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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유현, forget-me-not

회귀전

죽은 이는 말이 없다 했던가.

한유진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얽힌 채로 굳어버린 싸늘한 손가락이나 죄책감에 젖어 어깨를 짓누르던 공기 같은 걸 아무리 떠올려봐도 그것을 함께 나눠줄 사람은 이제 없었다. 아직도 한유진은 뼈가 시릴 정도로 추운 날이면 어깨 위로 외투를 걸쳐주던 손길이 생각났고, 집에 돌아오면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 위로 자신을 한껏 반겨주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망상병자 같은 소리였지만, 그는 그 온기로 아직도 살아갈 수 있었다. 앉았다 간 의자 위의 미지근함을 억지로 끌어모으는 꼴이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한유진은 불을 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상실이란 이른바 그런 것이었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살아갈 의지를 빼앗고 이윽고 모든 상념과 슬픔조차 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너의 허락 없이는 호흡조차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드넓은 세상에 그 어떤 흔적도 남길 수 없었다.

스스로 제한한 생활반경 안에서는 새로운 것을 찾기 힘들었다. 악순환이었다. 예쁘게 정리해둔 신발들 사이에서,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찬 냉장고 속에서 한유진은 허우적거릴 수 밖에 없었다. 따뜻하고 세심한 성미는 네가 없는 세상에선 오히려 죄가 되었다. 하지만 동생의 일부를 자신의 시야에서 조금이라도 잃어버리는 것이 훨씬 두려웠다. 다시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한유진이 머무는 다정의 늪은 주인을 잃어 말라버렸을지언정 따뜻했기에, 그대로 수개월이 지났다.

-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이유는 없었다. 날씨가 좋았던 탓이라고 대충 미루어 짐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밖에 나와 있었기에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텅 빈 거리를 하염없이 걷다 꽃집을 발견했다. 앞에 나와있는 많은 꽃들 중에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파랗고 올망졸망한 것이 퍽 귀여운 녀석이었다.

"유현이를 닮았네..."

사가면 좋아하지 않을까? 살짝 웃으며 화분을 집어들었을 그 때였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유현이는 어디 있었지? 

'게이트석이야. 이걸 쓰면 밖으로 나갈 수 있어...'

수백번은 들은 것 같은 목소리가 반복된다. 잊고 있었던 진실이 와락 덮쳐든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로 눈앞이 새까맣게 물든다. 아무리 고개를 저어봐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삐- 하고 거세게 귓가에 울리는 이명과 담담한 목소리가 겹쳐져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다가 이내 발치가 푹 꺼진다.

한유진은 눈물에 젖어 끈적해진 눈을 힘겹게 떴다. 그 안에 자리한 것은 선명한 절망이었다. 입술은 이름을 차마 소리내어 부르지 못하고 텅 빈 움직임만을 반복했다. 식은땀에 절은 손이 이불을 억세게 그러잡았다. 그러다 식탁 위를 보았다. 꿈에서 산 꽃이 그 위에 있었다. 홀린 듯이 앞으로 걸어갔다. 꽃은 꿈과는 정반대로 시들어 있었다. 마치 몇 개월은 방치된 것처럼...

비쩍 말라붙은 꽃을 조심스레 손 안으로 그러모았다. 거울처럼 파랗게 질린 잎들은 버석버석 소리를 내며 몸을 비튼다. 한유진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본다. 약해진 꽃은 조심스런 접촉에도 금새 모양을 잃고 추락해간다. 한유진은 흩어지는 파랑 속에서 자신의 동생을 떠올리고 만다. 손을 쥐었다 펴자 꽃잎들이 맥없이 떨어진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꽃말대로 유진이는 영원히 유현이를 잊을 수 없을거란 점이 좋아요 아무리 끔찍한 악몽이라도..

2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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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페어
#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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