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대학생이 과거에 빠진 이유

10. 허술함

아침이 밝았습니다. 지갑 속 골드바 두 개를 챙겨 번화가로 내려갔습니다. 혹여나 이방인이라 사기치는 곳이 있을까, 발품을 팔며 몇몇 가게를 돌아다녔습니다. 가장 높게 쳐주는 곳을 찾아 현금으로 바꾸었습니다.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군요.

왜 정가 제도가 생겼고 명확한 단위가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사기 안 당하려니까 힘들어! 소매치기 피하려 신경 기울이는 것도 일이야!

현대사회 만세다. 당연합니다. 쌓아온 시간이 몇인데. 나아진 것이 없으면 미친 세상이죠. 기껏 발전시킨 것을 퇴보시키려는 사람들의 존재를 감안해도... 이건 아니구나. 돌려놓으려면 몇 십년은 순식간에 돌아가지. 그런 사람들은 그냥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어느 찻집에 들어갔습니다. 메뉴판에 뭐가 많군요. 간단해 보이는 식사류도 있었습니다. 먹고 싶은데 지금 기운이 너무 없어요. 못 삼키지 않을까요? 무난해 보이는 차 한 잔만 시켰습니다.

"왜 그리 힘이 빠져있습니까?"

"현금 만들려고 금은방 다녀왔어요... 어?"

아는 사람 목소리... 여기는 무슨 일로 왔을까요? 고개를 들었습니다. 선우가 맞은편 의자에 막 앉았습니다.

"어쩐 일이에요? 집에 있을 줄 알았는데."

"종종 식사하러 오는 곳입니다. 환전이 필요하다고 말씀해주셨다면 괜찮은 곳을 알려드릴 수 있었습니다만."

"자질구레한 일까지 도움 받으려니 너무 미안해서요."

"별 것도 아닙니다만."

"잘 곳을 마련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걸요. 거기에 옷까지 빌렸고..."

찻집 종업원이 차를 내왔습니다. 주문한 적 없는 식사 메뉴도 같이 나왔습니다. 난 시킨 적 없으니 선우의 몫이군요.

"자주 먹는 메뉴인가요?"

"아니요. 올 때마다 주방장 추천대로 먹습니다."

주방장 추천이라. 난 뭐가 나올지 몰라 도전 못 해봤습니다. 선우는 가리는 음식이 딱히 없나 봅니다. 차를 식혀가며 세 모금을 마시고 나서야 정신이 좀 들었습니다.

"체력이 약하십니까?"

"공부하면서 다 떨어졌어요."

한숨을 쉬었습니다. 사실 반은 거짓말입니다. 대학 들어오기 전에는 체력이 꽤 좋았습니다.

"한밤중 등산은 일도 아니었는데... "

수능 끝난 고삼이 정점이었죠. 한밤중에 산 속에 들어갔다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고 소동을 벌인 뒤에도 가볍게 돌아올 정도로. 결과적으로는 산까지 내려간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저는 예화대학교 의대에, 내 사촌 유진이는 연세대 정치외교과에 합격했으니까요. 일탈을 저지른 값으로 둘이 같이 부모님들께 혼나기야 했지만, 합격했으니 됐죠!

체력없다며 쓰러진 유진이와 달리 산을 돌아다녀도 아무렇지 않았던 내 체력은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사라졌습니다. 당연합니다. 신입생이라고 행사란 행사는 다 참여하고 놀았으니까! 시험 기간에는 밤샘을 일삼았고! 사람들은 이런 것을 자업자득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몸이 힘들다고 파업 선언을 안 해서 다행이군요. 다시 키울 생각을 하려니 막막하네.

"휘 아가씨."

"네?"

"조선 밖에서 살아온 시간이 길었나 봅니다."

선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습니다.

"...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지금은 거의 다 사라졌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호랑이가 조선의 산에 살았습니다."

호랑이... 맞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있던 모든 호랑이가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지금 내가 있는 시간으로부터 몇 년 전인가 봅니다.

"밤중에 산으로 들어간다는 건 죽겠다는 의미지요. 조선에서 살았다면 모를 수가 없습니다."

말 없이 차만 한 모금 마셨습니다. 시대상 차이가 엄청나네요. 요즘도 밤에는 입산하지 말라고들 하지만 대부분 안전사고 때문이지요. 호랑이에게 물려가던 시절이 몇 년 전이라...

"그 와중에 과거를 볼 수 있다는 말이 잘도 퍼졌네요."

"같은 생각입니다."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나저나, 아가씨가 아는 이야기는 제가 아는 것과 좀 다르군요."

"이곳에 내려오는 이야기는 다른가요?"

"예. 어르신들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우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습니다.

"유성우가 떨어지는 날 서낭당 근처에서는 시간이 엉킨다. 과거를 보고자 하는 이에게는 과거를, 미래를 꿈꾸는 자에게는 미래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현재를 보여준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내려오는군요. 현대에 있는 박재윤 교수님과 유진이는 '과거'만을 언급했습니다. 선배들 또한 도시의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개발되지 않은 시골마을 만이 보인다며 경악스러워 했어요. 전부 과거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서 과거를 봤을까요? 아니면, 그 사이에 무언가 변화가 있었을까요?

"아가씨는 과거를 보고 싶으십니까?"

"선택해서 볼 수 있다면 미래를 보고 싶어요."

왜냐하면 난 집에 가고 싶으니까요!

"밤에 산을 올라가실 수 있겠습니까?"

"네. 말씀드렸잖아요. 한밤중 등산은 일도 아니었다고."

선우가 뜸을 들이다 조심스레 말했습니다.

"지금은 누가 봐도 체력 약한 사람이 혼자 돌아다니는 모습입니다..."

할 말을 잃었습니다. 현 선우... 딱딱한 말투 못지 않게 팩트폭격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주일만 있어 봐요."

선우가 의아한 기색을 얼굴에 띄웠습니다.

"그 정도면 다 회복할 수 있어요."

"이 주도 아니고 일주일 만에 가능하겠습니까?"

"예. 가능합니다."

내가 당신 닮은 사람 만났을 때 얼마나 쌩쌩했는지 알아? 너무 오래 과로해서 그래요. 술만 안 마셔도 반은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이틀 동안 그랬듯 금주하고 잠 꼬박꼬박 잘 자면 100%는 아니어도 80%는 회복할 수 있어요.

"산에 올라가려고 이곳에 왔습니다. 체력이 없으면 큰일이지요."

"혼자 가실 생각입니까?"

"네."

선우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문제가 있나요?"

"말씀하신대로 시간이 비틀리는 현상을 볼 수 있는 곳은 산입니다. 통행금지도 어겨야 하고 가는 길도 험합니다."

맞... 다. 내가 또 과거라는 사실을 잊었어요. 현대에는 예화대학교 천문학과에서 설치해둔 천문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는 포장도로가 있습니다. 신입생들이 꼭 한 번은 들르곤 하는 산 중턱의 주막도 이 도로가 있어 영업이 가능했다고 들었습니다.

천문대에서 조금 아래로, 주막에서는 조금 위로. 약 십 분을 걸으면 오래된 서낭당이 나옵니다. 그곳에서 이 분 정도 오른쪽으로 걸으면 도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나옵니다. 이곳이 바로 세현의 오래된 전설이 내려오는 곳입니다. 과거의 도시를 볼 수 있는 곳. 어쩌면 미래를 볼 수 있는 곳. 내가 찾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위치는 아십니까?"

"서낭당이 있는 곳을 찾아가면 되잖아요?"

선우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습니다.

"서낭당으로 가는 길은 아십니까?"

"그건…"

이건…. 그러게요. 난감하네요. 처음 찾아갔을 때도 유진이의 안내가 있어 갈 수 있었습니다.

"산악도로가 있... 나요...?"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 산에는 도로를 놓을 가치가 없습니다."

이 시대에는 도로가 지금만큼 정비되지 않았겠지요. 특히 이쪽 산은 도로를 열 이유가 전혀 없기까지 합니다. 산이 도시 서북쪽에 있고, 북쪽으로 가는 길을 막지 않아 한반도 중앙으로 가는 길을 막지 않았어요. 내가 아는, 산꼭대기 천문대로 향하는 도로는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통행금지는 순사들 성향을 보고 뇌물로 넘기면 됩니다. 그런데 찾아 가는 길이 문제네요.

"같이 가줄 사람이 있을까요?"

"같이 갑시다. 시간이야 넉넉하니, 얼마든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위험하다 하지 않으셨나요? 부탁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받은 것이 많아서..."

"혼자 가시는 것보다 낫습니다."

선우가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저도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선택권은 없습니다. 동행하지요."

이거… 감사한 일이지만 제대로 찍힌 느낌입니다. 천방지축이라고. 정말 미안해서 어쩌죠. 주는 것도 없이 뭘 많이 받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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