는 넥타이도 와이셔츠도 없이, 평범한 티셔츠였다… 눈에 띄는 변화가 하나 더 생겼어. 트루디는 생각했다. 모비우스는 여전히 스스로 틀에 박힌 삶이라 여기겠지만, 분명 그 무한의 굴레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아마 지금 시간이라면 저녁 먹으라고 옆에 뭔가 놔 주고 가겠지. 혹은 저녁 먹으러 가자던가, 산책이라도 하자며 방 밖으로 내보내려는 시도를 할지 모른다. 트루디는 웃었고, 오늘 모비우스는 후자의 답을 내놓았다.
“저녁 먹으러 갈래?”
“네?”
“실비도 와 있어. 모처럼이니까- 다 같이 식사나 할까 해서.”
보장된 일상 속에서, 그 찰나의 비일상적인 인연을 기억했다. 그들은 여전히 친구라는 테두리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슈와마 먹으러 갈래요? 잘하는 집을 알아요.”
그러니 그건 정말로 변덕이었는데. 어쩌면 정말로 숨통 틀 구석이 필요했던 걸지도 몰라. 제안을 던져 놓고도 트루디는 모비우스가 그것을 거절하기를 바라는지, 찬성하기를 원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는 한참 동안 트루디를 바라보았다. 무수히 많은 로키를 본 이에게 슈와마가 무슨 의미인지 모를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1년 같았던 1분이 지나고, 모비우스가 입을 열었다
.
“…그럼 난 잘 모르니까, 메뉴 추천은 신입이 맡는 걸로.”
“그럼요! 정리하게 15분만 기다려 주실래요?”
“그래. 끝나면 내 자리에 있을 테니까 부르러 와.”
경쾌한 목소리가 약간의 졸음기를 삼키고는 좋아요, 하고 대답한다. 트루디는 이것 먼저 치우고 오겠다며 기록관에서 빌려 온 한 무더기의 책을 끌어안고 방을 나섰다. 모비우스는 그 위태로워 보이는 광경에 눈을 크게 떴으나… 곧 고개를 절레 흔들고는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녹청의 나무는 탄생하는 모든 시간선을 줄기로 삼아 성장하고 우거져 갔다. 다정과 친애가 피워낸 싹이 아주 멋지게 자랐지. 모비우스는 언젠가 모두가 모여서 수없이 고민하고 벽에 부딪혔던 테이블 위에 걸터앉았고- 오늘 이른 아침, 졸던 트루디가 보고 있었던 서류 더미를 펼쳤다. 최근 인쇄한 듯 아직 잉크도 덜 마른 문서 몇 건. 제목은 아주 일관적이었다- 시간 방사능의 ‘스파게티화’와 베타 붕괴, 엔트로피 증대 법칙 연관성 증명. 시간 방사능 반감기 추론……. 하! 불현듯 맥없는 소리를 내고, 모비우스는 다시 트루디의 책상 위에 종이를 가지런히 돌려놓았다. 무언가 두고 오기라도 한 듯 곧바로 일어나 방호벽 밖으로 나서는 발걸음은 누군가 붙잡고 있기라도 한 듯 보일지 모른다.
30분이 더 지나서 모비우스가 돌아왔을 때 책상은 조금 전 봤던 그대로였고, 트루디는 화장실 다녀오느라 늦었으니 내일 마저 치우겠다는 말을 했다. 그 약간 붉어진 눈을 보고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의식적인 격려 다음에는 거절할 것을 알고도 묻는 도움, 그리고 가벼운 일상 보고가 이어졌다.
헌터 B-15는 언제나와 같이, 늘 변함없이 위협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예전보다는 분명 일에 여유가 생겼고, 잡아 오는 ‘변종’은 모조리 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변화였다. 지금은 함께하지 않았지만, OB는 지하 깊은 곳 그의 작업실로 돌아갔다. 여전히 기계와 기름 냄새가 가득한 공간이었지만, 때때로 친구들이 찾아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TVA의 새로운 가이드 북을 쓰는 표정이 제법 즐거워 보인다고 전해 들었다… B-15의 증언에 따르면 근래 본 중 가장 행복해 보이더랬다. 제일 알 수 없는 것은 실비였으며, 또한 그녀도 무엇을 하고 다닌다 가볍게 입 연 적이 없어 그들도 묻지 않았다. 좌우지간 그녀를 아는 이들은 어쨌든, 정말이지 그답다는 평을 내렸다. 이 모든 이야기에 대해, 트루디는 그 기분을 단 한 문장으로밖에 말할 수 없었다.
“정말 잘됐어요.”
삶의 논리를 부수고 찾아온 변화에 적응해 나가는 친구들의 모습은 서투르고 어색하기 짝이 없으나, 그 실수에 웃을 줄 알게 된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었으므로.
"정말로요."
도착한 식당은 적막이 맴돌고 있었다. 다른 지구의 그 가게가 궁금하다는 연유로 아무 세계의 문을 열어젖힌 결과였으며, 이 시간 이 장소에 겹치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는 사실을 확인한 뒤로는 그다지 신경 쓸 것도 없었으므로, 그들은 잠깐의 평화를 즐겼다.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웃으며 이야기하는 새 트루디는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사장은 젊은 멕시코계 여성이었고 카운터에는 졸고 있는 아르바이트 남학생이 있었으며- 가게는 단골손님 위주의 식당이 아니라 작지만 제법 번듯한 프랜차이즈 매장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주문하시겠냐는 졸음기 가득한 점원의 목소리에 트루디는 자연스럽게 웃는 낯으로 그들이 가장 자신 있어 했던 메뉴를 네 개 골랐다. 어떤 영웅들이 폐허를 뚫고 찾아와 주문한 바로 그것들이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맛은 최악이었다. 슈와마에 대한 실비의 평가는 대략 이러했다.
"-끔찍하군."
그러자 헌터 B-15는 변론했다.
"왜, 먹을 만한데."
그러자 실비가 이렇게 반박하고 나섰다.
"그건 당신이 매일같이 간단식만 먹고 출동하느라 입이 삔 거야."
"좋은 지적이야. 그 끔찍한 식단의 원인에 네가 아주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도 알지?"
"-그만, 그만!"
듣다 못한 모비우스가 손사래를 치자 테이블은 다시 고요해졌다. 잠시 트루디의 표정을 살피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사실, 본인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노부부는 그다지 자극적인 것을 선호하지 않아서 소스를 최소한으로만 넣고는 했는데 이곳의 사장은 흘러 넘칠 정도로 담아 주었으며, 양고기는 그나마 그들보다 덜 질긴 것을 썼다.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찌르자 전혀 다른 공간 속에서도 트루디는 과거를 기억했다. 그래, 조금 다르긴 하나 철제 의자는 여전히 어딘가 고장 난 듯 쇠 맞물리는 소리를 내며 천은 낡아서 때가 탔고, 벽에는 이스탄불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때 트루디는 현실로 돌아오고야 말았고, 그제서야 계산대 옆 액자에 담긴 것이 선물 받은 토니 스타크의 서명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족사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혀 달라!
그래서 음료 삼키는 소리와 포장용 종이만 바스락거릴 때, 트루디는 분명 이 상황, 어디선가 본 적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2012년의 뉴욕, 아마도? 길거리가 난장판이 아니고 시간은 저녁, 들려오는 음악은 어색한 침묵이 아니라 때늦은 캐롤과 신년 음악이니, 앉아있는 이들에게는 영웅의 이름이 없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겠다. 트루디는 문득 그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여기서 로키한테 물을 쏟았는데요.”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금 해?”
"해 드릴까요? 짧지만 전 그때 정말로 곤란했는데도."
맛없는 슈와마를 먹으며 제가 아닌 낯선 남자 직원이 일하는 가게에, 이번에는 가장 큰 테이블을 차지한 것이 영웅이 아닌 우주의 한 개인들인 시간 속에서— 트루디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궁금함은 결국 미련으로부터 왔다고, 그래서 잊지 못하고 괜찮은 척 바쁘게 살아도, 돌고 돌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로키의 옷에 물을 쏟았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으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블랙카드를 본 이야기를 할 때 친구들은 조용히 웃었고, 정말 트루디다운 일상이었다며 가볍게 놀렸다. 트루디는 대꾸했다. 그럼요! 실수를 여러 번 하면 다음에 그 손님들 얼굴만 봐도 부끄럽잖아요. 영웅들은 아침의 피곤한 단골들 얼굴에 나란히 둬도 될 만큼 익숙해졌는데,
"로키는 다시 안 오길래 그때는 그대로 잊어버렸어요."
뒷말은 김빠진 콜라로 밀어 넣었다. 만남이 이어지지 않았다면 그대로 영원히 잊었을 것이며,
"정말 한순간의 인연이죠?"
그러나 이어졌기에 되새겨진 기억이다. 다음 날 모비우스는 또다시 쳇바퀴처럼 직조실로 토마토 들은 리코타 치즈 샌드위치를 가져왔으며, 아무도 없이 빈 방을 보았다. 그리 오래 지나진 않았던지 방 안에는 서늘한 가운데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었고, 바람 쐬고 오겠다는 쪽지만 남은 채였다. 그래서 그는 다시 어제와 같이 조용히 방폭문 너머로 걸음을 옮겼고,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적색 안내문은 최근 일련의 비극을 너무도 많이 겪었던 이들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을 주지 못했다. 경고, 이 문 너머로 스파게티화 가능성 7,000배 상승…….
원래 네가 알던 나에 가장 가까운 게, 그 쭈글쭈글한 늙다리 마법사라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어? 그가 말했잖아, 수천 년 동안 널 잊은 적 없다고 말이야. 그건 네가 쉰 번을 더 태어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도. 이런 생각도 해 봤어. ‘나'는 널 안 것이 그 슈와마 가게에서의 한 번인데, 이기적이게도 타인의 너를 붙잡는 것이 아닌가…….
*
고전 속 영웅은 영원한 사랑을 했다.
*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세상이 하나의 책과 같다면 결국 모든 이들은 집에 돌아올 테고, 변함없이 아늑한 온기를 맛보며 의자에 앉아서 이렇게 말하겠지. ‘자, 이제 돌아왔어.’ 하지만 떠나기 전의 그 사람과 돌아온 그 사람은 같은 사람이 맞을까?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뒤의 나도 분명 무언가 바뀐 뒤일 텐데 말이지.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일을 보고 왔는데, 어떤 내가 정말로 네가 아는 나일까?
그렇게 아이는 어른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 어떤 위대한 존재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부모의 아주 작은 사랑 한 조각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을 때, 찾아올 내일의 만남이 당연하지 않게 되어 새삼스레 반가운 인사를 할 때. 기념일에나 보는 먼 친척들이 '넌 변한 게 하나도 없네!'라고 한다면 당신은 많이 변했다. 어느새 그들이 당신을 위해 무릎을 굽혀 인사해 줄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들이 '많이 자랐구나!'라 한다면, 바로 그렇다. 이제 당신은 그들을 안아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장난에 대하여, 인간은 이렇게 웃으며 대답할 수 있다.
"네, 오랜만이에요."
스텔라 트루디 우드는 조명에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향해 인사를 했다.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몸을 떨고는 머리를 온통 하얗게 물들였다. 차가운 눈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트루디는 살짝 웃고는 장갑을 낀 손으로 물방울을 살짝 쓸어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 연휴를 지나 마지막 주말을 보내는 이들의 목소리에는 온통 아쉬움이 가득했다.
모비우스가 왜 갑자기 나갔느냐 묻는다면 이 이야기를 해 줘야지. 아세요? 오늘이 마지막 크리스마스 연휴였어요. 좋아하는 날은 추억하는 장소에서 보내라는 말이 있잖아요. 하지만 어딜 다녀왔느냐 묻는다면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주 단순하게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트루디 우드는 가출을 했다. 아주 먼 곳까지 다시 한 번 여행을 떠났지. 시카고로 가서 박람회의 폐회식까지 자리를 지켜 보았고, 오클라호마의 맥도날드에 앉아 감자튀김을 먹어 보았으며, 언젠가 우스갯소리로 함께 보기로 했던 800년 주기의 혜성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뉴욕의 저녁은 언제나와 같이 도로가 막혀 경적 소리와 고함으로 가득했으며, 사람들은 바쁘게 저마다의 길을 걸었다. 그 가운데 오직 트루디만이 느긋하게 발을 옮겼고, 방향에는 경향성이랄게 없었다. 오로지 순간적인 마음에 걷고 싶은 길을 골랐으며, 분명 이것은 갈 곳이 없는 방랑자의 태도였지.
시간을 거슬러 걷는다. 그리하여 시간은 가을이 지나 겨울로 접어드는 마지막 날이 되었다.
"로키!"
무지함에 행복했던 세월이 눈앞에 있다. 트루디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고 깊게 내뱉었다. 새해 장식이 가득했던 거리에는 함께 보았던 호박 장식들로 바뀌어 있었다. 얼굴만한 호박 바구니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환하게 웃는 과거의 자신은 누군가의 이름을 외쳤고, 멀찍이서 손을 흔드는 로키는 언제나와 같은 그 평화롭게 웃는 얼굴을 했다. 그래- 언제나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비를 맞으면서도 해를 찾지 않았고, 먼 미래의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렸으며, 관계에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함께 있는 그 순간이 좋아서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천천히 와, 또 넘어질라."
다정한 목소리와 얼굴 너머의 그는 말하지 않은 중요한 것이 있는 사람의 얼굴을 했다. 발걸음을 옮겨 트루디는 할로윈 가면을 쓴 채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틈새로 파고들었다. 아직은 자신이 없었다. 인파 너머에서도 너무나도 그리운 시절의 목소리는 모든 소음을 뚫고 들려왔으며, 트루디는 다음에 또 같이 오자는 로키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려고 입을 다물었다. 색색의 폭죽이 터져 하늘을 물들이면 트루디의 눈은 실선을 남기고 꺼져가는 불꽃의 잔상을 따라 움직였다. 그것은 아주 잠깐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빛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 들 거야. 그러면 사람들은 그저 하늘만 볼 수 있겠지. 이 앞으로 스파게티화 가능성 7,000배 상승. 불꽃이 꺼질 때 과거의 자신은 다시 어둑해진 하늘을 보고 정말 아름다웠다 말했고, 지금의 트루디는 다시 한번 도망치기를 택했다. 이별의 계절은 언제나, 이상할 정도로 온난한 겨울이다.
떠돌이는 진창에 발을 디뎠다. 첫 번째 작별을 떠올렸으나, 인사를 듣지 못했으니 이별로 치지 않았다. 재회의 반가움은 오랜 친구를 만났을 때의 바로 그것이었으므로. 골목길 밖으로 걸어 나가면 언젠가 싸구려 레몬에이드를 사 마셨던 가판대가 방수천 덮 채 방치되어 있었다. 한 달 전 새로 페인트를 칠해 매끈해진 벤치에 걸터앉아 트루디는 멍하니 얼어붙은 잔디밭을 바라보았다. 지금이야 눈도 다 녹아버려서 아무도 없지만, 어느 겨울에 어린아이처럼 눈밭을 뒹굴던 적이 있었다. 흙으로 범벅이 되어 분명 엉망이었는데도, 그 때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 같아. 아마 모든 곳에서 온통 자랄만큼 다 자란 어른들이 눈을 던지며 놀고 있었기 때문일 테다. 여름에는 자리를 펼쳐 두고는 몇 시간씩 책을 읽었다. 문득 낮잠이 든다면 눈을 떴을 때 그늘을 드리우고 있던 익숙한 등이 있어서 웃음을 터뜨리곤 했지. 그는 셰익스피어를 읽었고, 별로 좋아하진 않는 듯 하지만 맥베스를 자주 읽었다.
─로키.
어느새 주위 풍경이 생기 넘치는 봄이 되어 공원에는 비눗방울이 떠다니고 있음을 트루디는 알아채지 못했다. 두 번째 이별을 떠올렸다. 10월의 마지막 날 그는 떠날 것을 예고했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뒤 지키지 않았으므로, 받아들이지 못했으니 작별이 아니다. 신은 겨울을 저주하며 떠났고, 트루디는 그때 로키의 목소리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눈 따위 내리지 않고, 추위 따위 느끼지 않고, 해 지지 않는 겨울날 되기를. 물론 그때야 그것이 라그나로크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노릇이 없었으므로 트루디는 그저 걱정이 과하다며 웃어넘겼으나, 이제사 생각해 보면 그건 재회에 대한 염원이기도 했다. 그해 초겨울은 학자들이 이변을 우려할 정도로 따뜻했고, 중순으로 접어들자 기록적인 한파가 불어닥쳤다. 그제야 트루디는 기억해냈다. 종말의 계절은 영원한 겨울이었다. 로키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트루디는 언제나 모르는 채로 남아 있었고 그렇기에 행복한 일상이었다 추억할 수 있었으므로, 결국 나의 행복은 다시 한번 당신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
─모르겠어요.
내가 당신의 결의를 그저 슬퍼해도 되는 건가요? 트루디는 방호벽 너머로 던지지 못하고 영원히 마음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그 질문을 내리눌렀다. 가시가 돋쳐서 삼켜내 없애지는 못할 것 같아. 나는, 당신에게 무엇이었나?
스텔라 트루디 우드는 집으로 돌아왔다. 침실 입구부터 정리되지 않은 침대와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잠옷이 눈에 띄었다. 출근하기 바빴나 보지? 협탁 위에 놓인 캘린더를 들여다보았다. 2024년의 1월. 적막이 흐르는 불 다 꺼진 집은 여전히 누군가 살아가고 있던 시기의 바로 그 집이었다. 시계는 오후 여섯 시를 향해 있었으나 주인은 돌아오지 않겠지. 이 시절은 일이 워낙 많아 바쁘기도 했지만, 일부러 서점에 간다, 쇼핑을 한다 하며 늦게 들어오곤 했으니. 트루디는 손바닥만 한 액자를 들어 올렸다. 사진 귀퉁이에 몰래 적어 놓았던 메모가 보였다.
【하지만 로키는 언제 어디서 찍어도 완벽한데도요! 2014.08.25】
몇 번이나 쓰다듬었는지 코팅은 이미 마모된 지 오래인 나무 액자 사진 속에서, 로키는 웃고 있었다. 이 시절을 안다. 학업을 핑계로 카메라를 새로 바꾸고 나서 사진을 찍고 싶다 고집을 부려 거리로 나섰는데, 앞서 나간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 뒤돌아본 그 찰나! 그 순간이 왜 그리도 좋았는지, 트루디는 곧바로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잔소리가 따라온다─ 사람 이렇게 많은 데서 화면만 보고 다니면 안 되지. 저절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 트루디는 가볍게 웃으며 있던 자리에 액자를 돌려놓았다.
─트루디, 나는 인사를 잘 못 해.
툭. 무심코 액자로 쳐서 검은색 양장 수첩을 떨어뜨리면, 트루디는 잠시 펼쳐진 장을 바라보고는 들어 펼쳤다.
─약속도 잘 못 지켜.
언젠가 수도 없이 많이 읽었던 문장을 마주하면, 그대로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만 어디서나 널 보고 있을 거야.
이해하는 것이란, 그리고 이해받는 것이란- 알아가는 그 모든 과정은 말하기는 쉬우나 얄팍한 마음가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딪히며 발견하는 모든 부조화를 받아들여야 하며, 짧은 평생 쌓아 올린 정상성을 지워 나가는 과정이란 것은 분명 결심이 필요한 일이지. 지난 십몇 년, 숱하게 버텨낸 것이었으나 때로 힘에 부치기도 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며 익숙해지고 핑계를 만들어내는 일에 노련해지며, 꼬리표가 따라붙음에도 즐거이 웃어넘기는 방법에 통달함은 결국 괴짜의 증명이었다. 트루디는 기꺼이 자신을 수식하게 된 그 명제를 받아들였다. 또한 그러므로, 한 번 깨달았다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었다. 수없이 읽었던 그 작별 편지에, 이제서야 트루디는 그 진심을 깨달았다.
─만약 내가 너무 늦게 돌아가게 된다면, 그때도 날 붙잡아줄 거야?
"로키는 항상 말도 안 되는 곳에서 나를 붙잡아요."
─…그리고 무슨 책에서 봤는데, 아무튼 골고루 잘 챙겨 먹는 게 좋다는 거야. 그리고 버섯은 꼭 데쳐서 먹으라 했고. 조개는… 탈이 잘 난다니까, 이건 뭐. 있지, 식사 잘 챙겨. 건강해야지. 나 없다고 또 냉동식품만 먹을 건 아니지?
트루디는 그 가지런한 글씨들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이 짧은 생을 사랑한 당신, 나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이 있었어요. 시간이 많을 줄 알아서 묵혀 둔 감정들은 침전되어 있을 뿐이었어. 파도가 치니 떠올라 버렸으니 다시는 숨길 수 없다. 그런데 숨죽여 토해낼 수밖에 없다면 그 바다가 메말라 없어졌고, 그러므로 나는 그저 황량한 소금밭에 홀로 남았을 뿐이었으므로. 땅은 움튼 씨앗을 피우려 할 테지만 만개하지 못하고 말라 없어질 테지. 비 온 뒤의 소금 사막에서 춤추며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때로 그곳이 한때 바다였으며, 이젠 없어진 대양(大洋)을 그리워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는 했다.
"제가 존경하는 어떤 영웅이 그랬는데요, 그 흔적까지 내 삶이라 받아들이면 편하다고 했죠."
수년 전, 한 영웅은 제게 열쇠 문고리를 돌릴 용기만 있다면 결국 해낼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세상의 끝이 우주였기 때문이었고, 인간이 결국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을 미래가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의 틈새에서 본다면,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장난처럼 느껴지는 거야. 아르키메데스는 이 우주를 모래알로 채우는 것을 가정한 적이 있었다. 본질, 그 모래알 하나가 모두 누군가의 우주였다. 다나오스의 딸들은 밑바닥 뚫린 항아리에 영원히 물을 채워야 했다. 시시포스는 영원히 산꼭대기에 돌을 올려야 했으며, 시긴은 영원히 뱀의 독을 받아내야 했다. 그래서 트루디는 그때, 그저 맛없는 슈와마를 베어 물고는 그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잊지 못했죠.
"그럼 내 생각에, 나는 여전히 옥상까지 올라가서는 문을 못 열어서 앉아있지를 않았나 싶던 거예요."
문을 열었더니 또 다른 계단이 생기고 말았으니, 언제까지 올라가야 하늘을 볼 수 있을까? 800년 주기의 혜성을 이제 나는 볼 수 있음에도 당신이 없다면 그 살별이 녹아 사라지기 전,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겠는가? 모든 곳에 메아리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잔향 가운데, 손끝에 닿을 당신은 어디 있나요?
"나는 미련없는 척하면서 결국 미련으로 여기까지 온 거니까요."
그래, 바로 그랬다! 사랑을 하면 인간은 머저리가 된다고 하질 않던가, 최악의 선택을 하는 이유는 사고(思考)를 마비시켜서 그래. 그래서 그게 사고(事故)로 이어지고 만다. 그러니 비관주의자들이 사랑이랑 허상이라 피력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인간의 감정이란 건 모두 변하고 만다며. 하지만 어떤 것은 변하지 않았다. 어떤 나긋나긋한 노부부들은 다른 시간 속에서, 식당은 아니지만 서점을 했고 여전히 사이가 좋았으며, 창문 너머로 눈이 마주쳤을 때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도 친절한 눈으로 인사를 했다. 날씨가 참 좋지, 아가씨? 사실 그 말에 트루디는 거의 말문이 막혔는데, 다른 삶 속에서도 여전한 그들의 다정함과 함께하는 사랑이 너무나도 밝아 보인 탓이다. 그래, 그 날들─ 날씨가 너무 좋았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오니, 그것은…….
"정말 멀리 왔어요."
그렇다면 사랑한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바보일 테다. 요컨대 그가 어제 먹은 피칸 파이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이유로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리본 묶인 디저트 상자를 들고 오는 일— 절대로 한 번이 아니었지, 아마? 트루디는 웃었다. 장소가 바뀐다 해서 일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TVA의 어느 하루를 기억해냈다. 자판기에서 파이를 종류별로 하나씩 사서 시식 평을 내리는 두 사람을 보며 모비우스는 슬쩍 하나를 집어 갔고, 실비는 어처구니없어했고, OB는 동참했으며, B-15는 역시 제정신이 아니라는 한숨을 쉬었다. 추억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사랑하지 않고서야 떠올릴 수도 없는 것.
사랑이란, 결국 모든 곳에서 그 사람을 읽어내는 법을 아는 것.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이미 누군가가 아니고서야 설명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모든 시간에서 함께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트루디는 드디어 결론을 적어낼 수 있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사랑한 모든 시간을 추억하며, 그 어떤 추억의 끝이라도 내 삶이었다 받아들일 수 있으므로─ 종래에, 당신이 나를 보고 있으리라 믿는다. 당신이 나를 보고 있음을 안다. 인간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멀리 왔어. 그래서 되돌아가기엔 아쉬워요. 더 나아가기엔 두려워요. 하지만 그 여정을 사랑했으니 멈추는 건 원하지 않아.
“로키.”
난 이제 기다
리지 않을 거예요. 모든 시간의 너머 그토록 그립고, 사랑하는 목소리는 언제나 스스로 걸어 들어간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이번에야말로 기꺼이 스스로 모래를 손 틈으로 쏟아내 돌려보내기를 선택한 이는 바다를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을 테니. -아! 그렇지만 말이야, 나는 단지 신발 속에 흘러 들어간 모래알과 같은 존재가 되어도 좋아. 털어내도 영원히 일부는 거슬리는 채로 남아 있을 테니까. 누군가는 짜증을 낼 수도 있지만, 나는 로키가 분명히 웃으며 추억하고 있으리란 걸 믿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모든 시간의 당신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드디어 문밖으로 과거의 자신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한 사람, 비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둘이 종종 먹곤 했던 갓 구운 미트 파이의 냄새가 났다. 트루디는 탁자 위에 놓여 있었던 병뚜껑을 하나 챙겼다. 바다에 왔다면 깨진 조개껍데기를 주워 기념품 삼자. 내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찾는 사람이 이곳에 없으니, 이제는 스스로 움직여야 해. 수첩은 왼쪽 포켓에 넣고는 두어 번 두드렸다. 사랑하는 이의 편지는 결국 먼 길을 돌아 제대로 전해졌다.
“기다려 줘요."
템-패드의 문을 연다. 너머로 발을 옮겼다. 언제나처럼 기름 냄새와 녹슬어가는 쇳덩이들이 가득한 곳에서, 트루디는 익숙한 얼굴을 찾아냈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많이 로키를 알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 전에 가져다줬던 케밥은 맛있게 잘 먹었어요! 모비우스가 많이 걱정하던데요. 어딜 다녀왔어요? 반갑게 인사하며 가볍게 허공으로 렌치를 흔들어 보이는 이에게- 트루디는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OB, 내가 로키가 배운 것들을 배우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이미 내 전의 누군가 들었을 대답이 돌아왔다.
"수십 년이죠."
하지만 고민이 전부 무색하게도, 너는 언제나 나를 찾아내고 말아.
*
영원한 지지자란 축복일 테다.
*
수백 년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일평생 인간은 다 읽을 수 없다고 여겨지는 양의 책을 과거에 읽었고, 제 살던 시간의 난제가 풀리는 것을 미래에서 보고 왔으며, 그러므로 현재의 삶이 모든 시간이니 햇수를 셈에 의미는 없었다. 때때로 OB의 작업실로 시간을 걷는다면 토론을 하는지 공부를 하는지, 고양되어 있는 로키의 목소리가 들릴 때가 있었고 그럴 때면 트루디는 잠시 가만히 서서 그 그리운 소리를 듣고는 했다. 목소리가 멈추고 템 패드의 불빛이 사그라들면 그제야 어둠 속에서 나왔다. OB, 로키가 방금 무슨 결론을 내리고 갔는지 저한테 알려주실래요? 한참 걸려도 괜찮아요, OB가 바쁘지만 않다면.
가벼운 구둣발 소리와 함께 선물용 과일 바구니가 흔들린다.
인고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트루디는 답을 얻었다. 시간 방사능을 뚫고 당신을 만나러 가는 방법.
친가족처럼 닮은 이를 막아 세우는 사람은 없다.
답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모든 우주, 모든 삶에 시간 방사능은 언제나 극소량씩 존재했다. 단지 그 우주들을 하나로 묶어 직조기에 돌리고 있었으니 당연히 그것들 또한 무한히 증식했고, 공간 전체가 보이지 않는 죽음을 품게 되었다. 시간 방사능은 곧 세월이었다. 인간은 늙어가며, 병들고, 흙이 되어 되돌아갔다. 그러니 시간 방사능의 영향에서 벗어나겠다는 목표는 사실, 이미 그러고 있었다─ 세상에서 유령 같은 존재가 되면 끝나는 일이었어. 마치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고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 TVA처럼. 시간의 틈새라는 게 무엇이지? 이 공간 전체가, 여기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이미 우주를 속여내고 있었던 거야. 늙어 죽지 않으며, 병들지 않고, 이곳에서 영원하므로.
가설. 그러므로, 세월 그 자체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면 그만이다.
1996년 5월 2일, 시애틀. 아기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여자아이, 검은 눈이 이쪽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안내해 준 간호사가 웃으며 말을 걸어온다. 조카분이 정말 귀여우시네요, 좋으시겠어요! 트루디는 웃으며 대답한다. 저 애는 잘 자랄 거예요, 분명 그래서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게 될 거예요. 영원히.
그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신생아실과 가장 가까운 병실에는 두 사람이 잠들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새 기억 속에서 주름이 박여 있었던 그 얼굴들은 너무도 젊었으며, 트루디는 이제 자신을 영원히 잊을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어머니와, 의자에 앉아 잠든 아버지. 맞잡은 손은 떨어지지 않을 듯 단단했다.
"엄마."
속삭이는 목소리는 허공에서 흩어져 사라진다.
"아빠."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다. 트루디는 테이블에 과일 바구니를 올려놓고는 다시 문밖을 향했다. 문이 닫히기 직전 나즈막한 잠꼬대가 들렸고, 트루디는 참지 못하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건강하세요.
그래, 영원히. 다시 잠깐의 시간이 흘러 지금에 이른다. 트루디는 창문 너머 간호사가 안아 들어 보여주는 그 애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저 해맑게 웃고 있던 아기는 어느새 잠이 들었고, 작은 손은 주먹을 꼭 쥔 채다. 트루디는 속삭였다. 안녕, 너도 알겠지만 그 인생은 정말로 아름다웠어. 그래서, 이 삶에 아무런 후회도 없어. 영원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나는 이 순간까지 영원히 가져가게 될 거야. 그리고, 타임스틱을 들었다.
"넌 그 모든 시간에서 행복할 거야."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아기. 조금 전까지 웃고 있었지만 어리둥절한 채 용건을 묻는 간호사, 이름표도 없이 텅 비어버린 아기침대를 보고 트루디는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웃으며 고개를 젓고, 트루디는 병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릴 정도로 맑은 하늘이 기다린다. 난 로키를 만나러 갈 거야. 닫힌 문을 열러 가리라, 열쇠가 없다면 내가 바로 열쇠공이 되자.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상관없다. 수천 번 다시 문을 열어서라도 그 끝없는 길을 다시 걸어 올라갈 테니. 발이 움직인다는 것은 어디로든 가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어? 영원히 메아리를 듣게 된다면, 영원히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위안으로 삼아야지. 결국 그 끝에 길을 찾게 된다면… 두께 12cm 납유리 너머. 트루디는 언젠가 로키가 그러했듯,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철제 문을 열어젖혔다.
"아."
보라, 눈앞에 펼쳐진 세계수는 그저 따뜻한 빛을 뿜어낼 뿐이지 않니.
"로키!"
트루디는 제가 우는지, 웃는지도 알지 못했다. 방호복 한 겹도 없이 외우주를 걷고 있는데, 트루디가 느낄 수 있는 건 단지 하나뿐이었다. 끊어진 길 너머로 달려가면 다정한 녹빛 환영이 들판을 만들어 발을 띄워 주었다. 영원을 달려가며 트루디는 수십 번 그 이름을 외쳤다. 지평선 너머로 그가 보인다. 진리에 도달한 필멸을 위해 열린 틈새로, 트루디는 마침내 그 계단의 끝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로키!"
"…트루디."
말문이 막힌 듯, 터져 나온 목소리는 정말로 형편없었다. 어떤 것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당신은 언제나 내가 갑자기 달려오면 깜짝 놀란 눈을 했고, 잠시 침묵하고는 그렇게 서두르지 말라고 했어. 안긴 품을 서늘한 온기가 맞이한다. 마침내 신의 보폭을 따라잡은 인간을 보며,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은 숨이 막혀서 듣고 싶었던 그 목소리를 들려주지 못했다. 하지만 트루디는 이제 기다릴 수 있었다. 이름을 한 번 더 부르면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이 있었다.
"그렇게 빨리 달리지 말았어야지."
책의 마지막 문장을 장식하자. 마침내 그들은 세상의 끝을 보았고,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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