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BL] 노인과 청년 (前) 09
02. 우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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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빛에 달궈진 활주로 위에 불시착한 것 마냥 대기하게 된 의료봉사팀은 더위에 고통 받는 듯한 신음소리를 흘렸고 나는 멍하니 쓰고 있는 모자를 눌러쓴 채로 빈 활주로 위를 바라볼 뿐이었다.
"유엔 측에서 수송기랑 어레인지 해줄 사람들 보냈다니까. 조금만 더 대기하죠."
"하잖아 대기, 대기하는데…. 여기 대기 너무 더워."
강선생님의 말에 송선생님이 지친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에 그걸 가만히 쳐다보던 하선생님이 그런 송선생님에게 말을 걸었지만 송선생님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전화기를 꺼내면서 그 말에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인생 참~ 모른다."
"그래 모르는 번호…."
그렇게 걸려온 전화를 받는 송선생님을 잠시 쳐다봤던 나는 송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고 다시금 그에게로 시선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여보세요. 예, 누구시라고요? 이사장? 어디 이사장? 한 뭐요? 한석원~ 한석원이면 이사람아 한 사장이지 왜, …아 예~ 이사장님. 제가 핸드폰이 누추해서…. 아, 예! 이제 막 우르크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예, 예! 강팀장 바꿔드리겠습니다."
심드렁했던 말투가 점점 아부하는 것처럼 굽신거리는 듯한 말투로 바뀌더니 휴대폰을 귀에서 뗀 송선생님은 짜증으로 물든 얼굴인 강선생님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면서 손에 든 휴대폰을 내밀었다.
"넌 왜 전활 안 받고 그러냐…."
"후우…. 강모연입니다."
-"많이 덥죠. 지금이라도 맘 바뀌었으면 얘기해요. 강선생 한국으로 불러들일 핑계 너무 많으니까."
"하, 되셨고요. 호텔룸으로 부를 때부터 바닥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비겁한 놈인 줄은 몰랐거든요. 이사장님."
그 말을 들은 나는 천천히 강선생님께 다가갔고 조용히 강 선생님이 휴대폰을 들고있던 손을 톡톡 치는 것으로 강선생님의 시선을 받은 나는 휴대폰을 가르킨 손을 내미는 것으로 휴대폰을 달라는 표시를 내보였다.
나의 행동에 얼떨떨하면서도 나에게 휴대폰을 넘겨준 강선생님 덕에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강선생이 그런 타입이라고는 생각을 못한 건 미안하다 생각해요."
"…한석원 이사장님."
-"누구야?"
"한윤슬이라고 합니다. 오랜만이죠?"
내가 옅은 미소를 그리면서 하는 말에 휴대폰 너머에서 잠시 말이 들리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틈타서 내 할 말을 이어 나갔다.
"내 소개도 했으니까 이제 본론을 얘기해볼까? 석원이 형, 내가 한국가면 가만히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마. 내가 왜 조용히 지냈는지 잊으면 곤란하지. 떠올렸으면, 더이상 내 사람들 건들이지마. 그리고 이건 참고사항인데 아버지가 지금 벼르고 계시더라. 해성그룹, 괜찮은지 궁금하네. 그럼 내가 귀국하는 그날까지 잘 지내고, 연락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
"아무리 놀랐어도 대답은 해줘야지."
-"…그래, 알겠다."
"응, 그럼 이만."
그대로 전화를 끊은 나는 얼굴을 풀고 휴대폰의 주인인 송선생님에게 휴대폰을 건넸고 그러면서 송선생님의 얼떨떨한 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쳐다봤다.
"무슨 문제라도…?"
"선배, 이사장이랑… 아는 사이였,어요?"
송선생님은 물론 강선생님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묻고 싶은 얼굴이었는데 나는 그저 웃는 얼굴로 익숙하진 않아도 낯익은 프로펠러와 엔진음을 듣고 하늘로 시선을 옮기면서 툭하고 내뱉었다.
"아버지가 해성그룹 사람이시거든요."
나와는 관련 없다는 식의 말이여도 잘 생각해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테지만 굳이 그것을 짚어줄 생각은 없었다.
내 과거, 출신, 주변 이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는 터라 더이상의 언급은 사양이었다.
그저 이 순간 나타난 군용임이 분명해보이는 수송기를 보면서 나는 그들과는 별개로 복잡해지는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어?!"
강선생님의 목소리에 강 선생님을 향해 시선을 돌린 나는 그녀가 두르고 있던 스카프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그녀 대신 활주로 위로 걸음을 옮겨서 스카프를 주워들었는데 때마침 수송기에서 내리는 이들을 보고 멈칫하고 말았다.
하지만 애써 그들을 뒤로 하고 의료진들과 함께 서있는 그녀에게 걸어가 스카프를 건네주었다.
"저 군인 아저씨 그때 그…."
"맞는 거 같은데."
그리고 그때 뒷쪽에 서있던 최선생님이 하선생님에게 하는 말을 들은 나는 내가 본 이가 그가 맞다는 확신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곧 전투화와 아스팔트로 포장된 활주로가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우르크에 계시는 동안 의료팀 경호 임무를 맡은 모우루 중대 중대장 유시진 대위입니다. 반갑습니다."
사적으로 만날 때와 달리 각잡힌 말투에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나는 몸을 돌려서 그들과 마주했고 시간이 흘렀음에도 별 차이 없는 그의 모습에 순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우르크라는 곳은 안전과 평화보다는 불안과 전쟁이 더 어울리는 곳이었기에.
"여기서부터 목적지인 모우루 비행장까지는 뒤에 보이는 C-130 수송기로 이동하시게 됩니다. 이동 간에 기내에 휴대하실 수 있는 물품은 개인당 나눠드린 군용 더블백 하나로 제한합니다."
옆에 서있는 서대영이라고 했던 남자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뒤에 서있던 군인 두 사람이 의료진들에게 접혀있는 백을 하나씩 나눠주었고 나는 다시금 이것을 손에 쥐에 될 줄은 몰랐다고 생각하면서 익숙하게 군용 더블백을 펼친 뒤 안에 잠시 내려놓았던 스포츠백만을 넣고 닫아버렸다.
"나머지 물품은 육로로 이동, 내일 저녁이면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럼, 앞으로 10분 후인 10시 25분 출발 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가방을 닫은 나는 오른쪽 손목에 하고 있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리저리 긁힌 자국이 많은 시계지만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시계인 터라 그날 이후에 부품만 교체하는 걸로 고장난 걸 해결하고 쓰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이걸 본 이들은 모두 새걸로 안 바꾸냐고 물었지만 이 시계가 멈추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버릴 생각은 없었다.
"준비가 끝나신 분들부터 수송기에 탑승해주시면 됩니다."
그의 말에 내가 가방을 어깨에 메고 걸음을 옮기자 손이 빠른 이들도 정리가 끝난 것인지 내 뒤를 따랐고 나는 그저 말없이 안내를 하는 유시진 대위를 따라서 수송기에 올라탈 뿐이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미리 약을 챙겨먹은 탓에 심하지는 않아도 울렁거리는 속과 지끈거리는 두통에 눈을 질끈 감은 나는 창 밖도 볼 수 없는 탓에 그렇게 암흑 속에서 어서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나를 바라보는 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나는 그렇게 내릴 때까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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