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안님~!

혼마루 by 커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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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의 충고는 옛부터 틀린 게 없구나. 아니 틀린 게 아주 없지는 않은데 괜히 하는 말은 아니구나. 그런 걸 알게 되는 때가 있다. 문지방 밟고 들어가면 안 된다. 밤에 함부로 피리 불지 말아라. 꿈 이야기를 함부로 하고 다니지 말아라……. 네네. 알았어요. 귓등으로 가볍게 흘린 말이, 거봐 내가 뭐랬어. 조심하랬지! 그럴 줄 알았다는 낯설고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울리게 되는 그런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지금처럼.

종교는 없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엄마,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것처럼. 이성연은 상황을 파악하고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꼭 감았다. 하느님 부처님 천지신명님 제발. 제발요. 알고 있는 모든 신을 끌어내 빌었다. 제발 아무 일 없다고 해주세요. 제발, 이번 한 번만 앞으로 착하게 살테니까. 한 번만 봐주세요. 착하게 살면 선물을 주는 산타클로스도 기도문에 추가하고. 천천히 십까지 숫자를 센 뒤에 눈을 뜨자-.

파란 천으로 뒤덮인 상 위에 아래에 깔린 천보다는 색이 옅지만 새파란 그릇과 파란 초가 있고. 그 뒤에는 풍성한 꽃이 그려진 병풍과 거칠지만 멋드러진 선으로 그려진 수묵화 느낌이 물씬나는 대나무 병이 하나 있었다. 새파란 초. 대나무 병과 병풍. …그러면, 혹시? 고개를 살짝 숙여 상 다리 아래를 보자 작은 물 주전자와 잔, 그리고 표주박이 올라간 원형 상이 보였다. 상 위에 음식은 아무것도 없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이거 아무리 봐도.

반대쪽에 응당 있어야 하는 게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 상과 똑같은 상이 하나 더 있어야했다. 뭐가 그려진 병풍이 있고, 수묵화 느낌이 물씬 나는… 대나무가 여기 있으니, 저기는 뭐가 있더라. 아 그래 소나무. 소나무가 그려져 있고. 초와 그릇. 상 다리 아래에는 물 주전자와 잔과 표주박이 새빨간 천과 함께 있어야 했다. 그래야 남녀 한쌍 있는 게 되니까.

어딜봐도 전통 혼례식이잖아. 앞에 있는 그릇만큼은 아니지만 이성연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개인적으로 전통 혼례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 만약 결혼을 한다면 웨딩드레스도 좋지만 이왕이면 전통 혼례로 하고 싶다고 우스갯소리로 떠들기도 했지만. 그러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관심이고 만약이었다. 아니 일시적인 체험이나 기회가 있다면 고민없이 참여하고 그러겠지만!

결혼하는 꿈은 안 꾸고 싶어! 아니 이건 서양식이라도 싫지?! 눈 떠보니 갑자기, 웨딩 드레스를 입고 부케를 들고 있으면 싫지?!

왜 이런 꿈을 꾸는걸까 원인을 돌이켜보자면, 어르신의 충고로 돌아온다. 툭하면 나오는 충고 중 하나. 문지방 밟고 들어가지 마라, 밤에 피리 불지마라. 꿈 이야기는 함부로 하고 다니지 마라. 꿈 이야기. …이상한 꿈을 꿨어. 오늘따라 유달리 기운 없어 보이는 친구에게 무슨 일 있냐고 묻자,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어지는 꿈을 꿔. 이어진다고 해도 막 드라마틱한 뭐 그런 게 이어지는 게 아니고. 무슨 상… 제사상, 은 아닌데. 시골에 가면 있을 법한 상을 앞에 두고 얌전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꿈인데.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고 이쪽으로 오는 발소리만 들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으면서, 언제 올까. 괜히 머리를 매만지고. 가면을 미리 벗어야하나 아니면 인사하고 벗어야하나, 그런 걸 궁리하다가 깨. 진짜 이상한 꿈이지? 꿈이라서 일어나면 기억 안 나. 근데 또 잘 때가 되면, 아니다 꿈 속에서 그 상 앞에 사면 아 또 이거네. 오늘은 올까? 아니면 더 기다려야하나? 생각나서 문쪽만 빤히 보게 돼. 그런 걸 일주일정도 꾸고 있으니까…….

꾸고 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뒤가 잘 생각 안 나지만 컨디션이 별로라고 했을거야. 원래 잠은 꿈없이 푹 자야하는 건데 설사가상으로 일주일 연속 내리 찜찜한 꿈을 꾸고 있으니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지. 힘내라는 의미 반, 전에는 네가 샀으니까 공평하게 이번에는 내가, 그런 이유 반으로 카드를 긁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게 어딨냐고 억울해하는 친구의 모습도. …꿈 이야기를 듣고 어떤 대가를 냈으니 꿈을 사게 된 걸까? 이걸로 낸 게 아닌데도? 다른 걸로 산 건데도? 직접적인 게 아닌데도? 이런 오컬트는 항상 불합리하고 어이가 없다니까. 전에도 도서관 지하서고에서도…….

불평불만을 곱씹으며 턱을 괴니 맨 피부가 만져졌다. 어? 친구는 가면을 쓰고 있다고 했는데. 손으로 얼굴을 더듬자 말끔한 맨 얼굴이 만져졌다. 꿈을 샀는데 내용이 다를수가 있나? 다르면 꿈을 산 의미가 없잖아. 대례상 앞에서 가면을 쓰고 누군가, 아마도 신랑이 될 상대를 기다리는 꿈 아녔나?

아, 아니야. 말은 가면이라고 했지만 가면이 아니야. 친구는 항상 천같기도 하고 종이같기도 한 하얀 물체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얼굴 가림막, 가리개는 이상한데. 진짜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어. 전문 용어가 따로 있나? 있을 거 같은데 어디다 물어봐야할지 모르겠다고 웃던 친구가 생각났다.

친구가? 그런 친구가 있던가? 하얀 걸로, 늘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친구? 남이 어떤 걸 입고 다녀도 그건 자기 자유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런 애가 우리 반에 있었나? 꼬리를 물고 불어난 질문을 잡고 하나하나 생각하고 있으니 점점 정신이 들었다. 아니 아는 사람은 맞는데 친구는 아니야. ‘우리 그렇게 안 친해’ ‘우리가 친구였어?’ 그런 게 아니라……. 아무리 친해도 직장 동료나 동기를 친구라고 말하진 않잖아. 우리는 같은.

같은?

흐릿한 부분을 되짚은 그 순간, 장지문 뒤로 둥근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람 그림자치곤 전체적으로 너무 둥글어서 눈사람처럼 보이는 그런 그림자였다.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여기로 오는 발소리가 들려. 난 발소리 못 들었는데?! 왜 도착하는 부분부터 시작해?! 그런 게 어딨냐고 따지고 화를 내기에는 꿈을 사서 여기에 있는 이 상황부터가 부조리했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가 절정부터 시작하는데? 프시케도 밤에 몰래 오는 남편이 에로스인지 괴물인지 확인하는데 일주일은 보냈을걸. 왜 나는 지금부터 시작이야?

설마, 이럴 줄 알고 일부러 떠넘겼나? 가끔 그런 거 있잖아. 너희 아들은 곧 죽을거야. 그걸 피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에게 화를 넘겨야해. 뭘 해야할지 알겠지? 그런식으로 무당한테 조언을 들어서 나한테 일부러 꿈을 팔았다……. 설마, 그럴리가. 의심하기 딱 좋은 세상이지만 그럴리 없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 사람이 그럴리 없어요.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전 믿어요 그런 끈끈한 믿음이 있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는 같은.

장지문을 부술 기세로 험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건 공중에 붕 뜬 천이었다. 투명인간이 입은 옷처럼 딱 사람이 들어갈 공간만큼 비어있었다. 방은 전통 혼례로 꾸며져 있으면서, 나오는 유령은 고증이 하나도 안 되어 있네. 무슨 생각을 하려고 하면 발생하는 이상 현상, 혼란스러워서 제대로 안 돌아가는 머리.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이 엉망진창이라서 그런가. 이성연은 공중 부양 하는 천을 봐도, 아니 느닷없이 나타난 유령을 봐도 침착했다. 침착하기만 하고 여전히 정신 머리는 우주를 떠돌아다녔지만. 정신 차렸다면 침착하게 어떡하지? 탈출 방법이나 저걸 어떻게든 해보려는 궁리를 했을 텐데. 여전히 우주 속이라 고증이 저게 뭐야 성의없게. 그런 쓸데없는 걸 생각하면서 그 자리에 딱 멈춰섰다.

아니 근데 진짜 저게 뭔데. 먼지와 수상한 얼룩으로 더러워 천이라기보다 누더기에 가까웠다. 누가 결혼할때 저런 걸 입고 오는데. 예절이라는 게 있잖아. 깔끔하고 깨끗한 무명천이라면 베일인가보다, 하지. 저건 진짜 아니야. 성큼성큼 다가온 투명인간이 이성연의 턱을 살짝 들어올렸는데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생각을 했다. 정확히는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공포가 다가오면 사람은 부정하기 마련이고. 엉뚱한 쪽으로 사고를 흘리는 건 훌륭한 회피 수단이 되니까. 상황이 좋아지지는 않지만, 뭐 도피라는 게 상황이 좋아질때 할 수 있는 선택이긴 한가?

이성연의 뺨에 차가운 게 닿았다. 귀신은 음의 덩어리니 귀기가 서렸니 뭐니 해서 차가울 줄 알았는데 투명인간의 손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차갑긴 한데 뼈를 때리는 스산한 차가움이 아니라 체온이 조금 낮은 사람 같았다. ……도, 체온이 낮아서 처음 키스했을때 깜짝 놀랐는데. 본체가 칼이라서 그런가. 철답게 쉽게 뜨거워지고 쉽게 식어서 고생이 많았다. 하지만 어쩌겠어.

어? 어라?

생각을 정돈할 틈도 주지 않고, 입술에 부드러운 게 닿았다.

본론부터 이야기하지. 그래, 본론을 말하면 다 이해해줄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당신은 납득하면 뭐든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으니까.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지? 연련장에서 동료 사니와를 만난 건 기억하고 있나? 그쪽은 완전히 잡혀가기 전, 그 혼마루 히메츠루가 사건을 해결했다. 꿈 속에서 몰래 기회를 노리던 것은 소멸했고, 이 일은 ‘사니와 일 하다 생긴 살짝 신기한 일’로 마무리 되었어야 했는데……. 당신이 그 꿈에 갇혔더군. 뭐 짐작 가는 거 있나? 그쪽은 잘 모르겠다고 했어. 우리도 잘 모른다. 꿈에 박식한 검은 아직 혼마루에 없으니까.

그 혼마루 히메츠루 이치몬지가 원흉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베어 죽였는데. 왜 당신이 거기로 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껍데기만 남은 공간에 당신이 갇혔으니 어떻게든 꺼내야했다. 알맹이가 없는 건 무너지기 쉬우니, 신속하고 정확한 구조가 필요했어. 그래서. 그.

…구조로 내가 왔다.

설명이 조금 모자랐군. 신속하고 정확한 구조가 필요하지만 여기는 어디까지나 꿈이고. 주인은 이미 없는 껍데기뿐인 꿈이다. 그리고 우리는 전문가라고 볼 수 있는 이가 없어.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지? 그, 그러니까 이건……. 비를 데려가기 위한 의식 중 하나라고 하더군. 이곳의 주인은, 마음에 든 자를 이런식으로 데려와 연을 맺게 한 뒤 자기 거처로 데려간다고 해서, 그걸 이용하기로 했다. 우리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의식을 똑같이 재현해서 데리고 나오는 게 가장 안전해보였어.

다른 칼이 아니라 내가 왜 왔냐고? …아직도 의식이 혼탁한 건가? 그럴 수 있지. 주인.

나는 야만바기리 쿠니히로. 누가 베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일단 야만바를 벤 설화가 있는 칼이다. 내 본업이라고 할 수 있어.

그리고…….

결혼식의 마무리는 ……키스인데. 신랑인 내가 아니면, 누가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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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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