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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제유진]달콤한 한잔

2019.05.21 작성 | 공백 미포함 2,259자

 "유진군은 술 좋아하나?"

 "술이요?"

 뜬금없는 질문에 한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성현제가 생각보다 가까이 있어 목이 뻐근했지만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거리감에 구태여 뭐라 하지는 않았다. 까만 눈동자가 별말 없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금안을 품은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방금까지 보고 있던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성현제는 한유진과 시선을 맞추며 느리게 말을 꺼냈다.

 "저번 일본에서 칵테일을 꽤 맛있게 마시지 않았나. 그때 함께 못 마신 게 아쉬워서 말이야. 언제 한 번 제대로 잔을 기울여보고 싶다만."

 "술 마실 약속도 하시고 한가하신가 봅니다. 안되었지만 전 누구 씨랑 다르게 바빠서 말이죠."

 언제나처럼 무덤덤하게 톡 쏘게 말을 던진 한유진은 두 손으로 카페라떼를 감싸들고 쪽쪽 빨았다. 애들 돌보느라 피곤하니 큰 걸로 부탁했더니 어째 휘핑크림까지 업그레이드가 된 카페라떼였다. 성현제 이 인간이랑 같이 있다 보면 당 떨어진단 말이지. 달달한 거 먹으니 좀 좋네. 제 딴에는 무표정이라고 지은 얼굴이 서서히 펴지는 것을 보며 성현제는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가 유진이가 못 보는 사이에 다시 내렸다. 덩달아 눈썹까지 축 늘어뜨린 성현제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과장되게 말했다.

 "송실장하고 한잔할 시간은 있고, 파트너와 마실 시간은 없는 건가? 이것 참 슬프다네."

 쿨럭. 순간 사레에 들린 유진이가 작게 기침을 토했다. 반동으로 고개가 앞으로 숙여졌고, 높게 쌓아 올린 휘핑크림에 코가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겨우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든 한유진은 마치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눈으로 다시 성현제를 올려다보았다. 아주 노골적인 눈빛에도 성현제가 뻔뻔스레 우는 시늉을 하자 한유진은 들으라는 식으로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차피 술 마셔도 성현제씨나 저나 안 취하잖습니까."

 "술은 분위기로 먹는다는 말이 있지."

 "성현제씨랑 대체 무슨 분위기로 술을 먹는단 말입니까. 아주 마시다가 체하겠네."

 "파트너끼리 술도 한잔하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자리도 필요하지 않겠나."

 "저는 할 말 없는데요."

 "나는 많다네."

 덧붙여 한유진군에게 내줄 시간도 많지. 언제 울었다는 듯 생글생글 웃는 성현제를 보며 한유진은 미간을 짚었다. 이거 그거다. 거절했다가는 계속 시달릴 패턴. 한유진 본인은 그다지 겪어본 적은 없었지만, 그의 생일 전 나중에 뒤탈 없으려면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던 이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송실장의 피곤한 얼굴도. 송실장님은 성현제와 술 마신 적 있을까? 문득 떠오른 질문에 저도 모르게 상상을 하던 한유진은 이내 질색을 하며 생각을 떨쳐냈다. 상상만으로도 피곤해할 송태원이 쉽게 그려져 괜스레 미안해졌기에. 그런데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한 걸 보면 그런 적이 있을 것 같았다. 아직도 싱글거리며 제 답을 기다리는 성현제를 흘끔거리던 한유진은 깔끔하게 답을 내렸다.

 "언제 시간 되면요."

 거절하자니 끊임없이 그 이야기를 해서 피곤할 것 같고, 승낙하자니 그냥 마시기가 싫고. 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러면 적어도 술 마시자며 갑자기 들려 나갈 일은 없겠지. 스스로 던진 애매모호한 대답에 만족한 한유진은 다시 빨대를 물었다. 만족스러운 것은 성현제쪽도 마찬가지였는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그는 손을 뻗어 한유진의 콧잔등에 묻은 휘핑크림을 닦아냈다. 어? 그거 언제 묻었어요? 성현제의 손끝에 묻은 하얀 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 한유진은 혹여나 다른 데도 묻었을까 코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한유진이 정신이 팔린 사이 성현제는 손끝을 살짝 핥았다. 코코아 파우더가 더해져 달달한 맛이 혀끝을 감쌌다.

 "그럼 유진군이 좋아할만한 것으로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겠네."

 뭐가 좋을까. 적당히 비싼걸로요. 다시 여느때처럼 말을 주고 받으며 두 사람은 방에서 나갔다.


 "같이 마시고 싶었는데 말이지."

 와인맛에 감격스러운 눈빛을 한 남자를 보며 성현제가 못마땅한 듯 턱을 쓸었다. 무려 유진군을 위해 특별히 고르고 고른 것이었는데. 보는 이도 없어 인상을 쓰던 성현제의 얼굴은 제 파트너를 보자마자 스르르 풀렸다. 아까 날 선 분위기는 어느 정도 가라앉고 순수한 감탄만이 거기에 남아있었다. 일단 지금은 자신이 고심해서 고른 와인이 한유진 마음에 들었다는 걸 확인한 걸로 됐다. 감탄도 잠시, 평소대로 돌아와 정보를 캐내는 한유진을 보며 성현제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내 입꼬리가 묘하게 뒤틀렸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스스로가 적은 퀘스트 명을 되새기며 성현제는 제 입맛이 쓴 것을 느꼈다. 한유진의 눈에 감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것을 본 순간, 이 문장이 튀어 나간 것은 단순히 한유진이 그런 상황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성현제 본인에게도 해당하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성현제는 한유진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은 오늘따라 유독 작아 보이는 등에 닿지 못하고 투명한 장막에 가로막혔다. 이렇게 곁에 있는데, 고르고 고른 와인도 있는데 정작 자신은 곁에 있지 못하고 함께 잔을 나누지도 못한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자신의 파트너가 잘 이겨낼 수 있게 지켜보며 인내하는 것뿐.

 "유진군과 만난 이후 매일매일이 인내의 나날이로군."

 성현제가 손으로 투명한 장막을 쓸었다. 아마 장만만 없었다면 한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손길이었다. 분명 혼자서도 잘 해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실제로 잘 해내고 있기도 하지만─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예상치 못한 사건들을 즐기다가 갑자기 그저 텍스트와 아이템 몇 개 보내는 것이 다인 나날을 보내게 되니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부모 심정이 이러할까. 성현제는 헛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끼며 뒤로 살짝 몸을 물렸다. 쓰긴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시 이야기 할 날을 기다리며 입안을 감도는 씁쓸함을 즐기는 것도 제법 나쁘지는 않았다. 마치 디저트를 기다리며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처럼. 남자가 사라진 후, 언제나의 커피라떼를 마시는 한유진을 보며 성현제는 씁쓸함을 음미하듯 느리게 중얼거렸다.

 "언젠가 함께할 달콤한 한 잔을 기다리고 있겠네, 유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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