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크기
3758자, 악귀멸살 타입
구원을 믿나요?
호시미야 센이 그렇게 물으면, 토미오카 기유는 이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믿고 있다.
뚝, 뚜욱, 뚝······. 질척한 액체가 어딘가에 스며드는 소리가 들린다. 물보다는 조금 더, 뜨겁고. 무게감 있는 그런 액체가 토미오카 기유의 머리를 타고 흘러 하오리에 스며들어서 바닥으로 흐르고 있었다. 토미오카 기유는 자신의 어릴 적 친구, 사비토의 반쪽 하오리에 묻은 피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 어둡구나. 달 하나 뜨지 않은 밤, 사람들은 평화에 취해 잠들 시간이다. 오직 귀살대만이 잠들지 않고 밤의 위협에 맞선다. 토미오카 기유는 파랗고 칙칙한 눈동자를 굴렸다. 발소리. 급하게 다가오는 뜀박질 소리는 익숙한 아이의 것이었다.
"토미오카 씨···! 피, 피가. 다치신 건가요···?"
"이마만 살짝 베였다."
"살짝이 아니잖아요. 아아, 어서 나비 저택으로 가요······."
"알아서 가료할 수 있어."
"그래도·········"
"너는 복귀해라, 호시미야. 나는 근처에 남은 혈귀가 없는지 확인하고 복귀하마."
다른 날과 다르게 호시미야 센은 좀처럼 꼬리를 내리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말라고, 정말 괜찮다고. 몇 번을 거듭해서 말하니 슬슬 귀찮을 정도였다. 그가 결국 몸을 돌려 호시미야를 등지고 가려는 순간이었다.
털푸덕···.
토미오카 기유의 시야가 암전됐다.
피곤하다. 아직 잠에 취한 눈꺼풀이 무겁다. 새하얀 이불은 낯선 감촉이라는 것을 눈치채기엔 채 10초가 걸리지 않았다. 토미오카 기유는 허리를 일으켰다. 베였다고 생각했는데······ 머리 부분을 다친 거였나.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사비토였으면 실수하지 않았을 텐데···. 한탄, 그 어딘가에 위치한 말버릇이 또 나왔다. 그러고 보니, 사비토와 츠타코 누나의 옷을 이어붙인 하오리가 없다. 어디 있지? 잃어버렸으면, 안 되는데. 살짝 다급해진 기유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근처를 살핀다. 머리가 욱신거림에도 다시 누울 생각은 없었다. 내 하오리. 내 하오리.
"토미오카 씨?"
"······호시미야."
"깨어나셨네요···! 정말 걱정했어요. 갑자기 쓰러지셔서······. 여기, 하오리요. 빨아서 말린다는 게, 깨어나지 못하셔서 말씀을 못 드렸어요. 죄송해요."
"···아니. 고맙다. 신세를 졌어."
"신세졌기는요, 저야말로. 토미오카 씨에게············."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하얀 아이를 바라보다가, 토미오카 기유는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이만 실례하마."
"앗, 버, 벌써요?"
"난 기둥이야. 이럴 시간 따위 없다."
"하지만······."
호시미야 센은 더 말을 못 잇고 한참 손가락을 꼬물대다 말했다.
"···부상이, 다 낫지 않으셨는데. 또 쓰러지시면 큰일이 날 거예요······."
토미오카 기유는 그 말을 들었음에도 기어코 하오리를 챙겨 저택을 나섰다.
토미오카 기유는 도망치지 않았다. 다만 완치되지 않은 부상이 심히 거슬렸다. 특히 시야가 계속 흔들려서 목을 노리기가 어려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령 말고 나비 저택에 갈 걸 그랬나. 호시미야의 말대로······. 지원을 나온 일반 대원들은 진작 살해당했다. 유일한 희망인 기둥은 부상을 입어 몸을 가누기조차 쉽지 않았다. 토미오카 기유는 근처 나무 뒤에 숨어 앉아서 숨을 몰아쉬며 뇌를 굴린다. 하현 중에서도 상급. 어쩌면 상현의 아래일지도 모르고. 기둥이 된 이레로, 혈귀로 인해 이렇게 심하게 궁지에 몰린 적이 있었던가?
조금 기다린다고 목을 벨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없다. 지원을 부르면 늦을 것이다. 낭패다! 더 이상, 타개책은······.
아.
하지만.
드디어 그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츠타코 누나, 사비토. 나 열심히 했잖아. 이렇게까지 하며 숨 연명하고 살았잖아.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아? 편히 눈을 감아서, 당신들을 봐도 되지 않아? 그래, 차라리. 편해진다면, 편해진다면·········.
혈귀가 마침내 그를 발견했다. 토미오카 기유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눈을 감고 끝을 기다리고 있었다. 혈귀가 손톱을 세우고 그에게 달려드는 순간이었다.
"별의 호흡, 일의 형. 유성우!"
퍼뜩 눈을 뜨면 보이는 자잘한 별조각. 피에 잔뜩 젖은 흰색 머리카락과 하오리. 땀으로 범벅된 얼굴. 울 것만 같은 표정. 그러고 보면, 호시미야 센은 일전 내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고 했다.
"···이걸로··· 두 번이나··· 빚을 진 건가."
호시미야 센은 토미오카 기유의 앞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혈귀의 목을 베어냄에 따라 센이 뒤집어 쓴 혈귀의 피도 천천히 사라질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쩐지 신경이 쓰인 탓에 팔을 뻗어 흰색 머리칼을 흩뜨렸다. 호시미야 센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걱정했어요."
"그런가."
한참의 정적이었다. 그리고 또 센은 입을 열었다.
"구원을 믿나요?"
"저는 토미오카, 아니, 기유 씨 덕에 구원받았어요."
어떤 구원?
이런 것도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삶을 포기하기 직전 자신을 구해준 게 구원이라면 우리는 이미 수많은 구원을 행하고 있지 않나. 그렇게 간단한 것이 구원일 리가 없다. 구원은 좀 더 거창하고, 대단한 사람이 해야 하는 거다. 나 같이 누구도 지키지 못하는 사내가 아니라···.
"네 구원은 허상이다."
"아니요, 허상이 아니에요."
어느새 센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토미오카 기유는 여전히 가쁜 숨을 내쉬면서 센을 바라보았다.
"기유 씨 덕에 목숨을 구하고, 기유 씨처럼 위험에 처한 누군가를 구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고되고 힘든 훈련이라도 기유 씨 또한 이런 기간을 거쳤다 생각하면 몸에 힘이 들어갔어요. 기유 씨. 구원은 거창한 게 아니에요. 길에서 괴롭힘당하는 고양이를 구해주는 것도 그 고양이에겐 구원이 될 수 있죠. 길가에 시들어 있는 꽃을 옮겨 심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꽃에게는 구원이 될 수 있고요. 기유 씨, 저는 구원을 믿어요······."
잠깐의 침묵. 호시미야 센은 다시 입을 열었다.
"기유 씨. 돌아가요······. 저는, 기유 씨한테, 구원을 받았어요. 그리고 구원까진 아니더라도, 저도 기유 씨에게 도움 정도는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호시미야 센이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완고한 눈빛은 전에 없던 결단력이 있었다. 긴 그녀의 머리가 바람을 따라 흩날렸다.
옛날 사람들은 항해를 할 때 하늘에 뜬 별을 보고 올바른 길을 알아냈다고 한다. 내가 지금 항해 중이라면, 이 넓고 먼 바다와 파도에 머무르는 중이라면. 어쩌면, 내 곁에서 계속해서 머무르며 따스한 말을 건네주는 너는. 어둠 속, 달은 없어도. 많은 숫자로 길을 비춰주는 별빛이 너라면······.
몇 달이 지난 후, 토미오카 기유는 또다시 센을 구해냈다. 센은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어쩌면 시체가 아니라 절망 속에서 몸을 떨고 있는 것도 같았다.
기유 씨. 구원은 거창한 게 아니에요.
길에서 괴롭힘당하는 고양이를 구해주는 것도 그 고양이에겐 구원이 될 수 있죠. 길가에 시들어 있는 꽃을 옮겨 심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꽃에게는 구원이 될 수 있고요.
옛날 사람들은 항해를 할 때 하늘에 뜬 별을 보고 올바른 길을 알아냈다고 한다. 내가 지금 항해 중이라면, 이 넓고 먼 바다와 파도에 머무르는 중이라면. 그리고, 그리고······
나에게 길을 알려준 별을 내가 구원할 수 있다면······.
"네 잘못이 아니다."
센은 기유의 말을 듣고 눈물을 잔뜩 쏟아냈다. 호시미야 센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기 전의 일이었다.
구원을 믿나요?
호시미야 센이 그렇게 물으면, 토미오카 기유는 이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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