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빌런 (月下VILLAIN)

낮엔 히어로 한유진 밤엔 빌런 은유진

- 은유진의 오리지널 설정에서 몇 가지 설정을 추가했습니다.

- 은유진의 공격은 포션이 잘 통하지 않습니다.

- 한유진과 은유진은 기억을 공유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은유진은 한유진의 기억을 일방적으로 훔칠 수 있습니다.

퇴고 안 합니다.

트친님 맛있게 드십셔(하트)

이 짧은 글에 분위기가 두 개라서... 브금을 붙일까 말까 고민하다가 붙여봅니다.

https://youtu.be/fdjh2JaP0dg

뙤약볕이 고글까지 침범하여 지글지글 끓고 싸구려 쫄쫄이 슈트가 엉덩이에 꼈다. 검은 머리카락을 헤치고 정수리까지 열기가 피어오르는 끔찍한 여름이었다.

히어로, 이 얼마나 멋들어진 이름인지. 고작 그 화려함에 홀딱 속아 히어로 등록 센터를 방문했다. 으레 허접한 인간이 다 그렇듯 한유진도 F라는 최하위 등급을 받았다. 그러면서 헛된 희망에 물들기를, 곧 플래시가 터지고 수천수만 명을 구하는 S급 히어로가 되겠지. 매일같이 노력하고 사람을 구하다보면 언젠가 내 이름이 빛나겠지. 개같이 노력한 5년은 장식처럼 지난해에 동생이 S급 히어로가 됐다. 그제야 깨달았다. 히어로는 선택 받는 존재다. 감히 노력하여 될 일이 아니었다. 위기의 순간 갑자기 초능력이 깨어나 우락부락한 힘을 뽐낸다. 그 뒤, 온갖 카메라가 들이닥쳐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한다.

"각성했습니다."

동생이 각성한 날, 한유진의 꿈은 살해 당했다. 의대를 목표로 매일 같이 의자에 앉아 공부만 하던 동생의 성공은 한유진에게 있어서는 살인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웃으면서 동생을 맞이했다. 축하해, 내 동생. 얄팍한 기쁨마저도 일 년이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동생은 저를 배신하고 새로운 소속을 만들었다. 

"생활비 지원을 해줄게. 이제 히어로 따위 그만둬."

꿈을 살해한 동생이 선심 쓰듯 말했다. 자존심이 긁혔다. S급이면 다냐. 나는 그깟 돈 필요 없다. 비명 같은 말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형, 선배 히어로, 한유진. 갖가지 것들의 자존심이었다.

동생과 멀어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S급 히어로를 찾는 사람은 많았고, F급은 히어로 센터 홈페이지 가장 하단에 적혀있을 뿐이니까. 한유현의 형이라는 대명사가 더 익숙해질 무렵, 한유현이 집을 나갔다.

그 뒤로는 지겨운 나날이었다. 홍보를 위한 형광 슈트를 껴입고, 그 위로는 고글과 망토를 둘렀다. F급 히어로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의 엔터테이너로 활동하는 일이었다. SNS 유명인처럼 말장난도 만들어내고 특이한 행동을 하며 빌런을 해치웠다. 딱 먹고 살만큼 혹은 그 이하의 돈이 들어오면 자존심은 개처럼 아래를 기었다.


몇 번이나 재탕하여 끓인 김치찌개의 맛은 시큼했다. 언제 만들었더라. 딱 일주일 전에 하루 먹자고 만든 건데 물을 넣고 넣어 끓이다 보니 이렇게 됐다. 밥에 말아 먹으려다가 숟가락으로 냄비를 탕하고 쳤다. 김칫국물이 튀어 얼굴에 묻었다. 짜증이 어쩜 이렇게도 가시지 않는지. 오늘로 딱 이틀째, 일감이 없다. 빌런이 나타났단 소식에 이 여름에 수트를 껴입고 달려갔지만, 비슷한 등급의 히어로들이 마무리 포즈와 멘트를 하며 포토타임을 보내고 있었다. 

선풍기를 켜고 시큼한 김치찌개를 오물대며 TV 앞에 앉았다. 채널을 1번부터 10번까지 위아래로 넘기며 재밌는 채널을 찾았다. 남들 다 일하는 시간대는 대부분 재방송이었지만 딱 하나, 속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나운서는 격양된 얼굴이었다.

"생김새를 포함해서 성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월하빌런이 드디어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흐릿한 영상이지만 우리 NBC가 특종 보도합니다."

월하빌런! S급 히어로를 제외하고 마주치면 사망률 100퍼센트를 자랑하는 희대의 빌런. S급 히어로들은 저주에 걸려 그에 대해 발설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은 마주하지도 못해서 어떤 정보도 공개되지 않았던 빌런이다. 초승달이 뜨는 밤에만 나타난다고 하여 월하빌런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 그 녀석을 궁금해하지 않을까. 그 잘난 S급들도 엉망으로 만들어내는 빌런이었다. 수저를 내려놓고, 휴지로 입을 닦았다. 화면에 코가 닿을 만큼 목을 쭉 빼내며 보도에 집중했다.

흐릿한 영상에는 하얀 머리의 가녀린 사람이 창파오를 입고 가로등 위에서 화려하게 날뛰고 있었다. 촬영한 사람은 얼마 전에 사망한 A급 히어로라는 자막이 떴다. 하얀 달 아래에서 그보다 더 하얀 피부의 사람이 보름달처럼 둥글게 하늘을 날았다. 히어로는 철을 다루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무기처럼 쏘아대는 철을 가볍게 피한 월하빌런은 철을 계단처럼 밟아가며 그에게 다가왔다. 마치 개울가를 가로지르는 돌 위를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A급의 공격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여기다가 마침내 맞닿은 순간, 카메라가 떨어졌다. 낙하하는 카메라의 마지막은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히어로를 발로 내리찍는 월하빌런의 모습이었다. 영상 자체가 흐릿하고 월하빌런의 저주로 형태만 겨우 보였지만 그럼에도 빌런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피부에 와 닿았다.

가볍고, 자유로우며, 아름다운 빌런.

모두가 월하빌런에 대해 떠들었다. 한 마리의 새와 같았다. 다른 빌런처럼 시끄럽지 않고 바라는 것 또한 의뭉스러운 신묘한 존재에게 한유진은 완전히 매료됐다. 히어로 주제에 그러선 안 되지만.... 한유진이 가지지 못한 모든 걸 가지고 있었다. 강한 힘과 미디어에서부터 자유로운 고고함까지. 바라 마지않는 것들이.

"형!"

현관문이 부서지듯 쾅하고 열렸다. 조용한 서민용 아파트를 찢는 소리에 먹던 김치찌개까지 떨구며 뒤돌아봤다. 찾아온 사람은 한유현이었다.

"한유현, 너 미쳤냐?"

못된 말이 나왔지만, 온몸에 피투성인 동생에게 걱정스러운 시선이 가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유진의 시선을 헤치고 신발을 신은 채 다가 온 유현은 전보다 내린 뺨을 붙잡고 이리저리 둘러봤다. 

"괜찮아?"

유현이 월하빌런에 대해 떠들어대는 뉴스를 흘끔흘끔 봤다. 시선이 향하는 곳을 알아차렸지만, 그럼에도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황당함에 잠식된 유진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 유현이 머뭇대며 물었다.

"머리가 아프다던가...."

"무슨 헛소리야? 너 저 현관문 어쩔 거야. 돈 있다고 남의 집 현관문 같은 건 다 부셔도 되냐?"

연속된 황당함이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유진이 머리를 더벅머리가 될 때까지 손으로 헤쳤다. 짜증이 났다. 이틀 연속 허탕친 것도, 영문 모르고 달려와 헛소리나 해대는 동생도. 어쩜 제 인생에서는 멀쩡한 구석 하나 없는지. 시야 턱에 손빨래해서 말려둔 쫄쫄이 히어로복이 걸려있는 탓에 부끄러움도 밀려왔다.

"나가!"

개 같은 인생.

빌어먹은 인생.

월하빌런이라도 나타났으면 좋겠다.

"개같은 인생."

한유현은 히어로 협회 로비를 가로질렀다. 오는 길에 조무래기 빌런 면상을 박살 냈지만 흉흉한 기세가 가시지 않았다. 여름의 더위를 잊은 지 오래여도 부글부글 차오르는 열감은 잊은 계절감을 떠올리게 했다. 뚜벅뚜벅 걸어 육중한 대회의장 양 문을 밀어 열었다. 날개처럼 펼쳐진 문 너머에는 둥근 테이블과 S급 히어로들이 앉아있었다.

"상태는?"

S급 뇌신의 아들, 성현제가 물었다.

"멀쩡하지? 형님 상태야 멀쩡할 걸?"

S급 투창의 황소, 문현아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방송 송출에 관한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S급 검은 곰이자 공무원, 송태원이 사과했다.

"형은 아직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 지는 모를 일입니다."

자리에 앉지 않고 닫힌 문 앞에서 통보처럼 툭 내뱉은 한유현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초승달이 마지막입니다. 그날 우리는 무조건 승리해야 합니다."

의자에 몸을 기댄 문현아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두통아 두통아 하며 앓는 소리까지 냈다. 성현제는 말 없이 깍지를 꼈다.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송태원은 주먹을 불끈 쥐며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했다.

"잘난 S급들도 고전하게 하는 월하빌런 나리를 없애 드려야지."

문현아의 말을 끝으로 모두가 회의장을 떠났다.


모두가 잠든 밤, 어김없이 초승달이 떴다. 검은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 무리 가운데에 세상만사 아름답고 고고한 초승달은 반 이상 가려진 제 모습마저 문제없다며 환했다. 군중이 볼일이 끝나 발걸음이나 숨소리 없이 고요한 번화가는 커다란 원으로 통제되었다.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저기 있다."

만원경으로 거리를 살피던 문현아가 속삭였다. 선릉역 출구 가로등 위에 밤새 한 마리가 앉아있다. 창파오를 입은 남자였다. 파란색 창파오가 바람에 휘날리며 펄럭대는 소리를 냈다. 달빛이 없어도 그는 늘 하얀 편이었다. 은발에 은안. 피부가 질렸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하얗다. 움직임마저 소리 없이 가벼웠으니 저화질 영상이 얼마나 그를 담지 못했는지 직접 그를 본 사람만이 절실히 느꼈다. 그는 밤의 지배자였다. 누구도 초승달이 피어난 세상에서 그를 이기지 못하리라. 하지만 히어로들에게는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히어로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월하빌런을 살해해야 했다.

만원경을 건네받은 송태원이 눈에 갖다 문현아가 가리킨 방향을 본 순간이었다.

"피하세요!"

송태원과 문현아가 뒤로 뛴 순간, 그들 발치에 월하빌런이 들이닥쳤다. 가벼운 발차기처럼 보였지만, 그들이 서 있던 아스팔트 도로는 박살이 나 싱크홀처럼 깊은 구멍이 났다.

"좀 맞아주시지. 저 같은 조무래기에겐 필살기였거든요."

다리에 묻은 아스팔트 가루를 털어내며 한유진 아니, 월하빌런 은유진이 툴툴댔다. 뒤에 있던 성현제가 수색자의 사슬을 꺼내 은유진이 서있던 아스팔트를 포크처럼 찍어댔다. 그가 피하고자 뒤로 물러갈 때마다 그 바닥을 찔렀다.

"하하하! 복수인가요?"

뒤로 뛰고 뛰다 땅바닥에 양손을 짚고 빙그르르 돌아 빌딩 유리에 몸을 박았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송태원이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빌딩 벽면에 구멍이 나고 유리 파편이 파스스 꽃잎처럼 쏟아져 내렸다. 은유진이 양팔로 가드 했으나 그 위력을 견디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대로 빌딩을 관통하고 그것도 모자라 뒤에 있는 건물 두 채 정도를 관통했다. 구멍 난 빌딩은 그대로 무너져 자욱한 연기에 휩싸였다. 하지만 문현아는 연기 속에서도 은유진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알아내고 투창을 던졌다. 날아간 투창은 손을 떠난 순간부터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세상을 가로질러 박혀야 할 곳에 정확하게 박혔다. 하지만 그들이 상대하는 이가 누구인가. A급 정도는 곤죽을 내고, 선택받은 S급 히어로들마저 농락하는 그 월하빌런이 아니던가.

달 아래에서는 그를 이길 수 없다.

꽂혀야 할 곳에 있던 투창이 은유진 손에 들어간 순간 하얗게 빛나며 주인을 배신했다. 손장난 감을 새로 얻은 아이처럼 길고 무거운 투창을 펜 돌리기처럼 돌리다가 종이비행기를 날리듯 원주인에게 날렸다. 문현아는 피해 보려고 했으나 인지하는 시간보다 더 빨리 제 오른쪽 팔에 날아든 투창을 피하지 못했다. 얕은 비명을 뒤로하고 한유현이 푸른 버들잎을 밟아 은유진 앞으로 다가섰다.

"유현아."

다정한 얼굴의 은유진이 말했다. 자장자장. 호감 있는 상대에게 수면을 유도하는 한유진의 히어로 스킬이었다. 그러나 초승달이 뜬 밤에 은발 은안으로 물들면 유도가 아니라 마치 칼로 심장을 꿰뚫듯 강력한 수면효과를 불러일으켰다. 한유현은 신경을 부드럽게 풀어버리는 감각에 잠시 비틀대다가 이내 일대를 모두 태웠다. 달보다 더 밝게 타오르는 화마를 들이마시며 차오르는 수마를 물리쳐냈다. 은유진은 불길을 피해 뒤로 물러나며 칫 하고 혀를 찼다.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하늘의 초승달이 찬찬히 녹아갔다. 막대기를 타고 흐르는 아이스크림처럼 녹은 빛이 은유진 머리 위까지 흐르더니 이내 사슬의 모습으로 변했다. 수색자의 사슬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다만 그것보다 더 강한 빛을 뽐내며 달이 내린 속박이라 소리쳤다. 성현제는 저와 똑같은 무기가 나타나자 눈가를 떨었다.

"일이 귀찮아졌어."

사슬이 완벽하게 모양을 잡자마자 은유진을 감싸며 재빨리 움직였다. 귓가에는 사슬이 서로 부딪히며 우는 소리만 가득하다. 거센 바람이 일더니 창파오가, 가지런한 앞머리가 공기의 흐름에 순응하며 위로 펄럭였다. 한유현은 불길 속에서 그 광경을 눈에 담으며 감탄했다. 저 찬란한 달빛을 보라. 자유로운 한 마리의 밤새를 보라. 세상모든 이목이란 이목은 죄 끌어모아 발치 아래 꿇려놓은 오만한 빌런을 보라! 가슴 속 깊이 열감이 피어났다. 용암 덩어리를 쥐어도 끄떡없는 몸이 되었으나, 장기 곳곳에 화산이 터져나가 고통스러웠다. 이대로 토해내면 무엇이 나올까. 형을 향한 연민, 애정....

"내게 집중해야지."

사슬이 불길을 헤쳐 한유현의 몸을 압박했다. 불에 달궈진 사슬이나 살갗에 닿인 온도는 시리게 그지없었다. 팽팽히 당겨진 사슬을 타고 달려온 은유진이 말했다.

"사랑하는 내 동생. 형 믿지?"

뺨을 쓰다듬는 손길에 그들을 지켜보던 불길이 조금씩 꺼져갔다. 동시에 한유현의 몸이 무너졌다. 초승달의 비호를 받은 은색 남자 품에 안긴 건 형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고야 만 어린 맹수였다.

"한유현 씨!"

송태원은 그들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틈을 비집고 달려들었다. 은유진은 동생만은 놓지 않겠다며 꼭 안고 있다가 부서진 빌딩 잔해를 사슬로 이리저리 엮어 우박처럼 폭우처럼 내던지는 성현제 탓에 송태원에게 살포시 내던지고 도망쳤다. 처음 서있던 가로등 위에 안착한 은유진이 가로등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건 부시지 말아주세요. 제가 나름 아껴서 이름도 붙였거든요. 한가덴이라고, 아!"

애정어린 소개가 끝나기도 전에 송태원이 달려와 가로등을 박살 냈다. 공중에서 몇 바퀴 돌아 선릉역 출구 표지판에 안착한 은유진이 가증스러운 성현제를 따라 눈물 닦는 시늉이다.

"잘 가 가덴아. 그래도 매달 날 기다려줘서 고마워. 송태원 씨도 인사하세요."

송태원은 성현제 같은 행동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짜증처럼 은유진이 있는 표지판 위로 날아가 허리춤에 발차기를 시전했다. 고양이처럼 허리를 휘어 어떻게든 피한 은유진에게 오른팔을 붙잡고 있던 문현아의 새로운 투창이 날아들었다.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형님!"

"문현아 씨, 제 공격은 포션이 안 통하다는 거 잊으셨어요?"

투창과 함께 날아드는 사슬을 은유진이 사슬로 맞받아쳐 냈다. 한유현을 묶느라 사용하지 못했던 사슬이 다시금 나타나 공격에 사용됐다.

"어이 성 씨! 이 사슬 당신 거랑 똑같은 거 맞지?"

"확신할 수는 없지."

아까부터 뒤에서 후방지원만 하던 성현제가 양복바지에 불량스럽게 손을 넣고 차오르는 초승달을 올려다봤다. 그와 연결된 사슬을 따라 은유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뒤로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 군을 상처 입히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제 정말 막바지에 다다른 같군."

손을 빼고 구두 앞 코를 바닥에 쿡쿡 친 성현제가 발 하나를 뒤로 두어 준비하더니 추진력을 더해 은유진에게 날아들었다. 초승달이 구토하듯 차가운 빛을 뿜어냈다. 달이 발광체가 아닌 것처럼 은유진도 자기 자신의 힘이 아니었으니까 가련한 히어로를 농락하는 '그것'과의 연결을 끊기만 하면 이 지긋지긋한 전투도 끝이 나겠지.

성현제가 참전하고 나서는 난투의 연속이었다. 성현제는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코트를 펄럭이며 수색자의 사슬로 발목을 붙잡아 날리기를 반복했다. 그렇다고 해서 은유진이 얌전히 날아가지는 않고, 그의 사슬을 제 사슬로 엮어 마치 가로본능 CF처럼 세상을 꺾어 봤다. 송태원이 성현제의 사슬을 타고 달려와 정직한 발차기를 날리면, 코브라처럼 사슬을 우뚝 세워 방패막이로 써먹었다. 그러다가 더는 사슬이 참지 못하고 찰랑이면 송태원의 종아리를 겨드랑이에 끼워 팔꿈치로 세게 내리찍었다. 온 뼈를 울리는 고통에 주춤하면 그때를 노려 은유진이 송태원의 폐부에 주먹을 날린다. 그러면 문현아가 창으로 그 틈을 막고 골프공처럼 은유진을 저 멀리 떨구었다. 가벼운 골프공이 되어 하늘을 날면 여유롭게 뒤통수에 손깍지를 끼면서 한숨까지 내쉬었다.

"방심하면 곤란하지."

허공에서 성현제의 전력이 파밧하고 튀었다. 그러자 금세 하늘에 먹구름이 모이고 그 틈에 번개가 내리쳤다.

"역시 뇌신의 아들이시네요~ 지난번에 온 힘을 다해 전기능력을 봉인해놨는데, 본연의 힘이랍시고 그걸 또 되찾다니."

그 뒤로 은유진이 짜증 나 하고 중얼거렸다.

"칭찬 고맙군. 여태 잘 안 써져서 짜증이 날 지경이었어. 유진 군이 사슬을 저 위에 존재에게 빌리고 나니 영향력이 약해진 모양이야."

사슬에 전력을 실은 성현제가 구석에 잠들어 있던 한유현을 묶은 순간이었다.

"내 동생을!"

눈을 부릅뜨고 감히 동생에게 헛된 짓을 하다가는 죽여버리겠단 분노를 담는다. 성현제는 한유현을 제 뒤에 두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아이에게 달래듯 조곤조곤 속삭였다.

"도련님을 곤란하게 한 건 유진 군이라네."

그러고는 손목시계를 툭툭 가리켰다.

"이제는 잠들 시간이야, 신데렐라 도련님."

은유진이 앗차 하는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세상은 발광체인 태양의 빛으로 밝아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달은 그 빛에 조금씩 사라져가다가 이내 그 형체만 겨우 보일 지경이었다. 은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서며 모두에게 저주를 내렸다. 마지막 발광, 은유진이라는 존재로서 아직은 더 있고 싶다는 고집.

그러면 어떤 S급이라도 은유진의 귀가를 담지 못했다. 기억하지 못했다. 작렬하는 태양의 타오름과 함께 한유현이 눈을 떴다. 그리고 세상이 밝아졌단 사실을 깨닫고 아스팔트 바닥을 내리찍었다. 젠장, 젠장 하는 죄책감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끔한 성현제를 제외하고 모두 엉망이된 몸으로 기지개를 켜는 태양을 바라봤다. 부서진 빌딩과 구부러진 가로등이 평범하지 않은 모양의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그 그림자가 짧아지기 시작하자 문현아가 입을 열었다.

"돌아갈까."

"이번에도 실패군."

"그러게. 융통성 없는 공무원 나으리께서 고생 좀 하시겠어."

"다음은 더 치밀해야 합니다."

"도련님께서는 신생아처럼 잠들지 않는 법이나 알아와야겠어."


더 써야 할 내용이 많은데 너무 길어져서 참고 설정만 풀어냅니다!

- S급들은 초승달과 초토화 직전에 이르는 전투를 치룬 적이 있습니다. 그걸 한유진이 F급 물몸으로 저지하다가 초승달 마음에 들어 매 달 초승달 밤로 그들의 목숨을 거래합니다. 그날의 기억 (그들과 관련됐다는 기억)을 잃고 비루한 F급이라는 자책감에 빠진 한유진으로 살고 있습니다.

- 모두 한유진과 긴밀한 사이였습니다. 한유진은 F급이지만 스킬이 뛰어나고 전투머리도 좋습니다.

- 은유진은 초승달 밤만 되면 어김없이 선릉역 n번 출구 세번째 가로등 위에 서있습니다. 본인도 정신차리면 늘 그곳이라 그 세번째 가로등에게 한가덴이라며 이름을 붙여 예뻐합니다.

- 월하빌런을 살해한다 라는 말은 한유진과 초승달과의 거래를 파괴한다는 뜻과 같습니다.

- 월하빌런 은유진은 눈에 보이는 사람 모두를 죽이진 않습니다. 제게 덤비는 히어로만 죽입니다. 나름 착하네요... (아님)

- 한유현은 은유진 존재 자체가 형이 아니고 불순물인 초승달의 마리오네트와 다름 없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형이 늘 갈망하는 이상향인 은유진에 대해 고민이 많습니다. 은유진도... 유진이니까 내 형 아닌가? 하는 걸 제가 들었습니다.

전투 너무 어려웠어요 ㅠ  트친님 저 이거 쓰느라 죽을 뻔했고 일년 치 트친비라고 생각해주십셔 (철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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