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제유현] 同族
백업 / 센티넬~초능력 그 사이 어딘가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세차게 비가 쏟아져 내렸다. 비를 막을 우산도, 우비도 없는 어린아이는 몸을 웅크린 채 고스란히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차가운 바닥에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 자리에 얼마나 앉아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푸른색으로 물들어있던 세계는 주황빛으로 가득 차더니 이내 검은빛으로 가득 차버렸다. 네온사인의 화려한 색을 제외하고는 세상은 흑백세계였다.
“… 추워.”
어린 태를 벗어나지 못한 아이가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추웠다. 눈물이 흐를 정도로 사무치게 추웠다. 하지만 육체가 추운 것은 아니었다. 사그라지지 않는 열기가 내부에서 들끓는 것 같았다. 스스로가 느끼는 감각은 모순덩어리였다. 자신이 춥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서, 보이고 싶지 않아 다리를 접고 팔로 다리를 감싸 안고 잔뜩 웅크렸다.
행복한 시간이었을 텐데. 오늘 저녁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던져봤자 답을 알 수 없는 물음만이 입안에 맴돌았다.
그는 부모님과 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늦는 형이 걱정되었는지 현관문을 계속 바라보면서 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초인종 소리가 들리자 그저 뛰어 나갔을 뿐이었다. 유현아. 이름을 부르며 끌어안아 줄 형을 마주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은 한순간에 깨져버렸다.
문을 열자 아이를 마주한 건 형이 아닌 커다란 어른들. 그들은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거칠게 팔을 잡았다. 거칠게 저항하며 애타게 부모님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난 버려졌구나.
그는 잔인한 사실을 깨닫자마자 저항을 멈췄다. 더이상 저항은 무의미했다. 실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버려질 거라고. 부모님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좋지 않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애써 무시하고 버텼다. 형인 한유진이 있었기에. 하지만 그 순간, 모든 것을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그걸 깨닫자마자 줄에 매달린 마리오네트처럼 이지를 잃은 채 낯선 어른에게 붙들린 채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름이 불리기 전까지.
‘유현아!’
‘형?’
거짓말처럼 한유진이 나타났다. 그리고 힘껏 끌어안고 잡아당겼다. 정신을 차리자 어른들에게 벗어나, 한유진의 품 안에 안겨있었다.
‘당신들은 누구예요? 누구길래 남의 동생을 데려가는 거죠?’
‘그러니까 학생, 우리는….’
한유진의 품 안에 안긴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익숙한 향이 코끝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고작 이 짧은 순간에 안정을 느꼈다. 매섭게 그들을 쏘아보며 등을 두드려주는 손길은 다정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날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었어.
난 버려지지 않았어. 형은 날 버리지 않아. 그는 가슴이 시큰거렸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았지만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괜찮아, 유현아. 전부 다 괜찮아. 따스한 온기가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는 괜찮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저주했던가. 갑자기 숨이 막혀오고, 뱃속에서 무언가 들끓어 올랐다. 한유진의 목소리도, 어른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조심스레 감았던 눈을 떠도 세상은 깜깜했다. 암흑 속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분명 형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형이 없었다. 어른들도, 부모님도, 모든 것도. 갑작스레 찾아온 암전에 손을 허우적거렸다. 그는 무엇이라도 잡아서 이 세계에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붙잡았고, 그건 따스한 온기였다. 동시에 순간 세상은 밝아졌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망막에는 차츰차츰 상이 맺히기 시작했다.
…세상이 망가졌다.
비명이 귓가에 박혔다. 형은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비명을 듣고 뛰어나온 것인지, 부모님은 현관 밖으로 나와 있었다.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으며, 형을 안고 외쳤다.
‘넌 괴물이야! 넌 괴물이라고!’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 것을 뇌가 처리하지 못했다. 눈을 깜빡이며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붉은 불꽃이 자신의 주변을 넘실거렸고, 사방에는 불꽃이 흩뿌려져 거대한 욕심을 드러냈다. 거대한 욕심은 주변을 집어삼키고 활활 불태웠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는 되뇌었다. 불이라니.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비현실적인 일이라 생각했다. 이 주변에서 멀쩡한 사람은 그뿐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어른들은 새카만 불에 집어 삼켜진 채로 쓰러져있었다. 부모님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한유진도 쓰러져있었다.
깨달았다. 이 모든 일의 근원은 그 자신이라고. 그래서 뛰었다. 다른 건 다 괜찮았지만, 한유진을 다치게 한 자신을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구역질이 올라왔고, 한유진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혼자 거리를 걸었고, 구석으로 숨어들어 갔다. 몸을 웅크리고 사라지고 싶었다. 비가 쏟아지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불을 꺼줄 수 있으니까.
텅 빈 눈동자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독했던 상념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고작 몇 시간 전의 일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반복재생되는 비디오처럼 계속 머릿속에서 재생되었고 지독한 자기혐오에 빠질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몰랐다. 누군가가 자신이 숨어있는 골목으로 다가오는 것을.
…
한유현은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태어난 후 성장하면서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냈다. 아이라고 불리는 그는 아이가 아니었다. 이미 또래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런 한유현을 보고 사람들은 천재天才라고 말했다.
성장하면서 그는 특별함이 드러났다. 또래에 맞지 않는 빠른 성장. 육체도 정신도 뇌도 전부 빠르게 성장했다. 습득력이 빨랐기에 무언가를 하게 되면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습득할 수 있었다. 공부도, 운동도 손쉽게 해낼 수 있었다. 부모는 그들의 자녀가 천재라는 말에 잔뜩 기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영재 교육을 강요하였고, 부모는 천재라면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한유현에게 그것을 강요하였다. 한유현은 묵묵히 그들이 강요하는 것을 해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무언가가 결여 되어있다는 것과 그는 일반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오직 한유진밖에 없었다. 한유진은 한유현의 주변 사람 중에서 눈에 띄게 다른 행동을 보여줬던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한유현의 특별함을, 결여된 것을, 다르다는 것을 빨리 깨달았다. 하지만 한유진에게 한유현은 사랑하는 동생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유현에게 다른 사람들이 줄 수 없는 것을 주려고 했고, 가르치려고 했다.
‘유현아, 형은 유현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 좋겠어.’
‘형이 사랑하는 거 알지?’
‘힘들면 언제든지 형한테 와.’
한유현은 한유진을 통해 감정을 배웠고, 한유진에게만 감정을 보였다. 그의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어 웃었고, 잔뜩 어리광을 부렸다. 부모가 본다면 상상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한유현은 이 정도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하는 것들은 힘들지는 않았다. 조금 지쳤을 뿐, 어렵지는 않았다. 이런 일상이 반복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씩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아주 우연이었다. 한유진이 없었고, 부모와 함께 있었다. 그때 보였던 한유현의 반응으로 부모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자신의 자녀가 천재라는 것에 들떠서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들은 한유현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주변이 바뀌었다. 하지만 한유현은 괜찮았다. 그의 세상에는 한유진만 있었으면 족했다. 그는 부모에게는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혐오가 담긴 부모의 눈빛도, 이질적인 걸 바라보는 어른들과 낯선 걸 보는 또래의 눈빛도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형의 다정한 눈빛과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면 그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유현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 자신의 판단이 오판임을 깨닫지 못한, 큰 실수를.
사람들은 다수와 다른 소수를 배척한다. 그 소수가 공포를 일으키는 존재라면 더욱 배척했다. 그리고 한유현은 소수에 속했고, 한유진을 제외한 사람들은 다수에 속했다. 한유현의 부모가 기관에 연락을 취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보통 사람들과 달라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이곳에 연락하라고 하네? 다르다는 건 그 집 둘째 아들 같은 사람을 말하나봐?’
…
성현제는 오늘따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꼭 특별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기분. 그래서 평소에는 차를 타고 돌아가겠지만, 오늘은 비가 세차게 내려도 우산을 들고 걸었다. 자신의 코트와 바지, 구두가 젖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충분한 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물비린내가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특히나 감각이 발달한 성현제에게는 불쾌한 기분만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가 기분을 더 가라앉게 하였다.
[…아마도 전면적으로 계획을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몇 개월 동안 준비한 프로젝트가 돌발사고로 인해 엎어야 한다는 소식은 유쾌하게 들릴 수 없었다. 소식을 접하고, 정보를 모으고, 기회를 잡은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건만, 자신 측의 실수도 아닌 상대측의 실수로 모든 게 무너졌다는 것은 허탈하기도 했다. 하지만 분노할 수는 없었다. 분노가 무의미하다는 걸 성현제는 알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부하의 보고를 들으면서 성현제는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세워가기 시작했다. 빗소리와 주변의 소음이 거슬렸지만 성현제는 무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의 귓가에 작지만, 그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소리의 근원은 옆으로 길게 나 있는 골목 안이었다. 거친 호흡이 선연하게 들렸다. 성현제는 고개를 돌려 골목을 바라보았다. 금색 눈동자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알겠네. 나중에 다시 연락하지. 내가 뭔가를 발견해서 말이야.”
전화를 무심하게 끊어버리고 휴대폰은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방향을 바꾸어 천천히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골목 안이지만 성현제에게는 방해되지 않았다. 소리의 근원에 가까워질수록 이상하게 그의 심장이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꼭 무언가 기대하는 것 같았다. 뱃속에는 열이 올랐다. 알 수 없는 신체의 반응이 성현제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고조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시야에 그 존재가 들어오자 미소가 지었다.
“이런… 비에 젖은 고양이군.”
“…누구야!”
어린 소년을 만났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는 소년이었다. 그의 눈에는 많아도 중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소년이 그를 만족하게 해줄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동족同族이었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군.”
“필요 없어.”
“난 너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지. 보아하니… 불인가?”
“어떻게…?”
새카만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마주했다. 눈동자는 꼭 거리의 어둠을 담아둔 것 같았다. 성현제는 눈을 깜빡이는 소년을 보고 입술을 말아 올렸다.
“동족 기운을 풀풀 풍기는 걸 보아하니 깨달은 지 얼마 안 된 새파랗게 어린 동족이군. 젖은 꼴을 보아하니 비를 맞은 지 꽤나 시간이 흐른 것 같네만, 별다른 추위도 타지 않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불일 수밖에 없지. 풋내기는 이렇게 오래 버틸 수 없으니까. 성현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잔뜩 날을 세운 채 그를 바라보는 소년의 모습에 성현제는 기뻤다. 이런 행운이 있나.
“도와준다는 것은 뭐지?”
“자네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게 물심양면을 다해서 도와주지. 원하는 게 있다면 추가로 도와줄 의향이 있고.”
“대가는?”
“없다네. 동족을 돕고 싶은 동족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게나.”
성현제는 여유로운 어른이었다. 느긋하게 소년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차피 한계까지 몰린 동족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손을 붙잡는 것. 당장에라도 소년을 집어삼킬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아주 작은 도움만 있다면 저 소년은 자신과 비등하게 자랄 수 있다는 예감 했기 때문이다. 어린 동족을 집어삼키는 것도 즐겁지만, 비등한 동족을 집어삼키는 것은 더욱 즐거울 것이다. 성현제는 나른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소년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이름이?”
“한유현.”
“자네를 닮은 이름이군.”
그는 소년을, 한유현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우산을 씌워주었다. 자신의 어깨가 비에 젖는 건 개의치 않았다.
“한유현군, 잘 부탁하지.”
“잘 부탁해.”
이런, 존댓말 하는 법부터 가르쳐야겠군. 성현제는 한유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더이상 걸어갈 필요가 없었다.
* 同族 : 동족
센티넬버스와 초능력 그 사이의 어딘가. 본래 쓰고 싶던 내용에서 쓰기 어려울 듯 하여 잘라낸 내용을 따로 써봤습니다. 후편이 나올 수도 있고, 혹은 다른 글에 포함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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