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현제/송성] 세인트 파인 다이닝 1
세성 길드의 은밀한 복지 혜택 지금 당신과 함께 합니다
-포스타입 백업
-로코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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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파인 다이닝
대외적으로 말하는 세성 길드로 입사 지원 동기는 업계 최고 연봉이었다. 그리고 비공식적으로-어쩌면 공식적일 수도 있는-입사하고 싶은 이유 및 사내 복지 사항 1위는 길드장이었다. 정확히는 길드장인 성현제의 얼굴이었다.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지는 몰라도 얼굴만큼은 자주 방문하는 그 공직자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그러다보니 신입 사원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길드장 얼굴 한 번이라도 직접 보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 바라는 것은 길드장 비서실 혹은 S급 던전 공략 지원팀으로의 부서 이동이었다. 길드장의 얼굴을 직접 보고 싶다는 흑심 가득한 바람이었다.
그럼 신입 사원이 아닌 근속연수 n년차를 넘어가는 직원들은 어떨까. 세성 길드 입사 4년 차 박현서가 길드 내에서 가장 바라는 복지 혜택은 바로 길드 로또, 성현제와의 식사권 당첨이었다.
“아니, 길짱님이랑 밥 먹다가 체하면 어떡해요. 전 무서워서 싫어요.”
“왜요. 저는 정말 좋을 거 같은데. 길드장님 얼굴 보면서 먹는 밥이면 밥 세그릇도 먹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사이좋게 커피를 나눠마시던 세 사람은 박현서가 꺼낸 말에 의견이 갈렸다. 전자는 길드장의 성격을 직접 보고 들은 입사 1년 차 민지원이었고, 후자는 아직 길드장의 실물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입사 1개월 차 김아영이었다. 그 얼굴이면 성격이 아무리 나빠도 괜찮다는 의견과 아무리 그래도 직접 마주 하긴 싫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논란의 불씨를 던진 박현서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길드장님이 구워주신 쿠키 먹어봤어? 진짜 천국이야. 난 길드장님이 해주시는 음식 먹을 수 있으면 다음 달 월급 안 받아도 돼.”
그랬다. 박현서가 바라고 또 대부분의 길드원이 바라는 식사권은 단순히 밥을 같이 먹는 것이 아니라 길드장인 성현제가 직접 요리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기회였다. 길드 밖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성현제는 요리를 정말 수준급으로 잘했고, 실제로 식사권을 얻어 성현제의 식탁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극찬을 했다. S급 각성자의 위압감? 밥 먹기 부담스러운 외모? 어쩌면 벼락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성격? 그 모든 것이 성현제가 내놓은 요리를 한입 먹는 순간 머릿속에서 증발되어 오로지 식사에만 집중하게 만들 만큼 미슐랭 쓰리스타 저리 가라의 맛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일명 세인트 파인 다이닝은 원한다고 해서 누구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식사 자리가 주기적으로 정해진 날짜에 열리는 것이 아니라 성현제가 내키는 날 사내 긴급 공지로 식사 일정이 발송되는 것이었고, 공지 직후 올라오는 불꽃같은 티켓팅 사이트-식사비는 공짜다-에서 터질듯한 트래픽을 뚫고 많으면 세 자리 적으면 한자리인 식사권을 쟁취해내기란 정말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늘 그렇듯이 편법은 존재했다. 세인트 파인 다이닝 자체가 성현제가 내키는 날 열리는 것인 만큼 때맞춰 성현제의 눈에 띄어 티켓팅 없이 직접 초대 받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말이 좋아 편법이지 이것 또한 로또 확률에 가까운 일이었다.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길드장이 언제 그럴 마음이 생기는지 어떻게 알고, 그의 눈에 띈다는 말인가? 때문에 대부분의 직원은 언제 그럴 기분이 들지도 모를 성현제의 근처를 기웃거리다 벼락을 맞느니 티켓팅을 노렸고 로또 확률이라도 도전해보겠다고 하는 직원들은 성현제 본인이 아닌 비서실 직원들의 동향을 살폈다. 근속연수 n년차 모 직원의 빅데이터에 따르면 한 달에 한 번 정도 성현제가 기분이 무척이나 좋은 기간이 있는데 보통 그 주에 세인트 파인 다이닝이 열린다는 것과 보통 그 시기가 길드장 수행 업무 스트레스가 적어 비서실 직원들이 1층 카페 방문 횟수를 줄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시기를 잘 맞춰 길드장의 주변을 기웃거리면 로또 당첨 확률이 아주 조금은 올라갈지도 모른다는 판단이었다.
요컨대 비서실 직원들이 1층 카페 방문을 줄이고, 세인트 파인 다이닝 공지가 지나간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 같은 시기가 오면 길드장실 직행 엘리베이터 주변과 성현제가 자주 방문하는 구역에 인구 밀집도가 높아진다는 뜻이었다.
길드 건물 1층, 로비 옆 카페에 뭉쳐있는 직원들 대다수가 아닌 척 무심한 듯 시크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지만 모든 신경은 길드장실 직통 엘리베이터에 쏠려있었고 구석진 곳에서는 성현제의 눈에 띄는 법에 대한 심도 깊은-앞에서 넘어져 볼까, 차라리 다리에 매달리는게 빠르지, 장갑 던지고 일대일 신청해 그게 제일 빨라-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길드장실 직통 엘리베이터가 1층 도착 알림음을 알린 순간 거짓말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가 이런 것일까. 눈을 반짝이는 직원들이 무심한 듯 시크하게 마시던 커피도 내려놓고 하나둘씩 슬금슬금 엘리베이터 근처로 이동하기 시작할 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언제나와 같이 태양빛이 내려앉은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성현제의 뒤에는 익숙한 그 공직자가 서 있었다. 이건 좀. 이건 무리. 일보 전진했던 걸음들이 세보 후퇴하며 성현제와 함께 내린 공직자의 눈치를 살폈다. 죄지은 것이 없으니 공무원 눈치 볼 필요는 없다지만 경찰차가 지나가면 괜히 쪼는 그런 마음이었다. 식사권은 가지고 싶고 저기 서 있는 새카만 공무원 근처는 못 가겠고 마음속으로 발을 동동 거리고 있을 때 입사 1년 차, 성현제와 같이 먹으면 체할 것 같아 아직까지 세인트 파인 다이닝 식사권 쟁취 방법을 확인해보지 않은, 민지원이 업무에 복귀하기 위해 카페에서 나와 1층 로비를 가로질렀다. 텅 비어있는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민지원이 성현제의 눈에 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는지 태양같이 빛나는 얼굴에 반짝이는 미소를 한 스푼 더 올린 얼굴을 만들어낸 성현제가 걸어가던 민지원을 부르고 명함으로 추정되는 종이 하나를 건넸다.
“7시까지 오게.”
아. 여기저기서 소리 없는 탄식이 터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저기로 지나갈걸. 때늦은 후회들이 몰아쳤다. 모두의 관심 한가운데에 선 민지원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와 미쳤다. 진짜 개 잘생겼어, 대충 그랬다. 식사권에 관심 없던 그도 막상 눈앞에서 공짜로 얻고 보니 만세라도 외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럼 이때 성현제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지금 성현제의 옆에 서 있던 그 공직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뭐야.
눈을 찌푸린 채로 이게 무슨 일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 앞에서도 침착하던 검은색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며 성현제와 눈앞에 서 있는 이름 모를 세성 길드 직원을 번갈아보며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해 보려 애쓰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이런 식으로 성현제가 직원을 불러 세워 호출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업무 문제인가. 7시면 퇴근 이후인데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지.-성현제에 대한 것이라면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그였지만, 세성 길드의 직원이 아닌 이상 은밀한 복지 혜택 세인트 파인 다이닝과 식사권 쟁탈 법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기에 흔들리는 눈동자로 번갈아보아도 소득을 얻을 수 없었다.
“아, 그렇지. 자네 혼자서 오게. 늦지 말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채 파악하기도 전에 성현제가 꺼낸 두 번째 말에 흔들리던 까만 눈이 크게 뜨였다. 그랬다. 이제 어이가 없다 못해 헛웃음이 살짝 나오려 하는 얼굴이었다. 세성 길드와 가장 자주 접촉하고 성현제와 비슷한 비율로 뉴스에 얼굴을 비추는 이 남자는 각성자 관리실 실장 송태원이었고 동시에 세성길드 길드장의 비공식적인 썸남?이었다. 7시까지 오라는 말은 업무 관련이라 생각할 수 있다지만 퇴근 시간 이후에 늦지 말고, 혼자 오라는 말은 업무 문제로 보기 어려웠다. 성현제는 생각보다 직원들의 복지를 잘 챙겨주는 편이었으니 시간 외 근무를 저렇게 웃는 얼굴로 시킬 리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럼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이쯤 되면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송태원이 성현제의 비공식적인 썸남 자리를 차지하기 전, 날고 기는 고등급 각성자들에게 딱 저렇게 웃으며 약속을 잡던 일들이. 그리고 대체로 그렇게 약속에 나갔던 각성자들이 한두 달 이내로 성현제의 애인임을 자청하며 한국에 막무가내로 입국하려 했던 일들이. 그걸 떠올리자 송태원은 마음 속 키티 일기장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잘 생각해 보면 옆에 썸남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작업을 걸리 없다는 것도, 주변에서 부러워하는 탄식이 들린다는 것도 알아챌 수 있었을 테지만 키티 일기장을 꺼내든 송태원에게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성현제와 썸을 탄지 삼 개월. 중학생도 아니고 나이 서른 넘은 남자 둘이서 썸만 탄 게 벌써 삼 개월이었다. 명확한 관계 정립을 하고 싶어도 그럴 분위기를 잡기만 하면 귀신같이 알고 약속을 펑크 내는 성현제를 보아온 송태원의 입장에서, 아무리 점심 약속만 했다지만, 데이트 당일 더블 부킹을 잡는 성현제가 야속하게만 보였다.
송태원이 키티 일기장에 두 줄을 추가한 뒤 성현제가 그럴 리 없다, 오해일 거다, 라며 스스로를 달래고 있을 때 성현제는 사실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슬슬 길드원들 밥을 먹일 때가 되었는데 마침 송태원을 봐서 기분이 좋으니 오늘 먹이면 되겠다는 단순한 결론으로 식사 장소가 적혀있는 명함을 건네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오늘 송태원과 점심 약속을 잡았으니 최대한 오래 송태원과 같이 있고 싶은데, 아 그럼 1인분만 준비하면 되겠군,까지 이어서 떠올리며 길드원과 썸남을 동시에 생각하는 자신에게 뿌듯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송태원이 키티 일기장을 끌어안은 것도 모른 채 햇살 같은 미소를 지은채 길드원의 어깨를 두번 두드려주고-송태원은 여기서 키티 일기장에 한줄 추가했다- 송태원의 손을 잡아끌어 유유히 길드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데이트 시작부터 키티 일기장에 세줄 적립한 송태원은 성현제가 직접 운전해서 데려간 식당에서 한번, 돌아오는 길의 테이크 아웃 카페에서 한 번, 각성자 관리실의 본인 집무실에서 또 한 번. 총 세 번 성현제의 손을 잡았다. 보는 것만으로 달아서 녹아내릴 것 같은 시선으로 살뜰하게 송태원이 먹을 것을 챙겨주고 웃어주는 얼굴에 송태원은 말 그대로 배부른 곰돌이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잡은 손을 꼼질거렸다. 키트 일기장 같은 건 이미 까맣게 잊은 상태로 허허실실 웃고 있다 보니 헌터 협회와의 회의시간이 성큼 다가왔다. 썸남과 함께 하기 위해 비워둔 월급루팡의 한 시간이 끝나간다는 뜻이었다. 송태원은 아쉬운 마음에 잡은 손을 꼬옥 잡고 눈썹을 늘어트렸다.
“오늘, 같이 저녁을 드시겠습니까.”
송태원 스스로는 잘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연하남의 매력 어필을 잘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그 어필이 통하지 않았다.
“미안하군. 저녁에 다른 약속이 있어서.”
그랬다.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지만 성현제는 오늘 송태원의 앞에서 더블 부킹을 잡았었다. 점심은 송태원과 저녁은 다른 사람과. 외간 사람-길드원이다-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던 성현제의 얼굴을 떠올리고 송태원은 키티 일기장에 불을 붙였다. 아주 활활 잘 타오르는 걸 보니 이게 바로 질투인가 싶었다.
사실 송태원은 지금껏 질투라는 것을 크게 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타인이 자신보다 좋은 것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시기해본 적 없고 탐해본 적 없다. 그건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송태원이 해왔던 모든 연애는 물을 타놓은 우유처럼 밍밍했다. 그러니 처음 질투라는 불을 붙여본 마음이 전례 없을 만큼 뜨끈해지는 게 당연했다. 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 너머에서 송태원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성현제는 송태원의 손을 쓰다듬으며 입매를 느슨하게 당겨올렸다.
“대신 시간은 조금 늦겠지만 밤에는 괜찮을 거 같은데, 내 집에 잠시 들려주겠나?”
속 좁은 질투가 혓바닥 위로 쏟아질까 싶어 입은 꾹 다물고 고개만 겨우 끄덕인 송태원이 성현제의 눈에는 시무룩한 곰돌이 정도로 보였는지 제법 기분 좋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보겠다는 말을 하며 아직도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는 송태원의 뺨에 짧은 입맞춤까지 해주면서.
성현제가 사라진 집무실에서 송태원은 허전해진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처음 해보는 질투에 속이 꼬였지만 느리게 심호흡하고 회의실로 갈 준비를 하다 보니 들끓던 불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성현제가 과거에는 어찌 되었건 자신과 썸을 타는 동안에는 단 한 번도 다른 곳으로 눈길 한번 돌린 적 없음을 상기해낸 덕이었다. 제대로 사귀자는 말을 하려고 하면 약속을 펑크 내기는 했지만 그건 전부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지 않았던가. 그래, 이건 다 쓸데없는 질투다.
활활 타오르던 질투를 꺼트리고 제법 산뜻한 기분이 된 송태원은 회의가 끝나면 성현제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조금 전에 웃으면서 배웅해 주지 못 했던 게 마음에 걸려, 성현제가 종종 그러하듯이 이번에는 자신이 다디단 말을 해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주말 데이트는 어디로 가면 좋을지 이야기하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앞으로 약 일곱 시간 뒤, 꺼트린 불씨를 다시 뒤적거리게 될 거라는 것도 모른 채로 행복한 상상을 하며 송태원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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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장님, 퇴근하셨습니까?”
아뇨. 아직 일정이 남으셔서 퇴근하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급한 일이시면 길드장님께 곧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아, 그럼 일정 마무리되는 대로 실장님께 연락 부탁드린다고 전달해두겠습니다. 네, 괜찮습니다. 네네. 수고하세요.
송태원은 세성 길드 비서실과의 길지 않은 통화를 끝내고 휴대폰을 내렸다. 그리고 새카맣게 화면이 꺼진 휴대폰을 손에 쥐고 뻑뻑해진 눈을 깜빡였다가,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오후 9시 30분. 송태원이 성현제의 사택에 들리기로 했던 시간까지 삼십분이 남아있는, 그리고 꽃다발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삼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간. 송태원은 자신의 썸남의 의문스러운 밀회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다.
지금 송태원이 서 있는 곳은 성현제의 사택에서 멀지 않은 골목의 꽃집. 성현제가 나온 곳은 담이 낮은 어느 집. 그 집의 앞에 서 있는 성현제는 낮에 세성 길드 로비에서 보았던 인물과 함께 있었고 무어라 대화-시간이 늦었는데 집까지 데려다주지, 아뇨 괜찮아요. 오늘 식사만으로 충분한걸요-를 하고 있었다. 짧은 대화를 주고받던 인물은 성현제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반대편 큰길을 향해 걸어갔고 성현제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담이 낮은 그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여기서 의문 1. 분명히 아까 퇴근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의문 2. 성현제는 왜 저기에서 나왔나. 의문 3. 왜 둘이 같이 밥을 먹었지?
완전히 연소되었다고 생각한 질투의 불꽃이 살금살금 연기를 피웠다. 이래서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거다. 오해로 피운 질투를 확실하게 꺼트리는 방법은 낮의 통화에서라도 대놓고 물어보았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그걸 하지 않은 탓에 오해만 커졌다.
아무튼 송태원이 가진 의문은 알고 보면 하나의 대답으로 해결되는 일이었다. (3)세성 길드의 복지 혜택인 made by 성현제의 식사 제공을 위해 (2) 세성 길드 소유의 별관에서 (1) 성현제가 직접 요리를 하는 공식적인 일정 소화 중. 하지만 송태원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으니 불태운 키티 일기장에 적립해둔 글만 다시금 떠올렸다. 그리고 사려던 꽃다발을 포기하고 성현제가 들어간 집 앞으로 다가섰다.
일반 주택이라기에는 너무 낮은 담. 존재하지 않는 대문과 좁은 앞마당. 도로를 향해 크게 나있는 창문과 창문을 가린 얇은 커튼. 사람이 거주하는 집이라기보다는 잘 만들어놓은 카페나 개인 식당 정도로 보이는 집이지만 특별한 간판은 없는 곳. 무엇을 하는 곳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업무상 들릴만한 장소는 아닌 것처럼 보이는 집 앞에서 송태원은 고민했다. 이 집의 문을 두드릴까, 말까.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성현제도 이 집안에 있으니 들어가서 물어보면 되는 일이었다. 다만 그것을 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이유는 하나. 혹시라도 성현제가, 정말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자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대답을 할까 봐. 올해로 서른넷 송태원 오늘만큼 속 좁고 오늘만큼 어리석게 구는 건 처음이었다. 사랑에 빠지면 다 바보가 된다지만 이렇게까지 이성이 흔들릴 줄은 송태원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굳게 닫힌 문앞에서 고민하기를 십 여분. 문 건너편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송태원이 어찌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역시 자네였군.”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성현제였다. 문 앞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송태원을 보며 해사하게 웃는 얼굴에는-당연하게도 한점 부끄럼 없이-썸남을 만난 기쁨만 가득했다.
“문 앞에서 그렇게 서성거리면 신고 당하기 쉬우니 조심하게.”
농조 가득한 음성에 얕은 웃음소리를 섞어 말하며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자 송태원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자기를 보고 이렇게 좋아해 주는 사람을 두고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질투를 한 걸까. 그를 사랑하고 믿는 마음 8할에 아주 약간 남은 의심 2할로 애매하게 눈을 피하고 우물쭈물거리자 그새 문을 닫고 돌아선 성현제가 의문 가득한 낯을 했다.
“표정이 안 좋은데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피곤하면 오늘 자고 가도 되는데. 응? 걱정 반 의문 반으로 송태원이 뺨을 가볍게 매만져주는 손길에 송태원은 아주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조금 전에 같이 계시던 분은 길드원입니까.”
“왜 여기 앞에 서 있나 했더니 봤던 모양이군.”
가볍게 끄덕이며 여전히 꿀이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송태원이 왜 그것을 물었는지 모르는 기색이었다. 송태원은 흔들리는 까만 눈동자로 그 얼굴을 마주하다 눈을 질끈 감고 속 좁은 질투를 입 밖으로 꺼냈다.
“왜 길드원이랑 단둘이서, 여기서 식사를 하셨습니까.”
“음? 그거야….”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하던 음성이 도중에 멈췄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성현제가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눈을 깜빡이고 이내 곧 얼굴 가득 꽃이 피어나는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그저 미소만 지었을 뿐일까. 곱게 말려올라간 입술 사이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뺨을 만지던 손이 내려갔다.
“혹시, 질투한 건가?”
그리고 짧게 질문하고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리는 송태원을 보며 확신한 듯 허리를 굽히며 웃었다-송태원은 성현제가 이렇게 웃는 건 처음 봤다.- 맑은 웃음소리가 쉼 없이 나오고 어깨까지 들썩이며 한참을 웃자 송태원은 뒤늦은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차마 그만 웃으라고 말도 하지 못하고 목뒤까지 빨갛게 물든 채로 딱딱하게 굳어있자 성현제가 웃음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들었다. 너무 웃은 나머지 새어 나온 눈물이 눈가에 맺히고 얼굴에는 여전히 웃는 기색이 완연했지만 아무튼 큰 소리로 웃는 것은 멈춘 상태였다.
“갈수록 귀엽게 구는군.”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끝으로 훔치며 송태원이 정말 귀여워서 잡아먹고 싶다는 표정을 한 성현제는 그대로 송태원의 손을 맞잡았다.
“질투하는 건 귀엽긴 하지만 그런 의심을 했다니 조금 속상한데. 내가 그렇게 신용이 없었나?”
“아니, 그건. 그게….”
“죄 없이 의심받은 내 길드원의 명예를 위해 말해주자면 나와 그는 의심할만한 그런 관계가 아니야. 자네와 각성자 관리실 직원들이 그런 것처럼 그냥 상사와 부하 사이지.”
웃는 낯이기는 했으나 단호하게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못 박아주는 목소리에 송태원은 미안함과 어색함을 담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어떻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지 망설이며 우물거리자 성현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긋 웃었다. 그 표정에 무어라 말하려던 입이 꾹 다물렸다. 송태원은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어딘가 심사가 꼬인-송태원은 그걸 사고 치기 10분 전 표정이라고 마음속으로 명명했었다.-얼굴이었지만 잘못을 저지른 지금은 성현제가 제게 무슨 짓을 해도 감내해야만 했다.
“나와 왜 단둘이 식사를 했느냐고 물었었지.”
“...예.”
이대로 화를 낼까. 성현제가 지금까지는 진심으로 화를 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그런다면 어쩌면 좋지.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할까. 고작 부하직원과 밥 한 번 먹은 걸로 질투한다고 정이 떨어졌으면 어쩌지. 초조함에 손바닥이 땀이 배어 나오고 입안이 바싹 마르는 침묵 끝에 성현제는 산뜻하게 웃으며 송태원의 손을 잡아끌었다.
“비밀일세.”
퍽 유쾌하게도 들리는 음성으로 비밀이라고 말한 성현제는 송태원의 손을 잡고 자신의 사택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밤 산책도 나쁘지 않군. 희미하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앞서 걷는 성현제에게서는 크게 불쾌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화는 안 난 건가. 그럼 왜 비밀이라는 거지. 불안함에 성현제의 뒤를 느릿느릿 따라 걷자 힐끔 돌아보는 시선이 있었다.
“한 달.”
“예?”
“한 달 뒤에 알려주지. 대신 그때는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알려줄걸세.”
한 달 뒤에 말해줄 거라면 지금 말해도 되는 게 아닌가. 머리 뒤에서 툭 튀어나온 질문이 있었지만, 어이없는 질투를 하긴 했어도 잘못을 한 지금 해도 되는 말과 하면 안 되는 말은 구분할 줄 아는 송태원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잡은 손에 단단히 힘을 주며 착하네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한 달 뒤에 무슨 짓을 시킬지는 몰라도 일단 지금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되었다고 생각하며 보폭을 넓혀 성현제의 뒤를 따라 사택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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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의 시간은 빠르고도 느려서 하루가 참 길다고 생각하다가도 정신 차려보면 주말이고, 월급날이었고, 약속한 한 달 뒤가 되었다. 송태원이 한 달 전에 했던 속 좁은 질투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던 날씨가 좋았던 어느 아침. 언제나 그랬듯이 폭풍처럼 들이닥친 성현제가 집무실 소파를 차지하고 앉았고, 성현제를 따라서 들어온 그의 비서실장과 송태원의 보좌관이 두툼한 서류와 주의사항을 읊어주기 시작했다.
“마지막 사항입니다만, 당연히 아시겠지만 길드 내에서 보고 들으신 것 중 기밀 사항에 대해서는 함구해 주셔야 하며…,”
내용을 요약하면 그랬다. 빰빠라빰 송태원 실장의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성 길드 일일체험 쨔쨘! 어이없지만 진짜 저 내용이었다. 물론 기획서에 저렇게 적혀있다는 건 아니고, 두툼한 서류 위에 제법 있어 보이는 문장으로 각성자 관리실장이 직접 각 길드를 시찰하여 국내 길드의 실태조사를 보다 더 정확하게 할 것이며 그 첫 번째 대상이 세성 길드라고 적혀있었으나 결국은 송태원이 일일 사원으로 뺑이 친다는 거였다. 그것도 송태원의 동의 없이.
“저는 이런 기획서를 받은 적 없습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자네에게는 오늘 보여준 거니까.”
“예?”
“한 달 전에 약속한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방긋방긋 웃으며 말하는 목소리에 뼈가 있었다. 잊고 있던 한 달 전의 기억이 떠오른 송태원은 눈앞에 내밀어진 기획서를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할 수 없다면 날짜만이라도 어떻게 변경할 수 있지 않을까 눈치를 보며 성현제를 바라보지만,
“안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거절당했다. 시종일관 웃는 얼굴인 걸 보니 꽤나 단단히 벼른 모양이었다. 성현제가 저렇게 나온다면 송태원에게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걸 들어주는 것 말고는. 다행히 오늘은 여유가 있는 날이었다. 던전 브레이크만 없다면 하루 정도는 세성 길드원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길드 실생활을 살펴보는 건 나름대로 괜찮은 일이기도 하고. 느릿느릿하게 서류에 서명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 성현제와 그의 비서실장이 바깥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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