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휴식
일주일 정도 머무른 이 방이 이제는 집 같이 느껴집니다. 룸메이트와 같이 사는 방도 이 주일만에 적응했으니 이상하진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SNS를 켰습니다. 맞다. 안 되지. 어쩔 수 없네요. 이어폰을 끼고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한 시간짜리 음악 모음을 틀었습니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눈만 잠깐 깜빡였는데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멈췄습니다. 커튼 너머 날씨는 여전히 우중충했습니다. 옷을 갈아입으며 풀어둔 워치는 아침 열 시 반을 알렸습니다. 기절하듯 잠든 모양입니다.
여기 온 뒤로 너무 빡빡하게 돌아다녔나? 하지만 원래 내 일상도 빡빡합니다. 학교 수업 끝나고 도서관 가서 공부하고, 운동하고 과외 돌리고 열한 시에 귀가. 이걸 멀쩡하게 소화하는 내가 지난 이틀 정도의 행적으로 지칠 리가 없어요. 잠탱이가 되려고 이러나.
마루에 걸터앉아 바깥 공기를 실컷 들이마셨습니다. 깨끗하다. 속이 뻥 뚫리는 느낌입니다.
날씨가 무서우리만치 엉망입니다. 앞으로의 날씨도 알 수 있으면 참 좋은데... 참. 예보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을까요? 휴대폰을 켜 인터넷을 두들겼습니다. 그냥 검색으로는 잘 안 나오는군요.
이럴때는 포털사이트 미리내가 최고입니다. 누가 우리 대학 모기업 아니랄까, 포털사이트 중에서도 논문이나 학술자료가 될만한 것들을 제일 잘 정리해뒀어요. 날씨 정보는 이 시절에도 신문을 통해 퍼트렸겠죠?
신문 데이터베이스를 켜고 깨달았습니다. 지역신문 없었지. 있어도 나 한자 못 읽어. 현대인들에게는 번역기가 있지만 한자에 사용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현대인의 방식으로 정보 얻을 수 있다고 좋아했는데 번거롭게 되었네요. 휴대폰을 집어넣고 기지개를 쭉 켰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처마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누군가 문 밖에서 인사를 건넸습니다. 식당에서 만났던 사람입니다. 밥을 더 챙겨줬던 사람 중 요리사 같아요.
"네. 늦게 일어났죠?"
"배고프시겠다. 식사 챙겨드릴게요."
"아니에요! 제가 늦게 일어났잖아요. 밥 두 번 차리는 것도 일이에요."
작은 소녀가 고개를 젓고 저를 식당으로 데려갔습니다.
"주인님께서 아시면 경을 치셔요. 어서 들어오세요."
"... 아침에는 많이 못 먹습니다. 조금만 부탁드려요."
"그럼요. 아침 드시는 모습 봐서 압니다."
떠밀리듯 식당으로 왔습니다. 식탁 위로 밥 반 공기와 간단한 나물 반찬 두어 가지가 나왔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매번 식사 시간을 기대하고 있어요."
"저도 오랜만에 잘 먹어주는 사람을 만나서 기뻐요. 주인님과 도련님은 반응이 재미없다니까요."
소녀가 투덜거리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습니다.
"처음에는 제 요리를 좋아해 주셨는데 요즘은 시큰둥하세요."
"사람은 참 교활하잖아요. 익숙해지면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좋은지 잊어버려요."
젓가락으로 나물을 몇 번 집어 먹었습니다. 진짜 맛있다.
"어때요. 오늘도 마음에 드세요?"
"그럼요. 여기 계속 눌러앉아서 매일 먹고 싶을 정도에요. 대체 어떻게 만들었어요?"
"다~ 비법이 있지요. 비밀입니다."
주근깨가 핀 얼굴에 미소가 걸렸습니다.
"실력 좋은 요리사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김영자랍니다. 여기서 사 년 일했어요. 아가씨 이름은 들었어요. 외국인이라면서요? 어떻게 그렇게 조선어를 잘해요?"
"어머니가 조선 사람이세요. 그래서 열심히 배웠답니다."
검은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습니다. 그것도 잠시. 뒤에서 누군가 호통을 쳤습니다.
"너, 아가씨 밥 먹는데 자꾸 방해할 거야?!"
지난번에 식당에서 장난치던 아저씨군요.
"하여간 깐깐해..."
영자가 입을 삐죽 내밀더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다 먹은 식기는 가져다 둘까요?"
"그냥 자리에 두세요. 제가 치울게요."
아침에 선우와 사람들 식사도 챙겼겠지요? 일 두 번 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인사하려 했는데 영자가 후다닥 사라졌습니다. 그릇을 깔끔하게 비웠습니다. 나물 어떻게 무쳤지? 떠나기 전에 방법을 배우고 싶어요. 식탁 한쪽에 식기들을 모아놓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밖에서 호통쳤던 아저씨가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혹시 오늘 나갈 일이 있으십니까?"
"날이 이래서 돌아다닐 수는 있으련지..."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매서운 소리를 냈습니다.
"주인님께서 아가씨 얼굴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지금 시간 괜찮으시다면 차나 한잔 하시지요."
"물론입니다. 집주인은 도련님의 부모님이신가요?"
아저씨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안주인께서는 도련님이 미리견에 나가기 전에 돌아가셨고, 어르신은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선우가 왜 학업을 마치기도 전에 한반도에 돌아왔는지 이제 이해가 되는군요.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바로 세현으로 달려왔구나.
"지금 집 주인은 도련님의 누님입니다. 놀랍지요?"
한 지역을 호령하는 지주 집안이라면 장자 상속의 원칙을 철저히 지킬 법도 하건만.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축복인 시대 아닌가요.
"가풍이 정말 진보적이군요."
"도련님도 뛰어나지만, 아가씨... 아니. 주인님께서는 더 뛰어나면 뛰어났지 모자라진 않으셨습니다."
아저씨가 껄껄 웃었습니다. 표정에서 많은 감정이 엿보였습니다.
"좋은 분이신가 봅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 선생님 아니십니까. 도련님도 아가씨가 후계자가 된다는 사실에 이견이 없으셨습니다. 그때는 잘 이해가 안 되었는데... 도련님과 어르신은 주인님이 이렇게 성장하실 거라고 알고 계셨겠지요."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숨길 수 없는 재능이 있으니까요.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을 겁니다."
"예. 어르신께서는 그런 것들을 참 중히 여기셨답니다. 저희 같은 종들도 재능이 보이면 망설임 없이 지원해주셨지요. 뛰어난 것이 없어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자들을 위해서 공간까지 만들어주신 분입니다. 그러니 주인님의 재능이 얼마나 잘 보였겠습니까."
더 말을 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돌아가셨다는 전 집주인이 처음 수많은 서적들을 매입했다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교육자의 자질을 타고났을지도 모르겠군요. 세현 윤씨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교육 관련으로 지역사에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정말 궁금했습니다. 집안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예성 현 씨 집안의 이야기는 오리엔테이션부터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세현의 발전사는 곧 이 집안의 행적과 궤를 같이 해왔으니까요. 개항기가 시작된 이후 몰락할 때까지. 세현에서 윤씨 집안의 입지는 정말 절대적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고 가세가 기울었지만 당시 지역민들의 지지가 압도적이었던 덕분에 일제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이토록 굳건하던 집안이 무너졌을까요.
'이런 일이 벌어질 정도의 죄목은 독립운동밖에 없지 않나요?'
'타당한 지적입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실제로 동생은 봄에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순국했습니다. 문제는... 동생 체포 이후 당시 집안 주인의 행적이 모호해요.'
예전부터 궁금했던 사람의 얼굴을 곧 볼 수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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