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대학생이 과거에 빠진 이유

9. 밤의 학교

바깥에 노을이 졌습니다. 곧 어둠이 내리겠군요. 서재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이 왔습니다. 왜 이렇게 시끄러울까요? 사람이 웬만큼 모이지 않고서야 이렇게 시끄러울 수가 없는데.

 불길한 예감은 꼭 정답이 됩니다. 서재 모퉁이를 지나치는 순간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왜 이렇게 많아요? 동네 사람 다 모였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모습입니다. 교실 안이 사람으로 가득 찼고 밖에도 많았습니다. 대문 밖에는 안쪽을 힐끔힐끔 보는 순사들도 있었습니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 한 번에 쏟아졌습니다. 이런. 야학이 열리는 시간이었나 봅니다.

 "진짜네?"

 "양쪽 눈이 달라."

 수군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습니다. 멀리 있는 순사들도 흘끔흘끔 보는군요. 이럴 때 느껴지는 기분은 정말 떨쳐내기 힘드네요. 양 눈이 다른 건 현대 한국은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보기 어렵다죠. 이십 년이면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익숙은 무슨. 제발 어디 가서 숨고 싶습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선우가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 둘이 돌아다녔다는 소문이 짧은 사이에 퍼져서..."

 "아닙니다. 소문이 정말 빠르군요..."

 "예..."

나 여기 온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진 않은데... 아냐... 좀 되었나... 조선어를 할 수 있다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가 이해하자. 원래 내가 살던 동네에서도 그랬습니다. 도시라는 이름을 쓸 수 있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건너면 모두가 연결된 곳이었습니다. 거기서도 내 소문이 나흘 만에 다 퍼졌어요. 현대에서도 그랬습니다. 더군다나 이 시절의 세현은 지금 같은 대도시가 아닙니다. 중소규모의 지역은 오죽하겠습니까. 아니. 이것도 높게 쳐줬다. 이 시절의 세현은 그냥 작은 군(郡)이에요.

 "... 구경거리 된 김에 저도 사진이나 찍어 가도 될까요?"

 "예. 아무도 반대 안 합니다."

 선우가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호기심이 해결된 사람들도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래도 교실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방으로 돌아가 카메라를 꺼내왔습니다. 막 수업이 시작되려던 참이었습니다.

 "나오라고 해도 안 나오시던 분들께서 나오셨네요. 저 서운합니다?"

 "에이. 오늘은 그냥 나오고 싶어서 나왔어."

 옆에 있던 사람이 슬쩍 끼어들었습니다.

 "아가씨 얼굴이 궁금하다고 나오셨다는 사실은 다 압니다~."

 지난번에 만난 사진사가 유쾌하게 받아쳤습니다. 이름이 '기영' 이었죠? 시원시원하고 경쾌하게 생긴 외모만큼 경쾌한 어조입니다. 낮에는 정말 바빴나 봅니다. 그때는 목소리에 성격이 이렇게 선명하지 않았어요.

 "아가씨의 이름은 어떻게 되시나요?"

 "'휘'라고 불러주세요. 휘파람 할 때 휘 입니다."

 "카메라를 가지고 계시네요?"

이 시대의 것과 크기는 비슷해도 생긴 것이 많이 달라 조금 많이 찔렸지만... 그래도 이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카메라를 알진 못할 테니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습니다. 휴대폰은 대놓고 못쓰니 사진이라도 좀 남겨봅시다. 갑갑해 죽겠으니 취미생활이라도 좀 하면서 살자!

 "사진 좋아하세요?"

 "좋아해요. 잘 찍는 법은 모르지만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제 사진관으로 찾아와요. 이 일대의 유일한 사진사라 찾기는 쉽습니다."

 기영이 사람 좋게 웃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선우야. 오늘 누님은 안 오신대? 퇴근하는 모습을 봤는데."

 "이틀 밤을 꼬박 새우신 분께서 오실 수 있겠어?"

 선우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잡담은 여기까지. 어제 배운 내용은 기억하고 계십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또 빠져나갔습니다. 이제 공부하려는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판서식 수업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습니다. 얼핏 보이는 내용은 단순해 보입니다. 한글 자모. 간단한 낱말, 단어, 짧은 문장. 선생 노릇을 하는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인 선우, 그보다 많아 보여도 서른은 넘지 않은 듯 보이는 사진사 기영. 막 학교에서 달려왔는지 교복조차 갈아입지 못한 학생 한 명.

 못 배운 사람들을 위한 밤의 학교. 야학은 개화기에 시작되어 학교 교육이 보편화되고 필수로 자리 잡기 전까지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들었습니다. 이제야 이 말이 이해되는군요. 집중력이 대단합니다. 배우려는 열의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작은 도움만 있으면 되는구나.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누르려다 멈췄습니다. 셔터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릴지도 몰라 한참 기다렸습니다. 수업이 끝나려는 분위기가 되고 나서야 셔터를 눌렀습니다.

 "그 귀한 필름 여기다 써도 괜찮아요?"

 "찍고 싶은 사람 마음이지요. 아... 그. 불편하시면 사진 현상은,"

 "마음 쓰지 마시오."

 "언제 또 공부하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겠습니까."

 어르신들이 사람 좋게 웃어넘겼습니다.

 "통 크시네. 현상 필요하면 우리 사진관 찾아와요."

 "예."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죄송합니다. 필름이 아니라 디지털카메라여서 찾아갈 일이 없어요.

 수업이 완전히 끝났습니다.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선생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남았습니다. 책상을 밀어 넣고 책을 한곳에 모으며 교실 정리를 도와주었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청수야, 오늘 많이 급하다?"

 기영이 짐짓 장난기를 깔아 말했습니다. 학생의 이름은 청수였군요. 이름처럼 맑아 보이는 얼굴입니다. 

 "모레가 시험입니다!"

 선우가 빨리 가라는 듯 손짓했습니다. 학생이 나를 향해 꾸벅 인사하고 바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나도 이만 간다."

 "그래. 내일 보자."

 "내일도 봐요, 휘."

 기영도 대문간을 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구경할 만하셨습니까?"

 "네. 고생하셨습니다. 가르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능숙해 보이시는군요."

 "반년 전에 조선으로 돌아온 뒤, 평일에는 절대 빠지지 않고 해온 일입니다. 이젠 익숙합니다."

 "그건 더 힘든 일 아닌가요?"

 "그렇습니까?"

 "예. 꾸준함은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덕목이잖아요."

 선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교실 문을 닫고 문을 잠갔습니다. 봄이지만 밤이라 그런지 공기가 차갑습니다. 새삼 시간이 지나며 많이 발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공교육이 보편화된 세상.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기본으로 자리 잡은 세대.

"저는 정말 운이 좋았네요."

"행운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는 재능과 집안은 흔하지 않습니다."

선우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조심스럽지만... 여성에게는 특히나 어려운 세상이지요."

 "... 예. 그런 시대지요."

옛날에는 그런 집안도 많았죠. 나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현대라서, 나의 가족들이라서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나의 외가는 여성이었던 제 딸에게도 교육 기회를 주었다지만, 친가에서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운이 나빴다면 의대고 뭐고. 기본적인 것만 배우고 그 이상의 배움은 허락받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어떤 세상이건 여성에게 가혹하지만, 변화의 시작이었던 이 시대는 더 잔혹했을 겁니다.

 그러고보니... 선우에게 누나가 있다 하였지요. 그분은 어떨까요?

 "도련님께 누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분은 공부에 뜻이 있으셨나요?"

 "저보다 더한 분이십니다."

 선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아버님께서 저보다 더 총애하셨지요. 참 존경스러운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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