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경계 속 이방인
식사를 마친 선우와 가게 밖으로 나왔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번화가는 번화가인데 평소보다 순사들이 많았습니다. 상당수가 무기를 차고 있었습니다.
"아침에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곧 배가 들어올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네."
"해미에서 출발한 기차가 도착할 때가 되면 경계가 올라갑니다."
해미. 현대에는 예성시의 남부를 장식하고 있는 자리입니다. 옛날부터 남부지방의 항구도시로 기능해왔다고 수업 시간에 들었습니다. 현대에도 제주도와 중국, 일본으로 향하는 배가 정박하는 항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는 중간 기착지가 아닌가요?"
세현은 넓은 평지 지대에 위치한 가장 큰 지역입니다. 위치 조건도 좋은 편이라 이 일대에서 한반도 중앙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입니다. 그래서 예성시에 포함된 지역에서 대전, 서울로 향하는 길과 철도는 옛날에도 세현 외곽을 지나갔다고 합니다.
"보통은 항구 인근 보안이 강화되잖아요."
"항구에 배가 들어오면 세현에도 사람이 늘어납니다. 그 틈을 타 많은 일이 벌어지지요."
선우가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많을수록 사건사고도 늘어난다는 말이군요. 하지만 설명을 들어도 과잉 대응 같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정도의 대응에는 이유가 없을 수 없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서 해드리겠습니다."
선우가 단칼에 말을 잘랐습니다.
"이제부터 뭘 하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생각 안 해봤는데. 흠... 기차가 들어온다고 했죠. 사람 많은 곳만큼 구경하기 좋은 곳도 없습니다.
"역으로 가볼까요?"
"그러고보니 가방을 잃어버렸다 하셨지요."
참. 처음에 짐을 잃어버린 척 했었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경성에서 출발한 기차가 곧 도착할겁니다. 경성역에서 짐을 발견했다면 돌려보냈을지도 모릅니다."
타이밍이 좋았네요. 신분증도 없으니... 잃어버린 짐 속에 있다고 하고 찾아다녀야겠습니다. 눈 때문에 나에 관한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으니, 순사들 있는 곳에서 짐이랑 여권을 찾으러 다니면 잃어버렸다는 사실도 퍼지겠지요.
"그 생각은 못했어요. 고맙습니다. 찾아봐야겠네요. 도련님은 뭐 하실거에요?"
"저도 역으로 갑니다."
"일이 있으신가요?"
"예. 누님께서 병원에서 쓰실 물건이 오후 기차로 올겁니다."
오늘은 기막힐 정도로 동선이 겹치는군요.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선우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열아홉입니다. 당신은요?"
"스물하나 입니다.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니 말은 편하게 해주십시오."
먼저 말을 꺼내주니 감사하네요. 안 그래도 아가씨라는 존칭이 너무 불편해서 말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반가운 소리예요. 나도 이름으로 불러줘요. 아가씨라는 호칭 낮간지럽습니다. 말도 편하게 하시고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안될 리가 있어요?"
"말에 가시가 박혔다는 평가를 많이 들어서...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뭐. 이런저런 유형 다 있으니까요. 음… 미리 말씀드리자면. 전 반존대가 입에 붙어서 말을 다 놓지는 못해요. 버릇이라가지구."
말을 먼저 꺼내기는 했지만 내가 먼저 반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거부감이 들어요. 나는 몇 년의 시간이 우리 사이에 놓여있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혹시나 해서 하는 소리지만, 편찮냐? 같은 말은 안 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발언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놀랍게도, 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말 편히 하시죠. 저도 놓으려 해볼테니까요."
선우가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습니다.
"듣고 보니 나는 별것 아닌 것 같네."
선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어?"
"어디서 듣기는. 언어 배우던 사람들이 덜 배워서 벌인 실수죠. 처음 나온 뒤로 같이 노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쓰는 농담으로 자리 잡았어요."
사실은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 한때 돌았던 이야기지만요.
"배우다 보면 많이들 그러지."
웃음기를 띈 시선이 내 손으로 향했습니다. 이거?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들어 보여주었습니다.
"카메라? 내가 아는 것보다 렌즈가 크네."
"공학에 재능있는 친구가 개조해줘서 그래요. 크죠?"
"기영이 형이 보면 좋아하겠다. 항상 들고 다녀?"
"항상은 아니고, 얼마 전부터. 지난번에 꽃놀이 다녀오고 나서 깨달았거든요. 카메라를 떼어 놓으면 사진 포인트를 놓칠 수도 있겠구나."
"강변이 마음에 들었구나? 찍고 싶으면 한 번 더 다녀와. 얼마 뒤면 꽃도 다 질 거야."
조금 걸었을까요? 크게 지어진 건물이 하나 나왔습니다. 여기가 역이군요. 건물 뒤편으로는 철길이 놓여있었습니다. 일제시대에 깔았다는, 해미와 세현을 연결하는 기찻길이겠지요. 현대에서는 이 철길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음. 보이는 것마다 현대에서 못 보는 것들인데, 그 이유가 죄다 한반도 현대사의 비극이군요. 기분이 참 복잡합니다.
선우와 잠깐 갈라졌습니다. 역에서 보관하고 있던 분실물을 살펴보고, 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가방을 보았나 물어보았습니다. 내가 말한 모습의 가방은 못 봤다는 반응만이 돌아왔습니다. 당연하죠. 난 가방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까. 진짜 잃어버렸어도 이틀가량이 지난 시점에서 찾을 가능성은 0에 수렴했을 터. 진짜 가방도 그런데 실존하지 않는 물건은 어떻겠어요?
직원들에게 물어물어 가방을 찾는 척 돌아다니다, 포기한 척 의자에 걸터앉았습니다. 이쯤 되니, 역 경비실에 있던 순사들은 포기하는 게 빠르다는 눈치를 보내는군요. 하. 됐다. 당분간은 검문에 걸려도 잃어버린 가방에 있었다고 훼이크 치면 되겠어요. 바삐 돌아다니느라 조금 지친 정신과 몸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역 밖으로 나가려다 이상한 광경을 발견했습니다. 역 한구석에서 양장을 입은 여인이 짐을 잔뜩 둔 채 순사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여인의 얼굴에는 불쾌함이 가득했습니다.
"問題ないですよね?(문제없죠?)"
순사들이 찜찜한 표정으로 돌아섰습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못 알아들었지만, 순사들이 저 여성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겠네요. 짐 검사라도 했을까요? 순사들이 떠난 뒤에야 여성이 굳은 표정을 풀었습니다.
새삼 깨달았습니다. 잘도 이 살벌한 경계 속에서 돌아다녔구나 이 휘. 외국인인 척 다니고 있어서 안 걸렸을까요? 짐이 없어서 검문에 안 걸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검문은 끝났습니까?"
여인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 방금 끝났다."
여인이 편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지나가려던 순간 선우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가방은 찾았어?"
"놉. 없대요."
고개를 저었습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포기해야겠다."
"역 직원들도 그렇게 말했어요. 사람 생각 다 똑같다니까?"
살짝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아는 사이인가?"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제가 데려온 사람입니다."
"집에 머물고 있다는 이질적인 손님이 이 사람인가?"
"네. 동네에 소문 다 퍼지신 그분입니다."
여인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흥미로운 기색이 갈색 눈동자에 퍼졌습니다. 비슷한 결의 분위기, 닮은 외모...
"가족인가요?"
"맞아. 우리 누님이야."
선우가 선선히 대답했습니다.
"그동안 인사도 못했군요. 며칠 일에 시달리느라 꼴이 말이 아니었던지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치고는 매우 쌩쌩해 보였습니다. 시험 기간 끝난 나보다 훨씬 멀쩡해 보이는데요?
"통성명은 나중에 여유로울 때 합시다."
여인이 웃으며 옆에 놓인 상자 둘을 눈짓했습니다.
"옮겨야 되나요? 도와드릴,"
"전부 의약품이라 조심해서 다뤄야 합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선우가 뒤늦게 달려온 짐꾼과 함께 큰 상자를 들고 역 밖으로 나갔습니다. 여인이 눈인사를 남기고 남은 상자 하나를 들고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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