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컾]여름은 반복되고 진실은 번복되고
막간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디엘씨 네타 포함.
여름은 덥다. 한여름 낮이면 더더욱 덥다. 집 창문을 있는 대로 열어젖히면 바람은 천천히 흘러들어오지만, 그것도 햇빛에 잔뜩 달궈져서 가만히 버티기는 버거웠다. 그래서 루메르트와 세오도아는 마을 인근의 숲으로 피난을 떠났다. 시냇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 풀잎과 나무 무성한 숲 한쪽에 돗자리를 펴고 둘이서 나란히 누워있으면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벌겋게 달아오른 피부가 천천히 식어 주변 풍경에 녹아가듯이 미지근해진다. 나뭇가지와 잎사귀 사이로 내려오는 햇살은 작은 빛이 되어 세오도아의 피부나 루메르트의 옷 위에서 바람을 따라 일렁거렸다.
"자연은 대단하네. 햇빛이 그렇게나 강렬한데도 숲에 들어오니 거짓말처럼 시원해졌어."
"하핫."
"뭐야, 왜 웃어요. 루츠."
"나도 방금 똑같은 생각을 했거든."
여기서 '정말? 역시 우리는 닮은 꼴인가 봐.'같은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세오도아의 넉살은 좋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넉살을 떨기 이전에 자신을 상대와 같이 엮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뻔뻔함이 부족하다. 그래서 세오도아는 루메르트를 흉내 내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리에 누우면서 어디로 날아가지 않게 배 위에 올려둔 밀짚모자의 감촉이 까끌까끌했다.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는 웃음소리에 배인 약간의 어색함을 가려주었다.
"세오."
"뭔가요."
"넌 역시 인간이야."
여름 한낮에 열심히 지저귀는 새는 드물다. 다들 둥지 혹은 은신처에서 한숨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루메르트의 말은 세오도아의 귀에 유난히 크게 와닿았다. 까끌까끌한 밀짚모자의 동그란 몸통이 조금 움푹해졌다.
"왜 뜬금없이 그런 말을."
"이 세상에 신이 있고, 악마가 있고, 천사도 있고 유령도 있다고 생각해보자고."
"판타지."
"조용히 들어."
루메르트는 천천히, 허공으로부터 무언가를 조각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라면 기초부터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 새삼스레 감탄하진 않을 거야. 애초에 넌 만능이 아니고."
"언어라면 그럭저럭할 줄 아는데."
"그럭저럭의 우위에 내가 있잖아."
"체엣."
"네가 악마라고 가정한다면, 굳이 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숲까지 걸어오진 않았겠지."
"그럼 어떻게 했을까요?"
"내가 스파이로 몰렸을 때, 널 구해줄 테니 영혼을 팔라고 했겠지."
"그렇게 말했으면 팔았을 거예요?"
"못 해서 지금 여기까지 왔잖아?"
"체엣."
"만약에 천사라고 해도 마찬가지. 땀을 줄줄 흘리면서 더워죽겠다고 투덜대는 천사는 없어."
"여기서는 아부로라도 '이런, 넌 마치 천사같구나'라고 말해줘야 하는 부분 아닌가요?"
"무리해서 태클 걸지 마. 지금 몸에 닭살 돋았지?"
"겍, 그걸 어떻게."
"거봐."
"마지막으로 유령이라 가정해볼까? 하지만."
천천히, 손이 마주 잡힌다.
세오도아는 잠깐 숨을 멈췄다.
"유령이 이렇게 순순히 손에 잡힐 리가 없지. 그러니까 소거법으로, 너는 인간이야."
"…이봐요~ 루츠 씨. 그건 중요한 여러 가지를 무시한 결론 아닌가요? 알다시피 나는."
"너는 인간이야."
"……."
"매일매일 잠을 자고, 열심히 일하고, 맛있는 빵을 기대하고, 더울 때 땀범벅이 되어서 덥다고 칭얼거리기도 하고, 뺨에 닿는 숲의 바람이 시원하다고 느끼는 너는 인간이야."
"………그."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세오도아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잡아빼려다가, 루메르트가 생각보다 더 강한 힘으로 자신을 잡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적당히 미지근해져 있던 몸에 뭔가가 휘돌기 시작한다. 귓가에 열이 몰린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잡히는 바람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세오도아는 햇빛의 흔적을 눈으로 쫓으며 무의미한 언어들을 더듬거리다 입술을 앙다물었다. 바람이 잎새를 조용히 연주하며 흘러간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응."
"나는 조금도 나이를 먹지 않는데? 상처를 입어도 금방 나아버리는데? 당신과, 당신을."
함께 늙어 죽지도 못하는 몸인데.
나중에는 기억하는 것밖에 못 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내가 인간이야?
"이것 봐, 네가 어떻게 신이나 악마나 천사 같은 존재겠어…."
루메르트의 말은, 조금은 고요하고 잔잔하다.
"지금 너는"
"테오."
찻잔을 든 손이 달각인다. 세오도아는 천천히 찻물에 비친 자신과, 그 뒤로 비치는 건조한 천장과, 코끝에 와닿는 차의 향과, 귀에 와닿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그 목소리를 가진 인물을 인식했다. 테이블에 깔린 체크무늬 테이블보는 의외로 가장 늦게 눈에 들어왔다. 아, 찻받침 옆에 각설탕을 놔뒀었네. 세오도아는 흡사 남 일같이 생각하는 데 성공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아."
"하지만 세오도아라고 불러도 반응 안 했어."
"몇 번이나 불렀는데?"
"한 번."
"요 녀석."
계절은 여름. 8월에 가까운 날씨는 후덥지근 하지만 에어컨이 열심히 일해주는 덕분에 방 안의 공기는 시원하다. 더불어서 식물이라고는 꽃병에 꽂힌 장미꽃뿐인 방. 대체 무엇을 계기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만걸까. 과일 향이 감도는 차를 기계적으로 머금으며 생각하는 세오도아 앞에서 하지메가 입을 열었다.
"소거법."
"응?"
"소거법에 대한 작문, 끝났어."
"……아. 그랬었지. 미안, 잠시 생각을 좀 하느라."
세오도아 리들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내면의 풍경을 흐트러뜨리고는 웃어 보였다.
"그럼 우리 작은 신사의 작문 솜씨를 한 번 볼까."
"열심히 했어."
하츠토리 하지메는 작은 얼굴에 약간의 뿌듯함을 담고 종이 노트를 내민다. 그 위쪽에는 세오도아가 좀 전에 설명해줬을 터인 (그러나 체감상으로는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지는) 소거법에 대한 설명이 오밀조밀한 글씨로 기록되어 있었다.
「소거법. 논리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떠오른 여러 가지의 가정 중에서, 적합하지 않은 경우의 수를 하나씩 제거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해답을 역산하는 방식. 다만 자신 안에서 확실한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너무나 방대한 미지수 앞에 놓이거나 자신의 이해득실에 맞춰 사실관계를 왜곡하게 되므로 주의할 것.
이상의 정보를 토대로 다음 문장에서 소거법을 전개해보자.」
예시로 든 문장은 열다섯 살이 힘껏 고민하여 풀 수 있을 정도의 문제였다. 어쩌면 난이도 조절에 실패해 그보다 좀 어려웠을지도 모르지만, 노트의 한 바닥하고도 반을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생각한 흔적들을 보면 영 난제처럼 느껴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세오도아는 세 번에 걸쳐 하츠토리 하지메가 전개한 논리를 읽어본 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생각했구나. 기반 논리도 이치에 맞고, 합격점이야."
그렇게 말하면 하지메는 조금 기뻐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표정의 미미함은 둘째 치더라도, 그 동작만은 아이가 할 법한 느낌이었다. 노트를 착 덮은 세오도아가 하지메에게로 손을 뻗으면 작은 두 손이 두꺼운 소재의 대학노트를 순순히 받아 간다. 그대로 남은 차를 홀짝이던 세오도아에게 하츠토리의 말이 이어졌다.
"저기, 세오도아."
"응?"
"내 소거법, 제대로 맞았어?"
"그래. 내가 가르쳐준 대로야. 문제없어."
"그렇구나. 그럼 나는 역시 신의 자손인 거네."
그때 시냇물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 역할을 에어 컨디셔너가 수행했다.
"…이유를 들려줄래?"
"아까 가르쳐줬잖아. 소거법. 세오가 말이 없는 동안 생각해봤는데 나는 신이라기엔 만능이 아냐, 악마라기엔 딱히 누군가를 유혹하려는 마음이 없어, 만약 천사였다면 신의 계시를 직접 받았겠지.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어. 그렇다고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째깍, 하고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
"평범한 인간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
…….
……………….
"그러므로 나는 신의 자손."
바깥은 심하게 밝다. 한여름의 햇살이 구름 한 점 없이 내리쬐이고 있는 탓이다.
……그래, 밀짚모자와 시냇물과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던 부드러운 여름 햇살은 여기에 없다.
더는 없는 것이다.
「너는 지금, 울고 있잖아.」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주던 사람도.
그리하여 성립되지 않는 미지수는 제거된다. 잘못된 정리는 후세에 정돈되어서 새로운 진리를 맞이한다. 가상 존재의, 소거법과 관련된 유명한 명언이 빛을 발한다. 「불가능한 것을 제외하고 남은 것은 아무리 믿을 수 없어도 진실이다(When you have eliminated the impossible, whatever remains, however improbable, must be the truth.)」 (*1)
눈앞의 아이는 만난 이래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소리 내어 깔깔 웃는 일도 없었다. 그저 희미하게 웃으며 모든 것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지금껏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겠지. 그건 분명 인간으로서는 부자연스러운 삶이다. 무척이나 부자연스럽다고, 세오도아 리들 안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다.
"……그래."
그런데도 세오도아 리들은 힘주어 말하지 못한다.
너는 그냥 인간이라고, 슬프면 울고 기쁠 때 웃을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지 못한다.
모든 비인간성 위에 자신이 가진 인간성을 두고 그냥 인정하라고 웃는 것이 불가능하다.
맞아. 내가 인간일 리 없지.
역시, 내가 인간일 리 없었던 거야.
루.
"분명 네 생각이 맞겠지."
아이는 마음이 따뜻해진 것처럼 천천히 미소짓는다.
세오도아는 마치 마주 놓인 거울처럼 그 표정을 흉내 냈다.
*1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시리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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