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원현제 / 송성 ]

[태원현제 / 송성] 세인트 파인 다이닝 2

세성 길드의 은밀한 복지 혜택 지금 당신과 함께 합니다

만식 by 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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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타입 백업

- 로코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 1편 ( https://pnxl.me/wh51wu )

- 3편 ( https://pnxl.me/d161z3 )


세인트 파인 다이닝

“길드장 차를 타고 첫 출근 하는 신입사원은 자네가 처음일걸세.”

자의 10 타의 90 으로 성현제의 차를 타고 도착한 세성 길드.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지하주차장이 아닌 로비 입구에 차를 세웠다는 것이었다. 쎄하게 느껴지는 불길한 감-대체로 감이 맞는 편이다.-을 모른척하며 로비 입구로 들어서자 당장 각성자 관리실로 돌아가 서명한 서류를 불태우고 싶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로비 입구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화환-축 송태원 입사 경, 송태원 우리 막내가 돼라, 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들의 문구와 폭죽을 터트릴 준비를 하며 서 있는 직원들에 아마도 제 머리 위를 노리고 있는 것 화관까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상황에 입구에 우뚝 서있자 성현제가 손수 화관을 들고 다가왔다.

“입사 축하하네, 송태원 씨.”

말 끝에 웃음 웃음 이모티콘이 붙어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음성으로 머리 위에 화관을 씌워준 성현제는 곧바로 목걸이가 달린 사원증을 내밀었다. 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공무원증에 붙어있는 것과 똑같은, 몇 년 전 증명사진까지 착실하게 붙어있는 사원증이었다. 팡팡팡 터지는 폭죽 소리를 뒤로하고 성현제는 직접 길드 내부 안내를 시작했다. 로비에 있는 사내 카페부터 각 층의 부서 위치와 각 부서 담당자들까지 인사 시켜주며 길드 운영에 대해 꽤 진지한 얼굴로 알려주는 덕에 송태원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에 부가사항들을 추가 저장하며 성현제의 뒤를 잘 따라다녔다. 

그리고 길드 건물 순회가 끝나고 다시 로비. 들어오면서 보았던 화환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 대신 뽑기 상자로 추정되는 물건이 로비 한가운데에 놓여있었다.

“일일 사원 체험이니 이름값은 해야지.”

로비 한가운데 놓여있는 상자는 송태원을 자기 팀원으로 데려가고 싶은 부서들이 이름을 넣는 상자였다. 부서가 워낙 많으니 그걸 전부 돌아보기는 어려우니 하나만 뽑아서 진득하게 체험해 보자는 취지였는데,

“이거 빈 통 아닙니까.”

추첨을 위해 송태원이 상자에 손을 넣어봤지만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길드장을 따라 내리는 송태원의 얼굴만 봐도 뒷걸음질치는 길드원인데 아무리 하루짜리 체험이라지만 자기 부서 막내로 송태원을 데려가고 싶어 하는 부서가 많을 리가 없었다. 개인의 도덕성은 둘째치고 업무상 켕기는 게 많은 부서는 당연히 고사했고, 

“아, 한 장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부서들은?

“세성 길드 길드장실…, 이라고 적혀있습니다만….”

성현제가 직접 길드장실 이름을 적어서 추첨통에 넣었다는 말을 듣고 부서 이름이 적힌 종이를 모두 쓰레기통에-부서 막내들의 원성이 쏟아졌지만-집어넣었다. 송태원을 막내로 부리고 싶다는 배짱이 있는 길드원들도 송태원이 방문함으로 인해 쏟아질 길드장의 관심을 받고 싶지는 않은 탓이었다.

 

“오, 축하하네.”

텅텅 빈 추첨 통과 날렵한 필체로 길드장실이라고 적혀있는 종이를 번갈아보던 송태원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썸남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건 당연히 좋지만 그래도 업무의 일환인데 그냥 이렇게 좋아해도 되는 건가 싶은 직장인의 양심이 콕콕 찔렸다. 

“오늘 하루 계시는 거라 기본적인 아셔야 하는 내용만 적어두었습니다.”

송태원의 감상이 어찌 되었건 그가 길드장실로 가게 될 거라는 게 당연했다는 것 마냥 준비된 파일을 비서실장이 건네자 성현제가 꽤나 유쾌해 보이는 얼굴을 했다. 성현제 본인이 계획한 일이니 즐거운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저렇게까지 재미있어하니 장단을 맞춰주어도 괜찮을 거 같았다. 

수고하라는 말과 함께 스쳐 지나가는 성현제를 따라 자연스럽게 송태원이 걸음을 떼자 뒤쪽에서 비서실장이 덥석 붙잡았다. 예상하지 못한 손길에 멈칫하며 돌아보자 건조한 표정의 비서실장이 바로 옆에 서 있는 비서실 직원을 소개했다.

“송태원 실장님이라면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파일 내용은 한번 확인 해 보시는 게 편하실 겁니다. 자세한 사항은 여기있는 한혜진 씨가 알려주실 겁니다.”

그리고 성현제와 마찬가지로 수고하라는 말과 함께 앞서간 성현제를 따라 사라졌다.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네. 길드장님 수행은 비서실장님이나 보좌관님이 하실 일이라 송태원 실장님은 오늘 저랑 같이 업무를 보시면 돼요.

일해야 하는 곳이 길드장실이라길래 당연히 성현제 직접 수행 업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괜한 김칫국을 마신 것 같아 민망함에 뒷목이 뜻뜻해지기도 전에 한혜진이 빠른 걸음으로 송태원을 잡아끌었다.

“길드장님 오늘 공략 회의 한 건, 외부 미팅이 두 건, 인터뷰 한건 있으세요. 미팅은 12시 30분에 S 호텔 매화룸. P 제약 대표님이랑 점심 식사하시면서 진행하실 건데 신경 써야 하는 게 많아서 미리 가서 체크해야 해요.”

오늘 일정 자체는 널널한 편인데 이게 다 오후로 밀려있어서 시간이 좀 타이트해요. 그래도 미팅 장소를 다 가까이 잡아둬서 다행이에요. 실장님 혹시 궁금한 거 있으시면 편하게 물어보셔도 되고, 파일은 가시면서 보세요. 아 그런데 실장님이 정말 오실 줄은 몰랐어요. 바쁘실 텐데 직접-

재잘거리는 한혜진의 목소리를 BGM 삼아서 파일 내용을 훑어보니 생각보다 많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오늘 하루 성현제의 공식 일정과 만나게 될 사람들의 명단과 그들의 상세 프로필. 각종 주의사항에 덧붙여서 사소한 업무 팁까지 정리되어 있는 것을 빠르게 살피고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성현제를 직접 수행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비서실 직원 뒤를 따라다니며 업무 보조 일을 하는 거라면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주의사항에 신경 쓰이는 문장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처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판단이 착각이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미팅 시간 한 시간 전 매화 실로 들어가야 하는 코스 요리가 총 두 번 바뀌었다. 양식에서 일식으로 그리고 다시 양식으로. 세부 메뉴는 그것보다 더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미팅 시간 15분전 21층 매화실에서 23층 모란실로 장소가 바뀌었다. 변덕의 주체는 P 제약이었다. 그 대표의 비서들이 몇 번이고 허리를 굽히며 부탁해온 내용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대표는 미팅 직전이면 꼭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한다고 한혜진이 귓속말로 알려주었다. 주의사항에 적혀있던 변덕스러우니 계속 대기하라는 말이 성현제를 주의하라는 뜻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한 시간에 걸친 변경 요청은 성현제가 호텔에 들어옴과 동시에 끊겼다. 뒤이어 도착한 P 제약 대표가 웃는 얼굴로 들어간 모란실 안쪽에서는 순조롭게 이야기가 진행되는듯해 다음 일정 시간을 계산하며 앉아있자 한혜진이 나가봐야 한다며 손짓한다.

“여기 마무리는 비서실장님이랑 도원씨가 하실 거예요. 저희는 K 방송국으로 가죠.”

빠른 걸음으로 내려간 한혜진이 빠른 손놀림으로 지하에서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이 내미는 가방을 받아들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저희 점심은 이거! 도착하면 밥부터 먹어요.

이 호텔에 사전 체크를 하러 왔던 것처럼 다음 일정도 미리 가서 확인을 해야 했다. 조수석에 앉아 건네진 가방을 열자 자신과 한혜진 몫으로 추정되는 도시락통이 곱게 들어있었다. 송태원이라고 라벨링이 붙어있는 도시락 뚜껑을 열자 무척이나 알차게 들어있는 내용물이 보였다.

“도시락 끝내주죠? 오늘 실장님도 계신다고 하니까 더 신경 써서 챙겨주셨대요.”

도시락 내용물을 힐끔 확인하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엑셀을 꾸욱 밟았던 한혜진은 K 방송국에 도착하자마자 방송국 관계자들에게 쭈욱 인사를 하고는 대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호화로운 도시락에 감탄하기 3초, 비서실에서 온 전화받기 2분, 예쁘게 말린 계란말이 음미하기 10초, 대기실 밖에서 금속 탐지기가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입에 도시락 쏟아 넣기 1분 후에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옆에 앉아있던 송태원도 비슷했다. 예쁘게 구워진 베이컨 말이 우물거리기 3초, 통화 종료 기다리기 2분, 계란말이 두 개 뇸뇸 먹기 5초, 금속탐지기 소리에 밥 크게 떠서 우걱우걱 먹기 50초. 세성길드 사내 식당 셰프가 신경 써서 만들었다는 도시락은 맛을 느낄새도 없이 사라졌다.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특집 인터뷰라기에 인터뷰만 신경 쓰면 될 줄 알았더니 스튜디오로 들어오는 직원들 신체검사부터 해야 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신원 체크와 신체검사, 물품 검사를 동시에 끝낸 뒤에 질문지의 최종의 최종 점검과 인터뷰어에게 주의사항 전달, 성현제 앞으로 준비된 음료 체크에 성현제가 앉을 자리에 비춰질 조명의 각도까지 세밀하게 확인을 끝내고 허겁지겁 먹은 도시락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할 즈음 성현제가 무미건조한 얼굴로 들어왔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에 한혜진을 힐끔 보자 한혜진이 빠르게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빠른 손놀림으로 30분 전 확인했던 질문 리스트를 다시 꺼내 볼펜으로 질문 몇가지에 줄을 북북 그어 인터뷰어에게 전달하는 걸 보니 성현제에게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까 거기 대표가 꼬장을 부려서요.”

손을 들어 한번 저어 보이는 모양새를 보니 조금 전의 미팅에서 주고받은 계약은 무산된 모양이었다. 꼬장꼬장한 노인네들 상대에 이골이 난 성현제가 저렇게 대놓고 기분 안 좋은 기색을 보이는 걸 보니 슬금슬금 걱정이 올라왔다. 성현제가 들어간 대기실을 불안하게 쳐다보고 있자 한혜진이 조용히 송태원을 불렀다.

“질문지 수정은 했으니까, 저는 촬영 감독님께 다녀올게요. 실장님은 대기실로 길드장님 음료 셋팅  부탁드려요.”

그렇잖아도 성현제의 상태가 걱정되던 중에 마침 잘 되었다 싶어 냉큼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전에 검사를 끝냈던 간식 트레이에서 성현제님-분홍색 하트도 붙어있었다-이라고 라벨링 된 음료를 챙겨들고 대기실로 들어가자 소파에 기대어 앉아있던 성현제가 생긋 웃으며 반겼다. 송태원의 걱정만큼 기분이 나쁜 건 아닌 듯 보였다.

“송태원씨가 준비한 음료라니 감격해도 되는 건가?”

“이건 방송국에서 준비한 겁니다.”

송태원이 내미는 음료를 받아든 성현제가 소파의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옆에 앉으라는 듯한 모습에 닫혀있는 대기실의 문을 힐끔 살피고 앉는다. 그러자 기다렸는 듯 어깨에 툭 기대어 오는 무게가 느껴졌다.

“일은 좀 할만한가.”

“시키는 일만 하는 중이라 그렇게 어렵진 않습니다.”

일이 많기는 하지만. 뒷말은 굳이 하지 않고 대답하자 어깨에 기댄 얼굴이 얕게 웃는다.

“가능하다면 외부 일정이 없는 날 자네를 부르고 싶었는데 시간 조율이 안되더군.”

“그렇습니까.”

“나름대로 꽤 기대했었는데 아쉬워.”

“뭘 기대했습니까.”

성현제의 입에서 나온 기대가 무엇인가 싶어 살짝 내려다보니 샛노란 눈동자가 빤히 바라보다 휘어졌다.

“사내 연애.”

담백한 대답이었다. 사내연애. 성현제는 다른 사람들이 하듯이 탕비실이나 비상구 계단 같은 곳에서 만나 알콩달콩 하기를 원했던 걸까. 송태원과 성현제가 썸을 탄지 삼 개월. 업무상 겹치는 일이 많아 서로의 직장에서 자주 마주치기는 했지만 그건 따지자면 거래처 직원과 만나는 거지 사내 연애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서로의 위치상 자신들의 행위는 사내 연애 같은 가벼운 울림을 주는 단어보다는 정경유착 같은 8시 톱뉴스에 가까웠으니 성현제는 어쩌면 편하게 만나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사귀자고 말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위험부담은 다소 있겠지만 공개적으로 그 사실을 알린다면….

송태원이 깊고도 얕은 고민에 빠진 사이 휴식을 끝낸 성현제는 입술을 앙다물고 고민에 빠진 송태원의 얼굴을 제법 귀엽다는 듯 바라보다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고는 일어났다.

“이제 일해야지. 정신 차리면 밖으로 나오게.”

/

스튜디오로 들어올 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게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카메라 앞의 성현제는 보기 좋은 미소를 짓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검열했던 질문지가 무색하게 인터뷰어가 애드립을 날린 다소 부담스러운 질문에도 가볍게 웃어넘기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약간 불안한 눈빛으로 인터뷰 진행을 바라보던 한혜진은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스튜디오 바깥으로 송태원을 끌고 나갔다.

“아까 진짜 사고 나는 거 아닌가 걱정했다니까요. 그래도 길드장님 기분이 나아지셔서 다행이에요.”

“예, 다행입니다. 마지막 질문은 저도 걱정했었습니다. 질문지에는 없던 내용이어서.”

“맞아요. 제발 가이드라인 지켜달라고 요청해도 꼭 그렇게 오버하는 사람이 있다니까요. 뭐. 그 인터뷰어는 이제 저희 쪽으로 올 일은 없겠지만요.”

자 이제 길드로 돌아갑시다. 사뿐한 걸음으로 차에 오른 한혜진을 따라 조수석에 앉은 송태원은 안전벨트를 매다 멈칫한다. 외부 미팅이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아 그거요. 거긴 인터뷰하는 동안 도원씨가 준비해놔서 괜찮아요. 저흰 돌아가서 회의실 체크하고 커피랑 과자 먹으면서 잠깐 쉬면 돼요. 전 뒤에 정리해야 하는 일이 좀 더 있긴 한데 실장님이 하실 일은 회의실 체크까지만.”

송태원이 해야 하는 일은 회의실 체크까지라는 말이 사실이라는 듯 남은 일이 거의 없었다. 아무리 일일 사원이라고는 하지만 송태원에게 보여줄 수 있는 회의 내용에는 한계가 있어 이미 준비가 다 끝난 회의실에서 마이크와 빔프로젝터를 확인하고 커버가 덮혀있는 파일을 자리에 내려놓고 나오는 일이 끝이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회의 준비를 하는 던전 공략 팀과 백업 팀 사이에서 뻘쭘하게 서 있자 멀리서 비서실 직원들이 송태원을 불렀다. 간식시간이었다. 넓은 테이블 위에 놓인 쿠키를 보고 고개를 꾸벅 숙이자 곧바로 커피가 나왔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와아아 하는 영혼 없는 함성과 박수가 끝나면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이 커피를 들었다.

“비서실 일은 어떠셨어요?”

“실장님 각관실 그만두고 저희 길드 오실 생각 없으세요? 실장님 계시니까 일이 금방 끝나. 최고야.” 

“길드장님 아까 H 호텔에서 길짱님되서 나가셨는데 인터뷰 괜찮았어요?”
“아까 방송국 사람들 표정 봤어요? 특종 잡은 얼굴이었잖아요.”

“한두 시간 있으면 기사 나갈걸요. 송태원 실장, 세성 길드 밀착 감시 그런 걸로.”

꺄르륵 웃는 소리에 송태원도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가득 채웠던 커피잔과 쿠키가 바닥 날 즈음 맞은편에 앉아있던 직원이 고개를 쭉 내밀고 바깥을 살폈다.

“아, 실장님 회의실 들어가신다. 미팅 빨리 끝나셨나 봐.”

“예?”

“아, 실장님 말고 저희 실장님이요. 저희는 회의실에는 안 들어가지만 비서실장님은 들어가시니까요.”

“길드장님도 오셨겠네. 슬슬 일할 준비합쉬다.”

실장님은 쉬고 계세요. 짧은 휴식 시간이 끝나고 비서실 직원들이 빠르게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자 송태원만 덩그러니 남았다. 테이블 위를 정돈하고 어색하게 직원들 뒤를 기웃거리다가 다시 자리에 앉아 시간을 확인한다. 회의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15분 정도. 성현제는 시간 맞춰 들어갈 테니 아직 조금 여유가 있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직원들의 눈치를 슬 살피고 휴대폰을 들었다. [시간 되시면 10분 뒤에 탕비실로 와주십시오.] 은밀한 만남 요청이었다.

약 10분 뒤, 탕비실에 먼저 도착한 사람은 성현제였다. 비서실 왼쪽에 붙어있는 탕비실은 파티션으로 절묘하게 입구가 가려져 내부가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이런 곳으로 불러내다니 송태원도 제법 앙큼하군, 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는 성현제는 오늘 기분이 좋았다. 송태원을 여기까지 불러온 경위야 어찌 되었건 오늘 하루 송태원이 자신의 범위 안에서 뽈뽈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던 탓이다. 희미한 미소를 띤 채로 얼마 기다리지 않아 송태원이 조심스럽게 탕비실로 들어왔다.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는 모양새가 다른 직원들에게 들키지 않았나 걱정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자신도 그렇지만 그 커다란 몸으로 여기까지 오는데 제 직원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건 자신도 그도 모를 리 없으니 그건 아니겠지만서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들키지 않고 오려 했더니 생각보다 어려워서요.”

정말로 다른 직원들 몰래 들어오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살금살금 들어오는 게 답지않더라니. 웃음을 꾹 내리누르며 자기 일하느라 못 봤을 걸세, 라고 한마디 얹어주자 송태원의 표정이 안도로 풀어졌다. 정말이지 깜찍하기 짝이 없는 남자였다.

“그래서 갑자기 무슨 일이지?”

이 깜찍이가 무슨 일을 하려고 이렇게 주변 눈치를 보는 걸까. 즐거움과 호기심이 담뿍 담긴 시선으로 송태원을 바라보면 아주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커피를 내민다.

“이번에는 제가 사 온 겁니다. 1층 카페 커피긴 하지만…,”

노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이는 성현제 손에 커피와 아마도 카페에서 같이 샀을 커피 쿠키를 한 손에 쥐여준 송태원이 다시 한번 바깥을 힐끔 보았다가 성현제에게 짧게 입을 맞췄다. 서로의 집무실이나 집이면 모를까 바깥에서의 스킨십은 자제하는 송태원이 다른 곳도 아닌 남의 회사 탕비실에서 뽀뽀를 하다니 이거 진짜 송태원인가? 기분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합리적인 의심에 눈이 가늘어지려는 찰나,

“그…, 사내연애가 아쉽다고 하시길래….”

머쓱한 낯으로 귓불을 붉히는 송태원의 모습에 의심은 사라지고 눈앞의 남자가 사랑스럽다는 감상만 남았다. 반은 농담 삼아 했던 사내연애라는 말이 신경 쓰여 그 바램을 이뤄주지는 못하지만 비슷하게라도 해보려 굳이 굳이 탕비실로 불러내 커피를 건네고 입을 맞추는 송태원이라니. 나중에 몹시 귀여워해 줘야겠군.

“그리고 회의 끝나고 퇴근하시면 같이 저녁 드시러 가시죠.”

아 참, 귀여워해 주기 전에 빅 이벤트가 하나 남아있었지. 성현제가 오늘 송태원을 일일 사원까지 시켜가며 세성 길드로 불러들인 이유는 하나였다. 송태원이 궁금해하던 그날 저녁의 은밀한 밀회의 정체인 한 달에 한 번, 세성 길드의 로또 같은 복지 혜택, 세인트 파인 다이닝에 송태원을 초대하기 위해서였다. 지난달에 말로서 알려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일을 크게 벌인 건 바람이 났나 걱정한 송태원이 괘씸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아무튼 본 목적은 그거였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직 송태원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말하는 모양새를 보니 성현제가 이런 일을 벌인 이유를 지난달 그의 실수에 대한 일종의 심술 정도로-맞다-생각하는 것 같으니 조금 더 심술을 부려볼까.

비서실에서 괜찮은 식당을 추천받았다며 수줍게 권하는 얼굴을 보며 짐짓 아쉽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미안하지만 회의 이후에 다른 일정이 있어서, 그 식당은 다음에 가도록 하지.”

부러 단호한 말씨로 거절하자 송태원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오늘 세성 길드장의 일정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는데 대체 무슨 일이 남았냐는 듯한 혼란 가득한 의문에 답하지 않고 받은 커피만 살짝 들어 보였다.

“이건 잘 마시겠네.”

회의에 걸릴 시간은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그 시간 동안만 송태원의 속을 태워보겠다 생각하며 자주 해주던 뺨 뽀뽀도 생략하고 먼저 탕비실 바깥으로 나선다. 

한 손에 사내 카페 로고가 찍힌 아메리카노를 쥐고 다른 손으로 커피 쿠키를 들고 회의실로 들어온 성현제는 회의 내내 기분이 좋아 보였다. 최근 일주일간 바쁘게 일정을 소화했다기에 회의 중에 잔뜩 깨지는 것도 각오하고 들어왔던 공략 팀은 슬금슬금 눈짓을 주고받았다.-길짱님 왜 기분 좋아 보이지. 오늘이 그날 아냐? 성식당 여는날. 그날치고는 비서실 개 바쁘던데.- 없는 텔레파시 능력이라도 생긴듯 성현제의 기분에 대해 미묘한 눈짓으로 추론하는 것을 성현제도 당연히 눈치채고 있었지만 콕 집어서 지적하지 않는 건 성현제의 기분이 정말로 좋아서였다. 바깥에서 애타고 있을 애인? 이 있는데 부러 지적해가며 회의 시간을 늘릴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반듯한 입매를 끌어올리고 입을 뗀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

회의의 종료를 알리는 말이었다. 그 순간 입사 n년차. 성현제 수행비서 경력만 4년하고 8개월의 김에스더는 누구보다 빠르고 신속한 손놀림으로 태블릿을 두드려 비서실 전체 메시지를 전송한다. 메시지 내용은 간결하고 직관적인 번개 이모지 하나.

/

공략 팀 회의가 시작된 지 약 한 시간째. 송태원은 비서실 직원들과 커피를 마시던 자리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건 탕비실에서 무려 15분이나 서서 생각하던 내용에서 크게 발전하지 않은 것이었다. 성현제의 저녁 일정은 대체 무엇인가. 송태원이 받았던 파일에 기재되어 있던 공식적인 일정은 공략 회의가 마지막이었다. 혹시 비공식적인 약속이라도 있는가 싶어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비서실 직원에게 물어보았으나, 아뇨. 오늘은 일정이 끝나시는 대로 바로 퇴근하실 거예요, 시원한 대답만 돌아왔다. 비서실 직원들도 모르는 개인 일정이 있나. 멍해진 머리를 한참 굴리다 문득 닿은 결론은 차였나? 지구 내핵까지 들어가는 삽질이었다.

성현제가 들으면, 아니 성현제와 송태원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비서실 직원들이나 각성자 관리실 직원들에게라도 물어봤더라면 그건 아니라고 대답이 따라올 결론을 손에 들고 묵묵히 테이블을 노려봤다. 그래 지난달에 그런 오해를 했던 게 기분이 나빴던 거겠지. 당연하지 화를 내도 어쩔수 없어. 오늘 사원 일일 체험같은 억지스러운 기획으로 심술부리고 끝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어쩔 수 없지. 지난달의 실수를 되새기며 성현제가 자신의 데이트 신청을 걷어차고 이참에 자신까지 뻥 차버려도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보지만 조금 속이 상했다. 오늘 하루 전혀 그럴 기색이 보이지 않았던 터라-그럴 생각이 없으니 당연하다- 더 그랬다.

송태원이 삽질로 내핵에 노크를 하기 시작했을 즈음 평화롭게 자리에 앉아있던 비서실 직원들이 분주해졌다. 빠르게 키보드와 마우스를 두드리고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하고 어디론가 전화를 하며 신고 있던 슬리퍼를 구두와 운동화로 갈아 신고. 성현제는 아직 회의실에서 나오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무슨 일일까. 신속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의 모습에 삽질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석상처럼 앉아있던 송태원이 일어나자 깜빡하기도 어려운 존재감의 그를 잊고 있었다는 듯 화들짝 놀란 비서실 직원들이 어색하게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애매하게 웃었다.

“슬슬 퇴근 시간이라서요. 실장님도 길드장님 회의 끝나시면 오늘 일정 끝나신거라 곧 퇴근하실 수 있을 거예요.”

조금 확신이 없는 목소리. 퇴근하는 사람들 치고는 애매한 표정 그리고 데스크탑에 켜진 메신저창에 보이는 번개 이모지 하나. 송태원은 그 이모지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 -감은 대강 잡을 수 있더라도-알 수 없겠지만 비서실 직원들 모두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번개 이모지 갯수와 그 뒤에 따라붙을지도 모르는 부가 이모지들에 따라서 바리에이션 넓어지지만 아무것도 없이 번개 하나만 있는 경우에는 단순했다. 성현제 주의보였다. 번개가 많이 달려 있다면 오늘 야근을 각오해야 했지만 다행히 하나였다. 이 정도면 빠르게 데이터 백업을 하고 6시에 칼같이 퇴근하면 되었다. 

본래라면 성현제의 일정에 맞춰 마지막까지 있어야 하지만 이 번개 이모지의 발신지는 비서실장, 그럼 이후의 마무리는 비서실장이 한다는 뜻이니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한 가지, 오늘은 길드 내에 송태원이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송태원이 있다면 자신들의 길드장으로부터 발생될지도 모를 사고를 모두 막을 수 있겠지만, 송태원에게 자신들의 길드장을 전부 맡겨두고 가도 되느냐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었다. 일단 송태원도 퇴근할 시간이기도 했기 때문에 직장인의 양심이 너무나 아팠다. 

차라리 송태원도 데리고 퇴근할까. 이참에 회식이라도 하자고 해버릴까. 직원들이 갈등하는 사이 회의가 끝이 났다. 직원들이 송태원을 챙기기도 전에 긴 다리로 성큼성큼 비서실을 스쳐 지나가던 성현제가 송태원을 불렀다.

“송태원 씨는 퇴근 전에 내 집무실로 잠시 들리게.”

송태원과 함께 탈주하기는 계획 수립도 전에 실패했다. 탄식과 안타까움 그리고 약간의 안도가 담긴 시선을 주고받은 직원들은 송태원이 조금 안타깝기는 하지만 갈 사람은 가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송태원에게 파이팅 포즈, 힘내세요. 빠른 퇴근 응원할게요. 무슨 일 있으시면 비서실로 청구해 주세요,를 남기고 6시가 되자마자 재빠르게 사라졌다.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비서실에 비서실장만과 송태원만 남아 어색하게 서있자 비서실장이 길드장실 문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들어가시죠. 길드장님이 기다리십니다.”

성현제가 기다리고 있다. 잠시 옆으로 밀어두고 의식하지 않으려 했던 커다란 삽이 보이는 것 같았다. 성현제에게 차였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에 가까운 착각으로 무거워진 발을 느릿느릿하게 움직여 길드장실의 문을 열었다. 데스크에 앉아있던 성현제가 길드장실로 들어온 송태원을 확인하고 매끈하게 웃어 보였다. 송태원이 삽질 중만 아니었다면 저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얼굴이라는 걸 금방 눈치챘겠지만, 지금 송태원은 커다란 삽을 들고 내핵 돌파 중이라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송태원 씨 오늘 하루 우리 길드에서 일해본 소감은 어떤가.”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길드장실 업무 프로토콜도 이해했으니 이후에 각성자 관리실과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전보다 더 수월하게 진행하실 수 있을 겁니다.”

딱딱한, 그리고 상투적인 감상을 말하는 송태원을 보며 성현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지금 삐졌군. 자신만 보면 표정이 잔뜩 풀어지는 남자가 이렇게 대놓고 삐진 티를 내다니 귀엽기도하지. 콩깍지가 제대로 씌여있는 성현제가 송태원의 삽질을 삐진 것으로 정의 내리건 말건 송태원은 그저 조마조마한 심장을 꼬옥 쥐고 성현제가 할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 초조한 나머지,

“혹시 제게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깜빡이도 켜지 않고 속엣말을 꺼냈다. 냅다 지르고 후회하기는 했지만 매도 먼저 맞는게 났다고 계속 불안하게 있느니 성현제의 속을 시원하게 듣고 싶었다.

송태원의 직구에 의외라는 듯 고개를 기울이던 성현제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명함 사이즈의 종이를 꺼내 송태원 앞으로 내밀었다. 이 비슷하게 생긴 걸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지난달에 내 길드원과 왜 단둘이서 밥을 먹었는지 오늘 알려준다고 했었지. 저녁 7시까지 거기로 오면 알 수 있을 걸세.”

늦지 말고 혼자 오게.-이 말도 어디서 들은것 같은데- 생긋 웃으며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송태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 성현제가 길드장실에서 먼저 나가버리자 비서실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퇴근시간입니다, 송태원 실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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