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겨울

6455자, 악귀멸살 타입

사시하라 니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글을 시나즈가와 겐지가 보게 하고 싶었다.

유서를 쓰는 법은 의외로 어렵지 않다. 하고 싶은 말을 이것저것 욱여넣고 그것을 유서라 우기면 유서가 되는 거지, 다른 게 아니다. 사시하라 니아는 심중이 깊은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넣다 보면 어느새 종이가 가득 차고 말기 일쑤였다. 다음 장, 그리고 또 다음 장.

그녀에게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남아 있지 않다.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전부 쓰기에는 종이가 모자라다. 시나즈가와 겐야는 유서가 무색하게도 같이 귀살대에 소속되어 있다.

그럼 이 유서를 받는 이는 누구인가? 

시나즈가와 겐야의 쌍둥이 동생. 시나즈가와 겐지였다.


그 해 겨울, 카마도 네즈코가 태양을 극복했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혈귀에 의한 인명피해가 뚝 끊겼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기둥들이 일반 대원들을 데리고 훈련을 시킬 수 있는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도공 마을에서 네즈코의 태양 극복을 겐야와 함께 두 눈으로 지켜봤던 니아는 어쩐지 징조 같다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갖는 평화인가. 

날이 춥다. 시나즈가와 겐지는 도공 마을에서 돌아와 회복을 한 후, 귀살대에서 진행하는 합동 강화 훈련에 참여했다고 한다. 자신의 큰형 시나즈가와 사네미는 기둥이니 말할 것도 없었고, 귀살대의 대원인 시나즈가와 겐야와 사시하라 니아의 얼굴이라도 간만에 보기 위해 겐지는 산을 올랐다. 

"춥네···."

짧은 한 마디를 내뱉으며 양 손을 비비는 겐지였다.

"아무래도 겨울이니 그렇겠지."

"깜짝이야."

허공에 내뱉은 혼잣말은 쌍둥이 형 겐야의 대답으로 인해 얼떨결에 첫 대화의 시작을 끊은 문장이 되어버렸다. 어느새 겐지의 근처에 다가와 가볍게 팔을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는 겐야를 바라보다가, 겐지의 시야가 순식간에 흔들렸다.

"겐지 군!"

"어억!"

사시하라 니아가 한달음에 달려와 겐지의 양 볼을 잡고 당겨 자신의 눈높이에 맞춘 것이었다. 흔들리던 시야가 간신히 고정되었을 때, 겐지의 눈에 사시하라 니아가 방긋 웃는 얼굴이 담겼다. 평소에도 자주 보던 표정.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다른가? 어쩐지 슬퍼 보여. 겐야랑 있을 땐 항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었는데.

"잘 지냈어? 너무너무 보고 싶었는데! 겐지 군은 내가 안 보고 싶었으려나? 있지, 있지. 나 요즘·········."

누가 꽃의 호흡 사용자 아니랄까 봐 벌써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니아. 못 말린다는 표정을 하는 겐야와 유쾌한 얼굴로 꼬박꼬박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겐지였다. 니아는 양 손으로 각각 겐야와 겐지의 손을 잡고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벌써 돌아갈 시간이 됐다. 아무리 혈귀에 의한 인명 피해가 줄었다 한들 만약을 대비해 일반인은 일찍 들어가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간 큰형 사네미도, 쌍둥이 형 겐야도, 그리고 앞에 있는 니아도 걱정할 것이다. 시나즈가와 겐야는 바위 밀기 훈련에 전념하는 상태라 니아에게 겐지의 배웅을 부탁했다.

그녀의 배웅은 의외로 조용했다. 아까 오두막에서 이것저것 이야기했기 때문일까? 등불을 들고 있음에도 니아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겐지는 괜찮겠거니 하며 마냥 앞장섰다.

"배웅해줘서 고마워, 니아. 니아도 조심히 들어가."

"겐지 군."

"응?"

별안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시하라 니아가 입을 열었다. 시나즈가와 겐지는 두 눈을 끔뻑이다가 침묵하기를 택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어련히 제게 말해줄 것이다. 그녀는 솔직한 성격이었으니까.

"나 있지, 샤를(사시하라 니아의 까마귀)에게 맡겨놨어."

무엇을?

"그······ 유서 말이야. 장황하게 썼는데, 나는 영 전할 곳이 없더라고. 그도 그럴 게, 나와 겐야는 언제나 함께잖아! 헤헤. 그래서어··· 겐지에게 주고 싶었어. 내 부고 소식이 들려오면 꼭 읽어 봐. 알았지?"

유서. 그들에게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필 이 아름다운 세상에 혈귀가 존재해서, 그리고 또 하필 그들을 지키기 위해 직접 나서서. 혈귀가 창궐했을 때, 가장 먼저 목숨을 잃는 건 나약한 민간인이니까. 그들을 지키기 위해 언제나 밤에 활동하는 집단. 다만 사시하라 니아는 늘 밝은 모습만 보여주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람은 입체적이라지만, 지금은 퍽 이례적인 경우라. 시나즈가와 겐지는 두 눈만 꿈뻑였다.

"니아,"

"아~ 춥다! 내 대원복 치마는 너무 짧다니까! 그럼 갈게, 나는 밤눈이 밝으니 등불은 겐지 군이 가져가! 그럼 안녕!"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사시하라 니아가 빠른 속도로 돌아갔다. 겐지는 말하지 못한 문장을 마음 속에서 괜히 곱씹다가 고개를 돌리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겐지가 자고 일어난 어느 날 아침이었고 끔찍하리만치 고요했다. 장담하건대 겐지는 이 아침의 정적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까마귀 한 마리가 급하게 날아와 겐지에게 소식을 전했다. 오늘 밤에 최종 결전이 이루어졌다고. 키부츠지 무잔이, 토벌당했다고······.

겐지는 아주 다급히 달려갔다. 살면서 이만큼의 속력을 내본 적이 없었다. 숨이 찼지만 멈출 수 없었다. 세차게 숨을 쉴 때마다 나오는 하얀 입김은 금방 흩어져 사라졌다. 마침내 겐지가 도착한 나비 저택은 가득 차다 못해 부상자가 쌓인 수준이었고, 모든 등꽃 가문의 집도 만원인 탓에 겐지가 쉽사리 진입하지 못했다. 대원들의 시체 여럿. 그 중에서는 귀살대의 기둥도 존재했다. 겐지는 빠르게 근처를 훑었다. 익숙한 인영을 찾기 위하여.

겐지가 찾을 사람은 셋이었다. 시나즈가와 사네미, 시나즈가와 겐야, 사시하라 니아.

하지만 차마 간호사와 은隱 대원들을 밀쳐가며 찾을 수는 없었기에, 겐지의 애꿎은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러갈 뿐이었다. 하얀 머리카락, 측면을 깎은 머리카락, 그리고 회색빛에 꽃이 달린, 긴······

결론부터 말하자면 겐지는 사네미와 겐야, 니아를 사망자들이 아니라 부상자들이 누워 있는 곳에서 찾아냈다. 얼마나 다행이던지. 비록 셋 다 죽은 듯 자고 있었지만. 그리고 셋 다 나란히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지만. 

시나즈가와 사네미는 두 손가락을 잃었으나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시나즈가와 겐야의 얼굴엔 세로로 길게 상처가 남았지만 어째서인지 치유가 빨랐다. 

다만 사시하라 니아는, 그녀는······. 목에 가로로 깊은 상처가 났고, 그 상태에서 몇 번이나 호흡을 사용한 탓에 특히 위독했다. 겐지는 셋 다 깨어나길 간절히 빌었으나, 유독 누워있는 니아의 손을 자주 잡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내가 유서를 읽게 만들지 말라고.

니아. 사랑하는 나의 친구. 

어릴 적 있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분홍색 꽃 한가운데 존재하던 별빛 머리카락을 기억한다.

유년기를 함께했고, 겐야로 인해 다시 만났다. 겐지는 차가운 니아의 손을 잡은 채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겐지는 가끔 너무 어른스러워."

"응?"

"맞아. 나보다 어른스러우면 말 다 했지."

겐야는 겐지랑 싸운 후였고, 겐지와 사네미, 그리고 니아만 꽃밭에 있었을 때였다. 니아의 말에 사네미가 거들었다. 사시하라 니아는 회색 머리카락에 가려진 두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있잖아, 겐지는······ 너무 혼자 책임지려 해. 나 아니면 책임질 사람이 없다면서 우리를 지키려 하는 것 같아.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니아. 나는···."

"어른스러운 겐지가 싫다는 게 아니야. 나는, 그냥··· 겐지가······. 편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니아. 나는."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겐지, 최근에 겐야랑 싸웠지?"

"······응."

"왜 싸웠어?"

침묵하는 겐지를 대신 사네미가 나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니아는 잠자코 듣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이야, 아까도 말했듯이 겐지가 편안했으면 좋겠어.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는 감히 내가 가늠할 수 없어. 그렇기에 알려달라고 하기도 어렵지만···"

니아가 꽃밭에서 유독 작은 꽃을 꺾어 겐지의 귀 뒤에 꽂아주며 말했다.

"딱 이 정도."

계속 말을 잇는다.

"적어도 나랑 있을 때는······"

사시하라 니아의 회색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타이밍에 맞춰 그녀의 앞머리도 흔들렸고, 바다 같은 눈동자가 겐지의 눈에 담겼다. 흔들리는 꽃, 머리칼, 그리고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는 눈동자. '겐야, 네가 그렇게 정을 주는 것들은 널 그만큼 고통스럽게 만든단 말이야···.' 자신이 했던 말이 맴돌았다. 

"겐지가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웃었으면 해. 꽃처럼 활짝."

겐지는 겐야가 아프지 않았으면 했다. 정을 주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크게 사랑했으면 그만큼의 뒷감당을 견뎌내라는 이야기였다. 겐지는 어린 나이에 늘 어른스러웠고, 뒷일을 생각하며 조심스레 행동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는 게, 그렇게 쉬운 말인가. 당장 지금도 돌아가면 우리가 꽃밭에 머무른 시간만큼의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어쩐지 그렇게 해도 될 것만 같아서. 겐지는 무심코 니아의 말에 대답했다.

"······알았어."


봄이 왔다. 생존자들은 대부분 깨어난 상태였고, 다들 흉터나 잃은 부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시점이었다. 벚꽃이 흩날림과 함께, 긴 머리카락이 잘려나가 단발이 된 사시하라 니아가 찾아왔다. 그녀는 대원복 대신 분홍색 기모노를 입고 있었고, 목에 가로로 그어진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겐지 군!"

사시하라 니아가 한껏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손에는 일륜도 대신 서너 번 접혀진 종이가 들려 있는 채였다.

사시하라 니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글을 시나즈가와 겐지가 보게 하고 싶었다.

유서를 쓰는 법은 의외로 어렵지 않다. 하고 싶은 말을 이것저것 욱여넣고 그것을 유서라 우기면 유서가 되는 거지, 다른 게 아니다. 사시하라 니아는 심중이 깊은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넣다 보면 어느새 종이가 가득 차고 말기 일쑤였다. 다음 장, 그리고 또 다음 장.

그녀에게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남아 있지 않다.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전부 쓰기에는 종이가 모자라다. 시나즈가와 겐야는 유서가 무색하게도 같이 귀살대에 소속되어 있다.

그럼 이 유서를 받는 이는 누구인가? 

시나즈가와 겐야의 쌍둥이 동생. 시나즈가와 겐지였다.

수신인이 명확한 유서였고, 사시하라 니아는 자신이 살아남은 이상 이 유서는 남이 아니라 제 자신이 전달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시나즈가와 겐지를 찾아온 거다. 겐지와 니아는 사이좋게 툇마루에 앉았다. 

"읽어도 돼?"

"당연하지! 어서 펼쳐 봐, 겐지 군."

유서

본래 유서는 모두에게 남기는 게 일반적이지만, 나는 남길 사람이 없는지라 이렇게 편지 형식으로 남기게 되었어. 이 편지가 네게 갔을 쯤에는 이미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 후겠지? 유서라는 거, 생각보다 어렵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명확히 존재하니 써 볼게. 

겐지 군. 언제나 고마워. 나 말이야, 겐야를 다시 만난 것도 기뻤지만 겐지 군을 다시 만난 것도 뛸 듯이 기뻤어. 겐지 군은 언제나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거든. 어릴 때, 기억 나? 나랑, 풍주 아저씨랑, 겐야랑, 겐지 군이랑. 셋이서 늘 꽃밭에서 만났었잖아······. 나는 그 시간이 정말 좋았어. 

다시 만났을 때, 겐지 군의 표정은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어. 슬픈 것 같기도 했고, 걱정되는 것 같기도 했고. 나를 보며 반가워하는 것 같기도 했어. 하지만 구석 어딘가에··· 편안한 안도가 숨어 있는 것 같았어. 그래서 나, 엄청나게 기뻤다? 겐지 군이, 나랑 있을 때만이라도 편안하게 있어 달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이번 겨울은 무척 춥더라.

그거 아니? 겨울에만 피는 꽃이 있다고 해. 동백꽃이라고, 새빨간 색이고······ 노란색의 꽃술도 있어서 꼭 겐지 군이 생각나!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일 닮았다고 생각하는 건, 겨울이 어울린다는 거야. 나는 겐지 군을 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겨울이라고 생각해. 드넓고 새하얀 게 꼭 겐지 군을 닮았어. 이 세상이 겐지 군이고, 쌓인 흰 눈은 겐지 군의 지식이라고 생각하면 흰 눈을 소복소복 밟을 때마다 겐지 군의 안에 내가 남는 것 같아. 그 점이 좋아. 

겐지 군의 안에서 내리는 눈은 차갑기보다는 따뜻해. 그건 마치 여름날의 빗방울 같기도 했고, 이불 속 흰 솜 같기도 했어. 

내리는 눈을 맞아도 전~혀 차갑지 않아서, 나는 늘 그 눈을 맞으며 서 있어. 그럼 어느새 내 머리 위엔 눈이 한가득 쌓여. 겐지 군, 만약 내가 죽는다면··· 내가 보는 겐지 군이, 내게 있어 마지막 겨울이라면. 겐지 군, 겐지 군······ 내가 겐지 군과 겐야, 그리고 풍주 아저씨를 기억할 수 있게 미리 동백꽃을 따서 지금 달고 있는 꽃장식 대신 그 동백꽃을 내 머리에 달아주지 않을래? 

부탁할게. 

마지막 겨울에게.

추신
나 말이야, 겐야를 좋아해.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겐지 군이라면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하려나?

사시하라 니아가 어색하게 손을 꼼질거리며 다 읽었냐고 물어볼 때쯤, 겐지가 대답했다.

"바보 니아. 내가 겨울이라면 넌 봄이겠네."

"응?"

"겨울의 끝엔 봄이 있잖아."

겐지가 고개를 들어 니아의 꽃 모양 머리장식을 툭, 치며 말했다. 한껏 처진 눈썹, 그에 비해 올라가 살포시 지은 미소는 겐야와 똑 닮아 있었다. 

"봄에게는 동백꽃이 어울리지 않아, 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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