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면서 같은 시선과 이름

가상의 ‘배우론’ -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나 영화에 대한 평론/에세이를 씁니다.

유리 수조 by 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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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함’이란 봐야 할 것이

저 너머에 있다는 것이므로

아역배우라는 출신은 청소년기, 혹은 성인이 되고 나서 배우 일을 시작한 것보다 훨씬 까다롭다. 성인 배우들이 캐릭터 연구, 연기를 향한 진지함, 그리고 성실함과 직업인으로서의 깊이를 평가받는 반면, 아역의 경우 두 가지 반응에만 노출되곤 한다. 첫번째, 번뜩이는 천재성에 감탄하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유형. 두번째, ‘아이 답지 않은 완성도’에서 극성 부모의 그림자를 어떻게든 찾아내려 하는 유형. 그것은 부당하기도 부당하지만 배우 본인에게 있어 긍정적인 영향이라고는 전혀 미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그 두 가지 유형의 관객들의 방식은 두둔할 수도 없고 두둔되어서도 안 되는 일이나, 그 반응의 이해를 〈아웃 오브 더 블루〉에 한정한다면 이유만은 확실하게 공감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어두운 눈빛으로 까만 방 안에 웅크린 자세로 들어 앉아있는 열 살 남짓한 아이의 새까만 눈빛을 극장에서 보았다면, 관객 중 그것을 쉽게 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아이는 우물과 창문, 켜지 않은 TV를 들여다보다가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방 너머를 들여다본다. 문은 닫혀있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유령을 볼 수 있는 듯이 보이는 눈빛처럼. 그런 종류의 불길함은 이성으로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척추와 뒷목을 서늘하게 붙잡아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길함은 일종의 영적인 계시이기 때문이다. 저기에 네가 봐야 할 것이 있다. 네가 보아야 하는데도 보고 싶지 않아 외면해온 것이 저 곳에는 있노라고 천명하는 직감이기 때문이다.

‘오베론 신드롬’은 이처럼 어떤 인간적인 것이 아닌 초월적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보통의 아역 배우에 대한 찬사가 대사 처리, 순간의 표정, 눈물 연기 등의 알기 쉬운 지점에만 머무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분명히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주장하건대, 이것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이어지고 있는 오베론만의 맥락이다.

그는 여전히 그 ‘불길함’과 ‘그림자’의 힘으로 스크린에 자리를 꿰차고 있으므로.

단절된 자리를

무색하게 하는 것

아역 배우 오베론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그 이후로 그는 한동안 스크린에도, 안방극장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커리어는 마치 오랜 장마에 썩어버린 악기마냥 방치되었고, 그 기간동안 그에 대해서 들려온 것은 그저 정규 교육 과정이 아닌 홈스쿨링으로 학업을 대체했다는 소식 하나 뿐이었다. 당연히 그 동안에도 영화계는 뜨겁게 맥동해왔고, 그렇게 사람들은 그를 잊어가는 듯 보였다. 돌아가겠다는 의사 표명도, 근황 보고도 하나 없이 두문불출하는 배우를 성실히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고 보아도 좋으리라. 추억 내지는 과거를 떠올릴 때의 단편적인 언급. 그것이 오베론이라는 배우가 가지는 인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불씨가 사그라든 순간, 그는 전혀 화려하지 않은 방식으로 대중들과 마주하였다. 눈 내리는 저택을 배경으로 하는 7분 가량의 뮤직 비디오. 유명 광고 감독이 참여한 프로젝트이기에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 순간, 화면 안의 남자는 검은 머리카락을 눈이 잘 보이지 않도록 늘어뜨리고는, 화려하게 쏟아져내리는 선율에 춤도 추지 않는다. 그저 그는 카메라의 렌즈를 바라보며 비틀거리는 채로 어딘가로 나아갈 뿐이다. 은으로 된 나이프와 포크가 빼곡한 디너 테이블의 부엌을 지나고, 금실로 수놓인 고풍스러운 책등들이 보이는 서재를 지나고, 미술작품이 즐비하게 걸린 거실을 지나는 걸음은 느리고 불안정하지만 꾸준하다.

음악이 끝나고 남자는 저택의 현관문에 도달하고, 카메라는 천천히 정면에서 측면으로 비켜간다. 그제서야 관객들은 알게 된다. 남자가 시선으로 좇고 있었던 것은 정면도, 카메라도 아니라는 것을. 프레임 안의 오베론은 저택을 빠져나가고, 화면은 그의 등을 비춘다. 그는 맨발로 설원을 천천히 나아가고, 그 끝에 자리하는 것은 겨울이 되어 꺼멓게 죽어 메말라버린 거목이다. 그 곳에 손을 올리고 난 뒤에야 화면은 암전된다. 음악이 꺼지고 나서 이어지는 이 3분 간의 시퀀스에 깃들어 있는 어떤 성스러움은(물론 길이 상으로 훨씬 짧기는 하나)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노스탤지어〉에서 촛불을 옮기는 장면을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인터넷에서는 단번에 화제가 되었다. 대부분은 저 배우가 누구인지를 논하며 불씨를 붙였지만 기억력이 좋은 성실한 관객 중 몇몇은 아역 배우였던 시절의 오베론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의 오래된 경력은 다시 이야깃거리로 화려하게 부활했고, 그는 마치 그간의 공백이 없었다는 것처럼 그 시절에 대해서는 어떤 인터뷰도 하지 않은 채로 연기 경력을 이어갔다. 가히 불상과도 같은 고집이었다.

그 후로는 한 번 더 예상치 못한 변화를 보여준다. 헛다리를 자주 짚지만 결론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탐정 역할로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 이야기의 재기발랄함에 놀란 것이 아니라 캐주얼함과 엇박의 조화를 이루는 그에게 더 놀라곤 했다(그도 그럴 만한 것이 〈미스터 머피〉는 평균 별점 3.0 정도의 무난함이었기에 더 이야기되어질 만한 것이 없기도 했다). 모자를 벗어 던지는 손짓과 두 팔을 벌려 과장된 손짓을 보이는 모습은 그간의 연기를 무덤가의 침묵처럼 보이게 했다. 사람이 죽지 않는 경쾌한 추리물에서 그는 종횡무진 달려나간다. 마치 그가 해내야 하는 것은 정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납득할 만한 공연을 보여야 한다는 것처럼.

그 매력적인 연기가 필모그래피에 더했던 것은 다채로움 뿐만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베론의 커리어 중 가장 큰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Fate/Grand Order〉에서의 캐스팅을 결정 짓는 계기였다.

허락하지 않은 단 한 명이자,

허락되지 않는 단 한 명으로

그리고 경력은 또다시 한 번 반전된다. 눈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쓰던 그는 종종 보이는 눈웃음으로 시선이 도착하는 곳을 숨기기 시작했다. 드라마 〈Fate/Grand Order〉에서의 오베론은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인물이다. 텍스트에서 우러나오는 각자의 인물 해석은 어찌 되었건, 연출과 배우 오베론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가 바라보는 시선 끝의 것은 (철저하게 의도적이거나, 작품 자체의 성긴 완성도로 인하여) 그가 제대로 정체를 밝히기 전까지는 그의 시선 끝에 무엇이 남는지는 제대로 담지 않는다.

카메라가 하나의 언어라고 한다면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가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당연히 오버 더 숄더 샷OTS일 것인데, 그는 그런 방식으로 찍히지 않는다. 타인이 바라볼 때는 타인과 오베론이 같이 담길 때가 있지만, 오베론이 타인을 바라볼 때는 그 대상만이 카메라에 비친다. 그는 같은 프레임 안에 누군가와 함께 나오는 것을 자신의 시점으로는 극도로 거부하며, 그럴 수 없는 객관적 관점에서 촬영될 때만 타인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를 정서적 거절이 아니라고 한다면 무엇이 될까?

이는 재미 있는 흐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유령과 그림자가 드나드는 취약한 소년은 미소로 중무장하여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청년이 된 것이다. 카메라로 보이는 통로는 그에게의 감정적 연결이 모두 차단된다. 객관적 관점에서의 촬영은 상대에게로 이어지는 통로가 아니라 기껏 해야 청사진 정도이리라.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감정적으로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를 진정한 의미에서는 다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격은 상대의 약점을 알아야 가능한 일이니까. 그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만 타인에게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그 매끈한 방어는 미소로 완성된다.

그러나 이야기가 허용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전통적으로 불사와 무적이리라. 아무리 정서에만 국한한다 한들, 그 누구와도 통하지 않아 다치지 않는 자가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무대는 침범자를 단상 위에 올려놓는다.

미스터리와 호러,

다르면서 비슷한 그 이름으로

오베론이 드라마 〈Fate/Grand Order〉에서 맡은 역할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고 말한다면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설득하는 자가 될 것이다. 메타픽션은 현대에 와서는 꽤나 많이 쓰이는 작법이 되었으나, 전통적인 서사 매체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시도되지 않는다. 메타픽션 기법은 근본적으로 몰입을 강화하기 위한 요소이나, 거짓을 자백시킴으로서 획득하는 진정성에는 리스크가 도사리기 때문이다. 그 리스크는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결국 그 자백 또한 근본적으로 거짓에서 기인한다는 데에서 오는 불가피한 지점과, 이야기를 몇 층으로 쌓아올리는 복잡성과 현학성에 대한 사람들의 싫증이다. 드라마 〈Fate/Grand Order〉는 이를 우회적인 방식으로 소화하기 위해 이야기와 실존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트러뜨리고, 늘 그러했듯 그 모호함에서 오는 질문을 감정 호소의 파괴력으로 성공적으로 집어삼킨다.

다만 영리하게 경계를 흐려버리는 작법만으로 안전하게 수행될 만한 이야기 구조였느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 중요한 질문을 피했다고 하더라도 과감함은 과감함이고, 근본적으로 부조리한 폭력 앞에 선 ‘등장인물’에 대한 감정 이입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오베론의 역할이 중요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과거 오베론의 인터뷰를 인용해볼 수 있겠다. 그는 자신이 ‘특출난 상의 미남은 아니’라고 말하여 화제가 된 바 있다. 대중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장난 섞인 경악 혹은 비난을 했는데, 그의 이야기에 아예 진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인상에 선이 또렷하고 음영이 두드러지는 고전적인 미남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선이 정교하게 조형되어 마치 그림처럼 우아한 미청년이느냐 하면 그에도 다소 미치지 못하는 인상이다. 모든 메이크업을 떨어뜨린 그는 차라리 청순하고 정갈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지점에서는 아름답겠지만 그것은 미남이나 미청년보다는 ‘미인’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인상이리라. 이를 지금에 와서 왜 다시 꺼내오느냐, 그것은 그의 중립적인 인상이 이 극을 이끌어 나가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간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두운 배역을 많이 맡아왔고 그로 수상한 경력이 많아 흔히들 오해하는 편이지만, 그의 얼굴만 바라본다면 거기에서는 그 어떤 정보값이나 인상도 읽어내기 어렵다. 언뜻 보았을 때는 책을 많이 읽을 법한 조용한 청년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입술 아래로 불 같은 분노를 품을 법한 자로 비치기도 한다. 칼을 쥐여준다면 싸울 수도 있을 듯하고, 붓을 쥐여준다면 단 한 글자를 섬세히 적어 내려가리라. 그리고 그가 이 이야기에서 분하는 것은 희고 검은 두 자아이다. 희미하게 ‘아무도 아니었던’ 그의 얼굴 위로, ‘누군가’의 감정이 강렬하게 연기로 덧그려지는 그 순간. 그것은 힘을 발휘한다. 분노는 방향을 찾고, 정면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심지에 불이 붙은 채로.

이 지점에서, 그의 상대 배우가 이내일 필요가 생겨난다.

이전의 배우론에서 언급하였듯, 이내는 시선이 가 닿는 곳을 궁금하게 하는 배우다. 세밀한 인상의 눈동자로 무언가를 조용히 응시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그 배우가 바라보는 곳을 보고 싶어하게 된다. 그것이 그가 가진 힘이다. 알지 못하는 것을 향하게 하는 힘이다. 그렇다면 이를 미스터리라 칭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오베론은 시선이 가 닿는 곳을 불길하게 여기게 되는 배우다. 외형 자체만으로는 느낌을 주지 않는 시선이 무언가를 향할 때, 관객은 오베론이 보았던 곳에는 무언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그것이 그가 가진 힘이다. 알지 못하는 것이나 알아왔고, 외면해왔을 것임을 확신하게 하는 것이 그의 힘이다. 그렇다면 이를 호러라 칭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이제는 그 모든 이야기를 걸어왔던 두 사람의 시선이 동등한 높이에서 고요하게 얽히는 순간이다. 그때, 우리는 보고 싶지 않았고, 듣고 싶지 않았으며, 말하고 싶지 않아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자들의 이야기를 이해하게 되고 말았다. 상관 없었노라고, 자신과는 동떨어진 일이라 당당하게 이야기해왔던 것을 철회하고 들여다보게 된다. 그것이 두 배우가 이 이야기에서 가지는 힘이고, 드라마 〈Fate/Grand Order〉에서 들려주는 가장 결정적인 예술의 윤리이다. 알아야 할 것을 전부 보고 읽게 만드는 것. 고결함과 영웅성이 최대의 가치로 나오는 불공평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공평함을 수여하는 도착 지점.

이야기의 결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하루 온종일을 다 써서 이 이야기를 보았다. 이 세계의 모든 것에 매료되고 사랑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두 인물의 시선과 문장만큼은 아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리고 가끔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미스터리와 호러의 간극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이 다음으로 나아갈 때, 의미 있는 ‘다음’을 오베론과 이내라는 배우가 다시금 보여주기를 염치 없이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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