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현제 / 송성] 세인트 파인 다이닝 3 (完)

세성 길드의 은밀한 복지 혜택 지금 당신과 함께 합니다

만식 by 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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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타입 백업

- 로코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 1편 ( https://pnxl.me/wh51wu )

- 2편 ( https://pnxl.me/jyjuuy )


세인트 파인 다이닝

오후 6시 40분. 성현제의 사택 인근의 골목. 지난달 꽃다발을 살까 말까 고민했던 그 꽃집 앞에서 송태원은 한 달 전의 밤을 회상한다. 저기 바로 앞에 보이는 저 집의 앞에 서 있던 성현제와 길드원, 머리가 식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는 상상이었는데 그때는 왜 그런 오해를 했을까. 세성 길드에서 나온 뒤로 벌써 마흔여섯 번째의 한숨을 푹푹 내쉬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곧 성현제와 약속한 시간이 된다. 왜 굳이 여기로 다시 부른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늦는 것보단 일찍 도착하는 편이 좋겠지.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하며 굳게 닫혀있는 문의 초인종을 누른다.

맑은 소리의 초인종음이 울리자 문 너머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지고 이내 곧 성현제가 문을 열고 나왔다. 불이 꺼져있어 내부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지난달과 달리 환하게 켜진 실내 등은 깔끔하게 꾸며진 내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아이보리 컬러의 대리석 바닥과 싱그러운 녹빛의 식물이 공간을 채운, 아마도 로비로 꾸며놓은 듯한 1층 공간을 얼떨떨하게 둘러보고 있자 성현제가 송태원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찍 올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해두길 잘했군.”

준비? 무슨 준비? 서늘한 손이 잡아끄는 대로 2층으로 올라가자 송태원이 예상하지 못한 장소가 나왔다. 오픈 키친과 맞닿은 기다란 다이닝 테이블. 테이블 위에 나란히 세팅된 두 사람 몫의 커트러리와 식당이라면 응당 있어야 하지만 이곳에는 보이지 않는 셰프. 셰프? 잠시만 성현제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지?

다이닝룸을 멍하게 바라보던 송태원이 번쩍하고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돌리자 그런 송태원이 재미있다는 듯 입가를 가리고 작게 웃는 성현제가 보였다. 소매를 걷어올린 셔츠와 평소와 시계를 푼 손목 그리고 허리에 매여있는 구김 없는 검은색 앞치마. 당혹감과 혼란스러움이 잔뜩 섞여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쿡쿡 웃던 성현제가 송태원을 가볍게 밀어 자리에 앉히고 자신은 테이블과 마주한 키친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내가 길드원과 단둘이서 식사를 했던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었나?”

가벼운, 그리고 웃음기 가득한 음성이 송태원이 가졌던 의문을 한번 짚어주고 벽면에 자리한 와인셀러에서 와인을 꺼내들었다.

“이유는 간단해. 그날은 내가 식사를 대접하는 날이었으니까.”

그리고 불친절한 답변을 하며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 답변임에도 섣불리 입을 떼지 못하는 송태원의 앞에 와인잔을 하나 밀어주고 와인병을 기울여 와인잔의 바닥을 채운다. 꼭 성현제의 눈동자 색을 닮은 투명한 노란빛의 화이트 와인이 바닥을 찰랑이며 채워지자 잘 익은 과실향이 맡아졌다.

“길드를 위해 애쓰는 내 사람들을 대접하고자 한 달에 한 번 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네. 이곳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에 제한이 있어 많은 사람을 부르지는 못하는 게 안타까운 점이지만.”

송태원의 잔을 채우면 조금 전보다는 긴 대답을 덧붙이며 자신의 몫의 잔을 채우고는 슬쩍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내가 오늘 송태원 씨를 내 길드원으로 부린 이유도 알 수 있겠지?”

각성자 관리실 소속의 송태원 실장을 세성 길드 부속 건물로 불러내 공식적인 식사 대접을 하는 건 송태원이 언제나 걱정하던 정경유착 의혹을 받기 딱 좋은 일이었지만, 세성 길드원인 송태원을 불러 한 달에 한 번 세성 길드원이라면-어렵긴하지만-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식사자리에서 성현제의 식사 대접을 받는 건 길드 복지 혜택이라고 변명할 수 있었다. 그게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건 모두가 알지만 형식상의 문제였다.

“자네가 권하는 데이트를 거절하는 건 마음이 아프지만 오늘은 이 일정이 먼저라 미안하게 됐군.”

그 식당에는 다음에 가지. 와인병을 치우고 치즈와 올리브, 레몬 조각이 올려진 단 새우를 내려놓는 성현제가 마무리로 눈을 찡긋해보이자 송태원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민망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지난달, 그리고 오늘, 터무니없는 오해와 질투와 삽질을 반복한 스스로가 면이 팔렸다.

송태원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동안 성현제는 와인으로 입술을 축이고 식사 준비를 했다. 송태원에게 밥을 먹이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접시를 내려놓을 때마다 눈을 반짝이는 송태원을 보는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접시 위에 바질 페스토와 토마토 조각을 올리고 미리 손질해 놓은 관자를 버터에 가볍게 앞뒤로 구워 내려놓는다. 어린잎과 식용꽃으로 마무리 장식을 하고 수저로 와인잔의 바디를 툭 치자 맑은 소리가 났다.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고개가 올라왔다. 아직 귀 끝이 빨간 얼굴이었다.

“식사를 할 때는 얼굴을 봐야지.”

접시를 내려놓는 성현제와 어색하게 눈을 맞춘 송태원이 포크를 들었다. 깜찍하긴. 허브 크럼블을 골고루 묻혀둔 양고기를 오븐에 넣고, 데워둔 그릇을 미리 꺼내둔 뒤에 송태원의 옆에 앉았다. 성현제가 자리에 앉자 들고 있던 포크로 관자를 집어 조심스럽게 맛을 보는 송태원의 표정에 조금씩 화색이 돌았다. 

“입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군.”

“성현제씨가 만들어주는 것 중에,”

“맛없는 건 없다는 거지. 알고 있네. 알고 있지만 잘 먹는 걸 보면 새삼스럽게 기분이 좋아져서.”

성현제는 송태원이 먹는 걸 보는 게 좋다는 말이 진실인 듯이 와인만 조금 홀짝이다 송태원이 그릇을 깨끗하게 비움과 동시에 자신의 그릇을 송태원에게 밀어주었다.

“금방 다음 것을 가져오지.”

손을 대지 않은 그릇이 눈앞에 놓이는 것을 보고 송태원이 뒤늦게 표정을 굳히며 약간의 불만 표시를 하긴 했지만 성현제는 그냥 웃고 말았다. 송태원이 불만을 담은 눈으로 성현제 몫의 그릇을 노려보다 느리게 다시 포크를 드는 동안 미리 불을 올려놓은 육수에 손질해둔 문어를 가볍게 데친다. 송태원이 관자를 꼭꼭 씹어 먹는 속도를 가늠해 보며 으깬 감자 한 스쿱을 꾹 눌러 올리고, 팬 위에 버터를 두껍게 칠한다.

넓은 다이닝 공간에 풍미 가득한 버터 냄새가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데쳐진 문어에 버터 향을 골고루 묻히고, 꺼내둔 그릇을 나란히 내려놓는다. 예쁘게 눌린 감자 위로 문어 다리를 가지런히 쌓아 올리고, 비네거와 허브가 무심하게 툭툭 뿌려진다. 보기 좋게 만들어진 뽈뽀를 성현제가 슥 내밀자 송태원이 단호한 음성을 냈다.

“성현제 씨.”

표정을 보니 뒷 순서는 같이 먹지 않으면 자신도 먹지 않겠다는 강한 의사 표현을 하는 것 같았다. 화난 곰돌이 같군. 미간을 좁히고 입을 꾹 다문, 보통은 무서워할 법도 한 송태원의 얼굴을 곰돌이 인형을 보듯 보며 내놓은 것과 똑같은 그릇을 하나 더 만들어낸다. 

식탁 위에 완성된 그릇 내려놓고 다시 송태원의 옆에 앉자 송태원이 시선을 빤히 보냈다. 숟가락을 들 생각도 하지 않는 모양새에 먼저 포크를 들자 송태원이 따라서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성현제가 다시 그것을 내려놓으면 송태원도 똑같이 내렸다. 

“알겠네. 같이 먹지.”

식탁 앞에서 장난을 계속 치고 있을 수도 없어 항복이라며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두꺼운 문어다리를 쿡 찌르자 송태원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길드원분들이랑 먹을 때도 이렇게 하셨습니까. 혼자서 준비하시려면 힘들 텐데….”

성현제가 하지 못하는 일은 없고 풀코스 요리도 아무렇지 않게 뚝딱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당장 지금도 자리에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고, 그릇이 비는 대로 다음 음식을 가지러 일어나는 건 파인 다이닝보다는 차력쇼에 가깝지 않은가. 

“보통 나는 요리를 내기만 하고 같이 먹지는 않는다네. 길드장이랑 나란히 앉아 밥을 먹으면 불편할 테니까.”

“…길드장이 해주는 음식을 혼자 먹고 있는 것도 불편할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흠.”

“체한 사람이 없어 다행입니다.”

성현제는 파인 다이닝 차력쇼를 하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식탁을 앞에 두고 그렇게 번잡스럽게 움직이고 싶지도 않고, 남이랑 같이 식사하는 걸 썩 내켜하지 않는 탓도 있어 길드원들을 초대하는 날에는 식탁에 함께 앉는 일은 없었다. 송태원의 말마따나 고용주가 해주는 밥을 먹기만 하면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길드원들은 성현제를 불편해하는 건 처음 몇 분뿐이고 요리가 나온 뒤에는 주는 대로 맛있게 먹고 기분 좋게 돌아갔었다. 

가끔 여분의 간까지 챙겨온 건지 담대한 친구들은 같이 먹기를 권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불편해서 체한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성현제는 오늘 처음 저 식탁에 앉아보았다. 

오늘도 굳이 옆에 앉지 않고 요리만 내놓을 수도 있었는데도 송태원의 옆자리에 앉아 자신의 몫까지 준비한 이유는 그저 송태원이 혼자 먹는다는 기분을 느끼게 하기 싫어서였다. 물론 함께 하는 기분만 내려고 앉아있다가 눈총을 받기는 했지만.

“다음 순서도 금방 내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게.”

내놓았던 그릇이 바닥이 보이면 성현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송태원도 따라서 일어났지만 하얀 손에 의해서 다시 자리에 앉혀졌다.

“기다리라니까.”

“하지만,”

“여긴 내 공간이고 송태원씨는 초대받은 거니 앉아있어도 돼. 아니면 길드장 명령에 불복할 건가?”

농조를 가득 담은 채 아직 송태원이 제 길드원인 것처럼 말하는 얼굴이 즐거워 보여 불만을 삼킨다. 비워진 그릇을 치우고 잘 손질된 도미 살을 꺼냈다. 손가락 세개 정도의 너비로 토막난 도미를 가볍게 타월로 눌러 물기를 제거하고는 기름을 두른 팬을 꺼낸다. 팬 위에서 살짝 굽는 것도 잠시 가벼운 전류가 팬 위를 타고 흐른다.

“요리는 화력 조절이 중요하니 가끔은 도련님 능력이 부러울 때가 있지.”

화염 계통 능력이 없어 아쉽다는 듯한 어조와 달리 스파크가 튀어 오른 팬 위로 화이트 와인을 두르자 화려하게 불꽃이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화염 능력은 없어도 될 것 같습니다.”

“이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편이 자네에게 더 맛있는 걸 해줄 수 있으니 하는 말일세.”

불꽃이 사라진 팬 위로 고소한 냄새가 맡아졌다. 잘 익은 도미살이 소스가 둘러진 그릇 위에 올려지고 사이드에 구운 야채를 예쁘게 놓이자 혓바닥 아래로 침이 차올랐다. 혼자 요리를 하는 성현제를 걱정하던 눈에 반짝이는 기대가 어리는 것을 보며 그릇을 식탁에 내려놓자 송태원이 곧장 성현제의 손목을 잡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해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기대와 기쁨과 성현제만 요리를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 건 별개의 문제니까.

“같이 먹는다니까.”

“그럼 앉으십시오.”

오븐에 넣어둔 양고기도 확인해야 하고 마리네이드한 방울토마토도 꺼내야 하는데 손목을 잡고 단호한 얼굴로 포크와 그릇을 눈짓하는 모른척 할 방법은 없었다.

“알겠네. 그런데 내가 오븐에 넣어둔 게 있어서,”

“드시고 꺼내셔도 됩니다.”

“음.”

성현제는 곤란한 얼굴로 눈썹을 내렸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송태원의 옆에 앉았다. 이번에도 항복이었다. 성현제가 곁에 앉으면 단단히 붙잡았던 손목을 놓아준다. 그리고 한 입 크기로 먹기 좋게 잘라낸 생선 살을 성현제에게 내민다. 송태원은 그 무거운 입술로 아앙, 하는 귀여운 소리는 하지 않았으나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낯부끄러운 행위였다. 받아먹는 입장도, 내밀어 준 입장도. 포크를 들고 있는 송태원은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귀 끝이 달아올라있었다.

“정말이지, 이길수가 없군.”

실없는 웃음이 새어나갔다. 웃는 얼굴에서 꿀이라도 떨어질 거 같았다. 입술을 작게 벌려 내밀어진 것을 받아먹는다. 혀 위에서 소스와 함께 뭉그러지는 생선 살이 부드러웠다.

성현제는 스스로가 요리를 못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들에 꽤나 만족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만든 것을 즐겁게 탐식하는 일은 없었다. 아무리 잘 만들어봤자 아는 맛이었으니까. 그러나 오늘은 제 손으로 만든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그건 송태원이 직접 먹여주고 있는 덕인듯 했다. 

송태원이 한번. 성현제가 한번. 코스요리인 탓에 양이 그리 많지 않은 각자의 요리를 상대에게 번갈아 먹여주느라 접시가 비워지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성현제에게 한 접시를 깨끗하게 먹여준 송태원은 몹시 만족스러운 얼굴이었고, 송태원의 얼굴을 보느라 아주 드물게 신경이 느슨해졌던 성현제는 뒤늦게 오븐 속 내용물을 떠올리고 눈썹을 찌푸렸다. 겉만 익히면 될 양고기가 오버 쿡이 되었을 게 분명했다. 맛있는 것만 주고 싶은데 곤란하게 되었군.

어떤 상태일지 짐작되는 결과를 보는 것은 성현제라도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큰 망설임 없이 오븐을 열면 먹음직스럽게 익은 양 갈비가 나왔다. 그건 송태원의 눈에는 딱 먹기 좋아 보였으나, 성현제의 눈에는 너무 익어버린-그래봤자 아주 조금이었다-것으로 보였다. 속상하군. 혹시 몰라 준비해둔 여분의 재료들이 있지만 지금부터 다시 익히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농담 삼아 말했던 한유현의 능력이 정말로 탐이 나는 순간이었다.

세심하게 다듬어진 눈썹이 슬픈듯이 내려가자 송태원이 성현제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러십니까.”

“별일 아닐세.”

잘 익은 양고기를 꺼내어 키친테이블에 성현제가 드문 한숨을 내쉰다.

“미안하지만, 다음 순서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예? 예. 괜찮습니다.”

“새 와인을 꺼내줄 테니 마시면서 기다리게.”

송태원은 눈앞에서 방치되고 있는 스테이크보다 진주의 눈물이라도 떨어트릴듯이-송태원의 눈에만 그렇게-보이는 성현제의 얼굴에 안절부절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도울만한 게 있습니까.”

“아니. 그대로 앉아있어도 돼.”

“하지만,”

송태원의 말꼬리를 자르듯 단호하게 새 와인잔이 꺼내졌다. 눈앞에 내려진 잔을 보고 입을 다물면 처음에 따라주었던 화이트 와인이 아닌, 선명하게 맑은 레드 와인이 잔을 채운다. 새로 따라진 음료를 마시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피자, 성현제가 긴 속눈썹을 깜빡인다.

“미안하군. 자네에게 화내는 게 아니야. 내가 조금 속상해서 그런 것뿐이지.”

“속상한 일이 있습니까.”

사이좋게 음식을 나눠먹던 조금 전까지는 기분 좋아보였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불안으로 울렁이는 검은색 시선이 성현제의 얼굴을 똑바르게 응시한다. 그리고 성현제의 시선을 따라 함께 움직여, 오븐에서 나온 뒤로 손도 대지 않고 있던 양 갈비에서 멈춘다. 

“저건 못 먹게 되었으니, 자네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더 길어져서 그렇다네.”

“먹으면…, 안됩니까?”

“생각보다 더 많이 익었지 뭔가. 자네에겐 맛있는 것만 주고 싶으니 저건 곤란해.”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괜찮지가 않아.”

“성현제씨가 해주는 것 중에 맛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건 알고 있네만,”

식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와 같은 대화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송태원이 성현제의 손을 붙잡았다.

“그건 성현제씨가 절 생각해서 만들어준 음식이라 그렇습니다. 더 익고 덜 익고는 상관없습니다. 그런 걸 따질 만큼 까다로운 입맛도 아니라는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건, 제가 억지로 성현제씨를 붙잡고 있던 탓이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그래도 저건 안돼.”

하지만 다소 침울해-마찬가지로 송태원의 눈에만 그렇게-보이는 낯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럼 저건 저건 제가 써도 괜찮습니까.”

“상관은 없네만 나중에,”

“아니 지금 쓰겠습니다.”

잡고 있던 손을 끌어 억지로 자신의 자리에 앉히고 양고기를 살짝 확인해 본다. 기껏해야 겉에 묻은 허브 크럼블 끝이 살짝 그을린 정도일까. 성현제가 속상해할 만큼 엉망이 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지간한 레스토랑의 스테이크보다 나을 것이다. 제게 좋은 것만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였지만, 스스로가 좋은 것을 먹는 것보단 성현제가 속상해하지 않는 쪽이 더 좋았다. 그리고 기왕이면 같이 준비하고 같이 먹기를 바랐다.

스테이크의 상태를 확인하면 곧장 고개를 돌려 성현제가 준비해두었던 밑재료를 확인한다. 

이걸 먹을 예정이었다면 여기에 어울리는 소스며, 가니쉬 재료들을 전부 마련해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짐작대로 꺼내기 쉬운 곳에 놓인 것들이 보였다.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허브 종류 여럿과 야채들을 헤아린다. 성현제가 지금까지 제게 해주었던 것들을 곰곰이 떠올리며 서랍 속에서 작은 사이즈의 팬을 꺼내든다. 그가 해주던 것들을 완벽히 기억하지 못하고, 똑같이 하기도 어려웠지만 흉내를 내어 비슷하게 만드는 정도라면 송태원도 할 수 있었다. 

불을 올린 팬 위에 버터를 넉넉하게 칠하고, 작은 양파처럼 보이는 것과 허브 종류를 한 번에 집어넣고 굽는다. 그리고 아마도, 와인이었나. 기억을 되새김질하느라 잔뜩 좁혀진 미간이 마침 성현제가 새로 꺼냈던 와인병을 쥔다. 병을 쥔 그대로 팬 위에 두르자 콸콸 나온 와인이 팬의 열기에 가볍게 끓었다. 그 탓에 걱정스럽게 송태원을 바라보던 성현제가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그가 웃는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기분이 풀어진 듯 보여 마음이 편해졌다. 끓는 소스 위로 설탕과 소금을 툭툭 뿌리자 성현제가 그 위에 월계수 잎을 하나 더 얹어주었다.

“거기에 초콜릿을 넣으면 더 맛있을 걸세.”

“초콜릿 말입니까?”

“그래. 거기 검은색 통에 들어있다네.”

그의 조언대로 통을 열면 다크초콜릿 조각이 보였다. 두어 조각만 팬 위로 떨어트리면 금방 녹아내렸다. 소스가 팬에 눌어붙지 않도록 신중하게 저어주자 훨씬 편안해진 음성이 턱을 괴고 송태원을 바라본다.

“생각보다 잘하는군.”

“성현제씨가 해주시던 걸 흉내 내는 것뿐입니다.”

“그래도 그 와인을 소스 만드는데 쓰는 사람은 자네뿐일 걸세.”

“안됩…니까?”

성현제의 칭찬에 한껏 부풀었던 마음이 찔금, 쪼그라들었다. 다급한 시선이 콸콸 쏟아부었던 와인의 라벨을 확인한다. 금색의 필기체가 멋들어지게 쓰여있는 빈티지 와인의 라벨에는 몇십 년은 지난 연도가 적혀있었다. 망했군. 성현제를 기쁘게 해주려고 나선 손이 사고를 쳤다. 빈티지 와인의 금액 같은 것은 송태원이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오래될수록 비싸다는 건 알았다. 

소스를 휘젓던 손이 멈추고 황망한 시선이 정처 없이 흔들린다. 나라라도 잃은 얼굴의 송태원 보면 성현제가 매끄럽게 웃었다.

“안 될 거야 없지.”

좋은 와인일수록 좋은 소스가 되지 않겠나. 부드럽게 다독이는 말씨에 송태원의 굳은 낯이 겨우 풀어진다. 정신을 차리고 그새 눌어붙기 직전이 된 소수를 야무지게 저어 마무리한다. 내내 방치되어 조금 식은 스테이크의 갈빗대를 쥐고 결대로 잘라낸다. 깨끗하게 잘라낸 고기를 납작한 그릇 위에 올리고 소스를 살며시 부어본다. 모양새가 그리 썩 예쁘지는 않았지만, 나쁘진 않았다.

소스를 만드느라 가니쉬는 전부 잊었다는 걸 그릇을 내려두고 나서야 눈치챘지만, 이제 와서 저것들을 가져오면 고기가 완전히 식어버릴 것이다. 민망한 기분으로 성현제의 앞에 내려둔 그릇과 얼굴을 번갈아보자, 그가 별다른 감상평 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리고 고기를 한 점 썰어내 삼키고는 사르르 녹아내리듯 웃어 보였다.

“맛있군.”

“성현제씨가 다 준비해둔 것이니까요.”

“아니, 내가 했으면 이렇게 안되었을 걸세.”

이미 성현제가 다 해둔 것에 숟가락만 올린 것이지만, 맛있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그가 계속 제게 요리를 해서 가져다 주는 걸까. 송태원이 성현제의 심정을 헤아리듯 성현제 또한 송태원의 기분을 느끼며 보기 좋게 웃었다.

“다음에는 전부 제가 준비해서 대접하겠습니다.”

“그거, 기대하지.”

“이 뒤에도 남은 순서가 있습니까.”

“샐러드와 디저트가 남아있네만.”

“그건 저도 돕게 해주십시오.”

“알겠네. 그럼 도와주겠나?”

이제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의 곁에 다시 자리를 잡고 앉는다. 성현제가 썰어주는 대로 받아먹은 양고기는 적당히 부드러웠고, 소스는 약간 떫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얼굴이 너무나 달아서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집어삼켰다. 송태원을 정말 사랑스러워 견디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을 보듯이 달게 바라보는 시선에 넋을 놓는다.

이미 다 씻어진 샐러드에 방울토마토를 담아 내놓고, 살짝 살얼음이 언 판나코타를 나눠먹는 동안에도 그랬다. 송태원의 신경은 온통 성현제에게 쏠려있었다. 길었던 식사의 끝. 디저트 그릇까지 비워내 후, 성현제가 차를 끓여오겠다며 일어났을 때. 송태원은 지난 삼 개월간 몇 번이고 기회를 노렸던 말을 준비했다.

오늘이라면, 지금이라면, 그에게 제대로 된 고백을 할 수 있다. 모든 시도를 매번 시도하기도 전에 실패해 아직까지도 비공식적인 썸남?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성현제가 설탕보다도 달게 웃어주는 오늘이라면 달랐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그저 알고 있는 것과 직접 확인하는 건 다르다. 송태원은 지금 그에게 확인 시켜주고 싶었다.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저 답지 않게 유치하게 굴고, 발을 동동거리며 마음을 졸일 만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성현제 씨.”

심호흡 끝에 불러낸 이름. 느리게 돌아보는 낯. 쿵쿵거리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거 같았다.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만큼 익숙해진 얼굴임에도 새삼스레 마주하기가 부끄러웠다. 

송태원이 그저 이름을 부르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찻잔을 꺼내던 그가 큰 보폭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걱정스럽게 묻는 물음. 혹여나 조금 전의 식사로 체하기라도 했을까. 어쩌면 지겹도록 생겨나는 던전 브레이크가 지금 나타났을까. 몇 가지의 가능성을 떠올리며 송태원이 꺼낼 말을 가만 기다리는 낯은 참을성이 깊었다.

뺨을 감싸 쥔 손에 살짝 고개를 기대었다가 바로 들었다. 인벤토리에 내내 넣어두었던 반지 케이스를 꺼내들었다. 새카만 벨벳 케이스가 나오자 성현제가 아주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곧 보기 좋게 호선을 그려낸다. 걱정을 가득 담고 있던 황금색의 눈에는 이제 기대가 가득 차올랐다. 그 얼굴에 용기가 생겼다.

“…사랑합니다.”

사랑한다는 울림이 무겁다. 그러다 버겁지는 않다. 입에 담았던 단어와 문장 중에 지금처럼 마음을 빠듯하게 채웠던 것은 없다. 마른침을 삼키고 케이스를 열어 반지를 보여준다. 송태원이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겨우 골랐던 백금색의 반지. 고작해야 고백 한 번에 반지까지 건네는 건은 너무 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있다. 하지만, 송태원의 남은 생에 반지를 건넬 사람이 있다면 그건 성현제 뿐이었기에. 제게 가장 좋은 것만 보내주는 그에게 송태원도 보답을 하고 싶었다.

“저와 교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그 반지를 내보이는데 망설임은 없었다. 거절당할 거라는 걱정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성현제가 송태원을 거절할리 없다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그런데, 따뜻하게 온기를 품었던 금색의 눈이 오랜만에 한색을 띤다. 

“송 실장.”

이름이 아니라 직함으로 부르는 음성이 건조하다. 어째서. 송태원의 까만 눈에 당혹감이 빼곡하다.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이네만, 두 달 전 만찬회가 있던 날 밤을 기억하고 있나.”

불안. 초조. 그것으로 깜빡이던 눈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두 달 전 만찬회. 그건 정재계 인사들이 모두 초청되었던 헌터 협회 주관의 행사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날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송태원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성현제와 함께 나왔으니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날 내 집에서 같이 술을 마셨던 것도?”

“예….”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던 성현제가 변덕을 부리듯 그의 사택으로 차를 돌렸던 날. 송태원은 굳이 그걸 거절하지 않았다. 다음날은 휴일이었고, 성현제는 송태원이 설탕과자나 다름없을 만큼 조심스럽게 대하던 상대였으니까. 그 집에서 늘 그랬듯이 그가 내어주는 가벼운 안줏거리와 만찬회에서 선물 받았던 술을 나누어 마시고, 푹 자고 일어났었는데.

아니. 제 발로 그 집의 침실로 걸어들어간 기억이 있던가. 턱 아래가 단단히 굳는다.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던 그날. 숙취도 없었고, 자고 일어난 정신도 맑았다. 그때는 왜 눈치채지 못했지. 그 전날 새벽의 기억이 반 이상 날아가 있다는걸.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합니다.”

“그럼 그때 했던 말은 기억 못 한다는 뜻이군.”

송태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자 성현제의 시선이 무심히 가늘어진다. 

그날 무슨 말을 했었지? 아무리 떠올리려 애를 써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술에 취해본 일이 너무 오랜만이었던 탓일까. 혹시 술기운에 실수라도 했던 걸까. 성현제의 표정을 보아서는 일을 쳐도 단단히 쳤는데.

“그래서 내내 풋풋하게 굴었군. 연애에는 영 젬병이라 그런 줄 알았네만.”

“그게 무슨,”

“그날, 내게 좋아한다고 했었지.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하며 사귀어 달라 말했었는데 설마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상태였을 줄이야.”

발아래로 온몸의 피가 전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것 참 곤란하군. 난 지금껏 자네를 내 애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성현제씨. 그게.”

이번에는 정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돌이킬 수 없다. 들고 있던 반지 케이스가 바닥으로 추락한다. 황급히 성현제의 손을 붙잡고 무릎을 꿇는다. 미쳤지 송태원. 지금까지 술을 마시고 실수를 해본 일이 없었는데, 그 최초를 성현제에게 저질렀다. 그것도 기억도 못 하는 고백으로. 

세상에 이런 머저리가 있나. 성현제가 정의되지 않은 관계에 재촉하거나 먼저 확언하지 않는게 이상하다 여겼는데, 이상한 일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술에 취해 고백했던것? 기억도 하지 못했던것? 무슨 말을 꺼내야 성현제가 상처 받지 않을까. 송태원은 여기서 스스로가 차이는 것보다 성현제가 속상해하는 얼굴을 보는 것이 더 두려웠다. 온도가 내려간 저 눈에서 눈물이라도 떨어진다면 정말 견디지 못할 거 같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저 성현제를 붙잡고만 있자, 표정이 사라진 낯이 비스듬히 기운다.

“더 할 말은 없나?”

“성현제 씨, 미안합,”

“지금 했던 고백, 프러포즈로 바꾼다면 받아줄 의향이 있네만.”

더듬더듬 꺼내던 사과가 멈춘다. 사고가 정지하고 멍청하게 입이 벌어진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나? 송태원 실장은.”

도자기 인형처럼 무표정하던 낯이 입매를 당겨올리고 짓궂게 웃는다. 대답해 주면 좋겠는데. 건조해졌던 음성이 다시금 온기를 품었다. 부드러운 손이 송태원의 손을 맞잡아주었다. 

“결혼…. 저와,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성현제 씨.”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입 밖으로 꺼내어진 문장.

“좋아. 송태원.”

그리고 담백한 승낙. 정지했던 사고가 느리게 작동한다. 바닥에 떨어트렸던 반지 케이스를 급하게 주워 반지를 꺼내면 눈앞에 새하얀 손이 내밀어진다. 불거진 곳 없이 단정한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았다.

“사랑합니다. 진심으로.”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나왔다. 일렁이는 목소리가 말하는 사랑에 성현제도 몸을 숙였다.

“나도 사랑하고 있다네. 고백도 기억 못 하는 자네를 마냥 귀엽다고 생각할 만큼.”

습하게 젖어버린 얼굴을 가까이 끌어안고, 얕게 웃는다.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송태원으로서도 드물다 느낄 만큼 즐겁게 느껴졌다. 동시에 아주 조금 속상하게도 들렸다. 그것이 슬퍼, 송태원의 눈이 아래로 축 처졌다.

“죄송합니다…. 그건 정말,”

“이것도 기억 못 하면 자네를 산 채로 길드 건물에 매달아 둘 걸세.”

“이번에는…, 그럴 일 없습니다.”

단호하게. 다짐이라도 하듯이 꾹 눌러 대답하는 음절에 푸스스 웃던 입술이 가볍게 이마 위에 내려앉았다 떨어진다.

“정말이지. 내가 자네를 너무 사랑해서.”

숨 닿는 거리에서 가늘게 접혀 웃는 금색의 눈동자가 꼭 차오르는 태양빛 같았다. 

“너무 사랑해서 큰일이야.”

그대로 거기에 빠져 죽어도 좋다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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