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스급/유현유진] 산타클로스는 있다

2023년 12월 25일 한유현 생일 기념

Minstrel by 자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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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년간, 일 년 내내 한 번도 울지 않았음에도…….”


또박또박 제 손에 들린 카드를 읽어 내려가는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했다. 성경을 읽으며 경건하게 아침 기도를 올리는 수도사의 목소리가 이러할까? 마치 지금의 제게 어떠한 놀라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그저 매일 반복하며 읽던 것을 오늘도 읽는 것처럼. 고요하게 이어지는 음성.

그 음성을 들으며 유진은 사이비 교주가 저런 목소리로 설교를 한다면 자신도 넘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놀라움을 쏙 뺀 목소리로 읽어내기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라는 작은 문제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지 못한.”


크리스마스 선물.

확실히 한유현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적이 없기는 했다.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동생을 위해 한유진이 언제나 챙겨준 것은 ‘생일 선물’이었지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을 한유진도 한유현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12월 25일은 크리스마스가 아닌 ‘한유현의 생일’이었으니.

왜 생일 케이크를 팔지 않고 크리스마스 케이크만 파느냐는 불평을 투덜거릴 때나 한번쯤 언급될 뿐인 크리스마스를, 구태여 선물까지 주어 챙길 이유가 없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 이유로 한유진이 한유현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지 않았으니, 누구도 한유현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지 않았고. 그건 즉, 한유현이 지금까지 한 번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그래! 나 동생한테 크리스마스 선물은 안 줬다! 근데 그게 예고도 없이 이런 꼴을 당해야 할 정도의 잘못이었냐!

크리스마스라는 단어에 순간 화르륵 열이 올랐던 한유진의 머리가 순식간에 식은 것은 여전히 이어진 동생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착한 어린이에게는, 옆에 괄호가 있고 ‘만 20세 이하의 미성년자는 어린이로 구분한다.’는 문장이 괄호 안에 적혀 있어.”


내 동생, 착하기도 하지. 함께 쪽지를 볼 수 없으니 세세하게 읽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유현의 설명이 덧붙었다. 쪽지의 내용을 읽을 때는 그저 무감하기만 한 목소리였는데, 형을 향한 친절이 담기니 목소리에서 은은한 온기가 도는 듯했다.

그렇게 제 고막을 간지럽게 파고드는 온기에 한유진은 또 설득당해 버리고야 말았다.

아, 하긴. 내 동생이 얼마나 착한데.

지금까지 동생이 한 착한 일들을 나열하면 팔만대장경도 짧다고 느껴질 만큼 다양한 업적들을 나열할 수 있노라 자신하는 한유진은 그제야 이 상황을 아주 조금 수긍할 수 있었다.

그렇게나 착하고 귀한 동생이었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착한 어린이들’이라면 받아 마땅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니. 이건 명백한 자신의 판단 미스였다.

12월 25일마다 크리스마스 선물과 생일 선물을 둘 다 안겨줬어야 하는 건데.

자신도 어렸기에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는 못하고 생일 선물만 챙겨줘 버렸다.

그렇다면 역시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단단한 안대에 눈이 가려 앞이 안 보이고 손과 발이 무언가에 묶여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건 벌이었나?

착한 어린아이인 동생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은 나쁜 보호자인 자신에게, 산타가 내린 천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던전이니 몬스터니 하는 것들이 튀어나온 세계에서 산타만 존재 불가능한 것 취급하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쉽게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고민의 늪에 잠긴 한유진이 묶인 손목을 한 번 꿈틀하는 사이, 유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산타클로스 협회의 권한으로 선물 증정이 강제 집행 됩니다.”

“뭐? 어디?”

“산타클로스 협회래.”


아니!! 역시 진짜 있었냐고, 산타클로스!!! 심지어 협회?! 강제 집행?! 국가 기관이었어?! 어느 나라 소속이야?! 대한민국일리는 없지?

강제 집행이었다니, 그나마 입에 재갈은 안 물려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너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니 생각이 탱탱볼처럼 이리저리 튀었다. 심지어 깜짝 놀라 몸도 한 번 꿈틀 했는데, 여전히 팔 다리가 묶인 채라 그저 물고기가 땅에서 한번 파닥이는 것처럼 움직여졌다.

눈이 가려 보이지 않더라도 지금 제가 어떤 모습일지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팔은 가슴 앞으로 모아서 꽁꽁 묶여 있고, 다리는 발목 부분이 싸매져 있다. 그나마 허리 정도야 꿈틀거릴 수 있다지만, 허리부터 허벅지 부분까지도 무언가가 칭칭 둘려 있는 감촉이 느껴지는 통에 마음껏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유진의 혼란을 진정시키는 유일한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선물 집행 대상자 한유현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기에, 그것을 선물로 드립니다.”


유진은 그제야 쪽지의 마지막에 다다랐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제, 해연에서 동생의 생일 파티가 끝나고, 단둘이 해연 길드장의 사택으로 넘어 왔다. 해연 길드에서 공식적으로 열린 한유현 길드장의 생일 파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한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된 해연 길드의 길드장 생일 파티니 사람이 많을 것은 자명했지만, 생일 당사자인 한유현 못지않게 그의 형인 한유진 도담 사육소장까지 몰려든 인파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고. 그 탓에 유진은 파티가 끝날 쯤에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인파에 밀려 에너지가 쪽쪽 빨린 탓에, 어젯밤에는 제대로 동생과 녹진녹진한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다. 침대에 나란히 누운 후에는 먹음직스럽게 발개진 동생의 입술을 머금어 보긴 했으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따뜻한 물에 데워진 입술보다 더 뜨거운 숨이 서로의 안에 불어넣어진 것은 분명 좋았다. 그러나 형의 상태를 걱정한 유현이 입술을 뗀 후에 형의 품으로 파고들며 이불 속의 온도를 높인 순간, 유진은 조금도 저항하지 못하고 자연히 가무러졌다.

그렇게 비정상적일 정도로 뚝 끊겨버린 기억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이미 이 상태였다. 부드러운 천에 눈이 가려진 채, 팔다리가 묶여 있는 상황 말이다.

한유현이 한유진의 꿈지럭거림에 놀라 일어나서 한 첫 번째 말인 ‘형……. 이벤트? 같은 걸 해주려고 한 거야?’를 듣는 순간, 한유진은 자신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유현이도 내가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 것도 못 알아챘다고? S급도 알아채지 못하게 침실에 침입해서 사람을 묶어놓고 사라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당황한 순간, 한유현이 무언가를 부스럭거리며 집어 드는 소리가 들렸다.


‘카드가 있는데…….’

‘카드가 있다고?’

‘응. 형 가슴 위에 있었어.’


종이를 펼치고 그 안에 내용을 읽는 동안, 잠시 유현은 말이 없었다. 그렇게 잠깐 고요해진 순간, 불안이 볼록하게 고개를 들어 유진은 불쑥 말을 뱉었다. ‘뭐라고 쓰여 있어?’라고.

형이 원하는 것은 거절하는 법이 없는 유현이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리 없으니. 그렇게 시작된 카드 낭독회가 드디어 끝에 다다랐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생일 축하합니다. 한유현 씨.”


아무래도 한유현 어린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나이긴 하지. 어린 시절에 못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일시불로 땡겨 받는 어른에게 주는 카드라 그런지 마지막 문장까지 마치 회사의 보고서처럼 정중했다.


“산타클로스가.”


마침내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듯이 내려앉은 목소리와 함께 기척이 느껴졌다.

유진은 제 눈가로 낯설지 않은 온기가 다가오는 것을 기꺼이 맞이했다. 애초에 선물을 받을 사람의 손길이 닿았기 때문인지, 유진의 머리 뒤쪽으로 묶여 있던 매듭은 조금의 저항도 없이 풀어졌다.

갑자기 밤이 아침이 된 것처럼, 순식간에 눈동자를 덮쳐오는 아침 햇살에 유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내 살그머니 실눈을 뜬 시야로 들어오는 얼굴이 반가워 오래지 않아 눈을 완전히 뜰 수 있었다.

형의 앞에 자리를 잡아 너른 등으로 햇살을 받아내며 잘생긴 얼굴이 곱게도 웃었다. 태양빛은 분명 가라졌는데도, 그 얼굴이 봄볕 같아서 시야가 따사로운 느낌이었다.


“……형이 묶여 있는데, 걱정도 안 되냐. 왜 웃고 있어.”

“하지만 카드나 리본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지도 않고, 형이 아파하지 않는 것도 기척으로 알았으니까. 그리고…….”

“그리고?”

“보자마자 선물이라는 걸 알기도 했고.”


수상하지만 수상하지 않은 광경이었다고 해야 하나.

그 말에 유진은 뒤늦게 제 꼴을 내려다보았다가, 동생의 말을 이해했다. 광택이 반드르르하게 도는 넓적한 공단 리본에 느슨하게 묶여있는 꼴은 정말 어떻게 봐도 ‘선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모양새였다. 아무리 묶인 대상이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앞으로 곱게 모아져 묶인 손목에도, 느슨하게 모여 묶인 발목에도, 빨간 리본이 붕대처럼 둘둘 감긴 허리와 허벅지에도, 성인 남성의 한 손을 쫙 펼친 것 만한 크기의 리본이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으니. 생겨 나려는 불안도 그 빨간색을 보면 나비처럼 날아가 사라졌을 테지.

솔직히 카드에 쓰여 있던 것처럼 정말로 산타클로스가 나타났던 것인지, 두 사람 다 확신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갑자기 닥친 이 상황에 더 이상 어떠한 불쾌함도 느낄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유진은 어쩐지 저를 벌써부터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는 동생을 올려다보다가, 슬그머니 손목이 묶인 제 손을 동생 쪽으로 내밀었다. 원래라면 선물을 받는 사람이 먼저 손을 대야했겠지만, 처음으로 받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동생에게 ‘어떻게’ 선물을 푸는지 알려주는 것도 형의 역할 아니겠는가.


“선물이라는 데, 안 풀어 볼 거냐?”

“아…….”


그 말만으로도 형의 마음속에 성큼 들어앉은 새까만 욕망까지 알아챘는지. 유현의 입가에 지어져 있던 미소가 깊어졌다. 그 미소가 짙어짐에 따라, 형의 손목에 느슨하게 묶인 리본 끈 사이로 파고드는 손끝의 움직임이 뭉근해졌다. 살살, 손목 안쪽의 옴폭한 부분을 문지르는 손가락이 어떤 열기를 끌어 올리려 하는 건지 의도가 명백했다.

제가 유도했지만, 꼬리뼈 부근이 간질거리는 움직임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발끝이 곱아들고 허벅지가 바짝 맞닿아, 호흡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아랫배가 당기는 감각에 입매를 굳히던 한유진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제 얼굴을 반쯤 베개에 묻으며 웅얼거렸다.


“선물 포장지는 원래 쫙쫙 뜯어야 제 맛인 건데. 너무 느린 거 아니냐.”

“형이 빨리 열어 보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마치 한유현의 손이 닿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순식간에 풀어진 리본이 힘없이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천천히 달아오르게 하는 것도, 빠르게 열을 올리는 것도.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걸 선명히 드러내는 말과 행동에 유진의 심장이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제 동생의 몸을 끌어안기 위해 팔을 뻗은 유진의 몸짓에 거부감은 조금도 섞이지 않았다.

어젯밤에 갖지 못했던 달콤한 시간이 이제야 다가오게 되었음을 예감한 두 사람의 심장에 가득 찬 것은 그저, 기대감과 애정.


“유현아, 생일 축하해.”


오로지 그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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