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5

해진아, 난 여름이 뭐가 좋은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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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푹 찌는 무더운 여름 날이었다. 구월 십오일. 집에 가는 길 아스팔트 도로 위에 일렁거리는 아지랑이가 피어 올랐다. 흰 셔츠에 팔뚝이 닿으면 그대로 달라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습도가 높아 불쾌함이 배가 되었다. 어쩐 일로 집에 해진이와 걸어가는 날이었다. 혼자서 걸어갈 수 없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아마 이게 엄마의 감시였을 것이다. 내가 딴 길로 새지 않게 김해진에게 미리 당부했겠지. 날도 더우니, 집으로 바로 들어오라면서. 착해 빠져선 내 형 행세를 하는 김해진은 아랑곳없이 네,하고 받아들였을테고. 턱 아래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기분이 나빴다. 끈적이는 손이, 팔뚝이, 진득하게 늘어 붙는 운동화와 땀냄새 날 것 같은 양말의 접촉이 내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등에서 물줄기가 흐르는 듯했다. 가방이 있기에 망정이었지, 아니었다면 등에 지도를 그렸으리라. 차라리 이렇게 땀범벅이 될거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벅차고 물로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골목 두개를 빙빙 돌았다. 개라도 된 것마냥 입을 헤-벌리고 숨을 쉬었다. 이번 여름은 폭염 확정이었다. 해진은 옆에서 셔츠를 풀어 재끼곤 하얀 반팔 티를 들었다 놓았다 하였다. 쟤도 만만치 않게 더운가 보다. "날씨 왜 이렇게 덥냐? 어째 매 여름마다 최고 기온 달성이야." "그러게…." 짧막한 대답을 끝으로 말을 끊었다. 정말이지 입 열었다 닫을 기운도 없었다. 해진이도 마찬가지였는지 몇 분간 말이 없었다. 집에 도착하기까지 파란 지붕 하나 남았을 때. 해진이는 걸음을 멈추어 섰다. 너무 더워서 탈진이라도 했나? 하는 생각으로 뒤돌아 봤을 때, 해진은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 뭐해?"

"유진아."

김해진은 예전부터 지어온 미소를 보여주었다. 얼굴을 찡그리면서 입꼬리를 두 뺨 위로 끌어올려 눈까지 함께 웃는… 설명이 길었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장난스레 웃는 얼굴이었다. 더위로 상기된 두 뺨이 평소보다 더욱 발그스레했기에 꼭 그 입에서 바다라도 가자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한유진은 김해진이 그렇게까지 일탈을 일삼는 위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안 먹을래? 내가 살게." 김해진이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이미 아이스크림 먹는 것은 확정인가보다. 나도 썩 나쁘지 않았다. 나는 곧장 해진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돈 많아?"

"이런 때에 쓰라고 용돈 받는 거 아니겠냐. 골라, 골라. 이 형님이 쏜다!"

"형은 무슨…."

낡고 헤진 문방구는 탈탈 털리는 선풍기 소리와 함께 미적지근하게 우릴 반겨주었다. [담배] 라고 정자로 적힌 글씨 아래에 네모난 냉동고 박스에 우린 손을 집어넣었다. 해진은 몸을 부르르 떨며 웃었다. "으흐, 차가워. 좋다." 라고 말하면서 은근슬쩍 더 오랫동안 손을 집어 넣고 있었다. 곧 있으면 문방구 주인 아줌마가 얼음 다 녹는다며 손 빼라고 호통칠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전에 미리 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땀이 얼어 붙는 것 같았다.

"학생들, 거기 문 오래 열고 있지마. 다 녹아서 장사 못 하면 책임질 거야?"

"아, 아이스크림 고르고 있었어요!"

해진은 멋쩍은 표정으로 변명했다. 같이 산지 2년이 넘은 내가 말하건대, 김해진은 거짓말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어쩌다 거짓말이라도 하는 날엔 입을 열기도 전에 뒷목부터 서서히 얼굴이 빨개졌다. 내가 눈 하나 깜빡 않고 말을 꾸며내는 데에 능했다면, 해진은 입을 열지 않고도 진실을 고하는 데에 재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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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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