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베

신용

약간의 믿음성, 출처를 알 수 없는 순진으로 자아내는 용기.

상록 by 수림

그렇담, 앞으로 조금 더 익숙해지는 연습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물론 손해를 보고 살아가는 것이 무작정 나쁜 건 아니지만 그 점을 악용하는 이들도 더러 있기 마련이니까……. 네가 이야기한 것처럼 선의는 돌고 돌아 그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것이 이상이고, 사회가 향해야 할 방향이기도 하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사이를 가로막고 서서 당연하다는 듯이 그 선의를 통해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 역시 있거든. 파수꾼, 에클리스 파르디. 네 마을과 세상을 지키는 연습을 하듯이 너 스스로를 지키려는 연습도 한 번 즈음은 해 봐. 아주 나쁜 경험은 아닐 거야.

물론 내가 무언가를 하라, 하지 말라 명령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말이지……. 적어도 너와 나와 같은 친밀한 관계 속에서는 아무 대가 없어 보이는 도움 역시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 오히려 개인과 개인의 관계이니 더욱 값을 치루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 너는 그 사람에게 아무것도 건네주지 않는다고 느낄지 몰라도, 무언가를 내어주던 당사자는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으니 그것이면 되었다고 이야기할 때도 더러 있으니까.

그리 이야기하고는 역시 축제까지 열릴 정도라면 내가 조금 더 많은 걸 돌려받는 기분이잖아. 조용히 왔다 조용히 돌아갈테니, 내 친구의 환대 한 번이면 충분해. 라고 덧붙였다. 물론 워낙 타인과의 교류를 즐기는 성정인지라 정말로 축제의 판이 열리기 시작하면 예정에도 없던 며칠 간의 체류가 이어질 가능성이 컸지만. 그는 제 앞의 상대가 그 스스로의 마을-자신이 파수꾼으로서 지켜야 할 것에 대해 지니는 감정이 단순한 애착 이상의 것임을 어렴풋이 눈치챘으나, 그 흐릿한 안개 너머에 눈길을 둘 생각을 지니지는 않았다. 각자의 삶에는 각자의 미지가 있다. 본능적인 호기심은 그 속을 들여다 보라는 속삭임을 내뱉지만 끝내 그가 내린 판단은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결국 언젠가 눈에 담게 될 애착의 종착지라면 그 풍경에서 무엇인가 깨달을 수 있는 바가 있으리라.

개척-몇 번의 말 전에만 하여도 무언가를 지키고 유지하는 이의 입장에 있던 이가 내뱉은 그 단어는 퍽 독특한 흐름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어울리지 않는 가락을 연주하는 악기의 소리를, 작은 새의 소리를 모방하는 큼지막한 맹수의 목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기묘함을 지닌 소리는, 놀랍게도 그리 나쁘지 않은 음을 자아내고 있었다. 어쩌면 그러한 두려움과 가능성, 미지 따위로부터 무언가를 수호하기 위한 타개점으로 상대는 개척을 선택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래, 마치 결국에는 둥지를 지키기 위해 날개를 펴는 어린 새처럼. 상대가 이어가는 목소리 너머로 마침 새가 나무를 떠나가는 듯한 부산스러운 스침이 들려 왔다.

사실 더욱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쪽은, 그리고 더욱 알기 어려운 쪽은 사람의 쪽이니까. 네 말대로 절망과 희망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리는 책은 드물어. 어쩌면 책이라는 정돈된 형태로 이 세상에 내놓기에는 너무나도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이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사람이 내뱉은 말은 그저 말일 뿐이지만 한 번 활자로 변해 책으로 나오는 순간, 그 내용이 같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확연히 달라지더라고. 아마 책에서 네가 이야기한 것처럼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나, 앎에 대한 추구나, 하늘과 바다에서 파랑이 아닌 다른 색을 찾는 이야기를 듣기는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그렇기에 그 속에 없는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서로에게 수도 없이 많은 의문을 던지는 것이고.

문득, 상대의 뒤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 본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를 만들었던 새의 그림자는 간 데 없이 청명한 밤의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이 정도의 날씨라면 촛불 하나 없이도 앞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따위를 한 번 해 본다.

그런 것들은 꼭 연습하지 않더라도 닿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던 것 같아. 몸과 마음이 커지며 자연히 무언가를 깨닫게 되고, 아무 연습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이지. 돌아가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겠지만 예전보다는 조금 덜 어렵게 그런 말들을 내뱉을 수 있을지도 몰라. 적어도 지금 내가 느끼는 바로는, 너는 그리 어렵지 않게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내뱉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난 그렇게 믿어.

이렇게 이야기하니 정말 어른이 되는 일이 코 앞까지 다가왔구나. 그리 이야기하고는 괜스레 제 손을 매만져 보았다. 더 이상은 굵어지는 뼈마디에 맞출 수 없어 위치를 바꾸었던 반지가 몇 개, 고리를 끼워 맞추는 사슬의 칸이 뒤로 밀린 팔찌가 하나, 한 눈에 보아도 확연히 큼직해진 손과 갑작스레 낯설게 느껴지는 땅과 시선 사이의 거리…….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이불 밖으로 발이 튀어나올지도 몰라-그리 덧붙이는 것은 가벼운 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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