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나나

[미나토우] 정착 속 배회

23.04.10 / 글 재활겸 쓴 단문 모음인데 조금씩 이어짐

호흡곤란 by 멍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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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세부설정이 공식설정과 전혀 관계없음. 그냥 보고 싶은 거 가져다가 붙인 것.

(1)

「그렇네요. 당신은……. 날 언제나 비참하게 만드는데.」

 조명이 꺼진 어둑한 거실에는 푸른 빛을 내뿜으며 존재감을 뽐내는 TV 소리만이 선명하게 울리고 있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푸른 빛과는 어울리지 않는 머리색의 두 사람 중 한 명은 누가 봐도 숨을 죽여 화면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했으며, 그 옆에 앉아있는 다른 하나는 그에 비해 다소 시큰둥한 얼굴로 화면을 응시했다. 아니, 시큰둥하다고 하기보다는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한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거실을 채우는 감성적인 대사, 애처롭다 못해 어딘가 처절해 보이는 목소리와는 대비되는 그 표정은 TV 속에 있는 인물과 같은 얼굴이었기에, 다른 누군가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다소 괴기스러운 위화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결국 난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그게 불합리해요.」

 물기를 머금은 말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커다란 탄식 소리가 적막─엄밀히 말하면 적막은 아니었으나─을 깨뜨렸다. 동시에 고개를 숙인 붉은 머리는 푸른 빛을 받아 시선을 돌릴 수 없는 오묘한 빛이 되었다고, 무덤덤하게 그 정수리를 바라보던 나츠메 미나미는 생각했다.

“이쯤에서 하나 터질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아~ 진짜 불쌍하잖아, 카나타 녀석! 어째서 유카는 저런 좋은 녀석을 놔두고~!”

 “후후, 드라마가 마음에 드신 모양이시네요. 엄청 집중하시고.”

 “아니, 그야 미나가 출연한 드라마잖아? 그것만으로도 재밌는데…. 아, 젠장. 역시 카나타가 불쌍해.”

 중얼거리는 소리였을까. 그런 것치고는 조금 크지 않았나 싶었지만 그 또한 이 사람다웠다. ‘카나타’가 불쌍하다며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토우마는, 이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서 다시 화면과 마주했다.

 그가 말하는 ‘카나타’는 나츠메 미나미가 맡은 배역으로, 《언젠가 다시 마주한다면 당신이 좋아(いつかまた向き合うならあなたがいい》라는 제목의 로맨스물 드라마였다. (제목이 길다 보니 팬들은 ‘마타이이’라고 줄여 부르는 듯했다. '마타아나'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 같았고.)

 특별히 신선한 소재가 있었던 건 아니었으나, 온갖 자극적인 소재와 시나리오에 지쳐있던 시청자들에게 피로감을 덜고 감성을 전해주자는 취지로 제작된 드라마였고, 그렇기에 초반 시청률이 높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저 여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요즘 인기 있는 아이돌이었던 점과, 그녀의 연기가 꽤 좋게 평가되고 있어 챙겨보는 콘크리트 층이 형성된 덕에 이 정도로 올 수 있었던 것이리라.

 미나미가 이 드라마에 캐스팅된 과정도 다소 특이했는데, 처음부터 캐스팅된 것이 아니라 스토리가 어느 정도 진행된 후, 서브 남자 주역이 등장할 무렵 즈음에 작가에 의해 지명된 것이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지명일 뿐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미나미의 몫이었고, 의외로 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후에 그가 말하길, '그렇게 복잡한 스토리도 아니었을뿐더러 가끔은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고. 미나미는 가끔이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듣던 주르 멤버들은 '가끔이 아니라 거진 처음이지 않나?' 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어쨌든, 서브 남자 주인공이라는 포지션은 꽤 편했다. 명품 이인자라는 평을 받기도 했고─하지만 그건 미나미가 주인공을 하려고 하지 않으니 그런 거 아니냐, 고 하루카는 투덜거렸다─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삶은 질리도록 겪어왔기 때문에 역 만들기가 어렵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카나타'는 저가 아니니 확인할 건 확인해야 했다. 지금의 모니터링─토우마는 그저 감상인 것 같으나─은 그 과정일 뿐.

 지나치게 몰입해서 호흡을 깨진 않았는지, 전하는 대사가 필요 이상으로 흐리거나 선명하지 않았는지, 표정은 적절했는가? 어조는 어떻지? '카나타'의 시선 끝에는 '유카'가 제대로 담겨있는가?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지?

 스스로가 내던지는 수많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했다. 누군가가 시킨 것이 아니라 나츠메 미나미가 추구하는 방식이 그러했으므로. 보다 다듬어지고, 정제되어 보는 이에게 닿아야 했다.

 하지만 그런 모니터링은 사실상 뒷전이다. 옆에 앉은 남자ㅡ이누마루 토우마와 함께 이 드라마를 보게 된 시점부터 제대로 된 모니터링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후에 한 번 더 혼자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혼자 염두에 두던 것은 멋지게 맞아떨어졌다.

 그의 탓을 하는 게 아니라, 이는 전적으로 저의 문제였다.

 지금도 '역시 카나타 쪽이 절대로 좋은 녀석인데.' 하고 중얼거리는 토우마 쪽을 바라보는 편이 훨씬 즐겁고 기분 좋은데. 그런 존재를 두고 어떻게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불가항력이라는 단어로밖에 설명되지 못한다. 그러니 또, 그가 중얼거리며 내뱉은 말에

 "결국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게 되니까요. 드라마든, 현실이든."

 하고 답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을 내뱉는 과정에서 혀끝이 쓰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입 밖에 낸 소리가 마냥 씁쓸하지만도 않았다. 이는 그의 중얼거림에 저 나름의 답을 내뱉어 응한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지금 과거의 사람을 떠올리기엔 제게 주어진 시간이 순간과 다름없다는 것을, 이미 사무칠 정도로 알고 있지 않은가.

 “미나도 그렇게 되려나?”

 정말 여러 의미로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사람. 뜬금없이 저를 겨냥하며 내뱉는 말에는 의도란 것이 담기지 않은 듯 담백했다. 그러니까, 이래서 당황할 수밖에 없는 거지. 하지만 당황에 잠겨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가만히 응시하며 설명을 요구한다. 이 사람, 또 무슨 소릴 하는 거람.

 “또 이상한 소리 한다는 식으로 보지 마…!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게 된다느니 뭐니 한 건 미나 쪽이면서!”

 “그야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고가 너무 사방으로 튀잖아요. 저희는 드라마에 관한 얘기중이었던 걸로 아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지. 그리고 뭐, 드라마를 보고 있으니까 더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게 된단 말이야. 여전히 연애하는 미나는 상상이 안 가지만, 어떠려나~ 싶어서….”

 이쪽이야말로 묻고 싶은 말이에요. 낮은 한숨과 함께 TV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가 계속 답을 요구한 것도, 뚫어져라 바라본 것도 아니었으나 스스로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 몸이 멋대로 반응하는 것이었다. 결국은 누구에게 답하는 건지도 모를 중얼거림이 ‘저야말로 그렇게밖에 못 하는 사람이죠.’라고.

 사쿠라 하루키를 그런 식으로 사랑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글쎄. 응어리가 되고 주박이 되어, 완전히 떨쳐내기까지 얼마나 괴로워했는가, 힘들었는가.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었을까. 사랑이 아닌 저주였다고 여기면서도, 그가 만들었던 곡들과 함께 밤을 보내고 나면 이는 역시 사랑이었다고. 그렇게 상기하며 더는 젖지 않는 마른 베갯잇을 쓸어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누마루 토우마는 어떠한가?

 결국 미나미의 목소리는 TV의 노이즈와 함께 뒤섞였다. 그러고는 조소와 함께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저가 내뱉은 말이, 숨이, 정말 오롯이 저의 것이었는지를.

 자신이 연기하고 있는 드라마, 화면, 그 너머에서 쓰게 웃고 있는 ‘배역’을 눈에 담았다. 저건 배역인가? 그냥 자기 모습을 배역으로 감싼 것이 아닌가? 

 아니, 역시 다르다. 나는 그에게,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모니터링은 이쯤이면 된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채널을 돌리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회피였다.

마주하는 일 같은 거,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2)

 솔직히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이누마루 토우마의 첫사랑이나 첫 연애라고 하는 그런 가십거리들은 들으려고 들은 것도 아니었다. 주르가 결성하고 몇 달 지나서였던가. 미나미는 저의 기억을 가볍게 되짚었다.

 그무렵의 저희는 지금보다 더 제멋대로였고, 어긋났고, 빠져나가기 일쑤였기에 그는 항상 마지막으로 남아 황망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토라오가 문득 '재밌는 화제를 꺼낸다면 어울려줄 수도 있지.' 같은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다. 물론 그건 다른 두 사람의 의견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하루카 쪽에서 금세 반박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토우마는 그 말을 꽤 진지하게 받아들인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가 듣고 싶은 건데? 

 "뻔하지. 여자 얘기다."

 정말 뻔한 얘기였다. 잠시라도 궁금해했던 스스로가 바보 같아졌기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 반쯤 몸을 돌려 벽에 기댔다. 완전히 돌아나가지 않은 것은 그저 토라오가 멋대로 그런 말을 붙여서였을 뿐이지, 그 화제에 그다지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기에 시큰둥한 얼굴로 토우마의 얼굴이나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는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눈동자를 굴리다가 '별 얘기 없는데.'하고 가볍게 입을 열었다. 

 연습생 시절에 저를 응원해 주었던 동갑내기 여자애였는데, 결국 그 애는 연습생만 하다 나갔더란다. 짝사랑이었던 데다가 계속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그녀의 상태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ㅡ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좋게 그만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ㅡ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그저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길 바란다는. 지극히 그 다운 이야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토라오는 그런 그를 시시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나마 하루카가 '흐응.' 하는 짧은 추임새로 이 대화를 정리했다. 

 그러니까 별거 없대도! 그렇게 변명하며 당황해하던 그와 눈이 잠시 마주쳤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알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그 사람은 얼굴에 다 드러나니까 알 수밖에 없던 거다.

 전부 다 말한 건 아니죠?

 모두가 해산하면서 문득 그렇게 물었다. 딱히 더 들으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또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타격감이 있는 사람이라니까.

 "……미나한테는 못 이기겠네."

 하루카와 토라오가 각자 갈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이쪽을 살짝 봤던 것도 같지만, 특별한 인사는 없었기에 다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날은 들릴 곳이 있어서 도중까지는 방향이 같았기 때문에 들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내 멋쩍게 제 목뒤를 매만지던 그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전 멤버… 중에 있었어, 그, 애인. 그룹이 해산하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졌지만."

 남자도 가능한 쪽이었구나. 그것이 감상의 전부였다. 평소에 하는 짓을 보면 완전 스트레이트라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은 일부만 봐서 모르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마, '그렇군요.' 정도의 대답이었을 것이다. 놀라지 않는 듯한 저를 보며 가볍게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는 기억이 나는 것도 같은데. 

 "헤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런 얘길 저한테 해도 괜찮은 건가요?"

 "뭐어, 미나는 이런 걸로 뭘 할 것 같지도 않으니까? 상대 이름은 말하지 않기도 했고. …료 씨 같은 사람에게 이런 얘기는 진짜 무리겠지만."

 "그 사람에겐 무슨 얘길 해도 위험한 걸요."

 횡단보도 앞에 서서 잠시 그런 얘길 했던 거 같다.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오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밀물과 썰물처럼 몰려 나가고 몰려 들어온다. 그러니, 스스로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파도가 있기 때문에 무언가에 이끌렸던 걸까, 거스를 수 없는 중력 같은 거였을까. 그럴 리가 없지만.

 "끝까지 갔나요?"

 횡단보도의 불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늦은 타이밍이었다. 돌은 굴러갔고, 차라리 묻지 않았다면 좋았을 거라고. 이제서야 그렇게 생각한다. 

 당황으로 빨갛게 물들었던 그의 얼굴이 동시에 떠오른다. 태양은 오래전에 사라진 밤에 가까운 저녁이었는데도, 기억 속의 그 거리는 태양이 있는 것마냥 밝았다. 그제야, 이제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은 그때도 그랬다는 것을.

 "……이상한 거 묻지 마!"

 본인 입으로 나온 확답은 아니었지만, 얼굴에 다 드러내는 사람은 여러모로… 아니, 그런 사람이 곤란하다고 느낀 건 아마 그 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런 짧은 감상도 잊고 바로 몸을 돌릴 수 있던 건, 역시 이는 제한된 인연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사람이 될 리가 없을 거라고, 그런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는 것이─실제로 이 관계는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는 기간제였으니까.

 그래. 그랬지. 표정을 구기며 미나미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옆에서 데모를 듣고 있는 토우마를 슬쩍 바라보다가도 금세 눈을 돌렸다. 아, 하필 이 타이밍이 쓸데없는 걸 떠올려선.

 하지만 그대로 가라앉을 틈이 없었다. 왜냐하면,

“역시 미나의 곡은 최고라니까!”

 

 자연스러운 감탄을 내뱉은 토우마가 그의 머리에 씌워진 헤드폰을 반쯤 벗겨내는 듯하더니, 또 금세 고쳐쓰며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기 때문이다.

 과장되지 않은 몸짓과 어조임에도, 들떠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을 만큼 고양된 얼굴이었기에 미나미는 저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흘려보냈다. 단순하고 솔직한 사람이라 걱정이 되면서도, 이럴 땐 그간의 고생을 단번에 보상받는다는 기분을 들게 해주는 사람. 

 ‘과찬이시네요.’ 그 한마디로 이 고양감을 감추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

 “없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고. 진짜, 진심으로! 여태 써왔던 곡도 그렇지만 이번 곡도 멋있고, 주르답고! 어디서 이런 영감을 받는지 신기하다니까~.”

 “글쎄요. 영감이랄 것까진 없지만… 여러분들을 보면 떠오르는 이미지라는 게 있으니까요.”

 “오, 예를 들면? 나는?”

 이렇게나 올곧게 다가오는 것이 대단하다 싶으면서,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던 미나미는 그저 웃어 보였다. 지금 이런 모습들이 영락없는, 보호자 앞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강아지인데.

 하지만 자신은 첫 번째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중요도에서도, 시간순에서도 자꾸만 밀려나고 있었다. 그건 저 또한 마찬가지이면서, 이 사람에게 내가 첫 번째가 아니라는 것이 왜 이렇게 거슬리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3)

 “푸우우웁.”

 “저런, 다 흘렸잖아요.”

 “안 흘리게 생겼어?!”

 입에 물을 물고 있던 것을 힘차게 뿜어내던 토우마는 가볍게 헉헉 숨을 몰아쉬더니 입가를 닦고, 기겁하며 미나미 쪽을 응시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게 연신 외치면서.

 “딱히. 그냥 궁금해서요.”

 “아니아니아니. 그게 언제 적……. 그보다 그런 걸 보통 그렇게 막 물어보고 그래?!”

 “당신이니까 물어보는 거잖아요. 당연한 소릴.”

 “그건 또 무슨 소리래?!”

 특별한 걸 물은 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미나미 스스로는,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을 뿐이다. 그게 설령 무언가에 눈이 멀어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하더라도. 어차피 기간제는 백지가 되었고, 신호등은 고장 난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돌진할 수 있냐고 묻느냐면 그건 또 아니지만, 이 정도는 친구라고 칭하는 이들끼리도 종종 화제가 되었던 이야기라고 생각하니까. 물론, 외국의 개방성도 상정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 토우마를 괴롭히는 결과를 낳을 뿐이란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요점은, 그래. 첫 경험에 대한 질문이었다. 어쩌면 더 디테일하게 물어봤던 것도 같고.

 “……그, 그래. 궁금해하는 것까진 이해하는데…. 이걸 왜 나한테 물어봐? 더한 적임자는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누마루 씨가 저였다면, 이런 주제로 미도 씨 얘기를 굳이 듣고 싶으세요?”

 그렇게 말하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토우마는 단박에 이해한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음, 아무래도 그렇겠지. 

 “…뭐, 그렇다고 해도 역시 곤란한 주제긴 했죠. 죄송해요.”

 

 이왕 이렇게 말을 꺼내게 된 거, 그의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면 거짓말이 되겠으나, 듣고 싶은 만큼이나 듣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누군지 대충 알 것 같은 점도 그렇고, 저가 모르는 사람이거나 그와 그 정도로 깊은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의 얘기만 들어도 고개가 삐딱하게 돌아가는데, ‘그쪽’과 연관된 이야기는……. 

 그런 말을 내뱉은 사람치고는 무책임한 생각이었지만, 역시 생리적으로 무리다. 그가 단번에 얘기해 줄 만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던, 일종의 객기였으려나. 그 증거라고 하기에도 뭣하지만, 지금만 해도 토우마는 ‘미나가 나쁜 의도가 있던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으니까.’라면서 괜찮다고 갈무리하고 있으니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것도 아니었다.

 “돌아가는 길에 라면 먹고 갈까? 저번에 리쿠랑 새로 생긴 라면 가게에 갔는데….”

 그 이후에 뭐라고 했더라.

 웬만해선 그의 이야기나 행동을 흘려보내는 일이 없지만, 이번만큼은 그 입을 어떻게든 막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미도 씨라면 능숙하게 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멋대로 상상하며, 먼저 대기실의 문을 열고 있는 토우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 듣고 끄덕였는지는 모르겠지만.


(4)

 “이전의 주르와는 좀 다른 느낌이었단 말이지. 나쁘다는 건 아니고, 굳이 따지면 좋은 의미로.”

 “니카이도 씨에게 칭찬을 받는 건 또 묘한 기분이네요. 감사히 듣겠지만요.”

 《마타이이》의 촬영이 끝나고 돌아가려는 타이밍에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먼저 말을 걸려고 했던 건 아니었고, 저쪽에서 먼저 자연스럽게 스태프들과 인사하며 촬영장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마도 저에게 볼일이 있는 모양이라 생각한 정도. 

 아니나 다를까 ‘여, 수고했어.’ 같은 말을 던지며 넉살 좋은 미소를 짓는 것이 니카이도 야마토다웠다. 

 니카이도 씨가 여길 다 찾아주시고. 제가 필요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지나가다가 얼굴이 보여서 그냥 들린 건데. 내가 그렇게 정 없어 보이나? 같은 이야기로 인사를 대신하다가 저쪽에서 문득 꺼낸 화제가 지난 앨범에 대한 이야기였다. 

 지금은 멤버들의 개인 스케줄이 좀 더 많기도 하고, 신곡은 아직 작업 중에 있으니… 가장 최근의 앨범이라면 「Źenit」의 얘기려나. 그전까지는 반항적이고 거친 스타일이 대부분이었으니 다른 느낌이 든다는 얘기는 곡 샘플이 올라갔을 때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었다. 때문에 팬덤 내부에서도 깬다는 말이 종종 들려왔던 게 사실이고. 하지만 단독 콘서트까지 끝낸 지금, 대부분의 팬들이 ‘계속 듣다 보니까 세뇌당한 것 같다’, ‘막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이게 진짜 갓곡임’, ‘이제 이 곡만 들으면 심장이 뛴다’ 같은 얘길 하고 있었다. 비계에서 본 말이니까 그쪽이 본심이겠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던 미나미는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나야 뭐, 그냥 노래가 좋으니까 어떤 곡이든 계속 듣고 있는 정도지만. 나기 녀석이 「Insomnia」를 듣고서는 ‘나츠메 씨 답군요’라고 하더라고. 곡조의 스타일을 보면 확실히, 이미지로선 너랑 가장 맞는 거 같긴 한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 가사 쪽을 신경 쓰는 거 같았단 말이야.”

 “꽤 구체적인 감상이네요. 니카이도 씨도, 로쿠야 씨도. 경험 기반이냐고 묻고 싶으신 건가요?’

 “그렇게까지 직구로 말하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야기가 가리키는 게 가사 쪽이잖아요. 보통 그런 질문이 가리키는 건 사실 여부 쪽이겠고요.”

 글쎄요, 어떠려나요. 거기까지 내뱉고 나니 비슷한 소릴 했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라 미나미의 얼굴이 묘하게 나른해졌다.

 「Insomnia」의 가이드가 완성됨과 함께 주르 멤버 모두가 미나미의 작업실에서 모였던 날, 언제나처럼 만족스러운 곡이라는 멤버들의 표정을 보곤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바로 연습해 보실래요? 지금이 아니어도 상관은 없겠지만요. 그 말이 자극제가 되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30분 정도 각자 연습하고 모여보자는 하루카의 발언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레코딩으로 넘어갈 게 아니라서 천천히 해도 되겠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보고 조금씩 파트를 수정해도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미나미는 가사를 프린팅해 둔 종이에 빨간색 펜을 가져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토우마가 이쪽을 묘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저 무시했다. 이 사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긴 한데 또 속 터지는 말을 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 무시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자잘한 메모로 여백을 채워가고 있자니, 저쪽에서 뭐가 급한 강아지마냥 자꾸 흘끔흘끔 눈치를 보는 것이…. 하루카와 토라오가 이어폰을 꽂은 채로 가사집에 집중하는 것을 확인한 다음, 작은 한숨과 함께 토우마를 불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세요? 

 “……. 티나?”

 “모르는 쪽이 바보겠다 싶을 정도로요. 곡이 마음에… 안 드셨나요?”

 “아니! 그럴 리가!! 곡은 언제나처럼 완벽했다고! 간만에 서정적인 느낌이기도 하고, 가사도 꽤나…. ……꽤…. 리얼하다고 해야 할까…….”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저희 모두가 느꼈던 공통점 같은 거니까요. 벗어나야 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러지 못하고, 결국은 그 과거를 그리며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잡으려고 애쓰고 있죠.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과거가 ‘나’를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고.”

 그런 미련한 사람들만 모여있으니 리얼하게 느껴질 수밖에요. 말을 끝맺는 혀끝이 조금은 씁쓸했다. 과거의 연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은 아니고, 그 미련이 저의 눈을 가려 다소 허비하며 지냈던 순간이 못내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미나미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토우마는 한층 더 묘한 얼굴이 되더니 꽤 진중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뭘까요, 저 자기가 다 책임지겠다는 듯한 표정은.

 “당신이 헛소리할 것 같아서 덧붙이는데, 그 사람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니에요. 딱히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쓴 곡도 아니었고.”

 “……. 내 얼굴이 티 나는 게 아니라 미나 쪽이 독심술을 쓰는 거 아냐?”

 “이누마루 씨가 단순한 거라니까요. 설마 하고 내던지는 말들이 전부 맞아떨어지다니….”

 이젠 진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한숨뿐이었다. 이 사람, 완전 헛다리 짚는 쪽은 세심하게 굴면서 저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둔감하다. 원래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정도가 되면 고의인가 싶은 생각까지 들어 저절로 눈이 게슴츠레하게 변하는 것이다. 물론, 토우마가 그럴 수 있는 인간이 아니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한순간의 의심으로 끝나긴 하지만.

 닿지 않는 마음을 전하고 있을 뿐. 가수는 노래의 가사처럼 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 경우엔 가사가 먼저인 게 아니니까 저가 해당될 리는 없겠구나. 그런 시답잖은 생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10분 남았어요, 이누마루 씨. 그 말을 듣자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돌리는 토우마를 바라보고 나서야 헛웃음을 내뱉을 수 있었다.

 “뭐야, 갑자기 왜 웃어?”

 “아뇨, 키우는 강아지가 생각나서.”

 강아지를 키웠던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미나미를 바라보던 야마토는 짧은 탄식과 함께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나 참, 어딜 가나 리더 취급이 멀쩡하질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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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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