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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제유진]아직

2019.05.17 작성 | 공백 미포함 2,759자

 악몽을 꾸었다. 유현이, 네가 나오는 꿈이었다. 네가 나를 보고 웃고, 뺨을 감싸고, 형이라며 나직하게 불렀다. 25살의 얼굴로. 꿈이라는 것을 알아도 나는 너를 끌어안지도, 밀어내지도 못한 채 뻣뻣하게 서 있었다. 끌어안기에는 그 추운 곳에 두고 온 진짜 네가 생각나서였고, 밀어내기에는 날 보고 웃는 네가 너무나도 어여뻤다. 회귀 전, 그렇게 웃는 네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왜 이렇게 선명하게 떠오른 것인지. 숨이 막힐 정도로 생생한 꿈에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눈을 떴다. 처음 보인 것은 먹구름이 낀 하늘이었다. 옥상정원인가. 이것도 꿈의 연장인지, 현실인지 순간적으로 분간이 되지 않았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자 허파에 눅눅한 공기가 가득 찼다. 서서히 현실이라는 자각이 든다. 느리게 몸을 일으키자 앞머리가 눈앞으로 떨어져 눈꺼풀을 간질였다. 언제 이렇게 머리가 길었지. 그러고 보니 회귀하고 나서 그 흔한 미용실 한 번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예림이가 코디 받으라고 한 것도 됐다며 거절했으니까. 회귀한 이후 시간이 꽤 지났구나. 그런데도 난 아직 널... 새삼스러운 것을 생각하며 앞머리를 살짝 치우고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식은땀이 맺힌 이마에 서늘한 손가락이 닿았다. 짧아도 생생한 꿈을 꿔서일까. 여운이 강해도 너무 강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머릿속에 남아있는 꿈의 장면들을 몰아내려 길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 아주 조금 속이 풀리는 것 같으면서도 녹진한 응어리가 가슴 쪽에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잘 잤나, 유진군." 

나긋나긋한 중저음의 목소리. 눈동자만 데굴 굴리자 앞머리 사이로 이제는 익숙한 금안이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눈이 웃음을 머금으며 부드럽게 휘어진다. 

"...왜 여기 있습니까." 

"오늘 만나기로 한 약속 잊은 건가. 이것 참 섭섭하다네." 

막 깨어 몽롱한 시야로 시계를 찾았다. 오후 2시 24분.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24분이나 지난 시간이었다. 명백히 내 실수임에도 불구하고 성현제는 기분이 나쁘지도 않은지, 평소와 같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다리 위에 올려져있던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책은 의자에 놓아두고 내 옆에 앉더니 땀으로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정리해준다.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오간다. 이런 곳에서 자면 더 피곤하다네.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속삭이듯 건네오는 말에 인상을 쓰며 손을 쳐냈다. F급의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을 손이 순순히 물러난다. 

"오셨으면 깨우지 그러셨습니까." 

"안 그래도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으면 키스로 깨워야할까 고민하고 있었지." 

"잠꼬대는 댁에서 하시죠?" 

"잠꼬대를하고 있는 건 유진군이 아닌가." 

"잠 다 깼습니다만." 

"내 눈에는 아직도 졸려 보이네만." 

성현제는 낮게 웃으며 언제 갖고 왔는지 보온병을 꺼내 차 한 잔을 건넸다. 예전 피크닉 바구니도 그렇고 이런 걸 챙기는 게 취미인가. 길드장이나 되는 사람이 참 할 일이 없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와 성현제를 번갈아서 바라보다 일단 주는 것이니 조심스레 잔을 받았다. 손바닥을 타고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온다. 차인 줄 알았더니 코코아다. 단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말해도 참 한결같다. 두어 번 후후 불고 한 모금 머금으니 달콤하고 쌉싸름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단 건 별로지만 따뜻한 걸 먹으니 조금 몸이 풀리는 것 같다. 하긴 비 오기 직전의 옥상정원에서 얇은 티 차림으로 벤치에서 자고 있었으니. 한 잔을 다 비우고 나자 성현제는 만족스럽게 웃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피곤한 것 같으니 내일 다시 오지." 

"뭘, 내일 또 옵니까. 번거롭게. 한숨 자서 멀쩡하다 못해 팔팔하니 그냥 지금 얘기하시죠. 오늘 이야기하기로 한 게..." 

"유진군." 

아까까지의 미소는 어디로 갔는지 짐짓 진지한 표정의 성현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젊은 것도 좋지만 젊음을 너무 과신하지 않는 게 좋다네. 무리는 금물이야." 

"그러니까 전 멀쩡..." 

"유진아." 

성현제가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불렀다. 아까보다 단호해진 목소리에 입을 다무니 나 보라는 식으로 짧게 한숨을 내쉰다. 잠시 나를 내려다보던 성현제는 내 옆에 다시 앉고선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내 손보다 훨씬 크고 두꺼운 손. 전혀 다른데도 어째서인지 꿈 속의 유현이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성현제의 손이 목에 닿았다. 이마에도 맺혀있던 식은 땀이 목에도 똑같이 남아있었다. 남의 땀이 손에 닿는 게 꺼려지지도 않은지 성현제는 꿋꿋하게 손가락으로 목을 쓸며 땀을 닦아내었다. 눈을 감은 탓에 그의 손길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굳이 묻지 않겠네." 

"......" 

"그렇지만 힘들 땐 힘들다고 말하는 게 좋아." 

아직 25살이지 않은가. 조근조근 달래는 목소리에 눈을 뜨지 않은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직 25살이라. 하긴 30대 후반인 그에게 그 나이인 내가 한참 어려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지만 25살은 나에게도 어린 나이였다. 우리 유현이. 꿈속에서 본, 회귀 전 마지막으로 본 유현이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래, 아직 25살이었는데. 학교도 가고, 연애도 하고, 친구들이랑 한창 놀 나이인데. 못난 형때문에 그렇게 가버릴 나이가 아닌데. 역시 그 꿈은 악몽이다. 실제로 있을 수 없고, 앞으로도 있을 리 없는 나의 헛된 바람을 담은 지독한 희망 고문. 눈물을 참기 위해 짓이긴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새어 나왔다. 

"이런. 내가 무슨 말실수를 한 모양이군. 너무 세게 물진 말게. 피가 나고 있지 않은가." 

한숨 섞인 말을 흘리며 성현제가 반대쪽 손으로 뺨을 감싸고, 엄지로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낯선 감각에 느리게 눈을 뜨니 유현이 대신 성현제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날 가만히 살피는 눈빛에 뭐 하는 짓이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유현이처럼 웃고 있지 않았다. 유현이처럼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유현이처럼, 어리지도 않다. 마지막 자존심으로 끌어안지도, 밀어내지도 못한 채 가만히 있자, 목에 닿아있던 손이 부드럽게 뒤통수를 감싸더니 나를 제품에 끌어안았다. 나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이 터져나갔다.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낯설다. 부모님한테도 이런 토닥임 받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어쨌든 고작 S급이긴 해도 유진군의 할 일은 나눠 가지지 못할 정도로 능력이 없진 않다네." 

"그 말 대체 언제까지 써먹을 생각입니까?" 

"글쎄. 유진군이 어른이 될 때까지?" 

"명실공히 성인인데요." 

투덜거리며 살짝 이마를 대자 머리 위에서 작게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떨어진다. 내 말이 웃겼나. 살짝 성현제를 밀어내고 그를 올려다보니 아까 그 정색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여느때와 같이 여유로운 미소만이 남아있었다. 먹구름이 끼어 해도 보이지 않아 제법 어두운 옥상정원에서 그의 금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25살의 내가 비치고 있었다. 회귀 전을 떠올려서 그럴까. 새삼 지금의 나 자신이 앳되어 보인다. 그의 눈에는 항상 내가 이렇게 보이는걸까. 내가 유현이를 어리게 보는 것처럼. 잘 생각하면 당연한 사실이 낯간지럽고 묘하게 느껴졌다. 나는 분명 어른인데, 더 크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다니 이상하다. 

"코코아 한 잔 더 하겠나?" 

"주면 먹죠." 

"그럼 본부대로." 

왜인지 기분이 좋아보이는 성현제를 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뻥 뚫려있다는 착각이 들만큼 투명한 유리 너머로 먹구름이 밀려나고 해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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