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필링필링

4.2 그는 다 계획이 있다 (下)

행복만 남기를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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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의 회의가 무색하게도, 시연회에 갈 사람 중 한 명인 헤이즈는 자리를 비울 수 없게 되었다. 랩터의 동생인 스텔이 오르카의 습격을 받아 크게 다친 것이다.

“그럼… 헤이즈 선배 대신에, 제가 끼어도 돼요?”

스텔이 입원해 있는 병동,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가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이어서 말했다.

“…좀 그런가?”

“말했잖습니까. 나가 씨는…”

“초능력 함부로 안 쓸게요. 완벽을 무효화할 카메라도 있으니 특기 조절도 잘 할거고, 지시받으면서 가면 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제 몸만 감싸서 방어막 치면 다칠 일도 없고.”

어차피 그 자리에 있어야 할 헤이즈는 스텔의 보호자로서 병원에 있어야 한다. 그 순간부터 랩터와 동행해서 내부를 휘저을 계획은 이미 깨졌다고 할 수 있다. 나가는 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애초에 스텔을 습격한 범고래 혼혈, 오르카 역시 그것을 의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 백모래의 사랑인 랩터는 없어야 하며, 동생인 스텔이 다친다면 당연히 랩터는 스텔에게 돌아올 거라는 계산. 그의 카운터를 노리자면 어딜 보나 나가가 현장에 가는 것이 낫다.

나가가 굳이 백모래가 여는 시연회에 가고자 하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나가의 특기는 시공간을 왜곡시키는 완벽이 있을 때는 한 번에 대량의 피해를 초래할 수 있는 명백히 위험한 특기이기도 하지만, 지금 같이 전투를 피하고 시연회에 모인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상황 지원이 필요할 땐 매우 유용한 특기이기 때문이다. 딱히 백모래를 나서서 잡으려는 마음도 없었다. 타냐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어디까지나 싸움이 아니라 구조하는 거로… 정말 조심할게요.”

“나가…”

“그래도 혼자선 좀 아니죠. 그래서 말인데-”

그리고 지목된 것은 은비단. 포크 엔터 유다 사장의 비서이자 머리가 떨어져도 살아날 수 있는 불로불사 일족이자 힐러. 백모래를 잡는 것에 협조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같은 일족인 이호가 백모래를 구출해준 일 때문이다.

“그리고 이거 들고 가세요.”

“이건…?”

“타냐 씨의 특기가 담긴 침입니다. 한 번 맞으면 그 누구라도 흠칫할 수밖에 없으니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나가 씨한테 필요할지도 모르죠.”

자그마한 침 몇 개가 감싸여 있는 천이었다. 설명을 들은 나가는 절대 찔리지 않겠다, 결심하며 조심히 그것을 챙겼다. 헤이즈 선배가 이걸 갖고 있었다는 건 지금 현장에 있을 서장님이나 귀능 씨도 이걸 들고 있다는 걸까?

그런 거라면, 잘 쓰고 있는지가 궁금한데….

 

 


-물론 잘 쓰고 있었다.

“아, 샹! 더럽게 안 맞네.”

“뭐야….”

시연회 건물의 계단 한쪽에서 두 흑백의 남자가 대치하고 있었다. 한 명은 범고래, 한 명은 판다, 각자 종족 특성이 잘 드러나는 혼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둘 중 무력적으로 밀리는 사람이 어느 쪽인지는 너무나 명백했다.

“벽 타는 취미라도 생겼나 보지?”

툭, 팅그르르-

“닥쳐.”

건물 벽을 타고 올라와 오르카를 공격한 귀능의 긴 쇠꼬챙이 같은 흉기가 바닥에 던져져서, 형편없이 구석으로 굴러갔다. 귀능은 그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지만, 오르카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가 없는 잔잔한 표정이었다. 저 자식은 저런 점이 제일 짜증 나,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귀능은 다음 플랜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여기 와봤자 스푼에 좋을 것 하나 없어.”

“닥치랬지!”

“어차피 내 완벽 때문에 공격도 함부로 못 하잖…”

피슉, 피슉 피슉-

소음기를 단 총이 불꽃을 튀겼다.

일반적으로 ‘기’를 차단하는 성질을 담아 만드는 특기 억제 도구와 마찬가지로, 타냐는 그녀의 ‘기’를 담아 도구를 만들었다. 첫 번째 시도는 알약. 알약이 몸에 잔존하는 시간 동안 효과를 보게 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감정의 강도가 도를 넘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상한 용도로 이를 요구하는 사람만 차고 넘쳐 폐기했다. 두 번째 시도는 장신구. 적절하게 기를 담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정작 쓰려는 내담자는 별로 없는 상황이다.

그다음은 제압용 도구로, 당연히 무기에 이를 적용했는데….

“…!!”

주로 도구에 약을 덧바르는 것으로 적용했기 때문에, 알약과 마찬가지로 과한 효과에 유의해야 한다.

[귀능 씨, 완벽은 계속 안 쓰고 있어요!]

스푼의 세쌍둥이로부터 무전이 들어왔다. 피가 튀기고, 오르카가 멈칫거리는 순간을 귀능은 놓치지 않았다. 빠각, 머리 깨지는 소리가 청명했다. 속이 절로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떤 감정의 격변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오르카는 귀능에게 머리를 처맞고도 멍하니 손으로 땅을 짚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꼬시다, 물고기 자식. 이제 곧-

[서장님, 거기요.]

“이크…!”

콰드득- 쿵,

“잡았다.”

천장 벽을 뚫고 내려온 스푼의 서장, 다나의 손에 계단 바닥 한쪽에 머리를 처박힌 범고래 하나. 그리고-

툭, 또르르….

차마 쓰지 않은 듯한 완벽 하나. 나가에게 타격을 줬던, 공간을 왜곡하는 ‘그’ 완벽은 없는 것으로 확인했는데, 저 완벽은 뭐지? 하지만 이미 손에서 놓았으니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귀능은 그것을 챙겨두고 오르카 위에 올라타 그를 제압했다.

-그보다는 타냐의 말이 그대로 맞아 들어간 것이 신기했다. 귀능은 다시 총을 들을 들며 타냐의 말을 떠올렸다.

‘이 감정은 죄책감이에요.’

‘귀능 씨의 말대로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려 하는 사람이라면,’

“난 백모래 찾으러 간다.”

“넹, 서장님~”

‘죽고 싶어서 견디지 못할 거예요.’

이제 다시는, 널 볼 일이 없을 거야.

오르카는 그렇게 자신이 살려 둔 인간성의 증거의 손에 숨을 거뒀다.


[서, 서장님! 역시 범고래한테 그 완벽은 없나 봐요. 서장님이 달린 궤도가 틀어지질 않았어요.]

[저, 그런데 지금 나가 군이….]

이 새끼는 오지 말라니까 왜 여기 있는 거야. 다나는 오르카를 잡았다는 것에 안도하기도 잠시, 백모래와 나가가 대면 중이라는 소리에 이를 득득 갈며 이동을 시작했다. 그 대화 내용은 뻔했고, 또 중간에서 그대로 전달하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언제나처럼 백모래는 헛소리를 했고, 나가는 휘둘리고 있는 상황인데 이걸 몰랐다면 더 속이 터졌을 테니까.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그리고 날 독점하고 싶어 하지. 모두가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건 돈이 안 되잖아? 그래서 내 비위를 맞추려고 뭐든지 할 거야. 아니, 이미 하고 있어.”

-그런데 굳이 날 없애고 싶어? 강자한텐 원한 사고, 약자한텐 원망 사고. 그렇게 미련하게 살려고?

“…그런다고 해도, 선배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휘릭, 쾅-

“그 말대로다.”

네 말처럼 원한과 원망을 살 사람은 나가가 아니야.

순식간에 다나가 떼어낸 비상문이 백모래를 치고 날아갔다. 기습적으로 한 공격이라 완벽을 사용할 겨를도 없던 모양이다. 손맛이 좋네. 오히려 다나는 백모래의 상태보다 나가의 대답이 더 의외였다. 누굴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걸 지나치게 무서워하고, 워낙 소심한 놈이라 지가 백모래를 평생 감시하겠다는 소리나 할 줄 알았는데.

제 편을 먼저 떠올렸다는 것은 그만큼 스푼의 사원들이 힘이 되거나 의지가 되어주었다는 뜻이다. 그래야지. 최강의 에스퍼를 잡아두려면 동료들이 그 정도는 해줘야 한다. 문득 타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아니었으면 꿈도 못 꿨겠네. 무슨 든든한 사원이 없다.

“너무하네…. 진짜 죽는 줄 알았어.”

그때,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으로 벌떡 일어난 백모래가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를 데려가려던 나가를 밀쳤다.

“결국 방어라는 게 몸을 두르고 있는 것뿐이지. 중심을 견고하게 잡아주는 건 아니거든.”

미안, 그럼…

다나는 나가가 백모래의 손짓에 맥없이 밀려나 계단을 구르는 것을 어이없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초능력으로 방어하고야 있겠지만, 얼마나 물 몸이면 저기서 맥없이 밀려나겠는가.

-뭐, 어쨌든, 지금 다나가 할 일은 도와주지 않아도 무사할 나가를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나는 환자를 데리고 도망치려는 백모래의 팔을 잡아챘다.

“-그럼, 뭐?”

그리고 백모래는 뻔뻔스럽게 환자의 목을 잡아 인질로 쓰려 했지만, 글쎄, 다나 앞에서는 무의미한 짓이었다.

“야, 나랑 힘겨루기라도 해보려고?”

“하하…. 다나도 참. 내가 네 힘을 거스르겠어? -근데 그렇게 팽팽하게 당기고 있으면, 밀어서…!”

하, 코웃음이 나왔다. 다나는 당긴 적이 없었다. 그냥 잡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을 당겨서 균형을 잃게 만들려는 백모래의 노력이 우습기만 할 뿐이다.

“익! 이익…!”

이렇게 가소로운 새끼를, 난 몇 년 동안이나 쫓은 걸까.

“하-... 날 잘 이용해주길 바라. 물론 날 이용하고 싶은 사람은 넘치니 그 질투를 다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안 맞은 곳이라고 아가리는 잘 털어.”

지금 회장 상황이 어떤 줄도 모르고 말이야.

 


 

시연회에 돌입하기 며칠 전, 스푼의 서장 다나는 경찰서장인 염호와 만났다.

“그럼 그 선생 뒤엔 모로 재벌 말고도 뒷배가 있다고?”

“그래. 최근 토지를 엄청나게 사들이고 있다는데 관련 사업을 위해서 같아.”

윗분들 심기 거슬렀다간 서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겠어.

다나의 옆에 앉은 염호는 아이패드를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한숨 쉬듯 토로했다. 각종 환자를 정화 특기로 치유하며 ‘선생님’ 행세를 하는 백모래는 각종 지위가 있는 혼혈 납치 시도 역시 진행하고 있어 경찰의 추적 대상이었기 때문에 다나와 협력하고 있었다.

“근데 그건 트리비 의원도 마찬가지 아니냐.”

“맞아, 시키는 대로 해야 하지.”

“…”

양쪽에서 잡아라, 잡지 마라 지랄이군.

다나는 타냐와 얘기를 나누고 갔던 트리비 의원을 생각하며 잠시 고민했다. 타냐가 꾸미고 있는 일이라면 다 해결되지 않을까? 굳이 그게 아니어도 타냐에게 연락하면, 그들을 설득하는 것 정도는 흔쾌히 해줄 것이다. 다나는 잠시 염호에게 양해를 구한 후, 타냐에게 연락했다.

[아, 그분들이요? 건너건너 알고 있긴 해요 ‘설득’하면 되는 거죠?]

“어, 되겠냐?”

[음…. 시간이 좀 걸려서요. 늦으면 시연회 당일에나 될 것 같은데, 괜찮나요?]

“충분해.”

[그럼 같이 진행할게요!]

“어, 고생해라.”

그래, 지금 시민에게 스푼의 서장인 다나보다도 이름이 알려져 있는 타냐 정도의 영향력이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쪽으로 아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어쨌든, 윗분들에게 확실히 찍히기나 한 다나보다야 훨씬 낫다. 확답을 들은 다나는 염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스푼 사원?”

“뭐, 아직은.”

“그 사람이 뭘 할 수 있어서 그래?”

“넌 모르는 거. 그러니까…. 범인을 잡는 것만 집중해라.”

“뭐? 꺼지라면 꺼져야 하는데 어떻게 그러겠냐.”

다나는 이전에 오수가 주었던 시연회 초대장을 내밀었다. 한 장에 6명이 갈 수 있으니, 경찰들을 대동하고 가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만일의 경우엔 멀쩡하게 초대장이 있으니 다짜고짜 쫓겨나지도 않을 것이고…. 뭣보다 타냐가 제대로 해준다면, 후원자가 직접 와서 염호를 쫓아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러분!! 정숙하세요! 선생님은 환자분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용한 장소로 옮기셨습니다!”

오수가 준 초대장으로 스푼과 함께 시연회에 입장한 랩터는 광신도들에게 백모래가 자신에게 한 짓을 고발했다. 랩터의 동료를 죽이고, 다리를 쓰지 못하게 만든 원수 놈이 저렇게 광신도를 거느리고 떵떵거리고 있는 것은 참고 보기만 해도 이가 갈렸다. 차라리 그를 따르고 있는 신도들이 더 혐오스러울 정도로-

당연히 백모래의 광신도들이 그런 랩터를 넘어뜨릴 정도로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고, 백모래는 랩터를 보고 당황했는지 환자를 눕힌 침대를 끌며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랩터는 그런 백모래를 보며 흥, 코웃음을 쳤다. 이미 신도들 사이에는 불신의 씨앗이 자리하고 있었다.

“조금 전의 그 행동은 뭐였죠? 선생님께 싫은 소리를 했다고 걷지도 못하는 환자를 욕하고 밀치고!”

그러거나 말거나, 메두사는 남아서 랩터에게 폭력을 휘두른 이들을 비난하며 선동하고 있었다. 진실을 아는 사람에겐 아주 우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믿는 자에겐 아주 효과적인 채찍질이기도 했다.

“그게 여러분이 은혜를 갚는 방법인가요? 그게 선생님이 바라시는 행동이었을까요?”

“물론 여러분의 깊은 존경심에서 나온 행동인 건 압니다. 하지만 이 폭력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어요!”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랩터에게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은 죄책감이 서린 표정을 지었으나, 정작 그보다는 ‘선생님’의 심기를 거슬렀을까 눈치를 보는듯한 표정이었다.

“글렀네.”

랩터는 짧게 중얼거리며, 신도가 밀치는 바람에 피가 흘러내려 반쯤 시야가 가려진 오른쪽 눈을 만졌다. 그의 곁에는 경찰서장, 염호가 랩터를 지켜주고 있었다.

“-그래요,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어요.”

“?”

웅성, 웅성-

그때, 한편에서 부드러운 미성이 들려왔다. 메두사가 서 있는 단상 한편에서 쪽문이 열리더니, 짧은 정장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걸어 나왔다. 검은 치마, 검은 구두, 그리고 검은 털이 달린 하얀 케이프를 걸친 사람은 어느새 메두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단상 중앙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있지도 않은 죄를 덮어씌우는 짓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나요? 어쩌죠, 전제가 틀렸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전 죄가 있는 자를 용서할 수 없으니까.”

“-히어로 타냐?”

“TV에서 봤던 사람 아냐?”

“그런 사람이 왜 여기에….”

랩터는 너무 놀라 의자에서 일어날 뻔했다. 그랬다면 꼴사납게 넘어졌을 테니 다행이지만, …어쨌든 그만큼 놀랐다는 소리다. 안경을 벗고, 화장을 한 타냐는 평소 스푼 건물에서 보던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차라리 TV에서 나오던 모습과 더 비슷한 면이 있을 정도로.

“선생님에게 죄가 있다고 했죠? 네, 맞아요. 제가 바로 그 증인이니까요.”

딱-

그리고 뒤의 스크린에서, 타냐의 기억에서 뽑은 듯한 영상이 재생되었다. 오르카와 송하를 막다가 싸우던 장면, 그리고 돌아온 오르카가 제압하고 있던 일반 시민, 그리고 지나친 고통으로 정신을 잃을 때까지 집요하게 향했던 시선- 땅 구덩이 위의 인영. 랩터는 감탄했다.

언제 저런 기억 관련 특기자를 섭외한 거지?

기억을 뽑아내 보여주는 것이 가능했다면 랩터가 제일 먼저 협조했을 것이다. 물론, 이 상황에서는 공인인 타냐의 경험만큼 충격적이진 않겠지만….

“저, 저분은 조수분….”

“저 사람은 처음 보는데, 진짜 타냐랑 싸웠다고? 무슨 저렇게 큰 칼을,”

“땅에 시체를 파묻다니, 그럼 그냥 범죄자인 거 아냐?!”

급변한 분위기는 다시, 이번엔 다른 의미로 타올랐다. 아까 랩터의 발언으로 의문을 품고 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실망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드디어 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더욱 간절한 사람일수록 더했다. 시간이 갈수록 분노하는 것이 느껴졌는지, 메두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 이런 사정을 알고 계시던 후원자 중 한 분이 저를 들여보내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전부 진실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요. 여러분, 알아주세요. 저 자는 여러분을 방패로 도망칠 생각밖에 하지 않는 명백한 범죄자예요! 전 히어로로서, 순진한 시민인 여러분이 속아 넘어가 인질이 되지 않기를 바라요….”

“-사회자님!”

그때, 평범한 주부가 간절한 얼굴로 단상에 딱 달라붙어 말을 걸었다. 작은 아이의 엄마인 듯, 한 손은 아이의 어깨를 꽉 붙잡고 있었다. 랩터는 그가 할 말이 어쩐지 예상되는 기분이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어디 있죠? 얼른 오셔서 오해라고 해주셔야….”

“맞아! 저 영상에 선생님은 없잖아! 저 혼혈이 혼자 저지른 일이라면 어쩔건데?”

자, 이제 어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모를 테지만, 랩터의 눈에는 메두사의 짜증이 고스란히 보였다. 랩터는 박수라도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오르카를 꼬리 자르듯 잘라낸다면 몰라도, 당장 해명할 백모래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메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걸 생각했대, 타냐쌤은. 아니, 서장님 생각인가? 이대로라면 현장에서 메두사를 잡는 것이 가능할지도 몰라.

“아 거 아줌마!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그 새끼 그거 사기꾼이라고! 이 년도 패거리겠지!”

“아니 거, 아닐 수도 있-”

그때, 한 명의 남자가 단상으로 난입했다. 당장이라도 메두사의 멱살을 털 기색이었다.

어? 이건 안 되는데.

랩터는 옆에 서 있던 경찰, 염호에게 눈짓했으나 이미 부하가 갔다는 눈짓을 보낼 뿐 별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아니, 그래도 저거 그대로 두면-

“가서 그 새끼 데려와! 안 그러면 네년부터-”

뻑-

내 이럴 줄 알았지.

박 터지는 소리가 났다. 메두사는 자신에게 오는 폭력을 감내하면서까지 사회자 역할에 심취할 인물이 아니었다. 이 혼란을 틈타 도망을 쳤으면 쳤지. 랩터는 소란스럽게 비명이 나는 것에 예민한 귀가 괴로워하는 것을 느끼며 눈으로 타냐를 쫓았다. …어, 타냐쌤이 대신 맞았나?

철컥-

“이제부터 시민 여러분은… 경찰의 지시에 따라, 대피해주시길 바랍니다!”

메두사의 팔꿈치에 이마를 맞은 타냐는 잘못 스친 듯 피를 뚝뚝 흘리며 그 팔에 수갑을 채웠다. 그리곤 각자 맨손과 총으로 전투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 비일상적인 광경에, 일반 시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입구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범죄자를 앞에 두고 있다는 실감이 난 모양이었다. 아까 메두사와 대거리를 했던 아저씨는 아예 뒤로 기듯이 하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시민 여러분, 입구는 이쪽입니다!”

단상 앞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쓸려나가자, 랩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총을 들고도 맨몸의 메두사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던 타냐는 기어코 그를 단상 아래로 끌어 내린 채였다. 정확히는 수갑이 이어져 있는 것 때문에 단상 아래로 떨어진 타냐와 함께 딸려 내려왔다는 것이 맞겠지만…. 그래서인지 메두사는 타냐와 이어져 있는 수갑을 간단히 부숴버린 참이었다.

“아, 아까는 놀랐어요. 설마 이곳에 와있을 줄은.”

“그래? 어쩌나. 내 덕분에 계획은 다 망한 것 같은데.”

“그건…. 정확히는 이분 때문이죠.”

랩터는 그 짧은 사이에 이곳저곳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팔이 꺾여 있는 타냐를 흘긋 보았다. 쟤도 참 무식한 면이 있다고, 한편으로 생각하며. 하지만 그런 면이 그를 더욱더 히어로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랩터는, 타냐는 몇 없는 히어로다운 히어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도 그처럼 행동할 수 없을 거라고…. 어쩌면 스푼의 간부조차.

“절 잡으시게요? 할 수 있겠어요?”

“날 물로 보나 본데….”

넌 이걸로도 충분해.

랩터는 품에서 작은 단검 하나를 꺼내 쥐었다.

 


 

“그래서 잡혔대?”

“그렇다는데….”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 선생님이 그렇게 확고한 죄인이면 전국에 공표했을 거 아냐. 사실 뒤에 구린 사정이 있는 게….”

“타냐가 헛소리하겠어? 이제 잡혔으니 기사로 공표라도 나겠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시연회 밖을 꽉 채우고 있었다. 일렬로 늘어선 시민들이 자리를 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연회 안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불안하지만 질서정연한 분위기였다. 나가는 시연회장 안의 분위기를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이 생각보다 얌전한 것에 타냐의 개입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타냐 씨, 정신이 들어요? 힐은 필요 없어 보여서 수혈만 했는데….”

-그리고 나가의 우려와 다르게,

“네…. 감사합니다. 저 좀 일으켜 주실래요?”

일반인들은 전원 무사했고,

“예? 어디 가시게요?”

나이프는 모두 죽었다고 한다.

“네, 그리고 남는 수혈팩 있으면 주세요. 연출이 필요해서.”

“가짜 피 있는데 줄까?”

“앗, 그게 낫겠네요. 감사해요.”

별로 궁금하진 않았다.

“???”

 


 

철퍽, 피에 젖은 클러치백이 소파에 떨어졌다. 그것이 퍼포먼스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자리에 있던 ‘근미래 의료기술 시연회’ 후원자들은 어깨를 흠칫거렸다. 타냐는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고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런 범죄자를 후원하며 시연회까지 열다니, 대단히 유감스럽네요.”

“아니, 공개 수배자도 아니었는데 제가 어떻게 알고….”

“진님, 제 증언에도 불구하고 진작에 히어로와 경찰에 협조하지 않은 것, 트리비 의원님께 말씀드려도 될까요?”

명백히, 이 상황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은 타냐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런 타냐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복종하는 가소로운 하룻강아지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타냐가 이들을 압박할 수 있는 이유는 무언인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런 범죄자를 여태 은폐한 스푼 측의 책임 아닙니까?”

“저들은 살인마 집단이에요.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곤 생각하지 않나요? 게다가 제가 사실을 전달해 드렸을 때도 뻔뻔하게 계속 후원하고 계시던데요. -어쨌든 잡혔으니, 뉴스에 해당 사건은 특종으로 나갈 거예요. 그 경위와 장관님의 이번 언행은 언론에 올리도록 할게요.”

별것 아니다. 그만큼 타냐를 위하는 사람이 많았을 뿐이다. 타냐의 특기로 위로를 받은 사람들은 많았고, 그중 몇은 그 은혜를 잊지 않았다. 자신의 사업체를 떼어주고, 온갖 귀한 것들을 쥐여 주다 못해 섬기겠다며 몰려드는 이들은 많았다. 타냐는 그들의 삶 한쪽에 깊숙이 자리한 ‘영웅’이었으니까. 그것은 타냐의 특기가 가진 귀한 장점이다.

그들의 삶에 진한 자국을 남기는 것.

그를 활용하면 타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여태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을 뿐이다.

“아울 씨께서 해일 의료재단에 다음 후원은 없을 거라고 전하셨어요. 알다시피, 그분이 저를 좀 아끼셔서.”

“…죄송합니다.”

“-뭐, 이 정도면 잘 알아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트리비 의원님은 이것을 요구하셨고, 이것만 충족하면 여러분의 정체에 대한 것은 조건 여하에 따라 비밀에 부치겠습니다. 거절하진 않을 거라고 믿어요. 그러지 않는다면 만천하에 여러분의 뒷모습을 밝혀낼 테니.”

제가 능력이 안 돼서 가만히 두는 게 아니랍니다. -지켜보겠어요.

그리하여 지금처럼, 백모래의 후원자들을 질책하며 압박할 수 있는 것이다. 타냐는 트리비 의원 부인의 요구를 떠올리며 찍어두었던 오르카의 시신이 생각났다. 거기에 덧붙여 여기 있는 후원자들로부터 보상을 뜯어냈으니, 이 정도로 만족해주셔야 할 텐데…. 그러고 보니 아들분의 유해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었다.

“볼 일은 해결하셨습니까?”

“살몬 씨.”

일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온 타냐는 차로 대기 중인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듄은 스푼과 마찬가지로 현장 수습을 하느라 바빠 따로 부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타냐는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트리비 의원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타냐 씨. 사진은 잘 받았어.]

“다행이에요. 그중 직접적으로 납치를 주도했던 범고래 인간은- 특별히 제 특기에 당해서 죽었다고 보고 받았어요.”

[고마워요. 아들의 유해는?]

“염호 서장님 측에 연락해서, 최대한 빨리 댁에 보내드릴 수 있도록 할게요. 아까 얘기하기로는 내일 아침까지도 보내드릴 수 있다고.”

[그래…. 타냐 씨는 참 확실해서 좋아. 약속했던 대로-]

-한번은, 지원하도록 할게.

“감사해요”

[하지만 그 뒤는 아니야. 누가 우릴 잡아넣을 게 분명한 사람을 지원하겠어?]

“그걸로 충분할 거예요. 각오하고 계세요.”

[-무섭다니까. 그래, 그럼 나중에 봐.]

됐다.

타냐는 전화를 끊으며 주먹을 쥐었다. 모든 게 잘 흘러가고 있었다. 1년간 천천히, 그리고 요 몇 달간 급진적으로 진행해온 일은 빠르게 물살을 타고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곧 둑이 터질 때가 되었다. 타냐는 피에 젖은 클러치백을 열어 핸드폰을 도로 넣었다. 어차피 겉이 조금 젖은 정도라 별로 찝찝하지도 않았다.

“여기, 새것입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지금은 필요 없으니 일단 여기 두고…. 이제 갈까요?”

“네.”

이제, 몰아칠 시간이 왔다.

 

 


백모래가 잡힌 지 이틀 후,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와중에 스푼의 간부진들은 예의 그 대회의장에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체로 그제 잡혔다는 보고가 올라온 나이프 일당에 대한 회의였다. 그들은 안 그런 척 백모래의 정화 특기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간부 시라노는 폐수 정화에 집착하고 있었고, 간부 원강은 병, 그리고 또 다른 간부 라몬은 그를 이용한 불사에 집착했다.

타냐는, 그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또각, 또각-

“…타냐?”

“하, 그 건방진 것이-”

“안녕하세요?”

청남색의 짧은 드레스, 그 위에 검은 털이 달린 흰색 케이프를 걸치고 있는 타냐는 간부들이 보기에 충분히 ‘건방진’ 눈빛으로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간부들 역시 타냐가 시연회에 직접 개입해 일을 더 쉽게 이끌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이 있었기 때문에 타냐를 무시했다. 그에 진지하게 용건을 물어보는 것은 간부 시라노뿐이었다.

“무슨 일이냐.”

“백모래는 오늘 밤, 죽을 예정이라는 걸 알려 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뭐야?”

“그는 불로불사를 위한 실험체가 돼야 해!”

“아니, 자연정화를 위해 사용될 거다.”

마치 선전포고를 하듯, 당당하게 말하는 타냐가 입에 담은 백모래의 죽음에 간부들은 데인 듯이 반응했다. 직접 백모래를 마주해본 적이 없는 간부진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스푼 측에서 한 보고만으로 파악한 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다니는 천방지축일 뿐이고, 랩터라는 혼혈을 이용하면 다루기 그리 어려워 보이지도 않았으니. 그저 스푼이 무능력해 보일 뿐이다.

아니, 차라리 지금은 평소와 다르게 건방지게 굴고 있는 타냐가 더 거슬렸던 걸까. 타냐는 어느 쪽이든 되었다며 속으로 찬웃음을 지었다.

“어느 쪽이든, 이미 그의 죄업을 감당할 사람은 없어요. 이미 충분히 많은 죄를 지었고, 더 놔뒀다간 더 큰 희생을 불러올 사람. 간부들이 그것도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이, 이 년이-”

“일개 스푼의 사원인 주제에, 지금 네가 그렇게 뻗댈 위치가 된다고 생각하느냐?”

“아주 건방져졌어. 응?”

“하지만 사실인걸요. 그러니 백모래의 거취는 포기하셨으면 해요. 스푼이 몸을 던져가며 잡은 사회악을 살려두고 싶진 않거든요.”

싸늘한 정적이 대회의장을 감돌았다. 이제는 모든 간부진이 타냐를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그에 움츠러들어 눈치만 보고 있었을 작은 여자, 타냐는 이제 그런 시선에 당당히 대항하고 있었다. 석류색의 눈이 불타오르듯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복수심보다 순수한 분노에 가까운 그 눈의 온도에 몇은 뭔가 다름을 느꼈는지, 뒤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았다.

“지금 감히 우리가 무능력하다고 하는 게야!”

“실제로 현장에서 백모래와 마주친 일은 없으니,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 조언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네 목을 자를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니? 혀를 놀리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아해가 건방지구나.”

그래, 타냐를 노려보고 있는 것은 간부진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뒤로 대동하고 있는 일부 직속 부하들은 타냐를 무서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타냐는 조금의 위협도 받지 못하는 듯했다.

“그 혀를 놀리는 게 제 특기라, 별로 무섭지 않군요.”

“이 년이-!”

카강-

그때, 결국 참지 못한 원강의 부하가 단봉을 들고 나섰지만 타냐를 타격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뒤에 서 있던 언럭키로 인해 혼자 넘어져 버린 탓이다. 이어서 다른 부하가 총을 들었지만, 저 혼자 고장 나버린 총은 오발탄을 날릴 뿐이었다.

“…이제는 네가 언럭키를 휘두르는구나.”

“아뇨, 이번 자리에서만 ‘부탁’한 거예요. 그는 도구가 아니니까요. 그렇게 보인다면 간부님의 시선이 잘못된 게 아닐까요?”

“-네년이 끝까지 나를 무시해!”

아, 정말 한결같구나.

타냐는 짧은 웃음을 남기기가 무섭게 표정을 굳혔다. 이제 그가 뱉을 말은 그 책임이 막중한 한 마디였다. 예전의 타냐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을 바로 그런 말. 타냐는 몰래 심호흡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히어로다.

“같은 간부에게 폭언은 거기까지 해주셨으면 하네요.”

“…뭐?”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

웅성, 웅성-

십여 명 정도 모여 있을 뿐인 대회의장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몇몇은 무기를 치켜들었다. 고요한 곳은 타냐가 서 있는 단상뿐이었다. 타냐는 손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느긋하게 머리를 넘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타냐를 뒤에 있는 동료들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뭔가, 문제가 있을까요?”

“간부는 네깟 게 될 수 있을 만큼 쉬운 자리가 아니야!”

“간부는, 오랜 기간 히어로로 활동하며 여명기를 이끈 이들이 스푼을 조직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얻는 자리다. 너와 같은 애송이가 함부로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그래. 정치적인 영향력, 재력, 그 자신의 능력과 무력까지 갖춰야만 얻을 수 있는 자리를 너무 우습게 아는 것 같구나.”

“아, 그래요. 간부가 아니라 이사라고 하는 걸 실수했네요. 역할이 너무 비슷해서. 그런 것치고 모든 조건을 갖춘 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뭐?”

“아, 혹시 찔리는 게 있나요? 돈과 권력만으로 간부 자리에 앉으신 분들.”

타냐는 작게 웃으며 공중에 떠올라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간부들과 같은 눈높이였다. 그것에 간부 원강은 벌써부터 열을 내는 듯했지만, 타냐는 지극히 연출된 모습을 보이며 빙그레 웃어 보일 뿐이었다.

“간부 원강님, 사촌분이 실각하셨더라구요. 그 자리에 저희 내담자분이 올라가게 되셨는데, 혹시 알고 계셨나요?”

“뭐… 뭐?! 그게 네가 한 짓…!”

“라몬 님, 어쩌죠. 운영하시던 회사, 저희가 인수한 건데. 저희 쪽 대리인이 워낙 일을 잘해야지요. 그래도 돈은 잘 쳐 드렸으니 만족하셨으면 해요.”

“?!”

“링샤오 님, 지금 운영하시던 단체가 비리로 휘청이고 계시던데. 그쪽 인재들이 다 저희 쪽으로 온 거, 혹시 알고 계셨나요?”

“아, 아니…. 이건…”

“의료기업인 O사, 그곳에서 운영하는 제 타니아나 재단, 대략 O여개 의료기관과 제휴했죠. 그리고 저를 후원하는 회사인 L사와 D사, 처음엔 이렇게 성장할 줄 몰랐는데 보람차네요. 당연히 이게 전부는 아니겠죠.”

이 정도면 정치, 경제적인 영향력은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어진 기억의 상영.

끊임없이 말하는 타냐의 뒤로 기억에서 뽑아낸 듯한 이미지가 흘러갔다. 기억 관련 특기자, 기록 특기자, 상영 특기자··· 들의 능력을 합친 결과다. 그것을 통해 간부진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는, 타냐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 타냐는 짜릿한 쾌감에 처음으로 연출되지 않은 얼굴로 방긋, 웃을 수 있었다.

“그…그래 봤자 실질적인 활동이 없으면 누구도 널 인정하지 않을 거다!”

“멍청한 놈!”

그때, 간부 라몬이 쓸데없는 트집을 잡자 간부 시라노가 노성을 뱉었다. 그래, 쓸데없는 트집이었다. 타냐는 스푼이 창설된 이래, 제일 많이 언론에 노출되고 있는 히어로니까. 영정처럼 방송 활동을 했다면 더 큰 언론 장악력을 보였을 것이다. 타냐는 라몬을 향해 더 눈꼬리를 접어주었다. 더 발끈하는 것이, 비웃는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휘하의 무력이 없다면 히어로 간부로서의 입지가 위험할 텐데? 설마 그 역시 말로 해결하겠다는 건 아닐 거라 믿겠네.”

“아, 물론.”

딱-

청명한 소리와 함께 타냐의 뒤로 수많은 인원이 모여들었다. 모두 하나같이 정장 차림에, 타냐와 같은 흰 케이프, 혹은 코트를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 대개는-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너… 너, 살몬!! 덱스터! 요루!!”

“네 이놈들이… 나를 배신해?!”

“배신이라뇨, 스카우트라고 해주시죠. 제가 권유한 것뿐이에요.”

본인의 과거를 돌아보시는 게, 어떨까요?

“-이건 무효야!”

“이 외에도 저와 함께 일해주시겠다는 분은 많아요. 골라내기 참 힘들었지 뭐예요. 몇 명이나 되는지 안 궁금하세요?”

이 정도면 저 자체의 무력이 없어도 충분할 것 같은데.

당당하게 자격을 펼쳐 보이는 것에, 간부진들은 뭐라 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타냐는 당당한 히어로였고, 이대로 경력이 쌓이고 스푼에 인적, 경제적인 지원만 한다면 차고 넘치는 조건이었다. 오히려 영향력을 잃게 된 것은 라몬과 원강…. 일부러 이런 그림을 의도했던 타냐는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종이를 뒤로 넘겼다. 타냐 휘하의 히어로가 대신 받아서 정리해주었다.

“무엇보다 최강의 특기를 가진 히어로, 나가 군이 저를 돕는걸요.”

간부는 그제야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특기인 염동력으로 타냐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 왜 이제야 눈치챘을까 싶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였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힘의 척도인 인간이 타냐를 따르고 있다? 이따위의 계산이 간부들의 머릿속에 가득할 것이다. 타냐는 그런 생각에 도리어 속으로 진저리를 치며 이어서 말했다.

“아, 자유자재로 기억을 뽑아올 수 있는 특기. 누구일까요? 일부러 데려오진 않았어요.”

“그동안 올렸던 보고서와 저, 그리고 언럭키 씨를 향한 폭언들 역시 잘 담겨있고요. 아, 당연히 그동안 낸 보고서는 가짜겠죠?”

“그냥, 앞으론 제가 여태 보고 들은 모든 게 증거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잘 지켜보도록 할게요.”

“당신들의 뒷모습은 마음만 내키면 다 알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 얼굴에 어울릴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던, 비웃음이 잠시 타냐의 얼굴에 머물렀다가 곧 사라졌다. 어느새 단호한 얼굴로 돌아온 것이다.

“언럭키 씨의 말에 따르면, 간부님 한 분 한 분이 누군가의 영웅이셨다고 하더라구요.”

“…”

“-그리고 저는, 여러분이란 영웅을 자리에서 끌어내릴 힘이 충분해서요. 여러분의 선악을 가릴 수 있는 동등한 위치라고 할 수 있겠죠.”

이 정도면 대화할 마음이 생기셨나요?


타냐는 스푼이 간부진의 결정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그리고 서장인 다나가 그로 인해 고통받는다는 것을 안 직후로부터 이 계획을 세워왔다. 다만, 언럭키가 받는 대우를 보고 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엑셀을 밟았을 뿐이다. 그로 인해 생전 처음 과로도 앓아봤지만, 그만큼 값진 결과를 얻어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타냐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이미 자살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제 지분이긴 한데, 일부를 그냥 드릴게요. 갖고만 계셔도 수익이 들어올 겁니다. 이왕이면 조금씩 더 사두는 걸 추천드리지만, 잘 모르실 테니까. 전문가를 소개해 드릴게요’

‘아, 공무원이시니 당연히 문제없게 처리하겠습니다. 들어오는 돈만 받으시면 돼요.’

‘이런 도구라니…. 개선을 할 수 있다면 선생님은 정신의학과의 영웅이에요!’

‘타, 타냐 선생님…. 쿨럭, 선생님, 이 아니었다면 아들놈과는 평, 평생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겁니다….’

‘절 도와주시겠다구요? 타냐 선생님께 무슨 돈이 있다ㄱ… 아니,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요! 물론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지만….’

타냐는 근 3년간의 경험을 통해 얻어온 인연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사실 그땐 그런 돈과 권력 따위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타냐는 어디까지나 한낱 공무원, 스푼의 상담사였으니까. 오히려 더 부담스럽기도 했다. 다른 히어로들과 달리 특정된다는 이유로 겨우 억지로 떠안은 주식, 대리인, 인력…. 그저 그랬을 뿐인데, 이걸 휘두르게 될 줄이야.

“타냐 선생님?”

“아, 죄송해요. 잠깐 딴생각을 해버렸네요. -그래서 의료 재단 상황은 어떤가요?”

“순항 중이에요. 운영 관련 기관에도 지원자가 차고 넘쳐서 인사 처리를 하는 데 애를 먹고 있구요.”

“일단 다 받아줄래요? 다 저에게 필요한 인력이 될 것 같아서요.”

“그런… 낭비가 되진 않을까요?”

“제 사비로 더 충당할 수 있으니, 걱정 마요.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각자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법이니까요.”

“선생님….”

목걸이에 모래시계를 걸고 있는 올빼미 혼혈, 메이는 감동에 젖은 눈으로 타냐를 바라보았다. 이번 계획의 최대 조력자인, 가정폭력을 휘두른 남편과의 이혼을 타냐가 도와줬던 O 사의 외동딸이었다. 그의 타임 터너가 아니었으면 틈틈이 간부 직속 부하들을 스카우트하는 일의 진행은 요원했으리라. 애초에 번호를 얻는 것부터 난항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최고의 선택이었다.

“메이 씨, 메이 씨와 아울 씨께는 정말로 신세를 지고 있어요. 늘 고마워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희도 얻어가는 게 충분히 많아서 정말 감사한걸요.”

“음, 전 잘 모르겠는데. 하하…. -살몬 씨, 그쪽도 인원 명단을 좀 줄 수 있을까요?”

“네.”

타냐는 자신의 스카우트에 동의한 인원의 명단을 살펴보았다. 타냐가 점 찍어 둔 인원의 대부분이었다. 거부한 인원도 몇 있었지만, 관련 특기자의 능력으로 간부 측에서 먼저 물어보지 않는 이상은 유출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대로라면 간부 원강과 라몬은 거의 모든 직속 부하를 잃게 된다. 타냐는 상쾌하게 웃었다.


얼마 뒤, 백모래를 비롯한 나이프 일당의 검거는 매스컴에 올랐다. 테러리스트이자 살인마 집단의 검거에 성공했다는 내용으로. 어떠한 뒷사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외의 내용은 언론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그저 경찰청의 몇몇이 성과를 인정받았고, 스푼은 여전히 조용했을 뿐이다.

“아, 간부님들이요? 이미 나이프를 공론화한 상태에서 나서는 게 더 손해 아닐까요?”

타냐의 말로는 이에 뒤가 찔려 타냐의 입을 막아버리려는 윗선의 사람들은 진작에 각종 논란으로 침몰하고 그 자리에서 실각했다고 한다. 물론 그럼에도 자리를 지켜내는 간부들은 많았지만, 타냐를 지켜내는 사람들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는 듯했다. 걱정될 정도로 당당한 태도였지만, 생각해보니 나가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었다. 뭐, 나라면 엔간한 위협은 막아낼 수 있겠지. 열심히 도와주자고 생각하며, 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펑, 백모래는 저 폭발 속에서 죽었을 것이다. 타냐는 백모래가 구금된 방 안에 폭탄을 터뜨렸을 사사를 떠올렸다. 이걸로 사사 씨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야지. 타냐는 동그라니 빛나는 완벽을 손바닥에 굴렸다. 오르카가 갖고 있던 바로 그것. 스푼의 검사 결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특기를 가진, 타냐의 것보다 훨씬 커다란 완벽이었다. 정확히 어떤 규모의 상처까지 치유가 가능한지는 측정할 수 없었으나, 이것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오르카는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키를 내던졌다.

“어쩌다 보니 사실이 됐네요. 트리비 의원 부인님.”

그냥 내 특기 때문에 당황해서 잡힌 줄로만 알았는데. 정말로 죽고 싶어 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나이프 내에서도 도덕적인 편이라고 하더니, 그동안의 행적에서 받은 죄책감과 스트레스가 상상 이상인 모양이었다.

만약 그가 히어로에게 주워졌다면 어땠을까?

타냐는 그것이 못내 안쓰러웠다. 하지만 피투성이로 들어와 치료를 받던 귀능을 떠올린 타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애초에 웃고 있지도 않았지만, 더욱더 서늘한 얼굴이었다. 어쨌든 이제 죽어서 볼 일 없는 나이프 삼인방에게 줄 동정 따윈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하아, 인간성. 인간성을 되찾아야지….”

이제 이 일은 이걸로 끝이야. 타냐는 그렇게 결심하며 완벽을 지퍼백에 넣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타냐의 토트백 속에는 각종 동화책이 들어있었다.

-그 계획은 반드시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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